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천국

(존 A 샌포드 지음, 이기승 옮김, 두란노, 1999)


천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인류는 지금도 천국을 꿈꾸고나 있을까? 인류는 아직도 과학 문명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거라고 믿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다른 세상, 영원한 천국을 기다리고 있을까? 천국은 신기루와 같이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인류의 영원한 꿈일까, 아니면 손만 벌리기만 하면 누구나 붙잡을 수 있는 가까운 실재일까? 새 천년을 맞이하느라 부산한 가운데서 인류는 희망과 재앙의 두 가능성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천년 동안 천국을 말하여 온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어떤 천국을 소망하고 있을까? 기다리다 지쳐 이젠 이 세상에서 안식을 찾고 있을까? 아니면 벌써 이 세상에서 천국의 맛을 조금이라도 즐기고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껏 여러 가지 모양으로 천국을 꿈꾸어 왔다. 공간적으로 천국은 마음이나 교회 혹은 사회나 국가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고, 종종 우주 전체에 걸쳐 있거나 우주 바깥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시간적으로 천국은 이미 왔거나, 아직도 오고 있거나, 나중에야 올 거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지금까지도 천국에 관해 이처럼 다채롭고 다양한 생각이 함께 존재해온 주된 근거는 무엇보다 성서에 있다. 즉 성서는 천국에 관해 다양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류의 소망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달라졌다는 데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여하튼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운명은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에 나는 스나이더가 지은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읽고 서평한 적이 있었다. 그런 후 얼마 되지 않아 천국에 관한 또 하나의 책이 출판되었음을 알았다. "내 안에 있는 천국"(The Kingdom Within)이라는 이름으로 서점에 고개를 내민 이 책은 본인의 사촌 아우인 이기승 목사(원주교회)가 번역하여 선물한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너무 사회적, 역사적 천국관에만 집착하지 않았나 반성해 보는 의미에서, 또 번역자의 노고를 잘 아는 나로서 그 고마움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번 읽고 서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용도 그다지 어렵지 않고 번역도 매끄러운 탓에, 마음만 먹으면 하루 동안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248쪽)이다.

지은이 존 샌포드(John A. Sanford)는 칼 구스타프 융(C. G. Jung)을 연구한 정신분석 전문가이면서 성공회 목사이다. 융의 심리학과 신학을 접목하여 영적 세계를 분석하는 책들 많이 지은 저자는 이 책에서도 융의 이론에 근거한 꿈 해석을 자주 시도한다. 번역자가 이 책의 부제(The Inner Meaning of Jesus' Sayings: 예수의 말씀의 내적인 의미)를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라고 옮긴 것도 아마 심리학과의 관련성을 상기시키려 한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지은이는 "예수의 말씀이 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21쪽)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교훈은 그 어떤 사고체계에도 의존하지 않았으며, 예수는 전문 용어나 개념들이 아니라 생생한 심상, 상징과 비유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같은 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는 종종 융의 심리학 이론과 꿈 해석이론을 빌려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한다. 그러므로 번역자가 옮긴 한국말 부제는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단, 저자와 번역자는 인간 내면의 현상을 심리학적 현상으로만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인간의 은밀하고 신비한 마음을 누가 다 안다고 장담하겠는가?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만이 사람의 깊은 내면을 두루 통찰하실 수 있으리라!

서문에서 지은이는 "예수의 말씀이 담고 있는 내적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외면의 것(사회적, 제도적 삶과의 관련성)에 치중하여 강조하고 있는 현실에 균형을 부여하려고 시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해석이 예수가 하신 말씀의 바로 그 의미인지는 증명할 수 없다"거나, "내가 해석하는 의미가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겸손하게 말한다. 누가 예수를 절대적으로, 다 알았다고 말하겠는가? 그렇지만 지은이는 "외향적 태도에만 집중하고 내적인 인성의 필요를 무시함으로써 채워야 할 공백이 줄곧 만들어져 왔음"(18쪽)을 애석히 여기면서, 기독교가 지닌 개인적이며 창조적인 면을 재발견하려고 애쓴다. 특히 프로이트(S. Freud)와 칼 융에 의한 "무의식"의 재발견은 큰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지은이는 "인간의 자아(Ego) 중심에 온전한 자아(Whole Self)가 있으며, 이 자아는 이 내면적인 삶과 창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고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2쪽). 그런데 "온전한 자아"란 무엇인가? 그는 일평생을 "온전한 인간" 혹은 "총체적인 인간"을 설명하는 데 바친 칼 융의 이론을 빌려, 예수를 온전한 인성(1장)의 모범으로 입증한다. 융이 사용한 기본적 카테고리는 "외향성"과 "내향성"이다. 지은이는 예수에게 이 두 가지 면이 똑같이 발달하였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융이 온전함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두 번째 카테고리는 정신의 네 가지 기능, 즉 사고와 감정, 감각과 직관이다. 궁극적으로 온전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기능이 잘 발달되어야 하는데, 예수는 온전한 인성을 이룬 분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지은이는 예수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조화 있게 발달된 온전한 인격을 본다. 복음서는 온전한 인격의 패러다임, 모든 인간의 원형, 발달, 진정한 개인, 고유한 존재인 나사렛 예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25-40쪽).

