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마이클 호톤 지음, 김재영 옮김, 나침반, 1996)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억울한 비난을 받기 일쑤다. 즉 독일은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本産地)이기 때문에,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가 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라는 비난이 곧 그것이다. 물론 학문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신학은 분명히 18-19세기 경에 독일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 신학은 대개 전통이나 권위, 도그마(교리)보다는 때로는 이성을 더 강조하고, 때로는 감정이나 체험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신학의 대표자들(쉴라이어마허, 하르낙, 헤르만, 리츨, 트뢸취)은 대개 진보주의나 인간중심주의라는 특징을 지녔으며, 그 당시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옹호하거나, 심지어는 식민 제국주의에 편승한 경향도 뚜렷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그 자체 내에서 내적인 모순을 드러내었고,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자들(바르트, 브룬너, 틸리히 트루나이젠, 불트만 등)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이성이나 체험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강조하였고,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은총의 신학'을 회복하는 데도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초기에는 한결같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서, 그 대안으로 종교사회주의를 옹호하였다. 지금 독일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들은 대개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이다.

필자도 역시 한국에 되돌아 왔을 때, 두 가지 평가를 받았다. 하나는 우수한 독일 신학을 공부했다는 칭찬어린 격려였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에 물들어 왔다는 칼날서린 비판이었다. 독일신학이 때로는 과도하게 철학에 의존하거나, 때로는 과도하게 성서 비평을 함으로써, 전통과 성서 그리고 교회의 권위를 훼손할 가능성을 늘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단일 종교, 즉 기독교 정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이기 때문에, 미국처럼 온갖 종교가 성행하지도 않으며, 온갖 급진 신학의 실험장도 아니다. 필자의 인상으로는 독일은 미국보다 훨씬 더 전통과 성서의 권위 위에 서 있다. 루터와 칼빈의 건실한 전통, 철두철미한 성서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독일 신학은 무모하거나 실험적인 급진적 신학을 잘 용인하지 못한다. 오히려 전통과 성서에 대한 충실성 때문에 독일 신학은 좌우로 치우치다가도 쉽게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그에 반해 미국 사회는 얼마나 다인종, 다종교, 다문화 사회인가? 미국 사회는 얼마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갖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교회 중에는, 비록 소수이나마, 독일적 경향의 신학을 무조건 경계하고 근본주의(根本主義)를 고수하려는 경향성을 강하게 띈 교회들이 있으며, 그래서 근본주의가 종종 복음주의와 정통주의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 신학, 특히 독일 신학의 주된 공격수는 대체로 정통주의 혹은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근본주의적 경향의 미국 교회의 신학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대체로 미국사회에서 소수로 밀려난, 아니 그곳에서 정치적, 학문적 입지를 빼앗긴 교파에서 파송된, 비교적 학력이 낮거나 가슴이 뜨거운 선교사들의 선교를 주로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신학공부를 가급적 억압하였으며, 개방적, 진보적인 신학 태도를 정죄하거나 은근히 탄압하였다. 이리하여 한국 교회에서도 서구 신학, 특히 독일 신학은 자유스럽고 위험스럽다는 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필자는 이런 선입견 혹은 편견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편견은 학문적으로 제대로 정리되지도 못한 채, 미국의 메카시(미국 정치가를 온통 빨갱이로 몰아간 정치가)처럼 특정인을 자유주의자로 분칠하여 매도하려는 불순한 정치 공작꾼들의 공격무기로서 종종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교회의 뜨거운 신앙열, 전도열, 교회사랑을 매우 소중히 여기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보편적 정서가 독일 교회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해 왔다. 신학을 천시하고 감정, 체험을 빌려서라도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보편적인 관행, "꿩 잡은 게 매"라는 식의 실용주의, 자본주의, 상업주의적 발상에 젖은 부흥-성장 제일주의야말로 바로 성서와 전통, 교리를 가장 약화하는 게 아닌가? 이런 체험주의, 성장주의, 주관주의는 바로 18-19 세기의 독일 자유주의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었던 것이다.

샤마니즘의 영향을 받고 온갖 국란(國亂)을 경험한 한국인의 정서에도 이런 요소가 없지 않지만, 이런 요소들은 대체로 미국 사회의 주된 특징이기 하다. 하지만 나는 미국 사회를 몸소 경험해 보지도 않았거니와, 유럽 문화의 시각에서 미국 문화를 무조건 깎아 내릴 마음도 없다. 그렇지만 무차별적으로 미국 문화를 수입하는 한국 사회의 풍토에서 "미국제 복음의 젖줄만을 열심히 빨면서 급작하게 성장해 온 한국 교회는 과연 건강하게 자란 것인지?" 한번은 꼭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미국의 교회와 신학도 과연 건전한 것인지?" 검토하여, 미국의 것이든 독일의 것이든, 성서와 전통, 우리의 실정에 맞게 비판적으로 걸러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후배의 서재에서 특이한 제목의 책을 우연히 발견하여, 이를 빌려다 읽게 되었다. 원 제목은 "Made in America?"(미국제?)이다. 즉 이 책은 "교회와 신학은 미국제가 제일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아니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호톤(Michael Scott Horton)은 캘리포니아의 '누가 개혁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복음주의적인 장로교 계통의 목사이다. 자유주의자가 아닌, 복음주의자인 바로 그가 미국 복음주의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서, 이 책은 더 한층 강한 설득력을 준다. 이 책은 "복음주의 신학이 특히 미국 내에서 어떻게 현대의 주관주의(자유주의의 특징)와 타협해 나갔는가?"를 알기 쉽게 풀어 나간다. 읽기에 부담이 없도록 매끄럽게 번역한 김재영 씨의 말대로 "지금 한국교회는 이 책이 비판하고 있는 미국 복음주의의 부정적인 것들, 즉 주관주의, 감각주의, 물량주의와의 대타협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가?

