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토를라이프 보만, 허혁 옮김, 분도출판사, 322쪽>

  

이신건

 

서양 사상 혹은 서양 문화는 히브리적 전통과 그리스적 전통에서 흘러내려 왔다. 기독교는 분명히 히브리적 기반 위에서 출발하였지만, 나중에는 그리스적 전통과 서서히 합류하기 시작했다. 두 전통의 합류는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세계화와 교리화를 낳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적 정체성(본질)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양자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정립하는 것은 기독교의 사활과도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이 두 전통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서양 문화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와 구원의 본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 히브리적 사유이고, 무엇이 그리스적 사유인가? 두 사유의 특이성과 공통성은 무엇인가? 하르낙(A. Harnack) 이래로 여러 학자들(예컨대 니그렌, 오르딩, 돕슈츠)이 이 질문에 답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해 왔지만, 가장 분명하고 알찬 결실을 맺은 사람은 바로 스웨덴의 루터교회 목사인 토를라이프 보만(Thorleif Boman)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7세(1952년)에 발표한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비교"는 증쇄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교정되어 왔는데, 내가 읽은 책은 1968년에 나온 제5판이다.

저자는 두 사유를 비교하기 위해 두 언어 세계에 들어 있는 사유의 토대를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독자들은 언어의 외적 구조와 내적 의미를 지루하리 만큼 치밀하게 파헤치는 저자의 끈질긴 노력을 따라가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기독교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다행히 저자가 간간이 요약을 잘 해 주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 저자는 히브리적 사유를 동적, 정열적으로 보고, 그리스적 사유를 정적, 조화적으로 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행동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은혜를 실증한다. 하지만 플라톤에 의해 대변되는 그리스적 사유에서 존재의 본질은 부동성, 불변성에 있다. 히브리적 특성은 영원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고, 그리스적 특성은 영원한 정지로 볼 수 있다.

제2부에서 저자는 대상을 바라보는 두 민족의 차이를 본다. 이스라엘인이 대상의 외관에 관심이 없고, 지각된 대상에 관한 자신의 인상(印象)을 재현한다. 하나님의 외모나 현현(顯現) 양식을 뜻하는 형상(Imago)은 후기적 표상이다. 그리스인은 인상을 말하지 않고 실제로 본 것만을 말한다. 그리스인은 감각기능, 특히 시각을 통해 현실과 접촉한다.

제3부에서 저자는 그리스인의 민속적인 시간 개념이 원형적이라기보다는 직선적, 지속적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플라톤에게 보듯이, 시간은 부동적이고 불변적인 영원의 구체적이고 동적인 모방에 불과하다. 시간과 변화, 무상은 동의어이므로 신과 신적인 세계는 이런 범주들을 벗어난다. 이스라엘인에게 시간은 그 내용과 동일하다. 즉 시간은 사건들의 흐름이다. 플라톤으로부터 계승된 영원은 시간적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이다. 히브리어에서 영원은 피안적인 사물을 묘사하지 않고 차안적인 사물만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이다. 영원(올람: 끝없는 시간)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에도 이것은 초시간성, 피안성을 표시하지 않는다. 불변적인 피안성이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그리스인에게 필연적이었다면, 종말론은 히브리적 종교성의 영역에서 필연적인 귀결이다.

제4부에서 저자는 히브리적 사건 파악을 삼중적(동적, 도구적, 성품적)으로 보고, 그리스적 사건 파악을 이중적(상징적, 도구적)으로 본다. 제5부에 따르면 히브리인은 삶과 역사, 도덕의 법칙에 대한 개인적 확신을 추구하였다면, 그리스인은 객관적 진리, 명료성을 추구하였다. 히브리적 사유는 분석적이고, 그리스적 사유는 종합적이다. 히브리인은 듣고 느끼며, 그리스인은 대상을 본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신약성서 안에 들어 있는 히브리적 사유형식과 그리스적 사유형식의 관계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있다. 유대인 학자 부버(M. Buber)는 유대교의 헬레니즘화를 일종의 타락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히브리적 사유가 그리스적 사유와 병행되고 결합되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특히 히브리적인 시간적, 종말론적 희망과 그리스적인 공간적, 피안적 희망의 관계는 쿨만(O. Cullmann)의 "영혼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이냐?"를 위시하여 몰트만(J. Moltmann)의 "희망의 신학"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인의 종교적 심성과 사유에도 이 두 가지 희망이 역설적으로 혼합되거나, 불투명하게 병행하고 있음을 본다.

보만의 결론적인 견해에 따르면, 피안 희망이 도래(재림) 선포에 첨가된 것은 서구에서 얻은 기독교의 승리를 위한 필연적인 전제였고, 전자는 후자를 올바로 보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신약성서에서 분리될 수 없는 희망의 두 형식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적인 기독교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와 높여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히브리적인 것도 아니고 그리스적인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부버의 견해는 정통적이지만 비타협적이다. 보만의 견해는 현실적이지만 혼합적이다. 독자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둘 중에 누가 더 적합하고 정당하게 사유한다고 보는가? 실로 교회의 역사는 두 전통이 합류하거나 각축하였음을 보여주며, 지금도 기독교 전통과 다른 전통들이 합류하거나 각축하고 있음을 본다. 모름지기 전통의 자식이라면 전통에 충실해야 하지만, 현실에 몸을 담고 있는 처지에 현실을 깡그리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성서의 뚜껑은 늘 닫혀 있지만, 성서의 세계는 늘 열려 있다. 현실은 늘 우리를 현재로 유혹하지만, 희망은 늘 우리를 미래로 내몬다. 그러므로 부단한 연구와 치열한 참여, 그리고 고독한 기도만이 진리로 인도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