2장(천국의 보화)에서 지은이는 인간의 내면에는 보화, 즉 천국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천국은 우리 외부에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 겨자씨와 누룩처럼 성장하여 완성되어야 실재라는 말이다. 천국은 개인의 삶에서 전체적인 인성과 인생의 외적인 틀을 변화시켜 나가는 실재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묵시주의자의 생각처럼 외부로부터 오는 큰 사건이 아니라 내부에서 비롯되어 현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적인 실재이기도 하다. 천국은 개인에게서 온전성과 창조성을 향한 내면적인 성장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우리는 성장과 발달의 모델을 흔히 성인(成人)에게서 찾지만, 지은이는 역설적으로 어린아이에게서 그것을 본다. 왜냐하면 가식으로부터 벗어난 어린아이는 자유스럽고 창조적인 상태에 남아 있고, 외모와 실재 사이의 분열이 없고, 늘 내면세계와 창조적인 접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41-62쪽).

3장(쳔국에 들어감)에서 지은이는 "오로지 소수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발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대중심리를 통해 집단적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해 들어가는 좁고 험하고 구불구불한 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집단적인 억압과 비창조성을 벗어나 의식적(意識的)이고 창조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지만, "고통 속에 있는 영혼이야말로 하나님과 가깝다"(Gregory of Nazianzus). 천국에 가장 들어가기 쉬운 자는 상처를 입은 것을 깨달은 자다. 왜냐하면 천국은 순종이 아니라 창조성을 요구하고, 외형적 준수가 아니라 의식적(意識的)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인 천국은 새 부대를 요구한다.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큰물을 건너는 것과 같은 위기의 경험을 겪어야 한다. 천국의 기초는 영적 의식과 통찰이다. 천국에 이르는 삶은 창조성의 윤리를 요구한다(66-82쪽).

앞장의 내용도 그러하지만, 특히 4장(제자도의 대가)은 본회퍼(D. Bonhoeffer)의 유명한 책 "나를 따르라"(Nachfolge)를 연상시킨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개별적인 길로의 부름을 따르는 일을 의미하며, 이것은 불가피하게 집단 심리로부터 단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과 하나님 나라의 소명 사이에 그 어떤 것도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개별성의 종교이다. 하지만 이런 고립은 사람들과의 관계의 끝이 아니라 진실한 관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천국은 더 높은 상태로의 재연합이다(85-100쪽).

우리 각 사람 안에 있는 바리새인(5장)은 외면적인 가면을 벗을 것을 요구한다. 가면은 유용하지만,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거짓스러운 가면을 벗어야 한다. 오직 순수한 인성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도 지은이는 어린아이를 높이 평가한다. 도마가 썼다는 묵시록에서 "언제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겠으며,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게 될 것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한다: "부끄럼 없이 너희 옷을 벗을 때이다. 그리고 너희의 옷을 벗어 어린아이들처럼 너희의 발 아래 놓고 그것을 밟을 때이다." 어린아이는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스러우며, 위선적인 의도도 없이 자신들의 느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천국에 속하는 자에게는 내적인 모순이 없다. 천국은 내면의 인격과 외면의 인격이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101-117쪽).

외양과 모순되는 우리 내부의 인격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내면의 적(6장)이다. 원수는 바깥에 있지 않고 우리 내부에 있다. 내면의 원수는 우리의 의식적인 인성의 발달에서 배제된 것, 우리가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두 형제는 한 인성의 두 절반이다. 형은 책임성과 양심의 측면이고, 동생은 유머와 기쁨, 긍휼과 천진난만의 측면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미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여 비판한다. 그리함으로써 실제로 자기 자신을 비판한다. 천국에 속한 자는 비천하고 열등한 것, 악마적으로 보이는 부분까지 인성의 부분으로 포함시킨다. 의(義)가 아니라 사랑이, 규율 준수가 아니라 의식적인 자기 수용이 천국에 이르는 열쇠이다(119-141쪽).

7장(악과 죄의 역할)에서 지은이는 신학의 한계질문인 "악의 정체"까지 대담하게 다룬다. 인간의 내부에 악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배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모순과 위선을 낳는다고 그가 생각하였기 때문일까? 여하튼 지은이는 "예수가 왜 하나님이 창조 안에 악의 존재를 허용하시는지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악의 존재를 아시고 그것과 신비한 관련을 맺으셨다"고 말한다. 악의 존재는 불가사의하지만, 분명히 악은 존재한다.

