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학의 존재론

뚜 웨이 밍

이길용

 

1. 雜言

외국에 나와서 놀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가방끈 길이에 목숨을 걸고있는 먹물계에서 느낀 점 한가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그것은 대부분이 한국국적을 지니고있는 이들은 외국에서는 한결같이 한국에 관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고국에서 어떠한 공부를 했느냐 하는 것은 매우 부차적인 문제이다. 지금 이곳 외국 땅에서 노란 얼굴에 까만 머리카락을 지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번에 한국에 관해 정통한 지식을 지닌 전문가로 변신(?)한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 중의 하나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압력이 그들을 그곳으로 몰고 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비록 한국에 대한 공부가 고국에서는 짧았다 해서 이곳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법적인 근거도 없다. 오히려 이곳에서의 한국 공부, 내지는 동아시아에 대한 공부가 객관적인 비교적 시각까지 덤으로 던져 줘 보다 거시적인 문화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되지 못한 어설픔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시쳇말과도 같이 이곳사람들에게 정리 안된 억견만을 선사할 수도 있다는 예측은 종종 엄연한 현실로 우리 앞에 우뚝 서있다.

참으로 이런 얘기는 잡소리이다. 학위가 필요해서 온 사람들에게는 학위를 마치는 것이 '지고의 선'. 사실 하나의 과정을 끝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 충분히 찬사를 보내주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가슴깊이 미적이며 느물거리는 느낌 하나는, 왜곡되는 동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애증이다. 필자의 소박한 바람 하나는 만약 이곳에서 한국에 관한 내용으로 장사(?)를 할라치면 보다 분명하고 철저한 '시장조사(?)'를 마쳐달라는 것이다.

작금 한국에서는 이상한 붐이 조성되고 있다. 그것은 전통에 대한 몸살과도 같은 관심의 집중이다. 젊은 애, 늙은 분, 남정네, 여인네 할 것 없이 구름 같은 사람들이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실시하는 고전 읽기와 동양사상 강좌에 적잖은 돈을 내고 촌음을 쪼개어 학문의 길을 넓히고 있다. 이 열병과도 같은 붐의 중앙엔 사실 김용옥이라는 한 슈퍼스타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한문해석학]으로 대변되는 고전 읽기의 새로운 시각제공은 80년대 중반부터 한국 동양학계을 강타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예서 멈춘 것이 아니라 타고난 기막힌 마케팅 실력으로 자신의 호를 딴 {도올서원}이라는 계절학기를 설립하여 매 방학 때마다 중국과 한국의 고전을 독파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고전 읽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대부분 대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새파란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다. 필자 역시 89-90년도간에 아직 {도월서원}이라 이름짓기 전에 김씨의 [노자 강독]에 열심히 참석한 기억이 새롭다. 그때도 역시 내 나이 또래의 무진장(?) 젊은 친구들이 전공을 불문하고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를 썼던 기억 또한 잊지 않고 있다. 따로 수강비를 받고 매주 1회씩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대략 3시간 정도 진행되는 강의가 매번 500명 정도의 숫자가 강의실 중간 통로까지 꽉 채운 채 그의 노가리(?)를 경청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이다. 강의를 종료할 무렵 이루어지는 그의 특강엔 정말 거짓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많은 숫자들이 몰려들어 거의 3시간을 넘나드는 그의 강연을 경청했다. 그가 {여자란 무엇인가"}란 서물에서 "그 날, 그 시 감격을 안겨준 4천 눈동자에게.." 라고 헌정사를 쓴 것은 일호의 과장됨이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필자 역시 그의 많은 강연에 참석해 보았지만 항시 2,000명이 넘으면 넘었지 그보다 적은 수의 청중을 만난 기억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기실 이 이야기는 누구 들으라고 하는 곡소리가 아니다. 단지 나 자신에게 던지는 경계의 일갈이다. 앞서 전통문화와 전통사회에 대한 열기가 여전히 한국에 풍미하고 있고, 또 그 열풍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을 예시했었다. 이 이야기는 적어도 동아시아 전통을 가지고 밥 빌어먹을 사람들에겐 반드시 유의해야할 현실이다. 즉 이제 동아시아 문화를 논함에 있어서 대강의 썰 풀기로는 설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설픈 주변학문의 입장에서 정밀치 못한 잣대를 가지고 전통의 문제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몰매를 맞기 십상인 것이다. 그만큼 한국의 문화적 축적도가 상당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히 외국에서 한국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한국에서의 척도보다 더 철저한, 더 정밀한 방법과 시간을 가지고 문제에 천착해 들어가야 한다. 어설픈 재단은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잡소리가 너무 길어졌다. 사실 이러한 잡소리로 이 지면을 채울 생각은 없었다. 필자의 원래의 의도는 이 글을 통하여 우리가 전통사회에 대한 이해에 다가서기 힘들게 만드는 부분들에 대한 열거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애초의 목적을 시행해 볼까 한다.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이 그 문명에 대한 분석을 감행하려고 할 때 만나는 난관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우선 꼽아볼 수 있는 것은 언어적인 문제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언어적으로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무슨 얘기냐? 사실 동아시아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바로 50년 전만 해도 거의 한자(漢字)라고 하는 독재문자의 일인치하에 있었다.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뻘 되는 식자들은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도구로 어김없이 이 한자란 놈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행복하였다. 왜냐하면 거의 5천년이 넘어가는 통치기간(?)을 통하여 이 한자란 놈은 자신의 언어체계로 쓰여진 수없이 다양한 서물들을 축적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자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5천년의 문명사를 자신의 개인사로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배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많은 참고도서로 자신들의 생각을 보다 투명하게, 보다 넓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외국어 회화를 배우지 않아도, 한, 중, 일 삼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연구서들을 읽어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 당시 3국의 학술교류 범위는 오히려 지금의 수준 이상의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번역이라고 하는 반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원전을 그대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통치기간을 통하여 한국 지식계에 일대 변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언어의 몰살이었다. 그것은 사상도구의 해체였다. 일제 강압기를 통하여 한국 지식인계층의 지적 정보에 대한 폭넓은 수용능력은 점차 영양실조에 빠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침략기를 통해, 또 그들의 일본어 위주의 문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우리 선배들의 한자해석 능력이 점차 초라해진 것이다. 그리고 35년이란 기간이 지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제 한자는 5천년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낯선 글자체계인 언문이, 즉 한글이 한국 지식인들을 위한 사상도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 학계가 치러야 되는 수많은 굴곡과 난관이 파생되었다. 그것은 우선 전통과의 단절이다. 즉 고전과의 결별이다.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는 고전이란 없다.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은 5천년을 살면서 많은 생각의 흔적들을 책으로 남겼는데, 이제 그 서물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사실 손에 꼽을 정도이다. 100여 년 전 조선시대의 학자계층과 지금의 식자층을 비교해본다면 고전의 이해라는 점에서는 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국토의 분단 못지 않게 서글픈 사상의 단절을 우리는 경험해야만 한다. 선배들의 조언(?)을 듣지 못하는 우리들은 여전히 반쪽인 채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다.

