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복음주의의 주요 흐름

(박명수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1998)

 
이신건

 

들어가는 말

한국 신학계에서 서평 혹은 비평의 문화는 매우 척박하다. 남의 책만이 아니라 남의 논문조차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남의 글을 읽기나 하는지조차 궁금하다. 외국인의 글은 거의 광신적으로 읽고 인용하면서도, 한국인의 글을 읽고 인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혹 한국인의 글을 읽고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치켜세우는 내용으로 지면을 거의 채운 후, 약방 감초 정도로 비평하고는 싱겁게 끝맺고 만다. 이러니 어떤 독자가 서평을 즐거이 읽으려고 하겠는가? 차라리 정직하게 책광고나 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체면과 예의를 합리성보다 더 중시하는 풍토, 특히 웃어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유익할 것이 없다는 정치적 계산이 짙게 깔려 있는 한국적 풍토는 사대주의적인 글쓰기나 아부적인 글쓰기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남의 비평을 각오하며 글을 쓰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도 남을 비평하지 않으니 남도 그럴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한국의 신학 발전은 기약하기 어렵다.

이 글은 저자 박명수 박사가 자신의 책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가 비평을 각오하고 부탁하였을 것이라고 믿고 흔쾌히 응하였다. 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그의 글을 애정을 갖고서 읽어 왔다. 왜냐하면 그가 자주 발표한 글들은 우리가 그 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소홀히 여긴 주제들, 특히 성결교회의 뿌리와 배경에 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들은 성결교회의 신학에 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나는 자주 그와 진솔하게 토론하곤 하였다.

그리고 이 책도 저자가 당연히 기증하리라고 믿었지만, 그 때를 기다릴 수 없어서 막 출간된 따끈한 책을 사 들고 관심 있는 부분을 읽고 있는 참이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는 중에 얻은 기쁨도 크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욕구도 일어나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내게 비평을 부탁하다니, 이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닌가 싶다. 저자가 비판을 각오하고 직접 부탁한 것이니, 나를 인정해 준 그 고마움 때문에라도 체면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글을 쓸까 한다.

1. 이 책의 주요 관심사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그가 처음부터 미리 구상하여 쓴 것이 아니고 여러 계기에 발표한 글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그런 탓으로 내용이 중첩되는 곳이 자주 보인다. 그래서 구성 면에서 문제 의식의 치열성과 일관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추천하는 대로, 이 책은 독자의 관심에 따라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지닌다.

그렇지만 이 글은 전체적으로 한 가지의 주요 관심사를 반영한다. 그것은 부제가 말하듯이 "한국 성결교회의 배경에 대한 연구"이다. 차라리 이 부제가 제목으로 부각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왜냐하면 이 책이 "근대 복음주의의 주요 흐름"을 모두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성결교회와 배경"과 관련된 주제들을 "복음주의"라는 큰 명제 아래 역사-신학적으로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저자가 처음부터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인 면에서 그는 성결교회의 교리적 기원이 되는 근대 복음주의의 중생-성결-신유-재림 이해를 신학적으로 쉽게 풀어 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학원운동", "여성 사역", "신앙선교운동"에 관한 흥미 있는 주제들까지 다루면서, 근대 복음주의의 주요 특징을 역사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성결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근대 복음주의에 대한 연구서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조직신학자로서의 한계성을 가진 나는 여기서 특히 신학적인 주제들만 골라 읽고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표명하려고 한다.

2. 이 책의 공헌

이 책이 지닌 공헌을 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싶다.

1. 저자도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한국 교회는 19세기 말 이 땅에 온 미국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가장 직접적인 뿌리는 19세기 미국 기독교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바로 복음주의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 온 것이다"(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자신의 신학적 뿌리인 미국 교회의 신학을 연구하는 일에 매우 게을렀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적 배경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 줄 만한 문헌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동안 그들이 복음주의 내지 근본주의적 신앙 형태를 갖고 한국에 선교했다는 정도의 피상적인 견해로 만족하여야만 했다. 더욱이 성결교회의 신앙적 뿌리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 없는 자식처럼 방황하여야만 했다. 이런 현상은 두 가지의 역효과를 낳았다. 한편으로는 미국 교회에 대한 무지는 미국의 신앙과 생활을 무조건 숭배하는 사대주의적 전통을 낳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전통에 대한 반발심은 우리 전통과 직접 맞닿아 있지 않는 다른 신학의 무분별한 유입을 낳았다.

