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한스 큉, 이종한 옮김, 2002년, 분도출판사. 1070쪽)

 이신건

 

 카톨릭 신학자로서 한국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학자는 아마도 한스 큉(Hans Kueng)일 것이다. 역시 카톨릭 신학자이면서 개신교의 칼 바르트(K. Barth)에 비교될 수 있는 칼 라너(K. Rahner)의 책들도 더러 소개되었지만, 너무나 복잡하고 현학적인 문체 때문에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그리 끌지 못한 것 같다. 그와 달리 한스 큉은 치열한 문제의식과 명쾌한 해석, 솔직하고 때로는 도발적인 문장 때문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와 그의 첫 만남은 그의 작은 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과는 달리 교회론에 관한 이론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신학도 시절에 처음으로 접한 그의 책 '교회란 무엇인가'(1978년)는 나를 매우 감동시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튀빙겐 대학에서 교회론(칼 바르트의 교회론의 발전과 형태)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들은 대부분 나의 필독서가 되었다.

하지만 큉이 남달리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비단 그의 탁월한 신학적 역량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카톨릭 교회의 체제를 용감하게 비판하였던, 행동하는 실천적인 신학자로서도 두드러져 보인다. 탁견과 용기까지 겸한 이런 신학자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큰 행복감을 느낀다. 현대신학의 또 하나의 희대한 스캔들로 남아있는 교수직 박탈이라는 불행한 사건은 오히려 큉에게 더 많이 성찰하고 더 많은 책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불행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하나의 큰 행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책들 중에서 특히 1994년에 독일에서 출판되고 2002년에 비로소 한국에 번역된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라는 책은 나에게 하나의 큰 행운이었다. 이 책에 흠뻑 매료되어 나는 며칠 동안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그 후로도 나는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이 책을 놓아두고 짬짬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이 책을 성경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게 된 책이라고 소개한다. 왜냐하면 1,000쪽을 넘는 부피가 성서를 연상케 할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면면히 진행되어온 2,000년의 신학의 역사를 그 배경과 함께 탁월하게 정리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교리사 혹은 신학사를 정리한 신학 대가들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개의 책들, 예컨대 하르낙(A von Harnack)의 교리사는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이 지나치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이후로 쓰여진 책들은 대개 잡다한 자료들을 수집한 자료집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와 달리 큉의 이 책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 저자의 저술 의도를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감히 '신학사의 바이블'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서가 늘 나의 신앙과 생활의 거울이 되듯이, 이 책은 늘 나의 사유와 실천의 거울이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부피와 신학적 위상보다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방대한 자료들과 해박한 정보들이다. 더욱이 깔끔한 번역과 자주 삽입된 도표들은 부피 때문에 받게 될 부담감을 훨씬 덜어준다. 그리고 방대한 부피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다 읽지 않고도 책의 주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이 갖는 큰 장점들 중의 하나다.

큉이 지금에 와서 다시금 그리스교에 관한 묵직한 책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가 직면한 크나큰 위기가 참으로 큰 대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아직도 신뢰할 수 있는가? 지금 그리스도교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본고장 유럽에서는 설득력과 신뢰성을 상실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저버리고 동양종교들, 온갖 종류의 정치단체와 체험 동아리들 또는 아무 귀찮은 책임수행 없는 사생활에 빠져드는 경향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지 않은가?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얼마나 자주 소홀히 다루어지고 낭비되고 더 나아가 배반당했던가! 교회 자신은 또 얼마나 빈번히 그리스도교를 무시, 남용, 배반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큉의 애정은 남다르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모든 대륙에서 아직도 현존하는 영적인 힘으로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온갖 탄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명실상부 최대의 세계종교로 남아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를 내버리고 싶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무엇이며, 또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싶어한다. 바로 이 일에 도움을 주려고 큉은 이 책을 썼다고 하며, 그래서 이 책이 모든 교회 안의 개혁적 역량들을 뒷받침하길 바란다.

그의 솔직한 고백대로 로마 체제의 온갖 무자비함을 갖가지로 겪었어도 교회에 적극적으로 헌신해온 큉의 설명은 그 어떤 고발이나 풍자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다. 그에 의하면 로마식 체제, 정교식 전통주의, 개신교식 근본주의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외양들로서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도발적인 발언을 한 다음에 큉은 근본적이고 철저한 개혁을 요구한다. 무릇 개혁이란 본질적인 것이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도록 만들 때에만 근본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본질적이란 말인가?