이러한 도구적 언어의 변환이 야기한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의 국어인 한글에 대한 메타적인 이해 부족이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에서 공부 꽤나 하는 학자들 중에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에 대한 반성적인 사고를 하는 이는 상당히 적은 편이다. 물론 그러한 일은 언어학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자리를 빌어 필자가 말하고싶은 것은 대부분의 한국학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조차 반성적 사고를 너무도 게을리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번역'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만나게 되면 금방 고개를 쳐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번역의 어려움과 개차반적인 결과의 초라함(?)에 대해서 일성(一聲)을 높인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일상어에 대한 뚜렷한 반성의 흔적이 없는 소치인 것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독일어를 비롯한 서구언어가 가지는 세밀한 미분화(微分化)와 질서정연한 논리성에 대해 경탄해마지 않지만, 우리 언어가 가지는 표현상의 특성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이 번역어를 선택할 때마다 알량한 한자실력을 가지고 어설픈 퍼즐 맞추기에 스스로 자위하고만 있다. 그러면서 말한다. 한국어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그러나 필자의 느낌엔 무엇보다도 그런 일갈을 토해내고 있는 먹물들 자신이 한국어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그 문제의 해결이란 막막할 것이다. 각개의 언어는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과 장점이 있는 법. 보다 신중히 노력하면 우리는 우리의 언어사용에 대한 길을 훨씬 넓게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위한 공동작업과 또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가슴에 품어두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진작이 하나의 로비가 되어 한국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이 문제에 매진하게 하는 풍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는 꼭 하이덱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존재의 집'이지 않는가? 우리말의 분화되지 않음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말을 분화시키지 않는 우리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문제는 전통에 대한 문제이다. 필자의 바램은 이 전통이 내포하고 있는 바에 대한 계보학적인 시각 형성에 시간을 투자해 달라는 것이다. 앞서의 잔소리에서도 밝혔듯이 이미 한국사회는 언어의 단절이라는 굴곡을 거치면서 전통에 대한 이해도 왜곡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 전통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언어적 사용의 단절로 인해 왜곡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앉아 있다. 비근한 예로 전통에 대한, 동아시아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사회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성적인 사고가 진행되기 이전에 이미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우리 땅에 당도한 제국주의적 학문은 '식민사관'이라는 좀스런 별칭으로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대한 새로운 짜깁기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문화와 역사를 보는데 참으로 피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인 우열을 나누는 서늘한 가치판단을 가지고 마구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해부하였다. 그래서 유교는 지배자의 논리로 여성들을 억압하는 기재로, 있지도 않았던 봉건 사회의 구조를 운운하는 등 어설픈 춤사위를 벌인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서글픈 전통에의 재단은 실증주의, 진화론, 과학주의라는 개명된 미신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미신적 시각의 제거, 내지는 교정이라는 작업이 전통이해에 다가서려고 하는 이들이 먼저 해치워야할 전제들이다. 사실 우리가 듣고있는 전통이라고 하는 것 역시 고작 100년에서 150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형성된 상당히 젊은 형님들이다. 그리고 그 이전의 보다 오래 된 문화의 흔적과 이해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다. 그러나 국사학계에 종사하는 몇몇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그 이전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실적에 대한 수용여하는 상당히 비관적이다. 여전히 대다수 한국사회를 재단하는 국사학계 주변의 학문계는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신학에서랴! 필자의 또 하나의 바램은 한국문제를 다루려면 보다 구체적인 국사학계의 연구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설픈 상식에 의존하여 조선사회를 사민 체제로 형성된 신분사회로, 또 양반이란 계층을 태생적 신분인양, 그리고 조선시대 여인들은 일생동안 '칠거지악'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구호화 하는 우는 다시금 범치 않기만을 두 손 모아 기도할 뿐이다.

할 얘기는 많지만 갈 길이 먼 관계로 예서 멈추기로 한다. 기우와도 같은 노파심으로 다시 한번 언급해보는 것은 동아시아 문화와 전통을 해석하려는 자세의 신중함, 바로 그것뿐이다.

