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 베이직


<앨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김덕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5년>


이신건

 

요즘 기독교 신문의 기사와 광고를 보면, 아직도 곳곳마다 영성(靈性)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요즘 사람들은 무슨 뜻으로 말끝마다 "영성, 영성"하는 것일까? '영성'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봐서 그럴까, 아니면 '영성'이라는 용어가 기독교 혹은 교회 운동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만약 전자의 뜻이라면, 영성 운동은 한 시대의 유행으로 풍미하다가 머잖아 사라질 고물이 될 게 뻔하다. 만약 후자의 뜻이라면, 늦바람이 난 노총각처럼 왜 새삼 이제 와서 '영성'을 이토록 열렬히 짝사랑할까? '영성'이라는 용어와 그런 운동이 없어도 우리는 여태까지 그럭저럭 잘 살아 오지 않았는가? 아니 이보다 더 멋진 용어와 운동도 있지 않았는가? 경건, 수양, 부흥, 제자, 개혁, 갱신, 복음, 순복음 등과 같은 용어 말이다. 심지어 혁명이라는 용어까지도 우리는 써 오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자꾸 '영성' 호들갑인가? 물질과 자본에 대한 냉소주의 혹은 패배주의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앙과 교회의 위기를 퇴치하기 위한 묘약인가? 좌우간 아직도 영성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결코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중에 또 하나의 '영성 입문서'가 출판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석좌교수 겸 동(同) 대학의 목회자 양성기관 위클리프 홀(Wycliffe Hall)의 학장인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가 쓴 책이다. 원 제목은 『Christian Spirituality. An Introduction』인데, 역자는『기독교 영성 베이직』이라는 제목으로 조금 바꾸어 놓았다. 어중간한 신학자나 설익은 부흥사가 쓴 책이 아니라 신학과 목회를 함께 하는, 그래서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학자로 널리 주목과 존경을 받는 저자가 쓴 책이라니 훨씬 믿음직스럽다. 원래의 제목대로 이 책은 기독교 영성으로 안내하는 하나의 입문서라는 점에서 저자의 겸손까지 드러내 보인다. 즉 이 책은 기독교 영성의 총론(總論)이 아니라 그곳으로 안내하려는 하나의 입문(入門)이길 원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저자의 수려한 글 못지 않게 다른 사람들의 멋진 글도 자주 소개되고 있다. 이와 달리 역자가 달아놓은 책의 제목은 마치 이 책이 기독교 영성의 토대를 닦는 책인 것 같은 느낌(오해!)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차이가 뭐 그리 대수인가! 다만 서두부터 말꼬리부터 잡는 속내 좁은 사람처럼 비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목회학 박사(D. Min)를 취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러 교회와 기관에서 활동하는 역자의 탄탄한 번역에도 신뢰가 간다.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는 찬송가(256장) 가사와 "홍수 중에 마실 물이 없다"는 속담처럼 영성을 외치는 자는 많건마는 영성의 샘물은 말랐고, 영성 서적의 홍수 중에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었는데, 이런 중에 나온 책이라서 더욱 반갑다. 다시 한번 묻는다.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며, 기독교의 근본적인 개념들을 함께 묶어주어 삶과 연관시키는 것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범위와 규범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인 경험이다"(15쪽). 그리스도인의 존재, 기독교의 근본, 개념과 삶, 신앙의 범위와 규범 등 ... 여러 용어의 나열 때문에 단순한 사람에게는 기독교 영성의 개념이 조금 혼란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저자는 기독교 영성이 지금까지 억압되어 온 기독교의 특정한 전통을 부각하려는 뜻으로 당파적, 일방적이거나 심지어 신비주의적, 이원론적이지 않음을 애써 강조하려는 것 같다. 좌우간 저자에 의하면 기독교 영성이란 곧 기독교인의 존재와 삶 그 자체, 즉 기독교의 본질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이 책에 '영성'이라는 유행어를 굳이 붙이지 않아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좌우간 이 책의 목적과 내용은 기독교 영성으로 안내하는 효과적인 길을 제시하려는 점에 있다. 제2장(기독교 영성의 종류)은 기독교 영성이 신학과 역사 개인과 종파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함으로써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는 포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유명한 저서『그리스도와 문화』가 제시한 다섯 가지 방식에 따라 저자도 기독교 영성의 범주를 다섯 가지로 나눈다. 다만 저자는 여기서 어떤 영성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를 독자에게 맡기려는 겸손을 보인다. 일방적, 종파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물론 이 내용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전체 얼거리에서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아니 어쩌면 기독교 영성의 본질(베이직)을 좌우할 만한 막중한 이 부분을 저자는 왜 간단히 스쳐지나갔을까? "생사를 가름하는 싸움판을 만들어 놓고서는 싸움은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듯한 태도는, 어찌 보면 독자를 매우 존중하는 듯하지만, 어찌 보면 초반부터 매우 무책임한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섣불리 실망할 일만은 아니다. 먼 여행을 앞두고 이만한 불편도 감수하지 못한다면, 황홀할 지도 모를 미지의 여행을 어찌 무사히 끝낼 수 있겠는가!

