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신학

- 어린이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

(이신건 지음, 한들 출판사, 1998)

 

황덕형(서울신대 조직신학 교수)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어린이 신학이 갖고 있는 가능성과 저자 자신의 감상을 다루고 있는 서론적 부분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부분은 앞에서 확인된 가능성과 함축성들을 신학적인 자리들(loci) 안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면서 그 윤리적 의미까지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저자의 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저자는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하고자 한다. 어린이를 통하여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왜 굳이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하여야 하는가?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이런 신학적 기획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저자는 이 신학적 착상의 동기는 그의 스승 몰트만의 글을 번역하는 중에 얻은 지극히 단순한 질문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양성(兩性)이 모두 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면, 왜 어린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불러서는 안 되는가(어린이 신학,13 이하 아라비아 숫자는 쪽에 대한 지시)?" 저자는 이 신선한 기획을 함에 있어서 이미 몰트만의 해방 기독론의 영향 아래서 사유하고 있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이 철저하게 그의 아들됨(성자)에서 근거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이를 보다 철저하게 신학화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서 현대에 어린이가 처하여 있는 상황인식도 거기 들어있는 것이다.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확실한 것은 이 신학이 고난의 신학으로서 지난 20세기 초반 전 유럽과 온 세계를 휩쓸었던 고난받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명상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신학화한 여타의 신학운동에서처럼 어린이의 수난을 신학적 이해의 텍스트로 삼으면서 어린이들이 감내하여야 하는 고통의 현실을 고발하고 어린이의 고통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책임을 진술하는 것이다.

이 고난의 신학은 고난의 현실의 인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해방의 역사, 그리고 그 해방의 구체적 자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어린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해방이 우리에게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어린이 신학을 '상황적, 실천적 신학'(11쪽)이라고 규정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먼저 저자는 그 어린이들의 무능력함과 고통에서 하나님이 경험하시는 무능력을 본다. 그 하나님은 전통적인 유신론에서 주장한 형이상학적 신이 아니라 현대 신학이 십자가에서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 고난받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추상적인 하나님 관념의 한계를 넘어서 우리의 현실 한복판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저자는 이를 세 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데, 첫 단락에서는 주로 바르트와 본회퍼 그리고 몰트만 세 사람의 독일 신학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고통받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진실한 하나님임을 말한다(37-48쪽). 특히 그는 바르트의 '그리스도론적 보편주의' 혹은 '그리스도론적 일원론'이 하나님 개념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것이 고난받은 하나님의 존재를 밝혀주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약함과 무력함의 형상과 일치시키고 있다.

두 번째로 양성적이신 하나님이란 단락을 통하여 저자는 어린이 신학이 해방의 신학과의 역사적 연속선 상에 서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마치 여성신학이 해방의 운동의 한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어필되고 있듯이, 어린이로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은 이 해방의 과정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으로 사유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한번 그의 스승인 몰트만의 해방의 정신을 이어서 바르트에게 잔재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남성 위주의 우주적 질서에 대한 사유를 극복하고자 한다(51쪽 이하).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의 '아빠 기도'의 해명과 내재적 삼위일체의 비밀을 해명한 몰트만의 하나님에 대한 해명과 연관이 있다(57). 아들의 탄생과 출생으로 표상된 하나님은 양성적이며, 그에 의하면 양성적(兩性的)인 하나님 이해를 통하여서만 가부장적인 하나님 이해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이와 연관해서 저자는 특별히 어린이를 선호하게 되는 까닭이 비인격적이며 중성적인 개념들(예를 들자면 폴 틸리히의 경우처럼: "하나님 아버지 너머에 있는")을 사용하지 않고도 여전히 하나님의 초월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71쪽).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어린이 신학의 가능성을 교리적으로 재확인하면서 다양하게 펼쳐보고자 한다. 이 부분은 아마도 어린이 신학의 특성을 세밀히 다루어 보고 그 특성들에 전통적인 신학의 각론이 어떻게 적용되어 이해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인지 이 부분은 앞에서보다 더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해석의 성공여부에 따라 어린이 신학의 가능성이 인정받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는 교리적인 순서를 약간 바꾸어서 먼저 기독론을 다루고 후에 신론과 인간론을 통해서 어린이 신학의 통찰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가 기독론을 먼저 다루고자 한 데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아마도 성서에서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보도가 빠져있고 그 대신 누가의 한가지 전승만이 예수의 유아시절을 대표해서 전하고 있다는 것이, 혹시 당시의 어린이 경시사상을 성서가 영향을 받아 그것을 변혁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다급한 주석적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저자는 이 문제를 성인 예수가 어떻게 어린이들을 대하고 있는가하는 본문에서 해명하고 있다. 특히 막 9장 36절 이하의 "예수가 어린이를 껴안았다."의 주석적 해명을 통하여 예수는 자신을 어린이와 동일시하였다는 것을 주장한다(106쪽). 저자에 의하면 예수는 철저한 '어린이 신학자'였던 셈이다. 그 까닭은 예수가 어린이를 인류의 모범으로 삼았고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모습 안에는 예수의 모습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09). 하지만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갖는 어린이상을 보편적 인류의 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매우 미묘한 문제로서 자연신학의 과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르트가 지적한 '자연신학'의 한계와 오류에 빠지지 않고 어린이 예수의 모습을 저자는 성서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11쪽이하). 그 중요한 특성은 1)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 2)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3) 진실한 마음, 4) 온유한 인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5) 놀이하는 삶의 모습이라고 파악한다.

