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추함

도올 김용옥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분석적 이해

 

이길용

 

김용옥교수의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저서는 "나의 기철학적 연극론, 극단 미추운동의 서장으로서" 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표제와 부제를 놓고 보자면 이 책은 그의 예술론이 피력되고있는 미학에 관계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책은 단순히 미학에 대한 저서만은 아니다. 기실 이 책은 예술에 대한 도올 자신의 깊이있는 시각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 책은 예술이란 것의 인간학적인 의미를 밝히려고하는 보다 원론적인 탐구를 시도하고 있고, 이같은 그의 시도는 인식론적인 전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책의 정확한 성격을 가려보자면 미학에 대한 연구서라기 보다는 무엇을 미(美)로 보는가에 대한 인식론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도올은 이 저서를 통해 그의 기철학에 의거한 "느낌의 인식론"을 제시하고있다. 그러므로 이 논평은 그의 글월중 진부한 연극얘기들은 생략하기로 하고 인식론에 대한 그의 새로운 접근을 중심으로 전개시키고자 한다.

도올이 말하는 "느낌의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먼저 그의 선언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나의 기철학 체계에 의하면 오성과 감성의 구분, 즉 이성과 감정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나는 이성이나 오성도 '느낌'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즉 도올은 서구 인식론의 커다란 함정이었던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받는 대상과의 구분, 그리고 인식과정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수학만능주의의 환상을 폐기하고 있다. 서구인들은 인간의 정보획득과정을 특정기관의 고유업무과정으로서 이해해왔다. 이는 칸트에게서도 발견되는 지독한 수학마취증이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이성,오성,감성이라는 인식론적인 개념도 이러한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도올은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인간의 인식활동은 오성이나 감성같은 각기 독립된 특정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라고 하는 氣의 聚散으로 이루어진 어떠한 개방적인 통일적 유기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즉 인간의 인식활동이라는 것은 인간 전존재(그가 사용하는 '몸'의 의미와 동일한 개념임)의 유기적이고도 창조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를 도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느낌의 구조를 인간 몸 전체의 유기적 통합의 구조로 보지않고 특정한 감각기관의 특정한 활동으로 파악하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몸이라고 하는 유기적인 통합체가 외부(단순히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외부가 아님)의 자극에 대해 자기 전존재로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올이 말하고 있는 '몸'이란 과연 무엇인가? 도올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기의 취산과정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떠한 개방적 유기체적 단위 이다."

이러한 그의 명제는 그가 설정해 놓은 기철학이라는 해석학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氣다. 기일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기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도올은 침묵하고 있다. 분명 그의 이 명제는 인식의 영역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게까지 확장시키는 커다란 음모를 배면에 깔고 있는 혁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논의는 접어두고 있다. 단지 '몸'이라고하는 매우 보편적이고도 일상화된 개념으로서 이 골치아픈 문제를 스리슬쩍 넘어가고 있다.

도올이 제기하듯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허품은 분명 아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가하자면 몸이라고 하는 것은 기라고 설명할 수 있는 운동 (파장)의 '자기 현존태'인 것이다. 이 운동은 무생물에서는 물질로 생물에게서는 세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도 사실상 방편적인 구분일 따름이다. 세포라고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기의 취산과정의 초기형태라고 할 수 있는 물질의 정교, 복잡화된 진화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생물.무생물"을 설정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사물은 사물일 뿐이며, 기일 뿐이며, 운동일 뿐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각각의 고유성을 보지하고 있는가? 사실 이것이 어려운 문제이다. 도올 자신도 이 문제만큼은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 궁여지책이지만 화이트헤드는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를 챙기고 있다. 그에게 있어 기의 개념은 "현실재"(actual entity)라고 불리워진다. 이 "현실재"라고 하는 것은 그의 유기체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재는 고정 불변적인 실체는 아니다. 매순간 새로이 다른 모습으로 전이가 가능한 실재의 원초적인 단위일 뿐이다. 즉 우리가 무엇을 경험할 때,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무엇은 바로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실체론적인 규정을 내린다면 그것은 이미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규정을 내린 나의 가치판단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그 무엇'에 대한 규정은 윤리적인 명제만 남게하는 것이지 실제적인 존재설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회이트헤드는 현실재에게 개방성을 부여하고 있고, 과정이라는 개념을 존재론의 한 개념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문제는 남는다. 그것이 바로 그 현실재의 잠정적인(시간성이 개입된) 자기동일성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이 문제를 '영원한 대상(etenal object)'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이 말은 각개의 현실재들은 내재적으로 무엇을 향하는'지향성'을 함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향성의 궁극이 바로 '神'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화이트헤드의 설명은 문제에 대한 해결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같은 화이트헤드의 설명은 "저기 있는 의자가 왜 의자로 버티고 있는줄 알아? 그건 神이 의자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설명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아뭏든 이 문제는 예민한 것으로서 차후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자손 대대로 기억될 것이다. 각설하고 다시 본 주제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하자.

