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이신건 옮김, 신앙과지성사, 2013)

   

 이신건

 

왜, 벌써부터 교회 개혁을 말하는가?

기독교가 언제부터 한국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잘 모르지만, 본격적인 선교는 약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톨릭 교회의 역사는 약 200여년을 헤아리고, 개신교의 역사는 약 100여년을 헤아린다. "천년이 뒤바뀐 이 마당에 고작 100-200년을 가지고 왠 자랑이냐?"고 말하실 분이 있으리라. 이만한 역사라도 자랑거리가 된다고 싶어서 새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개신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100여년 정도의 역사를 겨우 넘긴 이 마당에 여기저기서 개혁(改革)이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현상이 하도 서글퍼서 하는 말이다.

유럽교회는 1,500여년만에 자타가 공인하는 "개혁"을 일구어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개혁의 몸부림이 있었고, 교회의 역사가 갈등과 대립, 순교와 분파로 얼룩져 왔다. 하지만 진정한 "교회 개혁"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문에 반박문을 써 붙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행히도 이 사건은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후로 교회가 가장 크게 분열한 사건이 되었지만, 개신교 측으로서는 교회의 역사에서 최초(최종일까?), 최대의 개혁사건으로 해마다 기념되는 사건이다.

유럽교회에 비해 한국교회의 역사는 턱없이 짧건만, 벌써부터 개혁이라는 말이 무수히 나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좋게 말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남달리 반성하기를 잘하기 때문일까? 나쁘게 말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이기 때문일까? 한국인들은 늘 개혁을 표방해야만 인기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일까? 한국교회가 너무 일찍 썩어버렸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까닭들이 있겠지만, 솔직히 우리끼리 터놓고 말한다면, 유감스럽지만 마지막 것이 가장 그럴 듯한 답변이 될 것 같다.

평신도들이야 무슨 큰 잘못이 있겠는가? 목사들이 가르쳐 준대로 살아보려고, 그들만을 쳐다보고 살아온 죄(?) 밖에 더 있겠는가? 나 같은 사이비, 삯군, 아니 돌팔이 목사가 한국교회를 이토록 망쳐놓지 않았는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 한번 간단한 사례만을 집어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은 교회사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폭발적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분열하고 원수처럼 물어뜯고 싸운 교회도 바로 한국교회다. 사이비-이단성 교회, 사기꾼-정치꾼 목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자칭 하나님이 세명, 자칭 그리스도가 열댓명 나왔다. 자칭 교황, 자칭 교주는 또 얼마나 될까?

목사의 신뢰도는 어떠한가? 은행에서 신용카드 발급을 가장 꺼리거나 신용이 불량한 자는 바로 목사라고 한다. 국회위원, 아니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어놓고 거짓말하는 평신도들의 기막힌 연출극을 텔레비전에서 지켜보아야 했지만, 그게 어디 그들만의 잘못인가? 목사들이 미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다하게 거짓 맹세를 해온 일은 이미 익숙한 관례에 속한다. 그 탓에 젊은 목사들은 비자를 받으려고 가급적 목사의 신분을 가리려고 한다. 비록 일부 정치꾼 목사에 국한되는 일이겠지만, 감투와 명예 때문에 목사들이 거짓말하거나 서로 거래, 담합하는 수준은 세상 정치가들의 뺨을 칠 정도다. 차라리 거룩과 신앙으로 위장하지 않았더라면, 죄의 무게를 덜 수 있지나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예수를 따라다녔는가?

이런 현실 앞에서 자연히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생겨난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도대체 누구를 따라다녔는가? 물론 "예수"라고 즉각 대답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목사를 따라다닌 것이 아닐까? 목사를 따르는 것이 불가피했다면, 목사는 과연 예수를 제대로 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사 예수를 따랐다고 표방하였다고 하더라도, 대개의 목사가 따른 예수는 성경이 말하는 그분이 아니라 어쩌면 목사가 자신의 편의대로 주무르고 길들여놓은 그런 예수가 아닐까? 한국 땅에 온 예수, 아니 한국 목사가 모셔온 한국적 예수는 누구일까? 이 짧은 지면과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 이를 말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겠지만, 상식적으로 나열하면, 아마도 해방자 예수, 무당 예수, 복 방망이 예수, 솜사탕 예수, 액세서리 예수 등이리라.

