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구미정, 올리브나무, 2004년, 288쪽)

 

이신건

 

최근에 두 여성신학자로부터 자신이 직접 쓴 책을 선물로 받았다. 구미정의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는 책과 한미라의 '여자가 성서를 읽을 때'(대한기독교서회, 2002년, 351쪽)라는 책이다. 매우 이례적이고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서 더욱 반가웠다. 지금까지 몇몇 여성신학자들의 활약상을 지켜보긴 했지만, 그들의 글을 읽을 기회는 도무지 주어지지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여성을 깔보도록 길들여진 나의 악습 때문이겠지만, 여성들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이젠 남자들도 고무줄놀이를 재미있게 할 수 있는데, 여자들이 도무지 끼워주질 않는다. 지금까지 모든 놀이에서 여자를 배제해 온 남자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쓴 대가 중의 하나겠지만, 한국여성신학의 역사가 매우 짧은 탓도 있으리라. 그래도 남자를 계몽시킬 요량이라면, 남성 우군을 적극 포섭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언제까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동종교배를 일삼거나, 부질없이 남성에 대한 적개심만을 불태울 것인가?

지독한 불황에 어찌 공짜(=은혜)를 마다할까! 그리고 여성의 부드러운 힘을 어찌 물리칠 수 있을까! 그래서 먼저 구미정의 책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마치 엉큼한 악동이 여자 친구의 치맛자락을 들추어 보기라도 하듯이, 책을 열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소장(?) 여성신학자 구미정의 식견은 내가 경탄하는 노장(?) 여성신학자 뤼터에 거의 버금가는 듯하다. 우리도 이제 좋은 여성신학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뿌듯하다. 더욱이 '옴살'이나 '몸통'이라는 우리말을 맛깔스럽게 구사하거나 토속 자료로써 신학을 요리하는 멋진 솜씨는 나의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동시에 샀다. 무엇보다 이 책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더 많이 벗겨준 점이 고마웠다. 남의 옷은 잘 벗겨도 제 옷은 잘 못 벗는 바보임이 탄로가 난 기분이다.  

전통 신학을 비롯하여 교회의 마녀 사냥, 자본주의와 세계화 전략, 첨단과학 등이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지만, 여성을 정복하고 배제하려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토록 치열하게 작동하는지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남자들의 만행이 얼마나 큰지, 교회와 신학의 무지와 타락이 얼마나 깊은지, 세계화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이성과 진보와 자본과 과학에 대한 소박한 신뢰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생명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더욱 실감하였다.

이 책의 진가는 남성과 전통과 현대성을 통째로 부인하지 않고 다만 그 속에 내재된 강자(남자) 지배 이데올로기를 고발하고 모두가 평등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대안 신학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점에 있다. 분명히 여성이 남성에게 고마워해야 할 사실도 많이 있다. 비록 남성이 종종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어도, 그가 이룩한 찬연한 문명 때문에 여성이 질병과 노동과 무지와 억압으로부터 더 많이 해방될 수도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람보 기질의 남성이 만들어준 강력한 무기로 남성을 더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도 있지 않았던가! 비록 교회가 늙고 추하고 어리석어도, 그는 지혜로운 딸을 낳고 양육한 고마운 어미가 아니던가? 비록 과학이 때때로 반인간적, 반생명적, 반여성적, 반자연적이었어도, 예컨대 자궁 속에서 여성(Y)에서 남성(X)이 분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이야기처럼 남성에서 여성이 분화하거나 일반 상식처럼 무성(無性)에서 남성과 여성이 분화하는 줄만 알았던 나의 무식을 벗겨준 것은 분명히 과학의 공로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 책의 의도가 지배와 억압, 일방성의 원리를 비판하고 섬김과 나눔, 교호성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일부 급진적 여성신학자처럼 여성과 여성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이려고 안달하지 않는 것도 바람직한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 여성과 여성성이 더 많이 존중되고 더 높이 고양되어야 하지만, 성모 마리아처럼 여성을 우상화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이 책의 말미(287쪽)에서 저자는 "신학하는 남성 동지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숨겨지거나 억눌린 여성성과 만나고 이를 드러내고 개발하기를 요구한다.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차별적인, 그리고 약자 억압적인 제도에 맞서 함께 투쟁하는 데 헌신하기를 당부한다." 이런 그의 당부는 정당하고, 앞으로 더 많은 지지와 연대를 받을 것이다.

다행히 이 책은 약자의 범주 속에 자주 어린이를 넣는다. 하지만 참으로 의아스러운 점은, 대개 엄마가 되거나 엄마 나이가 된 여성신학자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약한 자녀들의 고통은 거의 모른 척 한다는 사실이다. 요즘 수많은 엄마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자녀들의 권리를 방기하고, 심지어 자녀들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학대하거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버린다. 그리고 수많은 엄마들이 양육과 교육의 이름으로 자식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을 억압한다. 아니 자신들의 한과 원을 그들에게 투영하여, 그들의 아픔을 사랑이라는 거룩한 옷으로 덧입힌다. 그러므로 억압당하는 여성의 눈으로 어머니 하나님을 재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이상이신 하나님(287쪽)의 이름을 붙이려면, 어머니보다 더 한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할 어린 생명들의 눈으로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과제는 남자에게는 낯설고, 어린이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과제는 상대적으로 더 자애롭고 친근한 여성, 어머니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니 자기 아픔에만 연연하거나 때로는 자기 고통을 지나치게 확대하지 - 엄살을 부리지 - 말고, 자기보다 훨씬 더 아파하는 여리고 어린 피조물들을 엄마의 넉넉한 젖가슴과 자비의 자궁으로 끌어안기를 바란다. 아니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친구로 삼기를 바란다. 만약 자신보다 더 연약한 자들이 해방된다면, 자신은 자연히, 그리고 마땅히 해방될 것이다. 이제는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 탄식하는 온 생명을 바라볼 때다!(2004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