전체적인 얼거리는 그렇다 치고, 골자는 매우 알차고 건실한 편이다. 제3장은 신학과 영성의 부정적인 관계(신학의 추상화, 지식의 교만)를 경계하고 그 긍정적인 관계를 복원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제대로 된 신학은 영성을 포용하며, 영성에 지식을 주며, 영성을 유지한다"(57쪽)거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며 기도하는 방법이 기독교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63쪽)라는 주장은 교회적 적합성 혹은 현실적 책임을 상실한 상아탑 신학자들과 신학(학위)을 한낱 출세의 수단이나 목회의 겉포장 정도로만 여기는 무식한 목회자들은 반드시 엄중히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다.

제4장부터 제7장까지는 기독교 영성 함양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사례들을 차례로 소상하게 소개한다. 저자는 내용의 거의 절반을 제4장(영성을 위한 신학적 근간 : 사례 연구)에 투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저자가 기독교 영성을 위한 신학의 중요성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영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 신학의 일곱 가지 분야(창조, 인간의 본성과 운명, 삼위일체, 성육신, 대속, 부활, 종말)를 해설-적용-예증의 순서로 간결하게 소개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71쪽) 영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독교 신학의 다른 주제들, 예컨대 교회의 본질과 성찬의 기능 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물론 이 책은 조직신학 입문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 입문서 역할을 하려는 이 책이 기독교 신학의 전체 주제를 소상히 논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이 "기독교 신앙의 범위와 규범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인 경험"이라는 정의와는 다소 괴리되듯이, 저자는 전반적으로 삶의 개인적, 인격적인 차원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성서가 사회적, 역사적, 집단적 전승의 집적(集積)이므로 개인의 눈으로만 읽기보다는 공동체의 눈으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교회론'을 생략한 것은 지면상의 단순한 생략을 넘어서 결정적인 구조적 결함일 수도 있다.

물론 저자의 시야가 항상 협소하게 개인적, 인격적인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예컨대 창조에 관해 말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독자의 시선을 세상과 창조 세계 전체로 인도한다. 여기서 저자는 '생업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향한 영성'과 '환경과 인간과 세상을 돌보는 것, 환경과 복지 사역의 중요함'을 강조한다(78쪽). 그러나 저자는 창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경이로움과 영광을 말하는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음으로써, 그의 시야가 여전히 수직적, 일방적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창조의 어두운 면, 즉 혼돈(Chaos)과 파괴, 악의 실재 혹은 창조의 고통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보이며,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교란하는 거대한 세력(레비아단)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듯하다. 가장 거시적인 신학 주제랄 수 있는 '창조'에 관해서 영성의 강조점이 이처럼 일방적이라면, 다른 것은 또 어떨까?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저자는 인간의 자율성, 죄, 영적 성장을 거론하면서도, 인간의 사회성과 역사성, 공동체성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삼위일체가 아무리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독특한 주제라고 해도, 삼위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저자는 전혀 몰랐을까? 또한 저자는 예수의 죽음의 전통적인 의미(대속적 희생)만을 너무 강조하느라, 죽음에까지 이른 예수의 삶의 역사적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수의 고난과 피조물의 고난이 어떤 상관성을 갖는지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영성이 무엇보다 고난 속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고 한다면, 피조물의 고난에 대한 저자의 무관심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저자는 부활의 다층적, 다원적 차원을 전혀 모르는 듯, 부활을 다만 죽음과만 대립시키고 있다. 그리고 생명의 총체적 차원을 가장 잘 드러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주제인 '종말론'에서도 역시 저자는 지나치게 개인적, 내세적, 초월적 소망에만 관심을 갖는다.