"해방자 예수" 하면, 70-80년대 노동-민중 운동과 더불어 이 땅에 소개되기 시작한 민중-해방신학의 예수를 언뜻 떠올리겠지만, 이는 가장 오래된 한국인의 예수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된다. 잘 아시다시피, 카톨릭 교회의 전래는 고난과 순교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초기 한국 카톨릭 신자들 중에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은 물론이거니와 중요한 교리조차 모르고도 용감히 순교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왜 그런가? 고난당하는 민중들의 피눈물나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몇 백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계급 사회를 교회가 과감히 허물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당시 민중들은 열광하지 않았겠는가? 개벽 세상을 애타게 기다리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해방자 예수는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분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 해방자 예수는 70-80년대의 민중항쟁의 역사 속에서 가장 생생히 되살아났다. 지금은 맥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무당 예수"는 아마도 한국 그리스도인의 집단 무의식에 가장 끈질기게 붙어있는 예수가 아닌가 생각된다. 무병장수와 물질풍요 등을 비는 기복신앙은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겠지만, 만주 땅을 거쳐 한국에 내려온 샤만 전통은 집요하게 생명력을 이어왔다. 한국의 고등 종교들도 한결같이 샤머니즘을 흡수하고서야 비로소 번성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를 가장 성장시킨 원인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를 가장 타락시킨 것도 바로 샤머니즘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윤리의식과 공동체 의식의 부재는 가장 큰 해악 중의 하나다. 70-80년대에는 해방자 예수와 함께 복 방망이 예수도 인기를 누린 예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성장 구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는 부흥사가 주도한 물질축복의 구호 "우리도 한번 복 받아보세"와 한 통속을 이루었다. 교회에서 소외된 해방자 예수가 공장과 거리에서 노동해방과 노사투쟁을 부추겼다면, 무당 예수와 복 방망이 예수는 복빌기 좋아하는 우리의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민중들을 교회와 기도원 안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가 되고 나니, 해방자 예수와 무당 예수, 복 방망이 예수의 인기도 상당히 시들해진 것 같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예수는 목에 매달려 있는 액세서리로 박제화하였다. 설사 그들이 박제화한 예수의 가르침을 조금은 알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를 따를 - 그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 - 의지는 거의 없다.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 지배하고 억압하는 권력자들, 생명과 행복, 안녕의 근거를 허망한 재물에 두고 끌어 모으기만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부자들을 향해 때로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때로는 통쾌한 독설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던 살아 있는 예수는 거리의 낭만인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포근한 예수로 변하였다.

딱딱하고 거북한 것을 다 없애고 달콤하게 정제된 예수는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도 자주 설교된다. 솜사탕은 먹기도 편하고 보송보송하여 귀엽다. 영양 가치도 별로 없지만, 소화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예수는 없으면 서운하지만 있어도 큰 부담이 없는, 아니 인스턴트로 적격인 달콤한 일회용 예수다. 오래 되새김할 필요도 없고, 더욱이 피와 살이 될 이유도 없다. 솜사탕을 사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고, 멀리까지 가서 힘들게 사 올 마음도 없다. 눈에 띄면 쉽게 구하여 먹고, 곧장 잊을 수 있는 값싼 예수, 달콤한 예수, 편안한 예수가 오늘 우리의 예수가 아닐까? 그래도 옛날의 예수는 우리에게 꽤 큰 희생과 대가를 요구하였건만, 지금의 예수는 지천에 늘려 있어 너무 값싸다. 그는 매우 넓고 쉬운 길로 인도한다. 대중화한 예수인가? 만인을 위한, 만인의 예수인가?

값싼 은혜는 교회의 철전지원수다!

하지만 성경 속에 살아 있는 예수는 결코 넓은 길로 인도하지 않으며, 결코 싸구려 은혜를 무더기로 내던지지 않는다. 히틀러(Hitler)가 독일의 정권(제3제국)과 교회를 장악했건만, 대다수의 독일교회가 비겁함 속에서 침묵하거나 히틀러를 독일의 구세주로 추앙하고 있을 때, 젊은 목사요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외로이, 이렇게 외쳤다. "은혜를 값싸게 보는 우리의 견해는 교회의 대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은혜는 홀로 무엇이나 원만히 처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옛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좋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은혜가 값없는 은혜다."