비록 너무 때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 책이 성결교회와 나사렛 교회, 구세군, 하나님의 성회를 포괄하는 신앙 전통만이 아니라 미국 교회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던 신앙 운동의 주요 흐름을 소상히 설명해 준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오래 묵은 것이 이처럼 새삼스러워 보이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 탓인데, 바로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자의 부지런함이 더욱 돋보인다.

2. 이 책은 한국 성결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종결할 만한 많은 단서들을 제공해 준다. 저자의 말대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464쪽). 저자는 여기서 세 가지의 입장 차이를 정리한다. 1. 웨슬리의 재발견과 그의 복원을 주장하는 입장, 2. 한국적 자생성(自生性)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입장, 3.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적 성결운동을 주장하는 입장이 곧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다 성결교회의 뿌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저자의 말대로 성결교회의 직접적 뿌리는 의심할 바도 없이 미국의 성결운동이다. 저자는 "한국 성결교회가 웨슬리를 연구한 것은 매우 드물었다"(464쪽 이하)고 말하지만, 나로서는 한국 성결교회의 문헌에서 웨슬리의 내용을 직접 거론하거나 인용하고 있는 것을 전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한국 성결교회의 자생성은 정치 제도 외에는 그다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신학적 자생성(?)이 성결교회의 야심찬 미래적 과제일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 신학은 분명히 미국 성결운동가(웨슬리안)의 신학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오직 그것만을 소개받았기 때문이리라.

이런 면에서 이 책은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적 뿌리 혹은 그 정체성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한다.

3.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정말 만화경과 같이 다양한 현상을 포함하는 모호한 용어다. 이를 신학으로 보느냐, 아니면 운동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그 정의가 달라지겠지만, 설령 신학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복음주의를 정의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하지도 않은 채 "복음주의적 신학"이니 "복음주의적 기관"이니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대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미리 선점(先占)하고 그 테두리를 인위적으로 긋게 되면, 그에 속하지 않는 무리는 마치 복음주의자가 아닌 듯, 심지어는 자유주의자인 듯 비난하고 자신을 복음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체로 "영국의 복음주의"의 저자인 베빙톤(D. Bebbington)의 입장에 따라서 복음주의의 주요 특징을 성서주의(성서의 권위 강조), 회심주의(체험적 신앙), 활동주의(신앙선교운동) 등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성결교회의 복음주의적 특징을 은총의 낙관주의, 온전한 구원, 체험주의, 복음적 사회개혁에서 찾고 있다.

복음주의가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정의하는 학자에 의해 이 정도라도 정의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다음에야 비로소 복음주의의 특징만이 아니라 그 한계성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적어도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확히 해 놓고 난 다음에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동지 간의 싸움은 미리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면에서 복음주의자의 솔직한 자기 정의에 경의를 보낸다.

4. 이 책의 또 하나의 공헌은 "복음주의"를 무시간적, 절대적 현상으로 절대화하지 않는 저자의 솔직한 학문적 입장을 보여준다. "종교는 하늘에서 내려온 순수한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다. 종교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동시에 주변 환경에 의해 언제나 영향을 받아 왔다"는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의 말을 자신의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베빙톤은 복음주의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정치-경제-사회적 조건 등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아 왔음을 실증하였다.

