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니어링 자서전

- The Making of a Radical -

(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실천문학사, 2002년, 515쪽)

이신건

 

남의 집에 갈 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서가를 훑어본다. 새로운 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며칠 전에 하루 밤을 묵기 위해 찾아간 젊은 목사의 서가를 훑어보던 중에 <스콧트 니어링 자서전>이 눈에 띄었다. 아니 이 책이 순식간에 나의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고 해야 옳다. 무슨 힘이 그토록 강하게 작용했을까? 나도 그처럼 낭만적인 전원 생활을 꿈꾸고 있었던가? 좌우간 잡아채듯 빌려온 이 책을 나는 한숨에 다 읽었다.

"스콧트 니어링" 하면, 대개의 사람들도 나처럼 스무 살 연하였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헬렌 니어링)와 함께 행복하고 조화로운 전원 생활을 보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된 책들은 이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책은 색달랐다. 나의 소박한 선입견과는 달리 이 책에서 재발견한 그의 모습은 낭만적인 자연주의자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는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를 연상시키지만, 실제로 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책의 원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다소 은둔적이고 몽상적인 <월든>과는 달리 미국적인 삶의 방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급진적인 이상을 실현하려고 몸부림친 니어링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883년에 태어나 100살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일생은 문명, 특히 미국 문명에 대한 완강한 저항으로 점철된다. 그를 통해 우리는 미국인이면서도 미국인이기를 거부한 사람, 문명인이면서도 문명인이기를 거부한 사람, 더욱이 기독교조차 거부하고 자기가 세운 이상과 철학에 충실했던 한 사람을 만난다. 버트란트 러셀에 버금가는 연설과 강연으로 수천 명을 흥분시켰던 그는 젊은 시절에 경제학을 가르치는 학자로서 제국주의적인 전쟁과 미국의 자본주의에 저항하였다. 인생의 후반부에 그는 버몬트 숲 속에 들어가 자립적인 농경 생활을 꾸려 나갔다. 하지만 그가 농경 생활을 택한 것도 소박한 자연주의자로서 평화롭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계급사회에 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모범으로 삼아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조화로운 전원 생활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라 자유롭고 의미 있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천적인 교범이다.

젊은 시절 그는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였고, 자유주의자였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공산(사회)주의자였다. 양심적이고 신념에 찬 투쟁 생활로 말미암아 그는 두 번씩이나 교수직에서 밀려났으며, 전쟁을 반대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쓰고 재판정에 서야만 했다. 진기한 것은 예수님처럼 부(富)의 위험성을 철저히 경계한 그의 모습이다. 예컨대 8백 달러를 주고 산 독일 공채가 무려 6만 달러까지 치솟자, 그는 이를 난로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또한 니어링은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예컨대 히로시마 원폭 투하 명령을 내린 트루먼에게 그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추수 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축제 기간 중에 그는 자발적으로 금식했다. 이처럼 비정한 산업주의 체제와 서양 문명의 야만성을 철저히 거부하고 저항한 점에서 그는 참으로 급진적이었다.

노년기에 그는 부인과 함께 시골(버몬트와 메인)에 들어가 자급자족하면서 채식주의와 생태주의를 실천하였다. 경쟁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 생활에서 실직은 곧 절망과 죽음의 나락을 의미한다면, 농경 생활은 완벽한 자유와 자급을 의미한다. 생계를 위한 4시간 노동, 지적 활동을 위한 4시간, 친교를 위한 4시간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농사를 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그는 주로 여행과 강의, 저술 생활을 보냈다.

이 책의 제목처럼 그는 선각자로서 급진적인 삶을 실험하고 실천했다. 감히 그를 예수님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예수님도 급진적인 분이 아니었던가? 비록 평화주의자였지만, 예수님도 역시 기존 질서의 급진적인 전복을 꿈꾸지 않았던가? 기독교의 모순에 저항하면서 무신론자의 삶을 살았던 니어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흔적을 언뜻 볼 수 있게 된다. 그를 통해 무신론과 유신론의 경계가 때로는 모호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니어링의 삶에서 우리는 진리로 인해, 그리고 진리를 위해 자유롭게 산  예수님의 참 제자를 보는 듯하다. 그를 대할 때마다 예수님을 팔아먹고 사는 나는 부끄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