2. 비교적인 시각으로 조망한 동아시아 3국의 사유의 구조적 특성

사실 이 문제는 상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처녀지이다. 물론 일전에 동경대 교수인 나카무라 하지메라고 하는 거장이 그의 번쩍이는 어학실력을 밑천으로 삼아 {동아시아 사람들의 사유방법 : 인도, 중국, 티벳, 일본 ( "Ways of Thinking of Eastern Peoples: India, China, Tibet, Japan ")}라는 연구서를 펴낸 적이 있다, 전통적인 일본의 실력 있는 불교학자로서 이미 도통의 수준에 다다른 그의 산스크리트어와 한문 실력을 기초로 하여 그는 이 연구서를 집필하였다. 그의 방법론의 중심부에는 불교의 경전이 자리하고 있다. 즉 그는 인도에서 파생한 불교의 경전이 중국어와 팔리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세밀한 언어학적, 의미론적 분석을 통하여 각 나라의 사유구조의 특성을 분석해내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연구는 인도, 티벳, 중국, 일본 4개국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의 책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가 보기에 한국은 중국의 아류에 포함되므로 크게 보아 중국인의 사유구조 속에 집어넣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한국어에 대해서는 깡통이었다는 아쉬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만약 그가 한국어가 고립어인 중국어와는 본시 태생부터 다른 언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면 상황은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설사 그가 그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한국의 처리문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에서는 자국어의 문자체계로 번역된 불교경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의 불교계는 여전히 중국의 번역본을 토대로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탁월한 문헌학자였던 하지메 교수는 사료가 없는 사상의 비교라고 하는 커다란 우(?)는 분명 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몫은 이제 한국학자의 손에 와있다. 아무튼 이제 그 문제는 뒤로하고 일단 여기서 중국인의 사유구조에 대한 하지메 교수의 정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지메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중국인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사실적인 성향이 강한 민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불교전문가로서 그는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와중에 생긴 번역상의 문제들을 통하여 이러한 중국민족의 특성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어에는 '세상의 이치에 밝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추상명사가 없다. 그들은 이러한 명사적 개념을 '千里眼'이라고 하는 상당히 구상화된 표현을 통하여 사용하고 있다. 즉 천리안이란 글자 그대로 천리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연걸과 임청하 주연의 수많은 중국무협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대목인, "왕이여 영원토록 장수하소서!" 라고 소리질 할 때도 그들은 "萬歲, 萬歲, 萬萬歲 !"라고 하는 구체적인 연수를 끌어오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독일어의 Dinge에 해당하는 추상명사 또한 전무하다. 그들은 만가지 사물(萬物)이란 표현으로 그를 대체하고 있다. 이런 일상어뿐만 아니라 보다 사상적인 내용의 단어에까지 이런 경향은 그대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화엄철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완전하며 모자람이 없다'라는 의미의 추상적인 성격이 강한 명사도 중국인들은 '둥근 것이 가득하며 모자름이 없다'라는 의미의 '圓滿'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근원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도(道)'라고 하는 단어 역시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상적인 도로를 이미지로서 포함하고 있으며, 질서·법칙을 의미하는 '리(理)'라는 개념은 옥의 결(무늬)을, 만물 형성의 기본을 의미하는 '기(氣)'라는 개념은 생물이 호흡하는 숨결을 원초적 이미지로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inscription, Inschrift, epigraphy 등과 같은 새겨놓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명사도 인도어에서도 lekha라 하여 무언가를 새겨 놓았다 라고 하는 서구어와 동일한 의미체계를 지닌 반면에 이를 번역하는 중국인들은 '金石文'이라 하여 아주 구체적인 사물을 빗대어 이해하고 있다. 하지메 교수는 이런 중국인들의 구상적인 사고유형의 기원을 한자라고 하는 언어의 특수성에서 찾는다. 물체의 형상을 표시하는 말은 많은 반면, 변화나 추이를 나타내는 동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그러한 이유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로서 한자가 원래 상형문자라는 데서 그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詩經} 연구의 권위자인 그라네의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인용하면서 중국인의 사유구조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개념은 대단히 구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중국어의 단어는 서구언어의 시각으로 판단하자면 보통명사보다 오히려 고유명사에 가깝다. 중국인들은 철학적인 사상이나 추상적 관념도 구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표현하려고 하였다."

아무튼 이런 그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중국인의 사유방법의 특징은 개별적인 것, 또는 특수한 것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상적인 것을 더 중시하며 이러한 특색은 사물의 특수한 모양을 매우 강하게 전달해주는 중국어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문화에 대한 연구가 세계적으로 활발한 것에 반해 사실 한국에 대한 연구는 초라한 편이다. 따라서 한국어를 통한 한국사상의 구조와 특징에 대한 연구논문 역시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그래도 그 중에서 동경대 교수인 쿠로즈미씨가 그의 신동아 기고논문에서 행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사상적 특징의 비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쿠로즈미교수는 일본문화와 한국문화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주고 있다.

"일본의 경우 조선과는 달리, 과거제도와 유교적 관료제를 지니지 않았으며 또 유교적 제사도 거의 정착되질 못했다. 다시 말하여 일본의 유교란 그 사상의 사회적, 정신적 핵심을 결여한 겉 틀만을 수용한 것이다. 일본의 유교라고 하는 것은 주자학의 원리주의를 혐오하고, 아주 비근한 실용주의로 달려갔으며, 그 지식은 주로 귀납주의적 경험지, 기술지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주자학과 다른 연역적 이론체계인 서양의 학문을 접했을 때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이에 비해 조선의 경우는 사회제도적으로, 또 종교제사적으로 유교정신을 중국보다도 더 현저하게 구현한 케이스에 속한다. 조선유교는 지극히 원리주의적이며, 그것은 지적으로는 연역주의로, 실천적으로는 강렬한 도의를 부르짖는 이상주의(MORAL RIGORISM)로 달려가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본질적 성격 때문에 서양의 사상체계와의 사이에는 오히려 강한 반발심리가 작용하야 일본처럼 서양문화가 수월하게 침투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사상형은 이른바 생활 실용적, 기술적 타입이다. 이러한 타입은 사상을 수용하는 방식에 갈등구조가 없으며 유연하고 신속하지만, 타면으로는 원리적인 것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결여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윤리적 차원에서 보자면 거대한 도의성의 결여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한국형 사상형은 고매하고 원대한 사태에 대하여 다이나믹한 관심을 쏟는 원리적 타입이다. {理}에 대한 추구가 깊은 만큼 갈등도 많다. 때로는 관념이나 이념에 사로잡혀 비근한 현실을 은폐해버리고, 관념과 현실의 분열에 찢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 갈등은 보다 큰 종합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한국인은 그 도의성이나 이상주의를 정말 거대한 보편성에의 지향으로 결합시킬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될 때 한국인은 그들의 고뇌를 지양한 지고한 도를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주자학이라고 하는 동일한 문명의 세례를 받은 두 지역이 결과적으로 파생된 문화적 에토스의 이질적인 차이를 토대로 얻어낸 것이다.