이 책의 저자도 근대 복음주의가 "교회가 더 이상 제도나 예식으로서 신자들을 얽어맬 수 없다고 하는 근대적인 상황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16쪽)"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루터와 칼빈은 물론, 청교도 운동과 영미의 복음주의 운동이 시대적 요인과 결합되어 있음을 밝힌다. 복음주의 운동이 선호하는 "부흥회는 18세기의 기독교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근대 기독교의 산물이다"(39쪽)는 그의 지적과, 근본주의(根本主義)와 긴밀히 결합된 "세대주의의 역사 구분 방법이 놀랍게도 지질학적 대변동과 마르크스의 역사 이해와 형식상 매우 유사하다"(196쪽)는 마스덴(G. Marsden)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중에 속한다.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서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대적 제한성을 간과하여 왔으며, 그 자신의 상황적 변화를 부인하려고 애써 왔는가? 이미 마이클 호튼(M. Horton)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는 그의 책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얼마나 시대와 잘 타협해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 바가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였던 쉐퍼(F. Shaeffer)의 말대로, "복음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주의라는 명목만을 가진 복음주의다"는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설령 "복음"이라는 옷을 걸쳤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상황이 함께 만들어 낸 온갖 "주의"(Ism)는 우상숭배와 가장 잘 통한다. 비록 스쳐 가는 어투로나마, 바로 이 점을 솔직히 지적하고 있는 저자의 겸손은 이 책의 가치를 더 돋보이게 한다.

5. 마지막으로 높이 사고 싶은 것은 성결교회의 신학 형성을 위한 저자의 열려 있는 입장이다. 과거의 복음주의가 그 나름대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해 왔듯이, 미래의 복음주의도 시대의 도전과 정신적-사회적 지형의 변화에 슬기롭게 응전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성결교회가 "역사의 긍정적인 측면과 한계점을 인식하고, 미래를 위한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고, ... 성결교회의 신학은 성결교회의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성결교회의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모든 성결인이 공감할 수 있는 신학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484쪽)는 그의 지적과, "교회 전통에 굳게 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세계 신학의 넓은 무대로 뛰어들어 현대 신학의 다양한 소리와 마주쳐 보는 모험이 있어야 한다"(504쪽)의 그의 지적은 역사신학자들이 가질 수 있는 열려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교리주의자들이나 조직신학자들은 "전통" 혹은 "정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한 나머지, "지계석(地界石)을 옮기지 말라"는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쉽다. 그 자신도 이미 지계석을 상당히 옮겨 놓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과거로의 회귀와 새로운 사상의 철저한 수용, 이 두 가지의 극단적 태도 사이에서 저자는 중용적인 입장을 보인다. 즉 그는 "전통 속에 있는 새 시대의 요소를 발굴하여 새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477쪽)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권장한다. 몰트만(J. Moltmann)의 말을 빌려, 그는 "가장 보수적인 것을 가장 새롭게 해석하는 예언자적인 통찰이 필요함"(같은 쪽)을 강조한다. 바로 그럴 때에만, "기독교가 유물이 되지 않고 적응력을 갖게 될 것"(504쪽)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본주의적 폐쇄주의로 고착되기 쉬운 복음주의에게 그가 던지는 유익한 경고라고 생각된다.

3. 이 책의 한계

이제 이 책이 갖는 한계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짚어 보려고 한다.

1. 저자는 "복음주의"를 나름대로 정의하려고 애쓰지만, "복음주의"에 대한 대개의 정의(定義)처럼 그의 정의도 모호하거나 협소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가 선호하는 것은 그냥 "복음주의"(근본주의적 복음주의?)가 아니라 "온건한 복음주의"이다. 그는 한국 교회와 성결교회의 주된 흐름을 "온건한 복음주의"로 규정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온건한 복음주의는 극단적 자유주의처럼 성서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극단적인 보수주의처럼 모든 것을 정통 교리의 자로 재려고 하지도 않는다. 온건한 복음주의는 성서의 진리를 순박하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강조하며,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 주요 특징으로 갖는다(3쪽).