융에 의하면 우리 인성의 중심에 있는 자기가 선이면서도 동시에 악이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우리 마음에 두었으며, 자아는 자기의 양면을 의식하고 이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분열을 치료하는 일을 해야 한다. 지은이는 악을 신학적,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쓴다. 신학적으로 악은 분리,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다. 심리학적으로 악은 인간 내면에서의 분리다.

영혼의 신앙(8장)에서 지은이는 물질주의에 빠져 영혼을 폐기한 현대인과 교회를 책망하고, 영혼의 존재를 규명하려고 애쓴다. 영혼은 주관적이다. 영혼의 활동 영역은 환상, 이미지, 상상력, 가치와 의미에 대한 종교적 관심이다. 하나님은 영혼의 신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영혼은 본질상 음(陰)이고, 여성적이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을 떠올리게 한다. 심리학적으로 영혼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의식을 깊은 내면과 연결시켜주는 존재이다. 영혼의 근본적인 기능은 관계이며, 자아와 내면 사이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관계이다. 사람이 영혼을 갖기 위해서 가면을 벗고 에로스 원리를 수용해야 한다. 에로스는 탁월한 여성적 원리다. 그래서 여성이 훨씬 종교적이다. 에로스는 결속시키고 연합시키고 종합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희망은 신앙에서 나오고, 신앙은 에로스에서 나오므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고전 13장). 영혼과의 연결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전체를 의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종합과 연합을 지향할 수 있게 된다(171-196쪽).

9장(잃어버린 동전)에서 지은이는 의식과 영혼의 통합을 더욱 더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인자(人子) 예수는 인간의 완성의 원형으로서 인간의 인성 안에서 잃어버렸던 부분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는 열등한 요소를 포함할 필요성을 역설하셨고, "잃어버린 양과 동전, 마지막 심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우리가 자신 가운데서 잃어버린 열등한 부분을 표현함으로써 완전해진다는 것을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등불을 켜는 일, 즉 의식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전체성에서 잘려져 나간 우리의 의식적인 삶은 구원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멸시받은 내면의 거지는 마지막에 구세주로 나타난다. 우리의 인성의 잃어버린 부분이 회복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자아의 오만을 제거하고, 영혼과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열등한 부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197-223쪽).

10장(천국의 도래)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더욱 상세히 설명한다. 여기서도 지은이는 예수처럼 어린아이를 천국의 원형으로 설정한다.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거짓된 외양 없이, 내면과 외면의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상상력과 자발성과 창조성이 샘솟는 천국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내면의 어린아이를 부정함으로써 그로부터 해방되려고 한다면, 유아적이고 퇴행적이고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유아적인 자기의 합법성을 인식하고 수용하여 작은 어린아이가 된다면, 유아적인 자기는 우리의 인성에서 자유와 창조와 내면의 새로운 삶의 계속적인 생성으로 표현된다. 천국은 창조적인 일치이며, 창조적인 내면의 연결이다. 천국의 삶은 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일치는 천국의 목표이다. 예수도 분열되지 않는 인격의 신비이다. 창조성은 연합에서 오며, 천국의 수원(水源)은 사랑이다(215-244쪽).

결론(현 시대를 위한 종교인 기독교)에서 지은이는 예수가 최초의 개별적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신성함과 접촉하셨고, 발달된 자아와 전인의 원형이셨음을 다시금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닮아감으로써 완전에 다가간다. 하지만 지은이는 천국을 협소한 개인의 차원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은 인간 의식과 자아의 사고 한계를 훨씬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책의 말미에서 인간의 삶의 전체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자기의 구원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관계 안에서 완전하지, 외딴 섬에서 홀로 살아서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248쪽). 개별성, 개체성과 함께 시종일관 전체성, 온전성을 강조해 온 이 책의 의도가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가치를 찬연히 발하는 것 같다. 이 대목에 이르면, 마지막 중생의 해탈을 보기까지 자신의 해탈을 끝까지 보류하는 불교의 지장보살을 보는 듯하다. 실제로 지은이는 정사각형이나 동심원 모양의 만다라(Mandara)를 온전성과 전체성의 상징으로 제시하기도 한다(225쪽). 그리고 "개인들을 통해서 일어나지만 항상 개인을 초월해 일어나는 의식의 진화(進化)에 미래의 기독교가 있다"는 대목에서는 진화의 종점(오메가 포인트)인 그리스도를 향해 진화하는 우주의 파노라마를 그렸던 떼이야르 샤르뎅(T. Sardine) 신부를 대하는 듯하다.

이 책에 대해 짤막하게 평가해 보고자 한다.

