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J.M. 로호만 지음, 오영석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이신건

나는 지난 주일까지 총 35회에 걸쳐 "사도신경"을 풀이하는 설교를 해 보았다! "해 보았다"고 함은 교리 설교가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교리 설교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다"는 뜻이다. 예배처럼 설교를 실험한다는 것도 신성모독에 가깝다. 하지만 내 전공을 모처럼 현장과 접목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대로 세상을 한번 거스르고도 싶었다. 너도나도 가벼운 설교, 재미나는 설교, 웃기는 설교, 감성적인 설교를 좋아하는 형국에 누가 딱딱하고 지루한 교리 설교를 들으려고 하겠는가! 세상 걱정과 마음의 상처 때문에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해 모여든 성도들은 현실과 무관한 듯한 설교를 좋아할 리가 없다. 더욱이 우리 교회에는 노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므로 나의 시도는 처음부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기(傲氣)랄 수도 있겠다. 신학생들은 실용적이고 쉬운, 그리고 학점을 따기 쉬운 수업을 골라 듣는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날로 인기가 없는 과목으로 전락하고 있다. 목회 현장에 들어선 목회자들은 조직신학을 목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조진신학"으로 폄하해 버린다. 더욱이 그들은 조직신학을 고민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프로그램들은 모두 끌어들이지만, 그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거의 하지 않는 않는다. 아니 교회 성장에 도움만 된다면, 때로는 비(非)신학적, 반(反)신학적 결정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니 한국 신학의 발전을 어떻게 기약할 수 있겠으며, 성숙한 신앙인을 어찌 배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곧 무너질 거대한 모래성을 쌓는 것 같다. 물론 대형 교회는 날로 비대해질 것이고, 작은 교회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그러나 비대한 공룡은 언젠가 사라졌지만, 작은 동물은 살아남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근본에 충실하지 않고 몸집 불리기에만 혈안이 된 대형 동물은 위기에 허약하다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작지만 알찬 교회를 원하며, 그런 교회가 미래의 새로운 그루터기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살림살이와 목회가 어려울수록 온갖 방법에만 매달리지 말고, 배고프고 한가한 김에 차분히 근본을 되돌아보심도 좋지 않겠는가! "근본"하면, "근본주의"라는 고약한 단어가 생각나겠지만, 근본을 착각하거나 오용한 사람들이 문제지, 어찌 근본 자체가 문제가 되겠는가!

물론 기독교의 근본이 무엇인가는 사람들에 따라 견해가 다를 것이다. 영성이냐, 신학이냐, 실천이냐? 신학이라면, 어떤 신학이냐? 하지만 나는 조직신학을 들고 싶다. 조직신학은 신학의 근본이다. 이 말은 다른 신학을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신학은 결국 하나의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체계를 가짐은 곧 뼈대를 가짐이요, 뼈대를 가짐은 곧 옹골찬 삶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근본과 뼈대와 같다. 순진하게 사도신경이 형성된 시대적, 정치적 맥락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교리의 폐해도 몰라서 하는 소리도 더욱 아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단순히 정치적 문서만도 아니고, 교리적 선언만도 아니다. 사도신경은 오래된 역사적 전통이라는 씨줄과 세계교회의 신앙이라는 날줄이 함께 얽혀져 있는 기독교 신학의 상징적인 얼굴이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가장 잘 압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주문(呪文)처럼 외울 게 아니라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는 것은 신앙과 교회의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나는 교리라는 것이 죽은 과거의 뼈다귀가 아니라 신앙의 뼈대를 이루는 살아 있는 증언임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다행히 지금도 살아서 신앙의 근본을 증언하는 사도신경 해설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정용섭 역)은 가장 학문적이지만, 소화하기 좀 어렵다. 바르트의 "사도신경 해설"(신경수 역)은 가장 정통적이지만 설명이 난해하고, 영어로 번역된 책을 재번역한 탓인지 어색함이 역력하다. 한스 큉의 "믿나이다"(이종한 역)는 기상이 호쾌하지만, 내용은 빈약한 편이다. 가장 마음에 든 책은 로호만의 "사도신경 해설"이었다.

로호만(J.M. Lochmann)은 체코 사람으로서 스위스 바젤(Basel)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은 입지적인 분이다. 몇 해 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에 그분의 강연을 듣고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소탈하고 겸손한 분이셨다. 그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바젤의 신학 거장 바르트였다. 하지만 그는 바르트의 우파처럼 교리 해설에만 매달리지 않고, 바르트의 정치신학적 해석을 실감나게 계승한다. 그리고 그는 바르트의 좌파처럼 바르트를 단지 정치적 당파주의자로만 보지 않고, 그를 기독교의 정통 신학자로 진지하게 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르트보다 훨씬 덜 교조적이다. 그는 교리의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할 줄도 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교리의 중요함도 쉽게 간과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죽은 교리를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으로 되살리는 슬기를 발휘한다. 번역자는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매우 평이한 문체를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지금도 독자들의 애잔한 사랑을 계속 받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이 책은 옛날의 거친 활자판으로 인쇄된 약점을 안고 있다. 번역은 전체적으로 무난하지만, 어색한 번역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 아마도 독어 문장 "Es geht um ..."을 번역한 것 같은데, 이 문장은 대체로 "... 가 중요하다", "... 가 본질이다", "....를 말한다"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 하지만 역자는 이 문장을 천편일률적으로 "... 가 문제다"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말로 "문제"라는 말은 대개 부정적인 뜻을 가지므로 독자들에게 오해를 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약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책보다 더 명쾌하고 웅변적인 사도신경 해설은 당분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 아니 신앙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되짚어보고 흔들리는 신앙의 뼈대를 다시 세우길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끝까지, 그리고 찬찬히 읽는다면, 이 책은 근본에 충실하고 뼈대가 있는 예수쟁이를 기필코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