하지만 이런 정의도 상당한 모호성을 내포한다. 성서의 권위(무오성)를 어느 정도까지 부정해야 자유주의가 되고, 정통 교리를 어느 정도까지 고수해야 근본주의가 되는지 우리는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 극단적 자유주의와 극단적 보수수의 사이에는 실로 무수한 편차가 존재할 수 있다. 복음의 중심과 그 둘레, 복음의 불변적 핵심과 가변적 형식에 대한 견해는 지금도 학자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온건한 복음주의"가 분파적이고 반지성적인 근본주의를 극복하려고 태동한 근래의 "신-복음주의"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 잘 모르겠지만, 그도 베빙톤처럼 "성서주의", "회심주의", "활동주의" 등을 복음주의의의 근본 특징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의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도 다양한 편차가 있으며, 회심의 경험도 결코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복음주의가 주로 급격한 회심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 회심은 어찌할 것인가? 회심을 판단할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주관적 감정인가 윤리적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 행동인가? 복음주의가 주로 직접선교와 같은 활동을 장려하지만, 그것만이 복음적 활동인가? 비록 매사에 스스로 "복음주의자"로 자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그를 "복음에 충실하지 않는 자"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정의된 "복음주의"는 "복음"을 인간의 편의대로 재단하는 위험한 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모든 "주의"는 획일화의 위험에 빠진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란 18-19세기에 영미에서 일어난 특정한 신앙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유럽의 종교개혁과 경건주의 운동 등에서 기원한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 유럽에서 "복음주의"(Evagelical: 이것은 "복음적"이라고 불러야 옳다)라는 말은 카톨릭 교회를 개혁한 "개신교 정신"(Protestantism)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종교개혁 전통은 복음주의의 가장 가까운 선조이다. 하지만 역사적-신학적 간극을 단숨에 무시하고 영미 복음주의와 유럽의 개신교 신앙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그러기에 "칼 바르트가 자기의 신학을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부른 것도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438쪽)는 저자의 설명은 다소 무리가 있다.

모든 "주의"는 "독재"다. 왜냐하면그것은 자신의 범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현상들을 무조건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스든(G. Marsden)도 지적하였다시피, 문화적 특성을 지닌 우리의 충절과 이해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압도하거나 거기에 우선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복음주의자 호튼(M. Horton)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미국인들의 온갖 욕망과 전략들이 뒤범벅되어 있을 수 있으니까.

2. 저자는 성결교회가 한국 교회의 주요 흐름처럼 "온건한 복음주의"를 특징으로 갖고 있다고 말하였으며(3쪽), "성결교회는 20세기 초에 형성된 근본주의보다는 18, 19세기의 폭넓은 복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462쪽)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차라리 과거를 향한 저자의 소박한 투사(投射)가 아니면 미래에 대한 그의 간절한 희망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자신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은 필요하다. 그리고 남의 자리를 엿보며 성화(聖化)하려고 하지 말고, 무릇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성화하려고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전통이라고 무조건 폄하해서도 안되지만, 무조건 미화해서도 안된다.

나는 저자와 달리 특히 초기 성결교회의 신앙적 특징이 상당히 근본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기 성결교회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성서 무오설(축자영감설), 사회 참여에 대한 혐오, 역사와 문화에 대한 비관주의(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 교리에 대한 전투적 방어 자세를 쉽게 대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오늘날 대개의 성결교인들의 심성을 크게 각인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저자는 "복음주의를 보수주의와 동일시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461쪽 이하)라고 말하지만, 오늘 우리 주위에서 "복음주의"는 "보수주의"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가 즐겨 사용함으로써 마치 자신의 교단 이름처럼 애용하고 있는 "순복음"이라는 말도 사실 우리 선조들이 즐겨 쓰던 용어이다. 이 말은, 저자도 인정하듯이, "Pure Gospel"이 아니라 "Full Gospel"이며, 그래서 "순복음"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온전한 복음이 20세기 초에 일본과 한국에서 순복음으로 번역되어 전해졌다. 이렇게 온전한 복음이 순복음으로 번역되면서, 복음주의는 성서의 모습을 현재에서 온전히 재현해 보려는 적극적 의미보다는 오히려 자유주의의 거짓된 교리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소극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458쪽 이하).