이 정도의 논의가 지금까지 한국 지성계에 제시된 동아시아 3국에 대한 사유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언설들이다. 물론 이 것들 외에 이규택을 위시한 수많은 수필가들, 그리고 국수주의자들의 한국사상, 내지 한민족 사상의 특성 등에 대해서 논한 서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학술연구 논문의 참고자료로서 채택하기에는 여간 곤란한 것들이 아니다. 사실 보다 본격적인 이 방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인근 주변학문들의 성의 있는 대화자세와 협력에의 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의 분과학문의 정보 축적 능력이라는 것이 여로 모로 부족한 상태인지라, 이 일에 대한 성취는 우리 후배들의 몫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없는 살림으로라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한국 사상의 특징에 대해서 한번 논구하자면 아무래도 다시 한번 불교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우리 학자의 글이 아닌 일본 학인의 입을 빌릴 수밖에 없다. 우선 한, 중, 일 동아시아 3국이 각각 수백년 이상 불교전통 하에 있었다는 것이 이 연구를 위한 기초가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도에서 파생된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중국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중요한 경전들이 한자로 번역되어진다. 그리고 그 번역되어진 경전을 가지고 동일한 한자문명권에 있었던 한국과 일본 역시 불교 수업들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동일한 교재를 가지고도 사실 한, 중, 일 3국의 불교는 상이한 역사와 특성을 보인 채 발전하여왔다. 따라서 이 들 3국의 변화된 불교의 특징을 살피는 일은 곧 이들 민족의 사상적 기질에 대한 탐구와도 통하는 점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은 사실 이미 나까무라 교수가 전제했던 것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러한 가정 하에 鎌田茂雄씨는 한국 불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 하나는 호국불교요, 나머지는 종합불교 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제시한 호국불교에 대한 문제는 좀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물론 신라 원광의 세속오계를 위시하여 고려 몽고 침입시의 팔만대장경 간행, 조선조 유명했던 서산, 사명 대사의 무용담에 이르기까지 사실 한국불교는 상당한 정치색을 띠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외피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일방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 또한 진지한 자세는 아니다. 한국의 불교가 호국적인 모습을 띠게 된 배경으로 우리는 먼저 불교가 어떠한 역사적 배경 하에 이 땅에 흘러들어 왔는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개략적으로 스케치하자면 일단 초창기 불교의 유입은 일반민중의 종교적 욕구에 의해 수용되었다기 보다는 기존의 무속종교에 기반을 두고있는 지방세력가들을 규합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당시 지배층의 계획적인 주도하에 선교되었다고 보는 것이 최근 연구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따라서 그 속에 스며있는 정치적인 계산은 무시한 채 일방적인 잣대로만 이 부분을 곡해해서는 곤란하겠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하더라고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호국성은 3국 불교비교를 위해서는 좋은 안주거리이기도 할 것이다. 계속해서 鎌田茂雄씨는 한국불교의 종합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리 독특한 이론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한국불교의 특징을 '통불교' 내지는 '회통불교'로 이미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교적 시각은 교리적인 측면에서 제기되는 것인데, 신기할 정도로 한국의 불교는 교, 선 양종에 대한 통합시도가 무진장 활방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화엄·법상·삼론·정토 등 수없이 많은 교파불교가 각각 교종이니 선종이니 부류를 형성하여 발전되었는데, 이 놈의 교파불교가 한국 땅에 다다르기만 하면 하나로 짬뽕되고마는 역사적인 경험이 실제로 있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신라대의 원효만 하더라도 "百家의 異諍을 화합하여 한 맛의 불교로 귀착시키는" 것을 그의 최고의 목표로 삼아 {十門和諍論}을 지었다. 그 뿐만 아니라 보조국사로 칭송받던 고려대의 지눌 역시 교선의 하나됨을 위하여 일생을 투신하였고, 이같은 경향은 조선조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리고 작금의 조계종은 그러한 종합불교의 후예로서 물론 외형적인 모습은 선종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여전히 교선일치의 전통을 존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사유의 구조적인 특성의 하나로서 '회통' 내지는 '종합화'라는 화두를 하나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건져낸 화두를 어떤 논리적 구조 속에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다. 그리고 필자의 소견에 의하면 그 방법의 하나는 바로 한국어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가능하리라 본다. 거칠게 말해보자면 한국어가 가지는 언어의 미분화성이 이러한 한국인들의 원론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을 형성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이 즈음에서 유동식 교수의 '비빔밥 문화'를 끌여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국문화의 구조 속에 자리잡은 통일지향적 내지는 종합화의 짙은 성격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은 이 논의의 과학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선결작업임은 분명하다.


3. 왜 또 유교인가?

이제 여기서 이 발제의 제목이 담고있는 내용에 대한 필자의 해명을 전하고자 한다. "왜 또 유교인가?"

