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문화의 구성원리

(우실하 지음, 소나무, 1998)


 

미국 문화가 막강한 힘을 떨치며 안방으로 점점 더 깊숙히 침투하고 있다. 전통 문화를 계승하려고 몸부림치는 일부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전통 문화는 미국 문화에 밀려 점차로 우리의 일상 생활로부터 단절되거나 박제화하고 있다. 본인도 역시 우리의 전통 문화를 전근대적인 것으로 천시하도록 길들여졌기에, 나이를 먹을수록 나의 민족적 정체성이 날로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는 나의 뚜렷한 정체성이 여전히 나를 굳건히 지켜 주고는 있지만, "음식과 말투를 빼고 나면, 나는 완전히 미국인, 서양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곤혹스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제3세계의 많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기독교가 미국-유럽 제국주의의 침략 이데올로기로 여겨지고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미국으로부터 건너온 기독교가 전근대적인 문화를 고수하다 망한 민족을 해방시켜 줄 구원자로까지 생각되었다. 비록 미국과 교회를 의지하여 민족 독립을 이루려던 소박한 꿈은 깨어졌지만, 그래도 미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한국 교회는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한국 문화를 타파하려던 계몽주의자들을 열렬한 신봉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언제까지 미국 문화를 열렬히 숭배하는 우상의 전당이 될 것인가? 한국인은 언제까지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이라는 대접을 받을 것인가? 아니 우리가 언제까지 자신을 왜소하게 여기고 대국(大國)을 추앙하는 사대주의적, 식민주의적 근성을 갖고 살 것인가? 토끼처럼 작고 연약한 우리 나라가 중국을 비롯한 여타 강대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인만이 갖는 고유한 문화적 특성은 무엇인가? 이런저런 질문을 해 본 사람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신학계에서는 70년대부터 "토착화(土着化)"에 대한 논의가 개시되었다. 하지만 주로 감리교 신학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토착화 신학"이 과연 한국 신학과 교회에 제대로 토착화되었는지 의문이다. 한국적 해방신학이라고 일컫는 "민중 신학"의 기반도 크게 침식되었고, 민중 교회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이제는 세계화, 정보화라는 거대 담론이 우리의 전통성과 주체성을 크게 압도하고 있다.

세계화가 결코 미국 문화의 세계화일 수는 없고, 정보화가 결코 미국 정보산업의 세계 장악일 수도 없다. 실로 세계화는 다원적 가치의 보편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세계에 내어놓을 수 있는 자랑스런 한국 문화는 무엇이며,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의 독특성, 독창성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문화의 원형, 그 구성 원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전통을 논하는 글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리고 틈틈이 읽어 본 글들도 막연히 복고주의를 조장하거나 무턱대고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경향이 짙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어떤 이는 샤머니즘을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불교와 유교를 말한다. 어떤 이는 민족 종교(증산교, 동학)를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 비록 이런 종교들이 우리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도리어 우리의 정체성을 더 혼란케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들을 관통하는 한국 문화의 원리가 무엇인가?

최근에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쓰여진 책 한권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소장 학자 우실하(禹實夏) 씨가 연세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논문을 기초로 하여 펴낸 책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332쪽)가 곧 그것이다. 사회학으로부터 출발한 그가 전통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 조사를 기초로 하여 내어놓은 결론이 무척 흥미롭다. 그의 전통 문화 읽기의 출발점은 "인간의 인식은 이해의 전구조(前構造) 안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가다머(Gadamer)의 "해석학적 원리"에 있다. 모든 문화는 그 형성 토대로서 구성 원리, 문법, 사유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음양론(陰陽論)으로 습합된 역사상(易思想)이다. 역사상 또는 음양론은 약 1만년 전 중국의 화남 지방에서 시작되어 화북 지방으로 전파된 농경 문화를 토대로 하여 주 나라에서 완성된 2수의 분화(1=道·太極→2=陰陽→4=四象→8=八卦→64=64卦)를 특징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삼신 사상(三神 思想) 또는 삼재론(三才論)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가장 깊은 사상의 뿌리인 동북방 샤머니즘과 태양 숭배사상과 연결된 것으로서 수렵 문화를 토대로 하는 3수 분화(0=無→1=道→3=三神·三才→9=3×3→81=9×9)를 특징으로 한다. 나머지 하나는 음양 오행론(陰陽 五行論)이다. 5수, 곧 오행(五行)이 중심이 된 이 사상은 농경 문화의 "2수 분화의 세계관"과 북방 샤머니즘의 "3수 분화의 세계관"이 산동 반도와 요동 반도를 잇는 발해만 지역에서 만나면서 전국 시대에 완성된 사상 체계이다. 이 세 가지의 세계관은 최소한 2,000년 이상을 지속하면서 우리의 전통 문화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구성 원리는 중국, 한국, 일본 등 이른바 한자 문화권 또는 유교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지형적 특성, 곧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나뉘는 동서의 지역 특성, 계급 분화와 맞물린 권력 관계, 통치의 상징 체계로 수용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격과 사회적 토대 등의 요인이 맞물리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의 구성 원리가 완성되었다. 백두대간의 서쪽인 고구려 지역에서는 음양 오행론이 정복 문화로 전파되어 삼재론을 밀어낸 결과 "음양 오행론 중심의 삼재론"이 문화의 구성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백두대간 동쪽의 신라 지역은 삼재론이 음양 오행론을 통제하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을 문화의 구성 원리로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한국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이 되었다.

