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눈

거시사의 세계

 

<요한 갈퉁, 소하일 이나야툴라 편저, 노영숙 옮김>

 

이신건

 

"거시사란 사회체제의 궤적을 따라가며 패턴을 발견하고자 하는 역사 연구방식이다. 거시사는 역사의 단계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원인, 즉 통시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매우 야심만만한 작업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은 1989년 봄 호놀룰루 하와이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주최한 거시사에 관한 사회이론 세미나의 결과물이다. 이 책은 동서고금의 위대한 사상가 20인의 이론과 전망을 통해 거시사를 소개해 준다. 이들 20인의 생애와 철학적 배경, 인식론과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이들이 제시하는 역사의 유형과 단계, 변화의 원인과 메커니즘 분석 등을 서로 비교한다. 뒷부분에 수록된 그래프에는 20가지 거시사 이론이 단순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독자들의 시각적 이해를 돕는다.

거시사이론은 크게 순환 모델과 선형 모델의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순환 모델은 역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본다. 변화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며, 따라서 역사는 주기적으로 순환한다. 사마천, 할둔, 비코, 파레토,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사르카르가 이에 속한다. 선형 모델은 고전적 서양 모델로 대표되는 것으로서 합리성의 증가, 경제발전, 도시화, 세속화, 민족통합, 근대화, 인류의 구원과 영적인 진화 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스미스, 헤겔, 콩트, 마르크스, 스펜서, 베버, 슈타이너, 샤르댕, 그람시, 아이슬러, 가이아 이론이 이에 속한다. 서양인에게는 순환형과 선형이 결합된 형태가 나타나지만, 동양인에게는 분명한 순환형이 나타난다.

종종 두 모델은 상보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모순적이다. 그 까닭은 우주와 인생을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선형 모델 배후에는 삶을 최종 상태의 준비로 보는 서양의 인생관이, 순환 모델에는 윤회를 믿는 동양의 인생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영생과 윤회, 기독교/이슬람교와 힌두교/불교가 대립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편저자는 절충주의 입장에 서려고 한다. 하나의 이론을 신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결정적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이 정답인지를 알 수 없다. 아무리 높은 산에 올라가도 지구의 모습 전부를 볼 수 없고, 지구 자체도 한계가 있다. 높은 산에 널찍한 공간이 자리하듯이, 위대함은 공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논쟁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선형적인 기독교적 모델에 익숙해 있다. 하지만 나는 동양인이기도 하므로 순환적 불교적 모델을 완전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 속에 이미 그런 모델이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종종 농담조로 전생을 말할 때면, "혹시 내가 전생을 믿는 게 아닌가, 아니 전생이 있는 게 아닌가?" 자문해 보기도 한다. 직선형이 압도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나의 사고 안에도 나선형을 적절히 수용함으로써 직선형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하지만 "거시사가는 신의 머리 위에서 신의 계획을 폭로하거나 신의 위치에 서서 신의 계획을 말해주는 사람(32쪽)"이라면, 누가 감히 신의 위치에 오르겠는가? 내가 인간의 깨달음보다는 신의 계시적 사건에 더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물론 나는 이 둘을 항상 모순적, 이분법적으로만 바라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도 인식론적, 실천적으로 이 둘은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직선형도 물론 신의 섭리 혹은 역사의 법칙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공허한 형이상학에 빠지거나 인간의 역할을 무시하는 단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순환형은 미시적으로는 낙관과 비관을 다 포함하는 듯하면서도, 거시적으로는 운명적, 비관적인 편이다. 반복하고 순환하는 미래에 무슨 희망을 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순환형은 인간의 행동과 역사의 희망을 제약할 수 있다. 희망이 있다면, 오직 순환하고 반복하는 역사보다는 역사 저편에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직선형은 역사 안에서 희망을 걸기 때문에 역사에 참여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다분히 진취적, 낙관적인 편이다. 덧붙여 말하면, 요즘에 순환형을 믿는 불교도 과학을 상당히 의존하는 편이지만, 과학적 이론(가이아 이론, 샤르댕)은 대개 선형에 기운다. 물론 '세계 내의 존재'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칼 뢰비트는 역사가를 '뒤를 바라보는 예언자'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앞을 바라보는 역사가'라고 칭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예언자의 역사해석에 의존한다. 예언자도 분명히 과거의 사건을 토대로 예언하지만, 몰트만의 말대로 성서의 약속의 역사 안에서 선취되는 미래의 능력은 과거와 현재의 가능성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므로 예언자에게서 역사는 미래의 요소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시하시는 미래의 사건에 초점을 둔다. 그러므로 역사는 상승과 하강, 죽음과 소멸의 순환이 아니라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의 시간이 된다. 미래의 능력은 항상 과거 반복의 압력과 현재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도록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역사는 곧 해방의 역사로서 메시아적 방향성을 갖는다. 스승 몰트만을 신봉하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를 믿고 기다리기 때문에 나는 따분하고 운명적인 순환형에 몸을 담을 수 없다. 나는 지금도 희망을 믿고, 기다리고, 찾는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내 삶은 의미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