물론 이 책의 목적이 기독교 신학 전체를 소개하는 데 있지 않고, 영성이라는 거선(巨船)으로 이끄는 작은 도선(導船)의 역할을 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지적은 좀 과욕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성'을 말하고 '삶의 총체적인 경험'을 말하는 저자가 너무 일방적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일 뿐만 아니라 영성에도 치명적일 수가 있음을 여기서 분명히 해 두고 싶다. 그렇지 않아도 '영성'이라는 용어 자체가 주는 묘한 신비감 혹은 초월적 함의(含意)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어긋난 길을 걷거나 엉뚱한 길에서 헤매야 했다. 저자를 비롯한 많은 영성의 대가들이 균형을 유지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靈)이라는 단어 때문에 혹시 몸, 육체, 사회, 역사 등의 용어를 은근히 억압하는 심리적 함정에 빠지기가 쉽지 않았을까? 물론 '영성'을 말하는 자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도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변수(變數), 아니 상수(常數)가 되었을 법하다.

그 다음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 시대의 상황에 걸맞게 기독교 영성을 위한 이미지(잔치, 여행, 포로, 투쟁, 정화, 신앙의 내면화, 광야, 올라감, 암흑과 빛, 침묵)와 시각화(성육신, 창조, 성례, 십자가)와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카톨릭 교회에서 실천되어 온 신앙의 시간적 리듬화(교회력)와 영적 공간화(건축, 제단, 성상, 성화, 성지)의 중요성을 새삼 부각하려고 애쓴 점은 특히 우리 시대의 개신교에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 우상 혹은 형상 타파 운동으로 인해 개신교에서는 상징 혹은 이미지는 상당히, 아니 거의 황폐해졌다. 겨우 가끔 실시하는 성만찬과 밋밋한 십자가와 조잡한 촛불 혹은 빛의 상징 정도로 만족하는 개신교는 '말과 말씀'의 과잉 때문에 너무 시끄러운 편이다. 개신교에는 거룩한 독서, 기도와 침묵, 명상과 묵상이 너무 결핍되어 있고, 그래서 개신교의 영성이 천박하고 경박하다는 비판을 들을 만하지 않은가!

마지막 장(제7장 : 전통 끌어안기)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작가들의 주옥과 같은 글들을 인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연구를 위한 자극을 줄뿐만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와 넓이로 안내한다. 다만 여기서도 아쉬운 점은 저자가 삶의 총체적 경험으로 안내할 수 있는 다른 길은 거의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예배와 성만찬, 성도의 교제, 사회봉사, 사회참여와 같은 다른 길들이다. 이것도 오직 공동체로서, 그리고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걸을 수 있는 길이란 점에서 저자는 여전히 개인주의적 관점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편이다. 영성의 길은 결코 고독한 개인으로서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며, 영성의 열매도 결코 개인 혼자서만 따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필자가 조금 딴 길로 벗어나는 것을 독자들은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얼마 전에 필자는 아까운 후배 한 사람과 영원히 작별해야만 했다.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10년 동안 '고대 사막 교부들의 영성'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10년 동안 '영성 신학'을 소개하고 '영성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방성규 박사(한영신학대학 교수)가 52세를 일기로 바람처럼 이 세상을 훌훌 떠나버린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비전은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이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면, 나는 이 글을 그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두 말 하지도 않고, 아니 싱긋이 웃으면서, 그는 선배의 강요를 기쁘게 받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필자보다 훨씬 더 좋은 글을 썼을 것이다. 참으로 아깝고, 아쉽다! 필자는 그를 기억하고 추도하는 마음으로 부족한 이 글을 썼다. 그가 남긴 책과 글을 읽고 싶은 분들은 <성결신학연구소>의 홈페이지를 열어 보시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그리고 그의 글을 통해 여러분의 영성이 더욱 온전해지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끝으로 부족하나마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해 본 필자로서 이 자리를 빌려 외롭고 힘든 영적인 고행을 무사히 마치신 역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를 드린다. <기독교사상 2006년 4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