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자 평전

(살림출판사)

 

이신건

 

 '살림'하면 한국신학연구소가 펴내는 조그만 잡지만 생각나고, 그 잡지가 아직도 잘 버티며 살아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던 즈음, 기독교사상 편집부로부터 '살림 출판사'가 펴내는 <현대신학자 평전>에 대해 서평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내가 여태 모르는 이런 이름의 큰 기독교 출판사도 다 있었나? 의아한 느낌 속에서 서평을 수락한 며칠 후,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책 네 권이 보도 자료와 함께 손에 들어왔다. 첫 느낌은 솔직히 '살림'이 아니라 궁상스럽게도 '죽음'이었다. 이런,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전혀 모르는 무모한 사람들이 또 망할 짓을 하고 있구나!

나의 우려는 결코 연민에서 우러나오는 기우만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연이어 신기록을 갱신하는 대박 영화 때문에 영화산업은 신나게 번창한다지만, 다른 한편 영상의 위력에 눌려 책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괜한 엄살이 아니다. 글과 말로 먹고사는 나의 서재의 값비싼 서적들도 오랫동안 짙은 먼지 속에서 시나브로 죽어가고 있건만, 텔레비전과 컴퓨터는 휘황한 광채를 휘날리며 연신 나의 혼을 빼앗는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닫는 서점은 날로 늘어나고 출판계는 불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데, 그나마 요즘 잘 팔린다는 책들도 한결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식의 일차원적인 실용서적들이란다. 더욱이 책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젊은이들은 무거운 책을 위해서는 도무지 지갑을 열지 않는다. 오죽 했으며, 영상문화와 한 통속인 텔레비전마저도 'TV 동화'니 '느낌표'니 하면서, 독서 문화를 부추기려고 안간힘을 써 주었을까! 그런데 이렇게 해서 잘 팔리는 책도 그렇게 썩 좋은 책은 아닌 것 같고, 더욱이 책이 자신을 죽이려드는 영상과 '적과의 동침'을 했으니, 달콤한 동거 관계가 오래 갈 리가 만무하다. 혼전 동거처럼 밀월 관계가 쉬이 깨어지고 보니, 과연 책의 인기도 썰렁해지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거늘, 누가 봐도 당연히 잃을 것이 뻔한 위험한 도박판을 무슨 깜냥, 무슨 배짱으로 벌렸을까? 차라리 그 많은 돈을 영상 산업에 투자한다면, 최소한 본전은 건질 수 있을 텐데!?    

허긴 남이야 흥하든 망하든, 나는 구경만 하면 될 것을, 중뿔나게 내가 걱정해서 뭐하랴! 그래도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다. 그래서 동지애를 발휘하여, 거짓말도 좀 보태고 허풍까지 띄워, 이 책의 진가를 한껏 부풀려 볼까! 솔직히 이런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안쓰러워도, 나는 출판사를 무조건 편들 마음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기왕에 판을 벌렸으니, 잘 되길 비는 굿판은 못 벌릴 바에 초반부터 초를 칠 마음은 없다. 누구의 말대로 위기는 곧 기회라나? 정말 출판의 위기를 기회로 잡아, 살림 출판사도 한번 대박을 크게 터뜨려 보았으면 정말 좋겠다. 아니 거의 죽어 가는 출판 시장을 조금이라도 살려 놓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토종 학자가 쓴 세계 최초, 세계 최대의 세계 인물 평전이니, 세계 최대는 아니라도 국내 최대로 신학서적 판매의 실적을 올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위대한 사상가가 어디 하루아침에 생겨나던가! 더욱이 남의 삶과 얼을 제대로 곱씹고 애면글면 자랑할 학자가 그리 쉽게 나오던가! 실로 나도 오랫동안 현대신학의 신기원을 이룩한 사랑하는 나의 스승 몰트만(J.Moltmann)의 삶과 얼을 화보를 곁들어 쉽게 소개해 볼까 하고, 수십 번 마음을 먹다가도 이내 포기하곤 했다. 시간도 부족하고 정열도 식었지만 시간이 아직 이르고, 나의 역량으로도 무모하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학자들의 삶과 얼을 진솔하게 소개한 단행본들이 서가에 더러 눈에 띄곤 했는데,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잘 찾을 수가 없다. 바르트(K.Barth), 틸리히(P.Tillich), 불트만(R.Bultmann), 샤르뎅(T.D.Sardin), 김교신 등이었던가! 이런 종류의 책들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사라졌다. 그 틈을 매우 선정적인 책들이 무례히 비집고 들어와,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포장이 잘 된 책이라도, 시대의 흔적과 삶의 고민이 진솔하게 우러나오지 않는 글들은 영 싱거워서 만족이 되지 않는다. 참여의 고통이 없는 글, 화려한 말의 성찬뿐인 글, 아니 호구지책과 궁여지책으로 나온 글은 애오라지 쓰레기일 뿐이다!