왜 그런가? 저자도 이미 밝혔듯이, 그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방어 심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사회-문화적 영향 아래 형성된 신앙 형태가 한국에 그대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복음"의 이름으로, 혹은 "웨슬리의 정신에 이어서 초시대의 감리교회를 그대로 따르려는 성결운동"의 이름으로 미국적 신앙을 고스란히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선교사들이 그렇게 주입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미 조지 마스든도 그의 책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생명의 말씀사)에서 상세하게 정리하였다시피, 성결운동은 세대주의와 그런 성향의 부흥운동, 미국의 정치-사회-문화적 요인과 결합되어 후기로 갈수록 상당히 근본주의화하였다. 미국 교회가 웨슬리적인 낙관적인 역사관(은총의 낙관주의)으로부터 비관적 역사관으로 "대반전"(大反轉)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히 성결운동도 존재하고 있다. 성결운동이 근본주의 운동과 결코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현대주의에 대한 싸움에 교단적 전통주의자들과 신학적으로 혁신적인 세대주의자들 및 성결교리 주창자들이 협력한 것은 하나의 독특한 근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마스든의 책 230쪽). 마스든에 의하면, "낭만적이고 감상적이며 종종 부정확하기까지 하였던 성결파의 가르침은 또 한번의 수정을 겪은 후 미국의 근본주의와 결합하였다"(앞의 책 169쪽)는 것이다. 그리고 "후천년주의적 입장으로부터 전천년주의적 입장으로 견해가 변천된 것은... 성결파 운동의 발흥과도 관련되어 있었다."(앞의 책 193쪽)는 것이다. 전천년주의는 세대주의와 함께 미국 근본주의의 핵심 주장이었는데, 이 흔적은 아직도 성결교회의 공식 교리로 남아 있다.

3. 저자가 "19세기 웨슬리안은 웨슬리의 성결론을 그대로 반복한 것은 아니다. 웨슬리의 주장을 충분히 따르기는 했지만, 여기에 자기의 강조점을 덧붙였던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웨슬리 신학과 웨슬리안 신학은 구분되어야 한다"(123쪽 이하)고 말하고, 그 차이점을 정리해 준 것은 우리의 신앙 전통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한국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18세기의 웨슬리의 중생과 성결, 19세기의 신유와 재림의 복음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469쪽)는 그의 지적도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강조점을 덧붙였다"는 말이나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는 말은 현상의 일면만을 소박하게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결합은 새로운 변형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와 웨슬리안의 사이에서 전자의 사상이 강화된 요소들 못지 않게 새롭게 추가, 변형, 반전된 요소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가다머(Gadamer)가 지적한 대로, 서로 다른 사상의 만남에는 분명히 "해석학적 지평융합"(解釋學的 地平融合)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웨슬리도 이전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였듯이, 웨슬리안도 자신의 경험들을 통해 웨슬리 사상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였던 것이다. 우리 신앙 선배들에게서도 "창조적인 종합"이 전혀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형식적으로는 웨슬리의 정신이 후대에 충실히 계승되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웨슬리안과 초대 한국 성결교인들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결교인들에게서도 "종합적 창조" 혹은 "해석학적 지평융합"은 조용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도 역사가에게는 전통과 현재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관적인 현상과 추가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변형되고 반전된 현상까지 섬세히 밝혀 냄으로써, 미래적 전망을 해 줄 사명이 있는 것이다. 저자도 물론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이 점을 해명하는 일에 바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변형"과 "반전"이라는 용어를 왜 떳떳이 쓰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가는 말

저자만큼 식견이 넓지 못한 나의 서평도 분명히 한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독자 제현들께서도 비평적 안목을 갖고서 이 글을 읽어 주시기를 바란다. 끝으로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책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은 "성결교회의 정체성"이니, "성결교회의 전통"이니 하는 말을 이제는 더 이상 쉽게 내뱉지 마시길 바란다! 이 책은 "성결교회의 배경 연구사"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쉽게 뺏기지 않으리라 본다. 저자가 긴 기간과 큰 정열을 기울여 쓴 책이니 만큼, 상당 기간 동안 그런 영광(?)을 누리는, 아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으로 저자의 노고와 서평 부탁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