두 번째로 그는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저자는 어린이들이 만나야 할 실존적 관점에서 어린이의 눈높이로 내려오신 하나님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두 번째로 기독론적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어린이 하나님의 가능성과 필연성 그리고 현실성을 사유하였다고 저자는 주장하며(131-140), 그 연속선 상에서 하나님의 모습은 순수하시며, 어린이 하나님으로서 그 순수함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받는 자비와 긍휼의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시도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람들에서 그 면면을 알아 볼 수 있듯이, 저자가 정통 독일신학의 후예임을 보여 주었다면, '놀이하는 하나님' 이해는 보다 더 적극적인 개방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속에서 저자는 진정한 자유와 능력 가운데 기꺼이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모험을 감수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159쪽 이하). 마지막으로 그는 성령의 체험을 어린이의 관점에서 해명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중생의 신비가 바로 성령을 지칭하는 한 모형이다. 중생을 통한 인간 정신의 성장은 언제나 그치지 않고 지속될 것이며, 그런 한에서 우리는 자신을 언제나 새로운 존재, 곧 어린이와 같은 존재로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164-164쪽).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어린이로 만드는 그 능력이 곧 성령의 현실이며, 이는 성령이 곧 어린이라고 말하게 한다는 것이다(164). 지속적으로 저자는 그리스도의 존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었다는 것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사귐과 공동적 나눔이 가능하였다는 것이 그 중요 이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자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통하여 많은 시사를 얻고자 한다. 왜 이런 연약한 상징 가운데 예수에게 임하였을까? 그는 한 마디로 온유한 어린이들, 고난받는 어린이들 위로 내리는 영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172).

세 번째로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어린이의 모습에서 찾음으로써 어린이 신학의 인간론(?)을 쓰고자 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으로 자라야 하는 종말론적 긴장에서 참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이를 다시 어린이와 연관 시키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론의 여러 가지 이해를 간략히 서술한 뒤에(178-185) 형상론에서부터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할 존재이며, 동시에 인간상호 간에 사회적 존재이며, 마지막으로 세상의 피조물들의 유기체적 관계를 보살펴야 할 존재라고 규정짓고, 이것들이 누구보다도 어린이에게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러한 해방의 하나님의 환상을 상상하면서 다시 한번 어린이의 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린이 신학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저자는 처음부터 일괄되게 어린이 신학이 목표하고 있는 지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려고 한다: 고난과 고통에 지지 않는 하나님의 해방의 사건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저자의 후기에서도 고백하고 있듯이, 그의 신학적 시도는 철저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궤적 위에 있는 몰트만의 기독론과 연관이 있으며, 이를 한 구체적 상황의 해방의 관점에서 더 철저하게 다루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어린이 신학이 해방이란 수식어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여성해방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저자의 착상 때문이다.

어린이 신학의 공헌점은 먼저 어린이가 당면한 상황을 신학화하였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겠다. 방법론적인 사변과 구상이 따로 있지 않았지만, 현장의 상황을 신학화하려는 의도는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장을 어떻게 신학화할 것인가? 비록 구체적으로 인용하지 않았지만, 저자는 인간이 체험하는 하나님을 시작점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체험한 인간을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고 보여진다. 많은 부분에서 예수의 삶의 경험이 어린이들을 신학화하는 전거로 인용되고 있으며, 특히 성자 하나님을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몰트만이 변증법적이며 비판적이라고 제시한 현실의 상황분석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이 신학에서 특별한 것은 어린이라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이 변증법적이며 비판적인 시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분석은 인간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인간의 인격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터였던 것이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어린이들의 고난과 인격의 성장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여러 가지 실증적인 심리분석적인 연구결과들이 다른 일반적인 자료들과 더불어서 충분히 신학화되지 못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 작업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기에, 어린이라는 가장 순수한 인간성의 원형을 보여 주어야 할 시간대가 단지 인생의 특수한 한 시간 상의 경험으로 제한되는 효과를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이 정신분석의 결과가 여기에 신학화되었다면 어린이의 문제가 보다 포괄적인 전인적인 인간성의 문제로 해명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두 번째로 어린이 신학이 가진 의의는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어린이의 입장에서 신론과 기독론 그리고 인간론 등 교리의 중심적 내용들을 해명하고 새롭게 쓰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주로 고난과 세상의 부정성을 어린이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해방의 사건을 다루어 가는 결정적인 모습으로서 어린이 하나님, 어린이 예수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어린이다운 인간 등을 구성하고 있다. 이때 저자는 일부 종교신학의 과욕을 피하기 위해 신학의 사명이 어떤 의미에서 기술적(記述的)이라는 점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시도에서 강점이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아쉬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은 어린이 신학이 갖고 있는 어린이의 이미지가 이중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때에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성자 하나님의 아들됨에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그래서 예수의 아빠 기도에서 그 해방의 가능성을 찾는다), 동시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어리석고 힘없는 가장 수동적 존재로서 표상된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가장 순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우리의 경험적 두 가지 측면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중적 이미지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저자가 암시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성서읽기를 통하여 가능하여졌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한국신학의 독창적 모색이, 싫든 좋든 간에, 토착화라는 구조 하에서 전통사상과 전통종교와의 만남에만 그쳤다고 한다면, 오히려 어린이 신학은 한국신학의 독창적 모색이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의 새로운 자리의 발견을 통하여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시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저자의 말대로 어린이 신학이 하나의 유행신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통적인 한국적 신학의 첫 발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런 사명과 연관해서 본서에서 가장 아쉬운 것으로 지적될 수 있는 바, 어린이 신학이 다른 '고통의 신학'과 다른 구체적인 새로운 진리인식을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론적 고찰의 결여 부분을 채워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