저자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을 통해서 한국 전통 문화를 구체적으로 해독한다.

1. 훈민정음의 원리: 훈민정음의 자음은 5행에 해당하는 5개의 기본 자음(?:木, 遁:火, ?: 土, 걁: 金, 둁:水)에 획을 더하여 만들어졌다.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상징하는 ·(天), ?(地), ?(人) 3개의 기본 모음이 역사상의 기본 도상인 하도(河圖)의 원리에 의해 조합되었다. 그리고 초성(天), 중성(人) , 종성(地)도 삼재론에 입각해 있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음양론, 오행론, 삼재론이 정교하고 치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동양의 사유물이다.

2. 길조어(吉兆語)와 흉조어(凶兆語): 한국의 속담 중에서 3수를 기초로 하는 말이 상당히 많다. 한국의 민속에서 2, 4, 5수가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3. 시조(時調)의 삼장논리(三章論理):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6구 12분절로 구성된 시조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정형시이다. 중국의 5언 절구나 7언 절구는 모두 기(起)·승(承)·전(轉)·결(結)의 4행으로 되어 있다.

4. 삼태극(三太極):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음양이 교차된 태극(太極)이 주로 사용되지만, 천지인 삼재를 나타내는 삼태극이 널리 쓰이는 곳은 한국 밖에 없다. 향교나 서원의 대문, 북이나 장고, 종각이나 비각, 능의 홍살문, 왕궁이나 사찰의 돌계단 등 일상 생활용품 할것 없이 모든 곳에서 삼태극이 발견된다.

5. 전통 음악: 동양 악기의 형태, 줄의 수, 장단, 박자, 5음계 등 모든 것이 음양 오행, 삼재론 등의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6. 화랑도: 화랑도의 기본 세계관도 3수 분화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유, 불, 선 삼교를 화통하고 있다.

7. 사찰의 삼신각(三神閣), 삼성각(三聖閣): 한국 사찰의 대부분은 부처를 모신 대웅전 외에도 삼신각 혹은 삼성각을 모시고 있다. 삼신은 본래 산신, 칠성, 용왕인데, 세 신을 인격신으로 나타내면 호랑이를 탄 산신령, 봉황새를 탄 칠성, 거북을 탄 용왕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불교는 무교(巫敎) 혹은 신교(神敎)의 탈을 쓰고 있다.

8. 민족 경전과 민족 종교: 민족 종교의 경전으로 취급되고 있는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은 3수 분화의 세계관을 가장 핵심으로 삼고 있다. 천부경은 "하나는 없음에서 시작되며, 시작된 하나는 셋으로 쪼개어져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로 시작되어 우주적 완성수인 81(9×9)자로 되어 있다. 또한 천지인(天地人)을 각각 1(天), 2(地), 3(人)에 배당하여 삼극(三極)으로 삼고, 모든 수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천부경은 3수 분화의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삼일신고에서도 없음(無)에서 일기(一氣)가 나와서 삼극(三極)으로 나뉘고, 이것이 곧 삼신(三神)이니, 삼신은 바로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신이라고 보고 있다. 천부경은 "하나는 곧 셋과 같고 나뉘어진 셋은 곧 하나로 돌아온다"라는 논리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증산교의 경전인 도전(道典)도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三神)은 곧 일신(一神)이요, 우주의 조화신이니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한국의 문화를 중국 문화의 변방으로 취급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공박하고, 우리 나라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문화적 독자성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고유한 논리의 가능성은 3수 분화의 세계관에서 발견될 수 있다. 비록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후대에 쓰여진 위서(僞書)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한국인의 고유한 사유 체계와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동양 문화의 텍스트를 동양의 세계관을 통해 읽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동도동기론"(東道東器論)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국 문화의 특성이 "삼재론 중심의 음양 오행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더 세분하여 "한도한기론"(韓道韓器論)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 공유하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동도동기론, 한도한기론으로의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불가능하고, 이것이 전제되지 않을 때, 서양 문화의 비판적 수용과 전통 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구호는 한낱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는 물론 전통 문화의 복권을 바라는 사람이지만, 독자를 새로운 질문 앞에 세운다. 1. 불교, 성리학, 천주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서로에게 어떤 변형이 이루어지는가? 2. 전통 문화를 구성하고 변형시켜 왔던 세계관의 구성 요소나 한국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가 현재의 우리 문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2. 이러한 것들이 현대의 문화에서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 박제화된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어떤 역사 과정을 통해서 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는가?