이 책은 386쪽을 달하는 작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매우 평이하게 쓰여졌고, 많은 실례와 인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가격(8,000원)과 부피에 눌려 읽지 않으려는 독자들을 위해, 아니 꼭 읽어보라는 뜻으로 목차를 잠깐 소개할까 한다. 1장: 민주주의의 시녀가 된 하나님, 2장: 실용주의적 복음주의, 3장: 소비자 중심, 4장: 구원으로부터 자기 존중으로, 6장: 이교도로의 복귀, 7장: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8장: 공동체의 상실

목차만을 대충 읽어보아도 미국의 복음주의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알 수 있다. 세계적인 복음주의의 지도자 프란시스 쉐퍼(F. A. Scheffer)의 말대로 "복음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복음주의라는 이름만을 가진 복음주의다." 가장 권위적이고 학문적인 복음주의자의 이런 진단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복음주의자들은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이, 아니 스스로 복음의 진수를 버리고 현실에 타협한 자들이 자신의 실패, 그것도 윤리적 실패나 사회적 영향력의 상실이 아닌, 교회 성장의 둔화를 소위 자유주의자의 탓으로 돌리고, 종종 마녀 사냥을 일삼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이 얼마나 비겁한 소행인가?

물론 나로서 이 책의 내용이 전적으로 수긍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칼빈주의적 전통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저자가 미국 복음주의의 타락의 첫 징조를 소위 '알미니안주의의 수용'에서 찾는 해석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잘 알다시피, 알미니우스(Alminius)는 화란의 신학자로서 칼빈(Calvin)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사상, 영원한 이중예정론에 의의를 제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책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성결교회의 신학의 원조(元祖)인 웨슬리(Wesley) 신학 전통도 어느 정도 알미니우스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배제한 신학도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과 길보다는 인간의 영광과 번영만을 옹호하는 신학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인간의 책임과 결단 혹은 인간의 경험을 배제한 극단적 칼빈주의도 인간을 숙명론(宿命論)으로 몰고 가기 쉽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이 책의 논조에는 동의한다. 미국의 정신과 혼합된 신학, 미국인의 정서에 영합한 복음, 자본주의적 상업주의에 편승한 목회는 분명히 복음의 정신을 훼손하기 쉽다. 여기에는 십자가의 신학, 제자의 길, 종말론적 삶의 태도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여기에는 영광과 번영의 신학, 그것도 미국과 미국적 자본주의의 번영을 뒷받침하는 신학만이 우세를 떨치기 쉽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미국교회의 영향을 과도하게 받고 있는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갱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유익한 참고서가 될 만한 책이다. 더욱이 IMF를 맞이하여 거품경제를 걷어내려고 몸부림치는 이 마당에, 한국 교회도 비복음적인, 아니 잘못된 미국제 복음주의의 거품을 과감하게 걷어내고 성서적, 복음적 신학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시대에 매우 적절한 충고를 주고 있다.

글이 좀 길어졌지만, 내가 이 책을 읽는 중에 빨간 밑줄을 쳐 놓은 구절을 몇 개 인용하고자 한다.

5.gif (517 bytes)27쪽: 현대종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절대 유일의 하나님이 상대화된 종교 안에서 종교의 신(神)으로 전락하고, 이 신이 종교적 경험들이라고 하는 것들을 통해 접근됨으로써 태동되었다... 그러한 하나님을 증거하던 신앙은 오늘날에 와서는 전적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영혼의 문제와 기껏해야 개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나 갈등 정도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다(하비 콕스).

5.gif (517 bytes)61쪽: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적이며 지적인 토대를 잠식시키면서, 복음주의자들은 사상의 시장에서 진지한 변호도 하지 못한 채 복음주의를 내팽개쳐 버렸다.

5.gif (517 bytes)72쪽: 복음주의는 세상을 세상적인 것이라고 정죄만 할뿐이지 진지하고 지성적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5.gif (517 bytes)105쪽: 미국의 종교(기독교)는 그 기능적 유용성을 위해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유럽 종교(기독교)의 가시적인 붕괴 이상으로 훨씬 더 교묘하게 변형될 것이다.