혹자는 얘기할 것이다. "왜 또 유교인가? 지금까지 해쳐먹었으면 되었지, 무엇이 모자라 또 기어 나오느냐고?!" 물론 그 말은 맞다. 유교는 참으로 오래 동안 동아시아의 사상계와 생활세계를 지배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무리 사회가 세속화되었고 현대화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매년 추석 때만 되면 그처럼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어가며 낑낑거리며 집안 어른들을 찾아보아야만 하는 우리네 심장에 가득히 박혀있는 부담감, 속으로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이 든 양반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자리를 양보해야된다는 우리네의 설명 잘 되는(?) 강요, 스스로는 개화되었고 상당히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자부하는 젊은 먹물내기도 자신보다 나이 어린놈들이 설치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는 정서적인 왜곡,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절정에 이르는 싸움일수록 꼭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외침, "너는 니 에미 에비도 없냐?!" 사실 이 모든 것들의 에토스적 토대는 유교라고 하는 괴물이 제공하고 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479)로부터 줄잡아 쳐도 거의 2,500 년이라는 기간을 우리와 함께 하고있는 그놈의 유교, 바로 그 유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이 시대의 해석자들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유교에 대한 진지한 접근보다는 유령 같은 허위의식만이 우리의 두뇌를 지배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령은 사실 우리 자신의 업보라기 보다는 뭐도 모르는 양놈들의 유교 재단(裁斷)에 기초하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어찌 변명한다고 해도 이 오해의 질곡은 합리화로 무장한 헤겔, 맑스, 베버 등과 같은 독일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의 작업의 내적 타당성과 합리성에 대해서 내 부인하는 바는 아니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그들로 인해 형성된 동아시아에 대한 완고한 선입견은 사실 오랫동안 서구세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자체의 식자층 들 머리를 지배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근대 이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본 것이 아니라 잘 나가는 서구적 세계가 제공해준 멋진 색안경을 끼고 우리를 정리한 것이다. 이런 서글픈 구조를 자각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최근의 일... 그리고 그러한 한계의 극복을 위한 시도가 앞서 언급한 고전 읽기 붐 등으로 표출되었다.

아무튼 그러한 논의는 이제 뒤로하고 필자의 또 하나의 염원은 보다 투명한 자세로 우리의 유교문화를 분석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오늘 또 필자는 유교를 하나의 주제로 선택하였다.