"나를 따르라"(Nachfolge, 허혁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9년 29쇄)라는 그의 책을 다시 읽노라면, 젊은 목숨을 걸고 어두운 시대의 교회를 매섭게 질책하던 그 당시의 본회퍼가 되살아나서, 시대와 환경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국교회를 흔들어 깨우는 것 같다. 그가, 아니 그를 통해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외치는 말은 너무나 절박하고 진실하다. 예수의 산상설교에 관한 그의 탁월한 해석은 단지 우리의 지성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되고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심장을 예리한 단도처럼 찌른다. 이 칼 앞에서 비겁하게 피해가든지, 뜨거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다른 제3의 대안은 없다. 도망가는 자는 다행히 구차한 목숨만은 건질 수 있겠지만, 그의 영혼은 음부의 권세에 담보로 잡혀야 할 것이다. 칼에 맞아 죽는 자는 당장은 아프고 괴롭겠지만, 죽어서 다시 살 것이다. 예수의 진정한 제자로, 참 그리스도인으로! 여러분은 어찌 하시겠는가? 이 칼을 한번 쳐다보시기라도 하겠는가?

지금껏 한국교회는 설교와 찬양 등을 통하여 주로 감정에 호소해 왔다. 그리고 새삼 감정 지수(EQ)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지성을 추구하는 학자인 필자도 감정이 꽤 풍부한 편이어서, 감동적인 영화나 설교 중에 가끔 굵은 눈물을 줄줄 흘린다. 하지만 감정이 나를 대상에 오래 묶어두기는 하지만, 나의 인생을 크게 흔들어 놓은 적은 없다. 미국에서 설교학과 예배학을 전공하고 최근에 돌아온 나의 친구 교수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설교를 폭죽(爆竹)에 비교한 적이 있다. 이번 새천년 맞이 행사장에서도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폭죽이 터졌겠는가? 하지만 폭죽 때문에 새 세상이 오진 않는다. 한국교회의 강단도 폭죽처럼 신선한 감동을 주다가는 별 결과도 없이 잊혀진다. 신자들의 인상(印象)과 심상(心象)에 그 무언가를 남기긴 하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신자의 생활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화 운동"이니 하면서, 교회마다 성경공부에 열을 올렸다. 성경공부는 무조건 믿는 소박한 신자를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든 게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지식이 풍부한 교인들도 많이 양산되었다. 하지만 문자숭배를 버리지 못한 보수적-근본주의적 성서관 때문에 성서와 역사를 보는 신자들의 태도와 그들의 삶의 방식이 크게 변화된 사례를 보기란 쉽지 않다. 똑똑한 지성 지수(IQ)가 훌륭한 삶의 필요 조건이기는 하겠지만, 필요충분의 조건은 되지 못한다. 의지의 굴복, 의지의 순종이 없는 감정과 지성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병든 믿음, 죽은 믿음이다. 감정에 겨워 "주여, 주여" 해도,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을 수 있다. 오직 실천만이 믿음을 입증하고, 오직 열매만이 나무의 가치를 결정한다.

의지를 굴복시키고, 예수를 따르자!

마치 예수가 저주한 열매없는 무화과인 양, 감정과 지식으로만 비대한 한국의 그리스도인, 아니 나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에 의지를 굴복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읽은 본회퍼의 책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친구 교수에게 나의 고민을 나누었더니, 그도 비슷한 고민을 하던 중에 의지 지수(DQ=Diaconite Quotient)를 고안하느라 궁리하고 있다고 했다. Diaconite는 집사의 직책을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은 헬라어로 섬김, 봉사, 하인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섬김의 지수,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행함의 지수일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나약해빠진 의지를 재어볼 수 있는 잣대가 마련된다면, 그 잣대로 우리의 종아리를 피나게 때려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잣대가 손에 쥐어지기를 마냥 기다릴 순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좁은 길, 값비싼 은혜의 길, 십자가의 길, 순종의 길을 권면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의 책을 읽고, 그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러한 길을 간 사람을 따르려고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따르려는 각오가 날로 더해질 것이다. 바로 여기에 본회퍼의 책의 가치가 있다. 실로 본회퍼도, 예수도 우리의 결심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결심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본회퍼가 강조하였듯이, 예수가 주는 멍에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장 쉬운 멍에다. 십자가는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극복되며, 십자가를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 되돌아온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 순종의 길, 좁은 제자의 길은 가장 큰 약속으로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약속! 너도나도 말하는 식상한 "개혁"이라는 말도 이제 그만 하고, 나부터 먼저 묵묵히 이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