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하버드에 오다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문예출판사, 2004년, 506쪽)

 

이신건

 

『세속도시』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학 신학부 교수 하비 콕스(Harvey  Cox)가 최근에 쓴 따끈한 책 한 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름하여『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이다. 그가 몇 해 전에『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책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책은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발간되었다고 하니, 더욱 뜻이 깊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그의 자상한 배려가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전의 책과는 달리 우리에게 매우 낯설어 보인다. 이름부터 조금 생소하고 특이하지 않은가? 예수가 하버드에 오다니? "하버드"라고 하면, 누가 문득 예수를 떠올리겠는가? "하버드" 하면, 차라리 나는 최근에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쓴 미국인 현각을 떠올린다. 그는 숭산 스님과 나눈 다음과 같은 선문답에 충격을 받아 출가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어떤 교수도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질문에 충격을 받은 후로 그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부모와 형제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또 이것은 바로 부처와 예수가  가르친 내용이라는 것이다. 물론 콕스가 쓴 책의 주된 내용은 불교 혹은 부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이야기, 혹은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피상적으로만 보면, 결론적 내용도 매우 비슷해 보인다. 콕스의 결론에 따르면 예수는 이야기 방식을 통해 가르침을 주는 '랍비'였으며, 예수는 단순히 이미 정해진 대답을 건네주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콕스는 '랍비적' 교육 방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콕스는 이 책에서 종종 유사한 불교의 이야기를 끌어오며, 부처와 예수를 수평적으로 비교한다. 이처럼 '하버드'라는 동일한 이름 때문에 두 책은 묘하게 처음부터 야릇한 연상을 일으킨다. 더욱이 이와 같은 인상은,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다름이 아니라『예수는 없다』라는, 역시 제목부터 내용까지 조금 특이한 책을 씀으로써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킨 종교(다원주의?!)학자 오강남 교수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 콕스도 오강남처럼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적 혹은 사실주의적 성서 이해를 넘어서기를 요청하며, 폭넓게 다른 종교들 혹은 종교적 스승들과 자주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런 연상 때문에 성급한 결론을 미리부터 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런 전제도 없는 독서 혹은 이해는 없겠지만, 미리 내려놓은 전제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은 정직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책이 핵심적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기 위해 "사실 자체!"로 돌진해야 한다.   

이런 특이한 제목을 가진 책이 쓰여지게 된 계기를 콕스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80년대 초 하버드대학교 학부에서 새로 도입된 학부 교과 과정의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 분과에서 예수에 관한 과목 하나를 가르치라고 부탁을 했다. 하버드대학교 학부에서 이런 분과를 창설한 것은, 우리 주변에서 점점 더 우리를 당황케 하는 온갖 현상들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부정한 거래, 불의한 범법 행위, 환자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많은 의사들, 자기들의 연구 자료를 날조하는 과학자들 등에 대한 이야기가 왜 이리도 많이 들려오는가? 더욱 한심한 것은 왜 이런 엉터리들 중 더러는 바로 우리 대학 졸업생들이란 말인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왜 그다지도 많이 그렇게 엄청나게 나쁜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 학생들에게 주는 교육에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 학생들이 사실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고 있었지만, 가치관에 있어서는 초보생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이런 일련의 정황 혹에서 교수회의 요청에 따라 '윤리적 사유'라는 강좌에 속하는 여러 과묵 중 하나로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고 하여, 예수의 윤리적 모범과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는 과목을 개설하기에 이른 것이다"(11쪽 이하).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버드 대학교 카탈로그에서 70년 동안 사라진 '예수에 대한 강좌'가 1982년에 다시 개설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강좌의 개설을 요청받은  콕스도 처음에는 "예수가 살았던 갈릴리 나사렛과 하버드가 위치한 매사추세츠 캠브리지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하고 의아심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콕스는 서로 경쟁적이고 상충하는 윤리적 강령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올바로 이해되기만 하면, 그 갈릴리 사람은 아직도 오늘 이 시대를 위해 강력한, 심지어 지상 명령적인, 윤리적 의미를 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강의를 진행해 나갔다고 한다. 번역된 책의 분량으로 거의 500쪽에 이르는,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이 책 속에서 콕스는 강의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강의 끝에 내린 그의 견해를 마치 자서전처럼, 아니 이야기책처럼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그리고 옮긴이의 말대로 이 책에서 콕스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철두철미하게 유대 랍비 전통의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 랍비 전통이란 무엇인가? 랍비 전통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쓰는 특징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콕스 교수에 의하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기존 전통에서 내려온 고정된 윤리 강령이나 지침을 그대로 되풀이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나 비유나 반대 질문 등을 통해 듣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나 인습적 관행을 뒤흔들어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삶과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일깨워주는 것, 그리하여 이런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그들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내어 그들 스스로 결단하도록 해주는 방법이라는 것이다"(475쪽 이하).

