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으로 본
산상보훈

<김희성, 영성, 2005년, 266쪽>

 

이신건

 

"한국의 기독교인이라면, 산상보훈을 읽어야 한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알맹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산상설교를 다시 풀이한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지만, 저자의 오랜 관심을 대변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책의 출간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그 동안 배워 온 구원론에 약간의 흠이 생겼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윤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저자는 "구원론을 바로 잡고, 윤리를 올바로 정립하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고 말한다. 본회퍼의 유명한 저서 "나를 따르라"를 연상시키듯이,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렇게 질타한다. "믿음은 행함을 배제하지 않고 행함을 내포하고 결합한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바울은 구원의 전제로서 믿음을 강조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의 준행을 강조했다. 그런데 심판하실 분은 예수님이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교회는 바울의 구원론만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행함과 분리하고, 그 대신 복과 결합해서 유포시켰다. 믿음과 복이 결합된 동전은 불량주화이다. 그것은 땅에서는 잘 유통되나, 하늘나라에서는 유통되지 못한다. 그 주화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흠이 난 한국교회의 구원론을 바로 잡는 일이 아주 중차대하고 시급하다."

다음으로 저자는 윤리의 문제를 거론한다. "약간의 흠이 있는 - 내가 보기에는 치명적인 흠이다! - 구원론은 즉각 윤리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윤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그 결과 기독교인들의 도덕성이 많이 실추되었고, 한국사회가 개선되지도 - 내가 보기에는 어떤 점은 조금 개선되었지만 어떤 점은 상당히 개악되었다! - 않았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윤리가 붕괴된 이후로 아직 새로운 윤리가 등장하지 않은 윤리적 진공상태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윤리 형성을 위한 새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자신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교회 개혁을 통한 일말의 희망을 거두지는 않고 있다.

지금까지 산상설교를 풀이한 서적들은 한국에도 적잖이 나온 편이다. 외국 서적들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것이고, 다행히 한국 서적들도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최근에 내가 산상설교를 중심으로 설교준비를 할 때도 여러 서적들을 참고해 보았는데, 독일어로 쓰여진 책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겠고,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의 저자로는 로핑크, 스코트, 라가츠, 슈트레커, 귈리히, 슈바이처 등이 있고, 한국인으로서는 박수암, 오덕호, 이신건 등이 있다. 박수암의 책은 실로 함량 미달이고, 오덕호의 책은 유감스럽게 보지 못했으며, 나는 비전공자로서 조금 외도한 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일단 문체와 문장이 상당히 소박하고 간결하다. 매우 복잡한 주장과 학설로 점철된 산상설교의 해석사를 이렇게 간결하게 정리한 책은 아직 없다. 그리고 저자는 많은 분량을 문학적, 문헌적 분석에 할애하고 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저자의 의도대로 성경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넓힐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이것이다. 다만 새롭거나 기발한 주장이나 학설은 거의, 아니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초보 신학생을 위한 교재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신학적으로 초보가 아닌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유명하다는 대형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봐도, 그들의 신학 수준은 초보 정도가 아니라 왕초보다!.

실로 산상설교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혁명 선언서, 아니 세상을 전복하는 거대한 폭약(라가츠)이다. 이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혁명적이고 폭발적인 영향을 받고 주었는가? "예수쟁이는 싫지만 예수는 좋다"던 간디를 비롯하여, 톨스토이, 루터 킹, 본회퍼 등 기억하고 기록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산상설교 때문에 한꺼번에 뒤집어졌고, 그래서 세상도 상당히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역사가 아무리 일천하다지만,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나의 식견이 좁은 탓일까? 그나마 거지와 병자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이현필 선생과 최근에 영상과 함께 묶여져 나온 '맨발천사 최춘선 할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셨음을 알고, 위로와 도전으로 삼는다.

왜 한국교회는 산상설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을까? 예수님보다 바울을 더 좋아하고 중요시한 탓일까? 아니면 선교와 성장이라는 지상 목표 때문에 저자의 말대로 믿음을 복과 결합하기에 바빴지, 믿음을 행함과 결합하기에는 매우 게을렀던 탓일까? 그렇지만 산상설교도 축복을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선언하신 축복이 한국인이 좋아하는 축복에 완전히 밀리거나 납작하게 눌려버린 탓일까? 산상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로써 진검승부를 걸려는 목사와 신도가 적었거니와, 이를 제대로 풀이한 책들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작지 않은 이유가 될 것이다. 목사들과 학자들의 직무 유기를 무슨 변명으로 덮을 수 있을까? 그러니 누가 산상설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나 있었겠으며, 더욱이 누가 이를 선구적으로 실천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교회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위축되지 않았을까?

이는 최근의 대형 목사들의 수준 이하의 발언과 행동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들에게 북한의 지도부는 여전히 사랑해야 할 원수가 아니라 타도해야 할 원수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재난 위에 저주까지 퍼부어야 시원한 지옥의 자식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기도회를 빙자한 친미적, 아니 숭미적 시위를 선동하는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먼저 구하는지, 아니면 내심으로는 미국을 믿고 미국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지를 도저히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가난한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면화하고 개인화한 책임은 마태에게 있다손 치더라도, 대형 교회와 대형 목사를 중심으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미워하라고 명하신 재물과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교회연합활동은 이미 산상설교를 걸레처럼 내동댕이쳤다는 공개적인 선언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기사 내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를 먼저 보는 지금의 나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주여, 불충하고 배역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교인의 감소, 아니 교회의 위기를 절감하고 교회의 갱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비록 산상설교처럼 미약한 분량으로나마, 그리고 비록 산상설교처럼 작은 목소리로나마, 산상설교의 진정한 가치와 능력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자의 이 작은 책이 무척 대견하고 고맙기까지 하다. 쓰레기와 같은 설교와 논문을 쌓는 데만 열중하는 목사들과 학자들이여, 그리고 독인지 약인지도 분간할 줄 모르고 던져주는 대로 먹기만을 좋아하는 신도들이여! 나중에는 쓰레기 더미에 던질지언정, 일단은 한번 읽어 보시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