혹자는 공자가 무척 잘나갔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공자의 초라한 모습만을 증거해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에서 일정한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제자 육성의 길로 매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맹자라고 하는 걸출한 위인을 통해 성인의 경지로 추앙되고, 주자라고 하는 집요한 사상가에 의해 드디어 [공자-맹자-주돈이-정명도]로 이어지는 도통의 원조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공자가 살았던 당시 유교는 가장 초라한 학파 중의 하나였고, 세상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얼뜰기들의 모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공자가 자리잡은 사상적 토대에 기초한다. 공자가 활동하던 당시는 하-은-주로 이어지던 중국의 원시 봉건 사회가 붕괴하고 수많은 지방 영주들의 각자 고유한 통치권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바로 이전의 국가였던 주나라의 인문제도에 주목한다. 참고로 여기서 공자의 출생과정을 밝히노라면 상당히 재미있는 구석이 보인다. 우선 공자는 우리의 기대처럼 한족태생이 아니다. 그는 은족 계통의 송나라 사람이다. 여기서 은족이라 함은 우리 민족과 궤를 같이 하는 몽골계통의 유목민족을 의미한다. 사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지금은 대체로 중국의 역사를 하나라부터 잡고 있다. 이 하나라는 한족들의 국가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하나라는 기원전 1800년을 전후로 하여 은이라고 하는 나라를 세운 기마 민족의 침략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은은 그후 700여 년 간 중원을 차지하고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기존의 하나라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경 문화적 성격이 강한 것에 반해 은나라의 경우는 기마 민족의 특성답게 목축업을 주로 하였고, 종교에 있어서도 '상제(上帝)'라 하는 상당히 인격신적인 성격이 농후한 신을 숭앙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하나라는 소박한 농경문화적 자연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었던 민족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 후 이 두 이질적인 문화는 700여 년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어느 정도 절충되어졌고 또 서로 동화되어갔다. 그러나 주에 의한 은의 몰락 이후 문화의 흐름은 보다 혁신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선 주나라는 건국 후 이전의 은 당시 보여주었던 신권 통치적인 색채를 과감히 줄여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제도의 중시를 통하여 나타났다. 즉 토지를 나누어주고 군주를 세워 신권통치적인 성격을 상당부분 세척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종법제도를 세워 자연스러운 혈연관계를 인위적인 정치관계 속에 융화시켰다. 이것을 일컬어 역사가들은 주공이 예를 제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주의 경향은 인격신을 숭배하며 그를 통해 통치의 기준을 삼았던 원시신앙에서부터 인문을 긍정하는 쪽으로의 나아감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자는 바로 이 부분 제도의 강조와 그 제도의 인문적 성격에 자신의 승부를 걸었다. 그래서 이 예에 대한 사례들을 학습하여 이미 젊은 나이에 예에 관한 한 통달한 사람이 되었다. 공자는 바로 이 사그러져가는 예의 확립을 통하여 다시 주나라의 안정된 정치구조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군주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도 미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자와 그의 유학파는 기나긴 야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한제국에 의해 정식 국가의 통치이념화 되면서 서서히 그 안에 잠재되어있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송대의 주자에 의해 성리학이 꽃을 피움으로 700년간의 장기집권에 성공한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 대의 유학이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공자가 꿈꾸던 인문의 회복이라는 면에서는 타락한 모습을 하였다. 당시 동중서라고 하는 막강한 실력자의 짬뽕실력으로 유학은 관학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반면, 사상적인 면에서는 절충주위, 내지는 혼합주의의 침략에 두 손을 들고만 형국이었다. 즉 한 대에 이르러 유학은 애초의 모습보다는 그 당시 횡행하던 소박한 우주론들이었던 음양, 오행 등과 같은 사상과의 접목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공자의 입장에서는 많은 부분이 후퇴한 우주론적인 모습을 가지고 심성론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신유학 초기의 학자들에게까지 이어져 주렴계의 {태극도설}이나 장재의 [태허] 등과 같은 개념도 이러한 소박한 우주론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것이 정호, 정이 두 형제를 거쳐 주자에 이르러서는 공자의 주관심을 회복하고 거기에 세련된 심성론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 바야흐로 신유학의 융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유교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내용만을 일별하여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먼저 생각해 볼 문제는 공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의 정체이다. 공자는 그의 남겨진 글들 곳곳에서 예의 회복을 통하여 주나라의 질서를 복권시키려 하였다. 그 때 이 예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잠시 공자의 직업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란 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성인의 후예들은 출세의 기회는 없는 사람들이나 특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달인들이 많다. 지금 공자는 그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의례에 밝은 것을 보면 그 또한 분명 달인인 것이다. 내 죽고 나면 꼭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공자가 성인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인이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와 만나게 된다. 우선 지금 우리가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성인이라는 용어는 잠시 잊어버리자. 왜냐하면 중국사에 있어서도 공자를 성인이라 추앙하는 흔적은 보이나 공자의 직계조상까지도 성인으로 칭한 곳은 어디에서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성인이라는 단어는 일정한 부류를 지칭하는 직업명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성이라고 하는 한자어의 형성과정을 살펴본다면 성이라고 하는 글자는 귀耳)와 드러남(呈)의 조합이다. 즉 이 말이 보여주는 바 그 의미는 '특별히 귀가 다른 사람에 비하야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잘 듣는 사람', '보통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그 무엇까지도 잘 듣는 사람' 이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한번 한자로 돌아가자. 다시 이 성이란 글자를 분해해보면 이 글자는 또 귀(耳)와 제기(口)가 나란히 서있고 그 밑에 임금 王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형상은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기 앞에 구부리고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앞서 언급한 성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을 일별해 보자면 제사, 제기, 즉 그것은 종교적 행위와 관련이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종합해 개관하자면 아마도 성인이라고 함은 주당시의 제사장적인 위치의 부류를 지칭하는 용어였을 것이다. 그것은 앞서 인용한 {사기}의 내용에서 공자는 禮에 관통했다는 서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예,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종교적인 의미 속에서 이해되어질 때 보다 분명한 자기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제사장 계층, 보다 구체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무당의 후예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공자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지배이념의 생성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인 색채는 오히려 이를 이용한 공자에 의해 상당히 퇴색하게 된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과정과 그 형식에 대한 숙련공들이었던 성인은 공자에 의해 서서히 도덕적인 완성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서는 공자를 도통의 원조로 삼은 신유학자들에 의해 이제 종교적인 옷은 거의 벗어버리고 완전한 도덕적 가능성의 실현자로서 이해되어졌다. 그러나 그 시작이 하-은-주로 이어지는 종교적 의례에 두고있다는 점에서 현 유교에 대한 통념적 이해에 어느 정도의 수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공맹으로 시작되는 원시유교에서 송대의 성리학에 이르기까지 유교라고 하는 사상체계의 (더 크게 보아 중국적인 사상체계로 까지 확장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특징은 물아일체관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있다. 이를 방동미 교수는 '萬物有生論'(universal organism)이라 부른다. 세계를 기계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의 총집합체로 파악한 중국인의 사유구조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교사상을, 더 나아가 중국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만물유생론적인 세계관은 세련된 언어로 채색된 유교의 논리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중국의 민간신앙 속에서도 흔히 발견되어지는 특징인 것이다. 중국의 민간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세계관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살아있으며 또한 각자 영향력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조직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은 바로 '조상숭배'이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까지도 그들 생활세계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뿌리 깊은 원형적 의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조상숭배' 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상숭배의 배면에는 바로 만물유생론적인 세계관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왜 서로 상이한 이 두 가지 사고체계의 기본적인 골격은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에 필자는 아직 설긴 하지만 이런 답변을 해볼까 한다. 신유학적 세계관이나 민간신앙의 골간을 이루는 天人相與적인 세계관 모두 소박한 '정령주의(Animism)'의 외화된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 양자의 차이는 그들이 본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 소박한 정령주의를 어떤 체계로 포장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신유학의 정교한 논리든, 민간신앙의 기복적 표현이든 이 양자는 모두 세상의 모든 사물은 살아있는 영을 지니고 있다는 정령주의적 기초 속에 놓여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원시유가든 신유학이든 간에 그들의 배면에는 이러한 정령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철저한 종교적 신념이 깔려있다 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유가들의 제시한 가르침의 언어는 차가운 논리구조만이 아닌 종교적인 언설이었다는 데서도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상식적인 선에서 많은 사람들은 유교에서 얘기하는 '본성에 합당하게 행동하라' 내지는 '이치에 합당케 하라' 등과 같은 명령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해석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명령만은 아니다. 정말로 세계를 살아있는 대상으로 파악하고 이해한 이들이 그와 자신을 동일시할 것을 강조하는 종교적 발언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유교적 토대 위에 발언하고 있는 당사자의 심리상태는 이미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교 경전을 대할 때는 바로 그들의 그 진지함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유교의 가르침과 깨우침 등은 지식의 계몽과 계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요소가 깊이 배여 있는 종교적인 가르침이요 깨우침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에서는 인식론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인식은 '영지적(靈智的)' 성격이 농후한 것이며, 하나의 정보에 대한 지식 전달과정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논리적인 인식론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설명과 그것에 대한 서술과 묘사가 아니라 존재에로 이르기는 길에 대한 방향제시적 성격이 강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신유학내에는 이렇게 신비주의적 요소가 상당한 정도로 스며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 하에 신유학의 경전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면 여러 모로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시론적 성격의 넋두리는 정리하고 본격적인 우리의 논의로 들어가 보자.

4. 뚜 웨밍 교수의 신유학의 존재론

그의 이 짧은 논문의 영문에는 "신유학의 존재론 : 서론적인 질문제기"라는 부제가 붙여있다. 그의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뚜 웨이밍의 이 글은 신유학의 존재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 하기보다는, 그가 이미 그의 글 속에서 밝힌바 있듯이 다른 윤리적 사상체계와의 비교 속에서 신유학적인 사상이 어떤 특성이 있는 가를 보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논자의 논문 구성을 그대로 따라가며 우선은 성실한 요약에 치중할까 한다.

먼저 그는 일반인들의 통념 속에 이미 굳게 자리잡고 있는 "신유학은 도덕철학이다" 라고 하는 믿음을 애써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곧바로 신유학 내에서는 이미 주돈이, 장재 등 초창기부터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적인 논의가 성숙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논의를 통해 신유학적인 도덕철학은 실상 어느 정도 세련된 완성된 형이상적 체계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근거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려고 한다. 물론 유학의 형이상학화에 대한 기존의 교과적인 답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송대에 시작한 유학의 형이상학화라는 새로운 움직임을 도가와 불가의 사상적인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상 신유학의 사상사적 자리는 그러한 소극적인 대응 그 이상의 것이라는 그의 믿음 역시 포기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이 논문을 통해 신유학의 윤리적 구조 배면에 면면이 흐르고 있는 존재론적인 기초를 드러내길 원한다.