김교수는 인식론의 전환을 '시각(視覺)으로부터 복각(腹覺)으로!'이라는 표어로서 선포하고 있다. 이 "복각"이라는 것은 내장이 느낀다는 의미인데, 인식과정은 인간 몸 전체의 유기적인 복합과정이라는 그의 대전제를 흡족시켜주는 훌륭한 명제이다. 그러나 이 몸을 어떻게 보느냐에 또다른 문제가 생긴다. 물론 도올이 몸을 '유기적인 통일체'로 보는 것에는 적극 찬동한다. 그러나 그의 언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몸을 이해함에 있어서 몸의 '통일체'로서의 특징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하는 주체로서의 몸을 암암리에 상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길 없다. 그러나 기실 몸이라는 것은 '허구'이다. 우리에겐 자기동일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주체적인 '몸'이란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세포덩어리일 뿐이다( 이 문제는 모든 존재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간에게만 국한시키도록 하겠음). 즉 수억의 세포로 구성되어진 유기적인 물질덩어리가 바로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주체로서의 '나'는 수억의 세포가 생존을 위해 토해낸 수많은 정보들의 교묘한 종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허구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몸'이라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존재론적으로 자기 동일성적인 몸은 없다. 다만 수많은 세포들의 생존정보가 형성하고 있는 "정보그물"만이 있을 뿐이다. 즉 몸이라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세포들의 아우성들일 뿐이다. 그것을 몸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부차적인 규정이다. 원초적으로 외부의 자극을 느끼기 위한 주체로서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느끼는 것은 각기 세포들이며 이 세포들의 존재방식이 서로 밀접한 정보를 주고받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유기적인 존재들이라 세포 하나의 인지는 전 세포의 인지를 초래할 뿐이다. 그러므로 느끼는 것은 세포요, 반응하는 것도 세포일 따름이다. 우리가 그것을 자기 동일성으로 느끼는 것은 정보의 복합화가 가져온 착각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존재 자체가 역설이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이 존재한다는 심각한 역설인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여럿보다는 하나를 쉽게 인지하고 인정해버릴 뿐이다.

도올은 대강의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感'의 의미도 인간의 복감과 사물의 상호적 만남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몸각에 의한 새로운 예술론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이때 비로서 그의 새로운 학술용어인 'homo-momiens'가 등장한다.

그의 이러한 몸각예술론의 제기는 서양과 동양의 에술형태에 대한 결과론적인 분석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도올은 시각을 위주로하는 서구 예술이 존재에 기초한 특징을 지닌 반면 동양의 예술은 생성을 주요특징으로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음악을 통해서 표출되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서구의 음악은 음높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즉 음의 수학화가 발달했고, 동양의 음악은 음높이 보다는 음의 색깔의 발전이 더욱 치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올은 동일한 기의 취산과정으로 생겨난 인간존재가 어떻게 공간적인 구별로 인해 그토록 '존재의 자취'(문화)가 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비젼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그 문제는 복잡한 문제라고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또 하나 첨가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올은 인식론적인 방법에 있어서 '몸'이라고 하는 개념을 제기함으로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했듯이 그의 '몸'은 좀더 검토해야 할만한 주제이다. 그리고 그는 이같은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문화에 대해서도 탁월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먼저 도올의 시각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연과 문화의 종합체이다. 자연이라함은 물질덩어리 '몸'이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것이요,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면서 축적해 온 인위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자연과 문화라는 양자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양자를 보지하고 있는 인간 존재 자체는 갈등적이지 않을 수 없으며 바로 이 갈등이 산출하는 모순이 웃음과 울음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화란 무엇인가? 쉽게 선문답적으로 얘기하자. 문화는 권력이다. 인간이 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문화이며 그 문화의 고갱이는 '전쟁'이다. 인류는 전쟁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러므로 문화는 궁극적으로 권력을 지향하고 있다.

대충 정리한다. 분명 도올 선생의 이 책은 많은 스커드미사일을 숨겨놓고 있다. 미사일은 발사해야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누가 숨겨진 미사일을 찾아 발사대에 올릴 것인가? 그러나 패트리어트미사일의 반격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좀더 철저한 계산과 준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서투른 문제제기는 어설픈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이의 부피에 비하여 이 책은 상당히 비중있는 내용을 함주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