5.gif (517 bytes)122쪽: 어떤 사람에게 예수를 파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신발 한 켤레 파는 것과 비슷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수는 상품이고 죄인은 소비자이며 복음 전도자는 상품 포장과 마케팅 대리인이 되었다. 이런 구도에서는 인간들은 빚진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구매자들인 것이다.

5.gif (517 bytes)129쪽: 미국인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다만 아무런 방해나 하지 않고 한 앻으로 빗겨나 있거나 상징적인 존재로서 미국 사회의 공적인 마스코트로 존재하는 한, 자기들의 사업체 안에서 머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경기의 심판이 될 수도 없으며 심지어 직접 몸으로 뛰는 선수도 될 수 없었다. 그저 자기들의 마스코트 노릇이나 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다음 실용주의는 하나님을 마스코트로서 뿐만 아니라 심부름하는 소년(급사)으로서 봉사하도록 요구하였다. 하나님은 공리주의적 이익들의 승인을 얻어 일해야 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미국의 신을 만들기 시작했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다.

5.gif (517 bytes)151쪽: 근본주의자들은 1950년대에는 '마음의 평안'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그 시대의 정신에 따라 '단체 생활'과 '공동체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현재에는 '자아 존중'의 복음에 완전히 빠져 있는데, 이 자아 존중의 복음이란 것은 현대의 자아 성취, 자기 실현의 정열과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5.gif (517 bytes)174쪽: 복음주의 문학은 하나님 중심 종교보다 인간중심주의 종교를 표현하고 있다. 복음주의 문학은 능력이나 성공, 생활을 운영하는 법, 마음과 영혼의 평안 등에 집착하고 있다. 그 문학은 구원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이전의 의미를 버렸다... 하나님은 자아 중심적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요 기술이 되었다. 금세기 초반의 기독교 문학에서 인간의 복지가 강조되고 신적 영광, 신적 위엄성과 그 능력은 축소되었다.

5.gif (517 bytes)177쪽: 이제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절망하고 짓밟힌 자들과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부유한 자들, 거만한 자들, 성취자들, 세력있는 자들, 성공한 자들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 번영의 복음은 미국에서 폭넒은 관중을 확보하였다... 로버트 슐러, 로버트 틸톤, 오랄 로버츠... 많은 전도자들이 이 물질주의적 복음을 장려하고 있다... 복음주의 신앙의 미국화(美國化)가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인간 중심주의, 시민 종교, 실용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자아 도취, 쾌락주의, 물질주의가 모두 하나의 저속하고 마귀적인 마술 종교 안에 혼합된 것이다.

5.gif (517 bytes)180쪽: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에서조차 물질 축복을 위한 기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를 능가하여 행해지고 있다. 또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을 요구할 정도에 이르렀다. 더욱이 심지어 주류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조차 고난과 고통을 위한 여지는 거의 없다.

5.gif (517 bytes)184쪽: 현대 미국의 기독교도 역시 이미 아주 물질주의화되었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선지자들은 "어떻게 예수께서 지상 사역 중에 사람들이 부자가 되도록 도왔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5.gif (517 bytes)185쪽: 미국에서 생겨난 새로운 기독교(복음주의)는 '자기 극대화'라는 도덕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있다." ... 도덕적이 되는 것은 가능하다. 이교도들에게도 도덕은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5.gif (517 bytes)189쪽: 오늘날의 종교는 주관적이며 사적인 것이 되어 버렸으며 개인적이다. 이는 인간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소비지향적이고 자아도취적인 경향과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조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주관적인 종교 경험의 기초 위에서 흔히 정당화되고 있다.

5.gif (517 bytes)228쪽: 내적이며 사적이며 완전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은 청교도적 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공적이며 사회적이며 현실주의적이며 공동체적인 측면들을 부인하였다.

5.gif (517 bytes)282쪽: 1960년대에는 미국 복음주의의 교회들은 어디에 가 있었는가? 인종 차별과 베트남 전쟁과 제3세계에 대한 착취가 계속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후 1970년대에 워트게이트 사건 때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때 우리는 누구 편에 서 있었는가? 온 세계가 다른 목소리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자 했을 때 들리는 것은 제도권 이야기의 재판(再版)이 아니었는가?

5.gif (517 bytes)343쪽: 복음주의자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신조들을 내던져 버리고 형편없는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경시하는 신조들과 신학들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5.gif (517 bytes) 355쪽: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교회들 안에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초대형(超大型) 교회들을 모델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영적인 제국들은 의도와는 다르게 우리를 집단적인 자아 도취로 몰아 넣는 경향이 있다. 긍정적인 설교(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지금까지 내가 살펴 본 대부분의 교회 성장 요건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전혀 없다.),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음악, 감동적인 간증 등은 이 세상에서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 자족적인 부르주아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하려고" 오지 않으셨는가?


관련 자료

 

이장우:『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