큉은 이미 1974년의 책 '왜 그리스도인인가'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폭넓게 서술한 적이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방향과 정체성,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책은 이 책의 속편인 셈이다. 여기서 큉은 교회 전통들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종의 비평사적인 정산(定算)을 시도한다. 그는 역사와 조직신학 두 차원의 종합을 감행한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해 나가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분석적 논증을 제시하며, 매우 복합적인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그리스도교의 원천에 비판적으로 비추어본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참된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한 물음도 제기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큉은 패러다임 분석을 시도한다. 패러다임 안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지배적인 구조들 안에서 역사를 이끌어간 인물들과 함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다임 안에서 전개한다는 것은 다양한 그리스도교의 총체적 상황, 그 발생, 성장, 경직화를 분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 담긴 구상과 사상은 큉의 오랜 사고과정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40년 신학연구에서 비롯하는 응축된 종합적 진술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그는 1983년 5월에 그의 주도 아래 튀빙겐 대학에서 개최되었던 국제 에큐메니칼 심포지엄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를 심화한다. 그 당시에 전 세계로부터 온 70여명의 학자들은 토마스 쿤(T. Kuhn)이 제공한 패러다임이라는 열쇠를 통해 지나간 역사의 특징과 다가올 미래의 방향을 풀어나갔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이란 특정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가치, 행동 방식들의 총체적 위상을 의미한다. 다행히 이 작업의 결과도 이미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1989년)라는 소책자로 깔끔하게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책은 과거의 책이 다소 원론적으로 제기한 내용을 더욱 심층적, 본격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이번에는 더욱 야심차게 이슬람과 정교회까지 포함한 방대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세밀하게 서술한다.

큉의 관심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또 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는가에 쏠리고 있다. 즉 그의 모든 작업의 목적은 현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함에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큉은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다섯 가지 패러다임들, 즉 원그리스도교 묵시문학 패러다임, 고대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 중세 로마 카톨릭 패러다임, 종교개혁 개신교 패러다임,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의 근본 특징들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대의 여러 가지 도전들에 직면하여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새로운 일치운동적 종합 안으로 지양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래의 패러다임은 상호보충적인 세 가지 근본태도, 즉 "누가 정통적인가?", "누가 카톨릭적인가?", "누가 복음적인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983년의 강연에서 새로운 세대의 바람직한 신학은 카톨릭적-복음(개신교)적, 전통적-현대적, 그리스도중심적-에큐메니칼, 이론(과학)적-실천적 신학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에 비하면, 여기서 큉은 문제 의식을 좀 더 단순화한 것 같다.    

이 글을 맺으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우리는 2,000년 동안 내려온 서구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교훈을 무시하거나 성급히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우리는 거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관한 큉의 입장을 우리가 교과서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정통적-교조주의적인 입장과는 달리 진지한 역사비평과 해석학적 작업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강한 설득력을 가져다준다.

(2) 이 책을 읽은 후에 나의 뇌리에는 언제나 다음의 질문이 깊이 박혀 있다. 기독교사상 1월호의 '고전읽기'에서 필자가 재번역한 몰트만(J. Moltmann)의 '희망의 신학' 서평의 끝자락에서 이미 지적하였다시피, 큉에 의하면 고대교회-헬레니즘 패러다임, 중세-로마 카톨릭 패러다임, 종교개혁-개신교 패러다임, 근대-계몽주의 패러다임은 제 각기 정교회, 로마 카톨릭, 개신교, 자유주의 속에서 계승되거나 보존되어 있는 반면, '그리스도교의 어머니'(E. Kaesemann)이라고 일컬어지는 원시 그리스도교-묵시문학 패러다임은 오직 이슬람에 의해서만 충실히 계승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슬람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충직한 후계자가 아닌가? 초대 그리스도교를 사로잡았던 그 희망은 오늘 누구에 의해 충실히 전승되고 실천되고 있는가? 본래의 그리스도교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3) 큉에 의하면 앞으로의 신학은 다중심적-다종교적-인류적이 될 것이고, 우주와 정신, 정치와 문화와 더불어 새로운 종합이 이루어질 것이며, 우주적-비차별적-해방적-전세계적 신심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미래의 가능성 앞에서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의 교회가 앞으로 세계 교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도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체계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하며, 이를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식견도 키워야 한다. 서구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 교회도 지금 신뢰성의 위기와 방향성 상실 때문에 표류하고 있지 않은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런 위기에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큉은 국경을 넘어서 정말 흠모할 만한 귀한 스승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제발... 그가 오래 살았으면, 참으로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