1) '성인다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기초 세우기

"성(聖)은 배울 수가 있습니까? 가능하다. 요점(要)이 있습니까? 있다. 청컨대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요점은 하나인데, 그 하나란 욕심을 없애는 것이다. 욕심을 없애면 곧 (마음이) 고요하여 텅 비어지게 되고, 행동을 하게되면 곧바르게 된다. 마음이 고요하고 텅 비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하게 된다. 행동이 곧 바르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두루 미치게 된다. 밝게 통하고 공정하게 두루 미치면 거의 (성인에) 가까운 것이다."

위에 인용한 주돈이의 이야기 속에 논자는 신유학의 모든 기초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유학에서 주장하는 핵심적인 목표는 "성인(聖人)"이다. 이는 신유학을 '성학지도(聖學之道)'라 지칭하는 것으로도 분명히 드러나는 바다. 그리고 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 때의 성, 무욕이란 '배움'을 통하여 도달 가능한 경지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사실 유교에 대해서 약간의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상식적으로 통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이 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그것은 바로 '성'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론적인 구조를 지닌 용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주돈이의 글을 인용한다.

"誠은 五常의 근본이며 온갖 행위의 원천이다.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성은 드러나지 않는(無) 상태에 있으며, 행위를 통하여 드러남(有)의 상태에 있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결점이 없고 관통하는 것이다. 오상과 온갖 행위가 참되지 못하면 그릇된 것이다. 이는 사악함과 어두움이 꽉 찬 것이다."

이러한 인용을 통해 그는 신유학적 체계 속에서 발언되고 있는 성(聖), 성(誠) 등과 같은 개념들은 철저히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배경을 깔고 있음을 통박한다. 이 개념들을 단지 심리학적 내지는 윤리학적인 잣대로만 파악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신유가들이 이 단어들을 '썰(說)' 할 때에는 분명한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자신감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의 연원으로 그는 그 유명한 {중용}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오직 세상에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라야 자기의 성품을 다할 것이니, 자기의 성품을 나하면 남의 성품을 다할 것이며, 남의 성품을 다하면 사물의 성품을 다할 것이며, 사물의 성품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2) 칸트의 질문제기 방식과의 비교

논자는 성인이 되기 위해 제기하는 신유학의 핵심적인 질문을 "나는 누구인가?"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제기의 원형으로서 공자의 수제자로 알려진 안연의 예를 들고있다. 그리고 안연이 이러한 질문에 자극 받아 '안연이 기꺼이 배우고자 했던 것([顔子所好何學論])'이라는 논문까지 쓴 정이(程滯,1033-1107)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어느 누구든지 성인에 이를 수 있다는 참으로 과감하고도 낙관적인 신유학의 인간이해를 논증하고 있다.

"하늘과 땅에 모여있는 생명의 원기로부터 사람들은 五行(水火木金土)을 자신의 지고한 탁월함 속으로 받아들인다. 사람의 본성은 순수하며 움직임이 없다. 그 본성이 동요되어지기 전에 그의 본성의 다섯 가지 도덕적인 원리들은 완전하게 결합되어있다 : 그것들을 일컬어 仁, 義, 禮, 智, 信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은 계속된 정이의 "학문의 올바른 방법은 자기 마음의 조정과 자신의 본성의 함양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사람이 중용에 머물고 성실에 거한다면, 바로 그가 성인인 것이다." 라는 주장을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논자는 하나의 비교대상으로서 서구의 칸트라고 하는 인물을 끌어들인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칸트가 제시했었던 질문은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칸트의 2번째 질문에 신유학의 사상을 연관시킨다. 아마도 칸트의 2번째 질문이 실천이성으로 나아가는 도덕의 형이상학화를 이루려는 시도였기 때문에 별반 고민 없이 선택하는 비교일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이에 주의를 요할 것을 표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차이를 그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도덕의 형이상학화를 위한 기초정립}이란 칸트의 유명한 저술의 한 대목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순수한 도덕을 위한) '책임의 근거'는 인간의 본성 안에 혹은 자신이 놓여져 있는 세계의 상태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험적으로 단지 순수이성의 개념 속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 도덕의 원리를 찾으려하는 신유가들의 시도와는 완전히 배치된다. 그리고 칸트의 이러한 결론은 인간 의지의 완전치 못함에 대한 그의 염려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을 인식한다면 신유학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 아무리 윤리적인 성향이 농후하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두 번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신유학의 질문은 칸트의 3번째 질문 바로 뒤에 4번째 질문을 첨가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하이덱거의 물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덱거는 칸트가 분명한 인식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기존의 관념적 형이상학과는 다른 과학적 형이상학의 길을 열었음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존재 그 자체에로 접근하는 길을 차단함으로 말미암아 존재에 대한 물음과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제기를 곤궁에 빠트렸다고 푸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푸념은 사실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3) 인간 본성의 존재론적인 위상

그러나 칸트의 한계를 뛰어넘어 현존재의 실존방식을 해석함으써 현존재를 열어 보이려고 했던 하이덱거의 '기초존재론' 역시 신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인간본성과 존재론적 실재는 하나이다' 라는 주장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양자의 차이는 바로 '시간성'에 있다. 신유학에서 인간본성에 대하야 발언할 때, 그 안에 시간이란 사라져 버린다. 철저한 무시간 성 속에서 그들은 존재일반과 인간존재의 동일함을 설파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하이덱거가 말하고 있는 현존재(Dasein)은 시간성을 전제로 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유학적 사유구조의 특수성이 부각되어진다. 여기서 잠시 장재의 글을 인용해보자.

