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그대의 사명은

(폴 투르니에, 형병룡 옮김, IVP, 2004년)

 

이신건

 

"나는 오늘날 여성이 가진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남성들은 공적인 생활 영역에서 여성을 제외시키고 서양의 기술 문명을 이룩했다. 그 결과 서양은 남성적인 사회, 곧 남성적인 가치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사회가 되어 여성의 기여를 차단해 버리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제는 평범한 상식이 된 주장으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여성 해방을 더 빨리 앞당기기 위하여 말년의 저자가 안간힘을 다하여 쓴 책이 아님을 독자들은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책은 여성을 향해 "남성과 함께 경쟁하는 남성다운 사람이 되려고만 하지 말고, 참으로 여성다운 사람이 되라!"고, "여성만이 갖는 진정한 사명과 가치를 재발견하고 실현함으로써, 남성들이 만들어온 빗나간 문명을 치료하고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라!"고 권한다. 대관절 남성이 무슨 잘못을 그토록 많이 지었고, 여성이 무슨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저자는 마틴 부버의 입장에 따라 사람이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나와 그것'과 '나와 너'가 곧 그것이다. 지금까지 특히 서양 문명은 르네상스와 데카르트 이래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종교의 신화는 기술진보(새로운 신화)로 대체되었고, 감정은 이성에 의해 억압되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종, 성적인 대상, 장식품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대체로 남성은 이성적, 사물적인 반면에 여성은 감성적, 인격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양 문명은 여성적인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눈부신 과학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이런 문명은 이제 한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융의 입장에 따라 저자는 문명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도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상호보완성을 이루어야만 바람직하고 건강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남성이 만들어 놓은 삭막하고 싸늘한 비인격적인 문명은 여성적인 가치를 통해 보완되고 치료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여성 운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책은 종종 일반적인 상식에 반기를 든다.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신화 혹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주장과 "데카르트의 철학만이 아니라 모든 뛰어난 창조적 행위에는 항상 충만한 감정이 수반되었다"는 주장에는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상식을 깨뜨리기도 한다. 우리는 대체로 중세기야말로 암흑기로서 과학만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한 시대라고 배워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마녀 재판이 최고도로 성행했던 시기는 르네상스 때였고, 그것이 최악의 상태에 이른 때는 17세기, 곧 데카르트가 활동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중세기에는 오히려 여성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역사에도 이와 같은 유사성이 발견된다. 조선 중엽까지는 여성이 상당한 권리를 누렸던 것 같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은 점차 비하되고 억압되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를 항상 새롭게, 아니 거꾸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좌우간 르네상스 이래 효율성과 힘을 추구한 서구 문명은 인간성과 인격의 상실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질병은 정복되었지만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신경성 질병은 늘어났다는 것이다.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삶의 질은 저하되었고, 그 결과로 여성의 가치도 함께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이 이런 비인격적, 비인간적인 사회를 치료하기를 희망하는 뜻에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러 점에서 이 책은 진정한 여성 해방과 병든 문명의 치유에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실로 인류의 반쪽은 여자다. 그리고 나머지 반쪽도 여자로부터 태어나 주로 여자에 의해 양육되고, 대개 여자와 결혼하고 여자와 함께 죽을 때까지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일평생 "여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산다. 대개 남녀의 갈등은 성격 차이만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부터도 기인한다고 볼 때, 우리는 그 동안 정말 꼭 배워야 할 중요한 진리보다는 쓰레기 지식만을 쌓아올린 것만 같다. 남녀가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마당에 인류의 평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날이 갈수록 이혼율이 증가하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사실도, 다른 한편으로 보면, 남녀 간의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며, 이런 현상은 남자가 주도한 현대 문명의 불가피한 비극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남자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하지만 여성 억압에 크게 기여한 같은 남자로서 과거를 통렬히 반성하는 뜻에서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가치에 큰 박수를 보내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여성에게 지나친 아부를 보내는 것 같아서 역시 같은 남자로서 마음이 조금 씁쓸하다. "지성의 특징은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고난 무능에 있다."(베르그송)는 주장은 지성의 가치를 너무 깎아내리는 듯이 보인다. 지성도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유효한 도구가 아닌가? "여성은 초월성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다"(아베 오래송)는 주장이나 "직관을 가진 여성이 신비를 더 잘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저자)는 주장은 오직 여성만이 삶을 초월하는 신비적인 존재인 양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종교인 중에는 확실히 여성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은 다만 초월적이 특성이 뛰어나서 종교에 더 많이 귀의하는가? 그리고 지성은 초월적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파스칼의 말대로 이성은 이성을 부인할 능력이 있지 않은가?

분명히 우리는 여성의 뛰어난 특징을 애써 부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 동물 중에도 인간보다 뛰어난 기능을 보여주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앞에서는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정, 좌뇌와 우뇌 등이 상호보완적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더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저자는 여성우월주의를 넘어서 여성찬미주의자가 되어 감을 느낀다. 결론부에 가서는 "이 반쪽(감정적, 인격적인 여성)이 다른 반쪽(합리적, 과학적인 남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우월주의 대신에 여성우월주의를 주창하는 새로운 깃발을 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진정 여성이 바라는 목표이며, 이런 세상이 진정 행복한 세상일까?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보다, 그리고 감정이 지배하는 세상이 과연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보다 더 나을까? 그 대답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