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워드 스나이더 지음, 이철민, 이승학 옮김, 두란노, 1999)

이신건

 

길을 걷다보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글을 새긴 팻말을 든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들의 전도열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체면과 부끄러움을 무시하고 전도하는 그들에게 복이 있어라! 하지만 그들의 전도구호는 언제나 나를 섬뜩하게 한다. 지옥을 협박하며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예수의 정신과 사뭇 거리가 멀거니와, 더욱이 예수는 단 한번도 "천당"을 가르치신 적이 없다. 그분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신국=천국)"이다. "천당이 바로 천국이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절대 아니올시다"이다. 천당은 "하늘의 큰 집"이라는 말이다.

예수가 "집"이라는 용어를 쓰신 것은 단 한번, 그것도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에 나타난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승천을 앞둔 예수의 천당 약속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의 고난 예고 다음에 위치해 있다. 고로 이 말씀은 "예수가 고난받기 위해 잠시 제자를 떠나시지만, 그 고난이 오히려 영생을 가져다주며, 그 후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집"이나 "처소"라는 용어는 "희생을 통한 영광"을 의미하는 문학적 은유(메타퍼)로 읽어야 무난하다. 왜 예수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한이 유독 "집"의 은유를 썼을까? 아마도 낯선 타국, 소아시아에서 방황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가장 갈망하는 안락한 집, 안정된 처소를 구원의 이미지로 삼았을 법하다. 더 깊은 논의는 성서신학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천당"이라는 말은 정체불명의 한국말이다. 일제 시대에 평양에서 최봉석(일명 최권능) 목사가 "예수 천당"하면서 설교했다는 설이 내려오는데, 그가 이 말을 처음으로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좌우간에 "당(堂)"이라는 말은 불당(佛堂)과 성황당(城隍堂) 혹은 서당(書堂)처럼 우리가 자주 쓰던 용어이다. 그래서 최권능 목사와 같은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집"을 "천국"으로 오해하여 이를 "천당"으로 옮겼을 법하다. 그러나 불당과 성황당, 서당은 구원의 처소가 아니다. 불교도 기독교처럼 지옥(地獄)이라는 말은 쓰지만, 지옥의 반대 용어는 천당이 아니라 극락(極樂)이다. 여하튼 옛 신앙 선배들도 요한처럼 "집"이라는 은유를 애용한 것 같다. 그리고 막연한 "천국"을 익숙한 "천당"이라는 말로 옮겨서 쉽게 전도하려고 한 것 같다.

하지만 "천당"을 "천국"과 동일시함으로써, 신학적-실천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생겨났다. 천국을 오로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사후 세계, 영혼만이 도달할 수 있는 처소로 오해하는 현상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그 결과로 부활 신앙과 역사 의식이 완전히 빛을 바래고 말았다. 성서의 전통과 거리가 먼 영혼불멸설과 역사비관주의, 개인주의가 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예수가 사후세계를 "천국"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분에게서 천국은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자들에게 가까이 오는 생생한 실재였다. "죽은 자들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 예수는 상세한 정보를 주시지 않았다. 단지 "아브라함의 품"이나 "잔다"는 은유를 쓰신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이 말씀과 변화산의 사건에서 우리는 생명이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임을 읽을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죽은 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삶을 누리고 있음을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예수가 "천국"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으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천국을 내세의 것으로 미루어 버림으로써 현세의 삶을 소홀히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까? 천국은 어디에나 있지만, 산 자의 관심거리는 죽은 자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죽은 자의 운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니,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게"하고,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는 강한 현실적 요청을 주시기 위함이었을까? 여하튼 하나님의 나라는 산 자들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초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나라"는 온갖 사상과 상황과 섞여서 잡탕밥처럼 되고 말았다. 무엇을 넣거나 빼도 잡탕밥은 잡탕밥이다. "넣고 싶은 대로 넣고, 빼고 싶은 것은 빼라. 손님이 즐기기만 한다면, 무엇을 넣고 빼든 무슨 상관이랴? 장사만 잘 되면 그만인 것을!" 이러다 보니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지, 누굴 믿는지 모호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타 종교인이나 심지어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 것을 이름만 달리하여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것 같다. 입신양명과 부귀영화, 무병장수와 영생불멸... 등등 좋다는 것은 다 넣고 싫은 것은 다 빼버린다. 8복은 빼버리고, 5복만 듬뿍 집어넣는다. 십자가는 싹 빼버리고, 부활은 최대한도로 넣는다. "회개와 심판"이라는 말을 가급적 빼버리고, "위로와 평안"을 강제로 주입한다. 작은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죄다 빼버리고, 겉과 무늬만 크고 화려하게 꾸민다. 이러니 속빈 강정처럼 기독교의 생명력이 점점 쪼그라들고, 물탄 술처럼 교인의 맛이 날로 싱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면, 용서하시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가 진짜 전하시고 실천하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맛보자"는 것이다. "원조", "순", "진짜", "참"이라는 군더더기 말, 아니 "복음"이라는 수사조차 덧붙일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우리는 좋은 안내서를 잘 만날 수 없었다. 특히 복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쓴 책은 가뭄의 콩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위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욕먹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엄청나게 연구하였던 반면, 복음주의자들이 쓴 학문적인 책은 래드(G. Ladd)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고작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이 여태 딴 복음을 전했다는 말일까?