이런 차제에 무려 30명이 넘는 신학자들을 소개하는 시리즈, 그것도 외국인이 쓴 것을 어설프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몽땅 한국 신학자에 의해서만 쓰여지는 시리즈가 편견과 냉대의 두꺼운 지각을 뚫고 돌연히 내 시선 앞으로 뛰쳐나왔다.  와! 대단하다. 설령 나중엔 이 일로 출판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발 기획대로 30여권의 책들은 다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 이 만한 책이라면, 자신은 죽더라도 남은 분명히 살리고 말 것이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경지가 아니라면, 이런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말초 감각을 자극하는 짜릿한 책도 아니고, 설교와 목회, 교회 성장을 돕는 실용서도 아니다. 역사가 유구하고 경영이 탄탄한 서양의 출판사들도 아직 이런 엄두를 못 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내놓은 것이라곤 겨우 <신학자 사전>(한들출판사, 2001년) 정도가 아닌가!

"그 동안 기독교 신학하면, 우리는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은 죄다', '쾌락은 육적인 것이다' 등의 매우 보수적인 윤리를 강조하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날마다 문화 코드가 달라지고 소비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는 요즘, 이러한 갑갑한 이야기들을 또다시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 네덜란드 교회에서는 주일 설교를 마친 후 목사와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그날의 설교에 대해 토론을 나눈다고 한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과연 어떠한 반응들을 보일까? 서양 문화의 절반은 기독교 문화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는 대부분 우리 나라의 선교를 담당했던 매우 보수적인 미국 북장로교들이 가져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이 너무나 편협하고 너무나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 과연 서양인들의 삶을 방향 짓고 그들의 문화를 형성했던 기독교의 균형 잡힌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바로 이러한 물음들로부터〈현대 신학자 평전〉이 기획되었다니, 출발치고는 조금 소박하고 고리타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을 통해 신을 만나자! 이를 통해 우리의 신학적 시각을 좀더 풍성히 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라지는 삶의 양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꿈은 매우 옹골차다. 이런 기획을 통해 독자들이 신은 만나지 못할망정, 살아 있는 신학자들은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몸으로 실천한 현대 신학자들을 총 망라했으니, 일단 밑절미는 매우 잘 된 셈이다. 막 출간된 네 권(리덜보스, 김재준, 틸리히, 슐라이어마허)을 보니, 부피도 적당하고, 편집 방식도 다양하다. 디자인도 단아하다. 영정처럼 까만 표지 속의 커다란 얼굴들이 살아서 다 못한 말을 하려는 듯이, 매우 진지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게 여겨지는 화란의 신학자 리덜보스(H.N.Ridderbos)의 전기(정훈택 씀)는 풍부한 사진과 살가운 대담 형식으로 인해 상당히 돋보인다. 리델보스의 두꺼운 저서 <하나님 나라>(오광만 옮김, 엠마오, 1987년)는 유럽과 미국 신학으로 편식해온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그의 왕성한 활동으로부터 독자들은 많은 자극을 받으리라 믿는다.  