콕스에 의하면 랍비 예수는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이야기꾼이었고, 복음서는 본질적으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과학이나 논리와 함께 이야기가 우리의 경험을 조직화하는 데 필수적이며, 우리의 세계를 알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 설화가 없으면 윤리적 사유도 불가능하게 된다. ... 모든 삶은 설화적 모양을 가지고 있고, 인간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다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57쪽 이하). 그래서 이 책에서 콕스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 16편과 예수가 한 이야기 7편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는 단지 이야기꾼 예수와 이야기 책 복음서를 단순히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스스로도 이야기꾼이 되어 학생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 대화가 학생들과 자기 자신에게 어떤 윤리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를 반성적으로 술회한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는 단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한 조직신학자의 신중한 견해를 듣는 데 있기보다는, 차라리 이야기 혹은 이야기식 대화가 예수와 복음서와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데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콕스의 결론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앎과 삶'의 모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제 나름대로 진솔한 결론에 도달하려고 애쓴 콕스의 글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대답이 아니 대답들, 열린 질문들, 아니 때로는 모순과 애매함이 자주 발견된다. 어쩌면 이것은 이야기가 갖는 속성, 아니 이야기꾼이 노리는 목표일 지도 모른다. 예수 세미나'와 '역사적 예수' 연구에 큰 기대를 품었다가 나중에는 혼란스럽고 근소한 그 결론,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결론에 크게 실망하였다는 그도 실제적으로는 종종 그로부터 크게 빚지고 있음을 엿본다. 복음서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역사적 혹은 과학적 연구에 의해 증명될 수 없는, 그야말로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라고 말하는(57쪽 이하) 그도 때로는 많은 부분에서 복음의 여러 이야기를 마치 역사적인 사실인 양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모습을 본다. 어떤 경우에는 근본주의자보다 더 근본주의자인 같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그의 성서 이해가 매우 일천한 나보다도 더 허술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놀이의 신학자'가 독자들과 속임수 놀이를 하고 있다는 인상도 풍긴다. 이와 같은 모순 혹은 모호성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가장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가 하버드에 왔다. 한 번만이 아니다. 그는 내가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기 오래 전부터 와 있었고, 내가 그 과목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어도 하버드를 떠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는 아직 거기 있는데, 여전히 포착하기 어렵고, 여전히 꼭 집어 뭐라 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는 변함이 없는 이, 바로 그 랍비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467쪽).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어떻게 예수가 오래 전부터 하버드에 와 있었고, 지금도 떠나지 않는단 말인가? 예수는 '영원한 로고스'라는 말인가, 아니면 '만물에 내재하는 영'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예수의 정신 위에 세워진 하버드 대학의 설립 정신은 영원하다, 아니 영원하여라!"는 말인가? 이런 초역사적인, 초과학적인, 초이성적인 발언을 통해 결론적으로 콕스는 결국 무엇을 말하려는가? 여기서 나는 콕스에 맞서는 콕스, 아니 콕스에 맞서는 나 자신을 본다. 만약 예수가 언제나 하버드에 와 있었고 지금도 하버드에 와 있다면, 그는 유대 전통의 랍비 이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단지 영원한 랍비로만 이해될 수 없다. 실로 예수는 당대의 랍비들을 얼마나 신랄하게 공격했는가? 그리고 예수는 랍비들의 신학과 그들의 이야기 방식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까지 훨씬 뛰어넘은 분이 아닌가? 예수는 이야기 투로 재미있게 혹은 둘러 말하지만 않고, 때로는 직선적이고 직설적으로, 아니 예언자적으로 발언하지 않았던가? 이런 점에서 예수는 단지 랍비만이 아니라 동시에 예언자이기도 하였고, 또한 전통적인 예언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지 않은가! 더욱이 콕스가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그의 부활을 하나의 설화로서만 풀어내지 않고 상당히 신빙성 있게, 매우 설득력 있게 말한다면, 예수는 분명히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이야기꾼, 지혜로운 랍비만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다만 우리는 콕스의 진지하고 구수한 입담을 통해 오랫동안 잊혀진, 아니 요즘 새삼 여러 방면에서 새삼 부각되는 랍비와 같은 이야기꾼 예수의 모습을 충분히 엿보게 된 것만으로도 큰 행운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니 비록 우리가 예수의 재담을 감히 넘어설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실로 그의 이야기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않는, 어쩌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게으르고 무익하고 악한 우리의 모습을 새삼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예수와 복음서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상상력의 가치를 배제하고, 닫힌 공간과 닫힌 사고, 닫힌 교리, 아니 닫힌 기득권 속에 유배된 불쌍한 노예 신세로 전락한 우리의 처량한 처지도 모르고, "예수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했다"는 노래를 헛되이 불러대는 바보가 된 것은 아닌지, 콕스의 진지한 충고를 깊이, 오래 반추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기독교사상 2005년 2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