그러나 다행히 복음주의권에서 이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 한 분을 나는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nyder)이다. 목회자와 브라질 선교사로 보낸 후, 지금은 오하이오 주 데이튼(Dayton)에 있는 연합신학교(United Theological Seminary)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번역-소개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Community of the Kingdom) 외에도 "하나님 나라 선언"(A Kingdom Manifesto)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한국에 내왕한 그에게 내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대화를 통해 나는 그가 복음주의권에서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학문적 균형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수준 정도라면, 나도 이제는 복음주의자임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복음주의자는 종종 부끄러워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자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종종 학문적 정직성을 외면하였으며, 때로는 정치적 이유로 복음을 심하게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은 물론 복음주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 스나이더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또 한 권의 좋은 책을 펴냈다. 이름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델"(Models of Kingdom, 1999)인데, 한국말로 곧바로 번역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워서 주저하지 않고 바로 구입해서 하루만에 독파하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수시로 구독을 권하고 있다. 다행히 내용과 번역이 그리 어렵지 않다. 성숙한 평신도들도 충분히 읽고 소화할 수 있는 내용과 분량(314쪽)이다. 굳이 단번에 다 읽지 않아도 좋다. 독서 모임을 만들어 차례로 발표하면서 읽고 토론해도 좋겠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교회가 여러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다"(7쪽)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가 복음 자체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된다"(같은 쪽)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모델은 세상을 뒤흔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10쪽)는 저자의 말이 새삼스럽다. 왜냐하면 예수에게서 그것은 분명 혁명적이었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 혁명은 고사하고, 세상 개혁에도 무기력하지 않은가? 그리고 예수는 혁명을 가져왔지만, 교회는 종종 얼마나 혁명을 저지해 왔는가? 저자도 역시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풍성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개념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가 현 상태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같은 쪽)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하튼 복잡다양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하여 저자는 모델(Model)의 가치를 이용한다. 비록 모델이 신학자의 사상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교회의 모델"과 "계시의 모델"을 논의한 발버터 뷜만(Walbert Bülmann)과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정리한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를 따라서 저자도 "하나님의 나라"를 모델로 제시해 보려고 애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서 중심이 되는 6 가지의 근본적인 긴장점 혹은 양극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1. 현재적-미래적, 2. 개인적-사회적, 3. 영적-물질적, 4. 점진적-급진적, 5. 하나님의 행위-인간의 행위, 6. 하나님의 나라-교회이라는 양극성이다.

저자는 이미 서두에서부터 "이러한 긴장 관계를 희석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 한 측면을 완전히 제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그만큼 비성경적이다. 성경적으로 믿을 만하고, 성경적으로 유용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어느 정도 이러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것과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23쪽)는 자신의 입장을 제시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생겨난다. 저자의 입장은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부질없는 대화가 되지 아닐까? 이성적으로는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것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은 상황과 처지, 심리에 따라 얼마나 쉽게 극단으로 치우치는가? 그리고 성서도 극단적인 것, 혁명적인 것을 배격하고, 모든 것을 가급적 균형있게 조화시키려고 할까? 전제가 훌륭하다고, 결론도 그럴 수 있을까?

여하튼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8 가지 모델로 나눈 후, 그 특징과 장-단점을 잘 정리한다.

1. 미래의 소망: 이 모델은 영적, 비사회적이며, 묵시적, 초자연적이다.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요아킴 등과 오순절 운동, 성결 운동이 주요한 대변자들이다.