1) 지난 시절의 신앙 선배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이 심령천국-교회천국-지상천국-영원한 천국 등으로 천국을 나누어 왔음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천국이라는 말 대신에 내세적인 의미를 진하게 풍기는 "천당"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면서 심령천국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한국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사후의 세계나 세계 종말 이후로 미루어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현세에서는 무엇을 꿈꾸고 산다는 말인가? 마음의 위로와 평안, 현세의 축복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천국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설령 한국의 목회자들이 마음의 평안과 확신을 강조해 왔더라도, 이것을 천국의 삶과 연결한 경우는 드물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주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것과 관련지어 말하여 왔다. 마치 지상천국은 이단(몰몬교, 여호와의 증인)의 전유물인 양 혐오하던 풍토에서 "땅에 이루어질 천국(주기도문!)"을 역설한 그들의 공로는 결코 작지 않다. 그리하여 이 면에서도 많은 진보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의 내면은 점점 더 고아가 되어 왔다. 보수적 교회와 진보적 교회가 다함께 "마음의 천국"을 박대하는 동안 외로운 영혼들은 어디를 떠돌아 다녔을까? 이런 의미에서 "마음 안에 있는 천국"을 되찾아준 지은이의 공로는 크다. 내면의 샘이 고갈한 줄도 모르고,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세속의 바다에서 헛되이 허우적거렸던가?

2) 비록 지은이가 영혼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온전한 자아", "자아의 전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인간의 신체적인 요소를 점차 무시, 간과해 온 것을 지은이가 애석히 여기는 것도 타당하다. 오늘날 교회는 인간 신체의 은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세상은 몸을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세상은 온통 "몸"에 빠져 있다. 하지만 교회와 신학대학에서 인간의 신체에 관해 진솔하게 말하는 것은 아직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온전한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교회와 신학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빨리 복권시켜야 한다. 아니, 교회가 이 세상을 온전히 구원하려고 한다면, 어서 빨리 영지주의적, 이단적인 이원론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3) 지은이가 이 책에서 자주 거론하는 "영혼"의 개념은 조금 불분명하다. 지은이는 영혼을 때로는 "실재"로, 때로는 "관계"로 보곤 한다. 마치 빛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상반된 특징을 지니듯이, 지은이도 종종 영혼을 "실재"와 "관계"라는 두 특징을 지닌 듯 말하고 있다. "정의하면 할수록 더욱 더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것"(Lynn Cowan)은 비단 영혼만은 아닐 것이다. 삼라만상이 다 그렇지 않는가? 하지만 지은이는 영혼의 실재를 굳게 믿는 것으로 보인다. 영혼은 감정, 환상, 이미지, 상상력을 통해 드러나지만, 특히 꿈을 통해 드러난다고 한다. 영혼은 심리적 실재로서 무의식 세계에 가장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것이 끊임없이 의식 세계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말에서 인간의 전체성에 대한 지은이의 든든한 신뢰성을 보게 된다.

4) 지은이가 온전한 인간의 모델로서 자주 어린아이를 거론하는 것은 최근의 나의 "어린이 신학"을 연상시킨다. 이 책이 그 전에 나왔더라면, 나의 책이 심리학적으로 든든히 보강될 수 있었을 텐데. 영혼을 깊이 다룬 종교 창시자들이나 지혜의 스승들이 온전한 인간, 구원에 이른 인간의 모습을 한결같이 어린아이의 이미지에서 찾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악"의 문제에 대한 지은이의 태도는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과 조금 다르다. 물론 그도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셨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예수님도 이를 설명하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은이는 분명히 이원론적인 해결도 피하지만,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본 어거스틴(Augustinus)에 반대하는 융(Jung)의 편에 선다. 그리고 그도 역시 인간이 악의 창시자가 아니라 그 불행한 선택자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지은이가 "하나님은 선과 악을 우리의 마음에 두시며 ... 의식적인 행위를 통하여 분열을 치료하는 일은 자아가 해야 할 과업이다"(147쪽)는 융의 말을 인용하거나, 역설적으로 "악은 있어야 하지만, 악의 도구가 되는 사람은 불행하다"(151쪽)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지은이는 악의 실재를 하나님의 불가피한 의도에 두는 것 같다. 비록 그 목적이 불가사의하지만,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셨다는 것이다(150쪽). 결국 하나님이 악의 창시자가 되는 셈이다. 분명히 이것은 이원론적 해결이나 "알 수 없다"는 무책임한 해결보다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주신 어려운 숙제를 풀지 못하여 고통을 당하는 학생의 괴로움은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도 자신이 만드신 악에 대해 책임지시려고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셨단 말인가?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은 그 자신이 만드신(허용하신) 악의 희생자이기도 한 셈이다. 그 목적이 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영원한 불가사의로 남는다. 그래도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가 사랑과 창조성이었다"(148쪽)는 말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사랑하는 자에게 멋진 진주를 만들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마음에 상처를 내셔야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