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읽고


배경식 박사(전 한일장신대 교수)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이 낳은 행동주의적인 신학자이다. 반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의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비밀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1945년 4월 9일 히틀러의 제 3국이 무너지기 직전 베르린에 있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게슈타포 장관의 직접명령으로 39세를 일기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청년 신학자이다. 그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8형제중 일곱째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칼 본회퍼는 권위 있는 정신병리학자로서 다년간 베르린 대학의 교수를 지냈으며 각계에서 신망이 높은 저명한 학자였다.  본회퍼의 부계는 많은 신학자, 예술가, 법률가를 배출한 명문이다.  그의 어머니 역시 신앙심이 깊은 훌륭한 목회자 가계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황제를 모시는 궁정목사였으며 조부는 19세기 최대의 교회사가로 이름난 아우구스트 폰 하제였다. 이처럼 본회퍼는 신앙과 학문과 예술의 명문 출신이었거니와 본회퍼 역시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타고났으며 문학과 예술적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다.  

열일곱살 때 그는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으며 그 다음해 베르린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교수들은 한결같이 이 젊은 신학도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신학자 하르낙은 그를 "천재적 신학 청년"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그가 스물한살 때 베르린 대학 신학부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는 대단히 우수한 논문이어서 신학자 칼 바르트도 "하나의 신학적 기적"이라고 예찬하였다.  

1933년 1월 30일에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그해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기독교는 우리 민족성의 유지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정부는 교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존중하여 교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당시 독일교회는 이를 환영하였다.  독일 복음주의교회의 총리 츄루나는 히틀러의 말을 "교회생활이 금후에도 불변할 것을 새로이 보증한 대헌장"이라고 까지 극찬을 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 구파의 기독교는 우리 민족성의 유지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라는 히틀러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그리하여 그해 4월 3-5일에 베르린에서 열린 「신앙운동 독일 기독교인 전국대회」에서 "히틀러의 국가는 교회를 부르고 있다. 교회는 이 부름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표어 아래 모였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 시대의 진상을 투시하고 있었다.