김재준은 앞으로 등장할 박형룡, 안병무, 윤성범과 더불어 한국 교회를 이끌어온 탁월한 지도자들 중의 한 분이다. 단지 그를 가까이 보아온 사람이 아닌 한 젊은 구약학자(천사무엘)가 김재준의 삶을 조명한 것은 조금 의외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정분과 의리와 무관한 사람의 객관적인 묘사는 인물전이 갖는 한계를 뛰어넘어 객관적으로 다가오는 묘미를 준다. 풍부한 사진은 이 책의 친밀감을 드높인다.  

틸리히는 <김재준 평전>을 쓴 김경재에 의해서 이미 소개된 적이 있지만, 더 젊은 학자(박만)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몰트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그가 틸리히를 쓴 이유가 생게망게하지만, 모든 문장을 대화 기법으로 이어간 후에 후학들에게 다시 생각할 문제를 던지는 기법은 무거운 주제를 소화하는 부담을 한층 덜어주며, 틸리히의 신학방법(상관관계의 방법)과도 매우 잘 어울린다. 대화 기법을 활용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필자의 노고와 문학적 상상력이 한층  돋보인다.   

슐라이어마허(F.D.E.Schleiermacher)의 전기는 사진이 전혀 없고 생애에 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한 편이어서 다소 묵직한 느낌을 주지만, 헤겔을 연구하고 슐라이어마허의 여러 책들(종교론, 해석학과 비평, 성탄축제)을 번역한 철학자(최신한)의 글답게 내용이 매우 튼실하다. 그 동안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을 공시적으로 소개한 책들은 더러 소개되었지만 통시적으로 소개한 책은 전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책의 가치는 단연 돋보인다.

 <현대신학자 평전>에 대해 흠을 좀 잡자면, 30여명의 전기를 쓰는 집필자들이 조금 편중된 느낌이다. 이 만한 대작을 기획할 바에야 기왕이면 교단과 학교를 두루 안배하자거나, 판매망도 충분히 고려하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학자들에 관해, 그것도 그들의 사상만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생애에 관해 세심하게 조명해야 하므로, 더 긴 시간을 두고 더 적합한 전문적인 필자들을 폭넓게 찾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폴 리꾀르(P.Ricoeur)와 같은 인물을 신학자의 범주에 넣은 것도 조금은 의아하다. 인물의 폭을 넓힐 의도였다면, 그 밖에도 키에르케고르(S.Kierkergaard), 하이데거(M.Heidegger), 야스퍼스(K.Jaspers), 부버(M.Buber), 샤르뎅 등과 같은 인물들도 마땅히 목록에 넣었어야 한다. 죌레(D.Soelle), 러셀(L.M.Russel) 등과 같은 여성신학자들이 목록에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남성편향적인 시각이라고 비판을 받을 만하며, 라너(K.Rahner)와 큉(H.Kueng)과 같은 쟁쟁한 카톨릭 신학자들은 왜 빠졌는지도 궁금하다. 제3세계 혹은 남미의 신학자들, 예컨대 구티에레즈(G.Gutierrez), 보프(L.Boff), 보니노(J.M.Bonino)와 같은 인물들이 빠진 것은 서구편향적인 시각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신학자들의 경우에도 편차가 두드러져 보인다. 장로교의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에서 네 분(박윤선, 박형룡 - 김재준, 안병무)이 등장하는 반면, 감리교에서는 오직 한 분(윤성범)만이 등장한다. 더욱이 다른 군소 교단의 인물은 전혀 없다. 앞의 인물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과연 없기 때문일까? 편집진이 큰 교단에 너무 집착한 것은 아니며, 대중적 인기에 너무 연연한 것은 아닐까? 비록 유명세는 덜하지만, 더 많이 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숨은 인물을 이번 기회에 과감히 발굴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만약 돌아가신 분만을 고려했다고 변명한다면, 리덜보스와 같은 외국인은 특별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좌우간 "<현대 신학자 평전〉을 통해 기독교가 금욕적이고 고리타분하며 멈추어 있는 죽어있는 학문이 아니라, 시대가 달라질수록 그 시대를 설명해내고 이끌어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출판사의 야무진 꿈이 부디 성취되길 바란다. 그리고 이 기획으로 인해 살림 출판사가 큰 타격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남도 살리고 자신도 더 왕성하게 도약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기독교사상 2005년 3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