특히 본인에게 예리하게 다가오는 질문은 전통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만남 혹은 상호간의 창조적 융합에 관한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서양 문화는 2대 원류, 즉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부터 생성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대인의 유목 문명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신중심적, 초월적, 영적인 성향을 지닌다. 그 반면에 헬레니즘은 그리스인의 농경 문화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인간중심적, 합리적, 현세중심적 성향을 지닌다.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에서 발원하였지만, 헬레니즘과의 만남 혹은 대결 속에서 독특하게 발전되어 왔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학도 헬레니즘 중심적 신학(합리적, 인간중심적, 현세적 신학)과 헤브라이즘 중심적 신학(영적, 신중심적, 미래지향적 신학)으로 구분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 싶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이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가 그리스적 사유와 만나면서 비로소 형성된 교리적 산물이지만, 헤브라이즘 중심적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헬레니즘 중심적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학의 특성이 크게 좌우될 것이다. 더욱이 삼위일체론이 한국의 삼재론과 융합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한국 신학계에서는 윤성범 박사가 최초로 단군신화를 삼위일체론과 연결하여 해석하였고, 이에 관해 박봉랑 박사가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思想界). 유동식 박사의 "풍류 신학"(風流 神學)도 이런 과제를 수용하였다고 보여진다.

삼일신론(三一神論)이 동양적 사유 체계 안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 사유의 진정한 발원지는 어디인가? 동서양의 구분을 떠나서 인간의 사유의 밑바탕에는 보편적으로 삼재론이 깔려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모든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의 흔적인가? 만약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한국 문화의 삼재론을 수용하고, 또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킨다면, 한국 신학과 한국 문화는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겠는가? 신학계로부터 좀 더 진지한 접근과 성찰이 요구되지 않겠는가?

끝으로 나의 고백적인 말을 나누고 싶다. 나는 언젠부터인가 기독교 신학을 "삼각형"(Trias) 구조로 풀기 시작했다. 나의 졸저 "평신도 눈높이 신학"(예영 커뮤니케이션)은 전체를 삼원 구조로 엮었다. 그리고 나의 졸저 "어린이 신학"(한들)에서도 삼위일체론이 가장 중요한 틀로 활용되었다. 여기에는 삼위일체론을 독특하게 전개하고 있는 나의 스승 몰트만(Moltmann)의 영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을 풀어 나갈수록 나는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삼각구도 안으로 잘 들어온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물론 교리를 학생들에게 알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풀어 주어야 한다는 확신도 크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이유는 여기에만 있지 않다. 강의 중에 어떤 학생이 나에게 "선생님은 왜 신학을 모두 삼각형에 꿰맞추십니까?"라고 저돌적으로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우리는 사물을 특정한 틀로 본다. 만약 틀이 없다면, 사물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무지개 일곱 색깔을 만드는 삼각 스펙트럼처럼, 온갖 진기한 형상을 빚는 삼각 만화경처럼 삼각형으로 신학을 보면 사물이 가장 잘,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기하학적으로도 삼각형은 가장 안정되어 있고, 모든 다각형(4각형, 5각형...)의 출발점이다."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지은 자(N. R. 우드)도 우주를 삼위일체의 눈으로 해석하였고, 바르트(K. Barth)의 신학에도 삼위일체론이 중요한 해석학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최근에는 "피라미드의 에너지"가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끈다. 왜 그런가? 나도 역시 뿌리 깊은 한국인이기 때문인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의 영향인가?

여하튼 "전통 문화의 구성 원리"라는 작은 책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 문화를 제대로 읽는 눈을 뜨게 되었음을 고맙게 여긴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기독교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매우 기쁘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두 인격, 즉 한국인과 기독교인이 서로 갈등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짜릿한 흥분을 일으킨다. "하나님은 나를 한국인으로 만드셨고, 또 한국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되게 하셨다"는 고백을 이제부터는 서슴없이 해도 되겠다 싶다. "기독교의 한국인이 되지 말고, 한국인의 기독교가 되라"는 이광수 선생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 것도 이 책 때문이다. 독자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