1933년 2월 1일 히틀러가 집권한 다음날 본회퍼는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강연을 통해서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잘못되 길로 오도하고 있으며 그의 정치원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적 지도자를 우상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것은 본회퍼가 히틀러의 반기독교적 성격을 이미 간파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히틀러에게서 악이 빛과 선 그리고 진실을 가장하고 또한 역사적 필연성과 사회정의를 가장하고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결국 그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기독교에도 악마적인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나치의 지도원리를 교회에 끌고들어와 교회까지도 그의 통합정책속에 집어 넣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전 육군 군목 루드비히 뮐러를 통해 제국감독이 지배하는 하나의 제국교회를 만들려고 꾀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히틀러의 말을 듣고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히틀러의 직속교회로 만들려고 꿈꾸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앙운동 독일 기독교인"을 결성하여 복음주의교회에 도전시켰다.  독일 기독교인은 루드비히 뮐러를 중심으로 교회의 통합운동을 벌였다.  이렇게해서 독일교회가 제국감독 뮐러의 손안에 들어가자 나치는 기독교를 뜯어고치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새 제국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새 교회'를 부르짖었고 "국가사회주의의 정신이 곧 교회의 정신이며 국가사회주의의 의지가 곧 교회의 의지로 대치되어야만 한다"라고 들고 나섰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히틀러의 이같은 종교적 간섭과 탄압에 무력하게 굴복하지 않고 항거하여 일어났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집권한때부터 고백교회에 속한 목사로서 히틀러와의 투쟁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그의 생애의 제 2기에 해당하는 교회투쟁의 시대가 시작된다.  본회퍼는 1940-43년에 거쳐 대전과 저항운동 속에서도 저술을 계속했는데 이 동안 저술을 편집한 것이 「기독교 윤리」이다.  그는 '복종'의 저술을 끝낼 무렵부터 필생의 사업으로 「기독교 윤리학」을 저술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1943년 4월에 체포된 때부터 1945년 4월 9일 처형되기까지 약 2년간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에 옥중에서 가족과 그의 친구 베트게에게 쓴 편지를 베트게가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 「'반항과 복종」이라는 부제목을 갖는 「옥중서간」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옥중생활의 처음 일년 반을 베르린에 있는 테겔 육군형무소에서 보냈다.  그것은 1943년 4월 5일부터 1944년 10월 8일까지였다.  본회퍼는 이곳에서 간수와 위생병들 중에서 좋은 친구들을 얻게되어 장문의 편지와 짧은 서신을 내왕할 수 있었다.  이 편지들 중에는 책의 제 1부를 골라냈다.  형무소의 검열관과 누구보다도 육군 고등군법회의 판사 레다박사가 이 편지들을 함께 검열했기 때문에 물론 다소의 가감이 있다.  그러나 가족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매우 강하게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옥중에서부터의 서신과 창작 앞에는 "10년 후"라는 기록을 두었다.  이것은 본회퍼가 1942년에서 1943년 전환기에 써서 그것을 몇몇 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낸 것이다.  그때 그는 벌써 특히 한스 폰 도나니에게서 국가 안전보장본부가 그의 체포를 서둘고 있으며 방증을 수집하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이 기록들은 지붕의 기와와 서까래 사이에 숨겨두어서 가택수색과 폭격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는 하나의 문제는 목사요, 신학자인 그가 이렇게 반나치 지하운동에 가담했고 나아가서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신학자 칼 바르트만 하더라도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한계상황에 있어서의 폭군 암살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본회퍼의 행동을 그 예로서 들었다.  그는 이렇게 본회퍼의 저항운동에 대한 도덕적 입장은 긍정하면서도 그 정치적 효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여 정세 판단으로 보아 성공의 가능성이 없었던 쿠테타는 실행에 옮기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당시의 독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이 말이 본 회퍼가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윤리」속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그의 이러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율법을 폐기하는 동시에 율법을 새롭게 참되게 효력 있는 것으로 하기 위한 자유가 존재한다.  율법의 효력정지는 오직 그것의 참된 성취를 위해서만 유익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전쟁의 경우에서는 살육이나 파괴나 약탈이 오직 생명과 진리와 재산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만 존재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의 위반이 도덕 멸시주의에서 오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율법의 참된 성화를 위한 책임성에서 오는 것이냐 하는데 있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본회퍼의 신학은 인간이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새로이 뜨게 하려는 것이며, 주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의미와 가치를 금일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새롭게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교리와 종교의식을 존중하고 정비하는 것은 주를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복종의 사상이요, 39년 동안 그의 생애 전체가 주에게 복종한 삶이었다. 그의 생애가 그의 신학의 가장 훌륭한 주석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한 신학자를 통하여 실천하는 신학이 무엇을 말하는가? 살아 숨쉬는 신학이 무엇인가? 신음하고, 고통 당하는 민족과 이웃을 외면하는 거룩한 척하는 신학은 하나님이 원하는 신학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독일에 본회퍼의 신학이 있었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누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에게도 그런 분들이 있었다. 일제의 강점과 신사참배 앞에서 올바른 신앙과 한국교회의 순결을 지키며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그러하셨고, 사랑으로 자식(동인, 동신)을 죽인 원수인 공산당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몸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신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계셨다.

본회퍼가 민족과 독일 교회를 등질 수 없어 미국으로 가던 중에 뒤 돌아섰다면, 손양원 목사님은 6.25때 피신을 하시지 않고 애양원에서 순교 하셨다: "양을 먹이는 목자가 그 양을 돌보지 않고 어디로 피신한단 말입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애양원의 일천 명 양떼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주의 품 이상의 피난처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비록 불의 불충하나 우리 주 예수의 의를 힘입어 주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바라던 제물이 되어 볼까 소원할 뿐입니다."   손 목사는 순교란 아무렇게나 살다가 단순히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죽는 것이 순교가 아니라고 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생을 눈물과 피를 흘리다가 죽은 자가 참된 순교자의 반열에 드는 순교자라고 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 앞에 바로 설 수 있을까? 이분들의 삶과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이들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가? 이분들의 신앙과 신학은 고난의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오늘 우리의 십자가는 너무 높은 성전의 종탑과 대형교회의 강대상 위에서 높고도 거룩하게만 서있어 고통 당하고, 소외된 우리의 민족과 이웃이 바라보고 다가서기엔 너무나 멀기만 한 것 같다.
 지금 우리의 서있는 자리와 모습은 어떠한가?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읽고 나는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를 한 번쯤 생각해 본다.

출처: http://user.chollian.net/~famp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