2. 내면의 영적인 경험: 이 모델은 가장 개인적, 플라톤적이며, 세상도피적, 이원론적이다. 사막 교부들과 오리겐. 그레고리, 아빌라의 테레사, 토마스 아 켐피스, 마이스터 엑카르트, 요한 아른트 등이 이를 대표한다.

3. 신비로운 사귐: 이 모델은 공동체와 예배, 성례전을 강조한다. 경험적, 상징적, 미적인 특성을 가진 이 모델도 비사회적, 영적, 이원론적이다. 존 타울러, 리처드 박스터, 존 밀턴, 존 번연, 존 웨슬리, 토마스 오덴 등에 의해 대변된다.

4. 제도적인 교회: 이 모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현재적이고 가시적이며, 교회의 구조와 권위를 강조한다. 고로 보수적, 제도적-계층적이며, 권위적-억압적, 정적이다. 어거스틴과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카톨릭 교회가 이를 대표한다.

5. 대안 사회: 저항의 나라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모델은 예언적,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공동체와 대안 문화로서의 교회(분파), "평화의 나라"를 강조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다. 어거스틴도 이를 강조했고, 아시시의 프랜시스를 비롯하여, 사회의 주도적 가치관과 제도에 저항하는 자들이 이를 대변한다.

6. 정치적인 국가: 이 모델은 신권정치(神權政治: Theocratic Kingdom)의 나라와 비유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시민 윤리를 강조하고,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긍정하며, 후천년주의적이다. 콘스탄티누스 이후로 부각되었고, 칼빈, 부처, 크롬웰, 미국의 정치사상 등에 반영되어 있다.

7. 기독교화된 문화: 이 모델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미래적이고, 개인적-사회적, 물질적-영적이다. 현 사회와의 연관성과 윤리를 많이 강조하고, 사회변혁에 대해 낙관적이며, 인간의 노력을 강조한다. 벵겔, 프랑케, 웨슬리, 피니, 라우센부쉬, 매튜 등이 이를 대변한다.

8. 지상의 유토피아: 이 모델은 강한 비전(구약성서의 예언적인 하나님의 나라)을 제시하고, 유토피아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노력한다. 거의 완전히 지상적이고 현재적이다. 콜린스, 오웬, 마르크스, 해방신학자들, 샤르댕 등에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천상적이면서도 지상적이고,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이며,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둘 다에 의해 임하나,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점진적으로 임하나 강력한 계시나 단절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시점이나 순간들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는 아니지만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223쪽)고 다시 한번 더 역설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어 주려고 애쓴다. 그리고 저자는 모델을 평가하는 기준을 3 가지로 제시한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충실한가? 2. 교회 내의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에 도움을 주는가? 3. 세상 속에서 구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무하고 육성하는가?(235쪽 이하)

마지막 장: "현대의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건설"(269쪽 이하)에서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하나님의 나라는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역사 속에 결정적으로 침투한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이다.

4.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약속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 질서 그 자체이다.

5.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의 나라와 적대적이다.

6.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7.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 순종이 요구된다.

8.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보다 은혜의 나라이다. '

9. 하나님 나라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 속에 제시되어 있다.

1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을 통해서 올뿐만 아니라, 인간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도 온다.

끝으로 저자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적인 의식(意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285쪽 이하), 하나님 나라를 민감하게 의식하기 위해서 교회가 알아야 할 사항을 6 가지로 정리한다.

1.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최종 승리를 확신하면서 살고 일해야 한다.

2. 교회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경계선이 지워졌음을 알아야 한다.

3.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교회의 일보다 더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정의와 복음 전도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함께 묶여 있다.

5.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란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를 혼란케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균형이 잘 잡힌 시각을 제시해 준 스나이더의 공로는 결코 작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애써 균형을 유지하려고 함으로써, 성서에 내포된 긴장이나 급진성 혹은 혁명성을 인위적으로 완화하지 않았는지 의심해 본다. 성서에는 우리가 쉽게 완화할 수 없는 급진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혁명을 인간의 수준으로 완전히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인간이 다 해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도 기도와 기다림의 대상이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와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이런 신비를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내용을 편견없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하고, 여러 견해를 두루 종합하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려고 한 저자의 공헌은 크게 돋보인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학자들, 자신의 견해로부터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완고하고 닫힌 신앙인들은 이 책으로부터 큰 도전을 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우리 시대에 옮겨놓기 위해 고민하려는 사람들은 이 책으로부터 큰 격려와 방향성을 제공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