"하늘을 아버지라 일컫고, 땅은 어머니라 일컫는다. 나는 여기서 아득하게 작지만 하늘땅과 한데 섞여져서 그 가운데 있다. 하늘과 땅의 가득 찬 것은 나의 몸이고, 하늘과 땅을 이끌고 가는 것이 나의 본성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의 짝이다."

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 인간의 존재론적인 위상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위의 장재의 글을 인간의 존재론적인 위상에 대한 표명이라 받아들인다면, 그의 생각 속에서, 인간은 우주창조 작업의 수혜자가 아니라 당당한 동역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인간 이해 속에서는 절대적 유일신에 의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개념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아울러 그로 인해 파생되는 원죄, 타락, 소외 등과 같은 것 역시 무망한 것들일 뿐이다. 장재는 계속해서 말한다.

"理에 따르면 그 어떠한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사함과 차이점, 수축과 확장, 시작과 끝이 없다면, 만약 그것이 그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참으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함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개의 주체적 독립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사물은 반드시 시작과 끝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유사함과 차이(변화) 그리고 있음과 없음(되어감) 사이에 어떠한 상호간의 영향이 없다면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 할 수 있다.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면 만약 그것이 하나의 사물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역경}에서는 이르기를, '수축과 확장은 서로 연달아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발생이 이루어진다,'"

"誠이라고 하는 것은 참된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성실치 않은 것은 참된 것의 결핍이다. 따라서 어찌 성실치 않음에 처음과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때문에 중용에 이르기를, '성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발언을 토대로 성급한 이들은 "이러한 구도는 자연의 영역을 도덕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 아니냐?"란 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논자는 이런 질문에 하이덱거의 유명한 말을 인용함으로써 벗어나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한 시도는 제한적인 언어를 가지고 존재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궁여지책에 나온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유학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들이란 천지(天地)의 창조적인 변화에 내재하고있는 것과 동일한 본질의 소유자이고, 그리고 그러한 본질의 포괄적인 풍부함 속에서 궁극적 실재를 인지하고 경험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을 소유한 존재들인 것이다.

4) 근본적인 물음으로서의 인간성

다시 문제는 처음으로 돌아온다. 즉 하늘과 땅, 즉 우주 만물과 동일한 구조 속에 있다면 과연 인간과 사물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연 인간만의 고유함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된다.

신유학자들은 사물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동일함을 지속적으로 설명한다. 다만 인간은 자신 안에 부여된 하늘이 준 본성을 다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이제 바야흐로 수양론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비록 인간이 일상적 실존상황에서는 유한적이며 제약을 받는 존재라 할지라도 궁극적 실재를 구체화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되는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각자의 수양을 통하여 배양될 수 있는 것이다. 장재는 계속 말한다.

"자신의 마음을 넓게 함으로써, 그는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어떤 사물이 아직도 여전히 들어가지 못하는 한, 여전히 정신외부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정신은 본 것과 들은 것의 협소함에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성인은 완전히 그의 본성을 발전시키어 본 것 혹은 들은 것이 그의 정신을 속박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만약 누군가가 그의 정신을 궁극까지 확장한다면, 그는 본성과 하늘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한 이유이다. 하늘은 그처럼 커서 그것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외부에 무엇인가를 남겨놓은 정신은 하늘의 마음과 더불어 그 자신이 하나로 연합할 수가 없다.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오는 지식은 사물과 접촉함으로서 획득한 지식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 아니다. 도덕적 본성을 통해 획득한 지식은 보고 혹은 들은 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이 진술 속에 '인간과 하늘의 절대적 하나됨 속에서 인간성의 구체화'라는 신유학적인 중요 관점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신유학자들의 중심질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어떻게 나는 나의 진정한 자아를 참으로 깨달을 수 있는가?" 혹은 위에서 자세히 살펴진 맥락 속에서 구성해 보자면, "어떻게 나는 지성적인 직관에 대한 나의 능력을 내 참된 자아를 표현하고 우주의 근본적인 하나됨에 동참하는 방법으로서 수양할 수 있는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간존재를 위한 지성적 직관의 존재론적인 가능성'이라는 모종삼 교수의 명쾌한 설명으로도 간단하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5. 마무리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 부으려고 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우리 모임의 원래 목적에는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우선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앞에 들어간 잔소리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심지를 맴돈다. 사실 그런 이유에는 원채 짧은 글 속에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을 오르내리며 자신의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뚜 웨이밍 자신의 욕심도 무시 못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논문은 많은 곳에서 더욱 상세한 설명이 필요함에도 많은 부분을 단상처럼 지나가고 있다.

서구 독자들을 위해서 칸트, 헤겔, 훗설 등의 사상을 언급하며 비교적인 관점을 던져주려는 노력은 높이 사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은 신유학을 바라보는 논자의 눈이 너무 일방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찌 보면 뚜 교수 역시 중국의 오래된 경학적 전통 위에 서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수많은 경전을 철두철미 하게 읽어가며 원래의 의미에 대한 적확한 해석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들. 바로 경학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학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도 무시할 수 없지만, 하나의 사고를 너무 추상화 시켜서 볼 수도 있는 단점이 있다. 즉 아무리 신유학의 존재론이 무시간성을 말한다 할 지라고 그들의 사고는 역사라고 하는 현장에서 태동한 시간의 아들이요 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지 논리적 연관관계만이 아닌 당시 송대의 사회, 역사, 정치, 그리고 종교적인 진행과정에 대한 친절한 소개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족의 주문을 달아본다.

그리고 앞서의 논의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유교 내에 흐르는 세계를 바라보는 진지한 실존인의 자세를 염두에 둔다면, 신유학적 윤리적 서술은 단지 존재론적인 발언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고백의 차원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반문 역시 제시해 본다. 즉 상대적으로 취약해진 체험적 요소에 대한 재강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서구 학자들과의 이론과의 비교 속에서 신유학의 존재론을 검토해보는 것도 좋지만, 성급한 비교의 정신이 혹 서로 어긋난 패러다임을 적용하는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에서 파생하는 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