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신학

- 김명용 지음, 이레서원, 2007년, 3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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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건

 



현대신학의 교부로 칭송을 받던 칼 바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40년이 지났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을 법한 긴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지금까지 그의 중요한 저서들은 거의 소개된 편이며, 그에 관해 씌어진 논문들과 책들도 - 번역된 논문과 책을 포함하여 - 이미 상당히 많은 편이다. 물론 바르트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을 지시하는 중요한 책『 Fides quaerens intellectum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바르트의 불후의 대작『 Kirchliche Dogmatik 』(교회 교의학)도 - 다행히 지금 바르트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착착 번역되고 있지만 - 아직 다 번역되지도 않았다. 설령 이 책이 언젠가 완역되어 나온다고 하더라도, 바르트의 글이 워낙 심원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글을 매끄럽게 번역하기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신학의 기능은 교회의 기능이고, 신학은 설교를 위해 존재한다!"고 외쳤던 바르트의 설교는 유감스럽게도 한 편도 번역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는 책들은 이미 상당히 많이 나온 셈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이미 케케묵은 냄새를 풍기는 구시대 신학처럼 보이기도 하고, 더 이상 새로운 흥미를 일으킬 것 같지도 않으며, 그래서 소수의 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애면글면 탐구해야 할 매력을 풍기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더욱이 하루가 멀다는 듯이 새로운 이론들과 책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정보화 문명이 현란한 춤을 추는 이 시대에 칼 바르트의 해묵은 신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의심할지 모를 일이다. 

 

이러한 형편 가운데서 또 하나의 바르트 소개서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필자와 똑같이 (우연하게도 나이도 비슷하다!)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몰트만의 지도 아래 바르트를 연구한 김명용 박사가 쓴 이 책이 곧 그것이다. 바르트의, 그리고 바르트에 관한 숱한 책들 위에 왜 또 다시 하나의 책을 굳이 쌓아올려야만 하는가? 질적, 양적으로 전무후무하다시피 방대하고 심원한 바르트의 저작들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되고 해명되지 않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바르트 신학의 수원지는 도저히 다 퍼낼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는 뜻인가? 물론 이 책은 사전에 기획된 성격의 책이 아니라, 그 동안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했던 논문들을 한데 모은 책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한계를 보완하였기 때문인지, 이 책은 칼 바르트에 관한 입문서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깔끔하고 충실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은 무엇보다도 간결하고 평이한 문체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다른 책들과 어느 정도 차별성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트를 경원시하거나 타부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차적으로 바르트의 사상이 매우 심오하고 그의 글까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때로는 철학과 문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때로는 전문가 수준의 성서주석 혹은 성서해석의 실력도 겸비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바르트의 저술 동기와 시대적 배경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일가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바르트의 사상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사상이 때로는 가파르게, 때로는 서서히 변화되었다는 사실에도 있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변화를 세밀히 읽어내지 못한다면, 독자들은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제대로 맛보기는커녕 주변만을 맴돌기가 쉽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르트가 지루하리만큼, 아니 끔찍스러울 만큼 긴 문장의 만연체를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에 있다.

 

더욱이 바르트의 글은 단순히 논리적인 질서만을 따르지 않는다. 그의 글은 때로는 우렁찬 함성을 토하는 웅변과 같고, 때로는 성령에 감동된 듯이 열정적으로 토해내는 설교와 같으며, 때로는 탁월한 수사학을 구사하는 멋진 문학 작품과도 같다. 그러므로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허술한 장비를 갖고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려는 시도처럼 무모하기 짝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한국말로 번역된 대개의 책들은 난삽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러니 감히 누가, 그리고 무슨 깜냥으로 이 고약한 험산준령을 오르기는커녕 한번 밟아보겠다고 엄두를 내려고 하겠는가!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바르트 관련 서적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게 씌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은 저자가 바르트와는 달리 간결한 문제를 즐겨 쓴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바르트의 복잡다양한 사상을 충분히 소화한 다음에 확신을 지니고 글을 썼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사실은 또한 저자가 그 누구보다 더 섬세히, 더 정확하게 독자의 눈높이를 배려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바르트의 글을 보자마자 성급히 손사래를 치던 독자들은 이 책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때로는 바르트의 사상에 빠져드는 독서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가 신학을 '아름다운 학문'이라고 불렀다면, 분명히 그의 사상과 체계, 그리고 그의 글까지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그의 신학을 가급적 망가뜨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길고 긴 그의 문장을 가급적 짧게, 복잡한 그의 체계를 가급적 쉽게 풀어내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 될 것이다. 만약 어려운 글쓰기도 인문학이 위기를 불러들인 한 가지 요인이 된다면, 저자의 쉬운 글쓰기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시도로서 귀감이 될 만하다고 여겨진다. 표현력과 번역의 실력이 부족하지만 않다면, 굳이 어렵게 쓰거나 장황한 논리를 자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심원한 사상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가 있고, 또 모름지기 그래야만 한다!     

 

서두가 너무 장황해졌다고 짜증을 낼 것 같은 독자들의 너그러운 아량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 책을 펴낸 의도는 무엇인가? 저자의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은 "바르트 신학의 핵심적인 특징을 설명하면서 바르트 신학 속에 나타나고 있는 신학적 변화와 발전을 동시에 언급하도록 노력했다."(6쪽)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책은 "생애"(11쪽)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비록 적은 분량이고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바르트의 생애로부터 시작하는 저자의 깊은 뜻은 충분히 헤아릴 만하다. 비록 바르트의 글이 밋밋하고 현학적인 이론처럼 보일지라도, 비록 바르트의 웅장한 교의학 체계가 조용한 서재와 고독한 산장에서 완성되었을지라도, 시대를 향한 치열한 관심과 고민, 그리고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인 열정과 발언을 담고 있지 않는 바르트의 글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바르트의 생애를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주로 이론적인 분석과 평가에만 그치고 있는 대다수의 책들과는 작은 차별성을 지닌다. 사족(蛇足)이지만, 장정도 시샘이 날 정도로 예쁘고 단아하다. 표지는 마치 내용의 맛깔을 미리 암시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내면보다 외모를 더 칭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바르트가『교회 교의학』의 하얀 외장을 여비서(키르쉬바움: 벚나무)의 치마폭에 비유했듯이, 이 책의 빨간 치마폭 안을 잠시 들여다보기로 하자. 이 책의 목차는 바르트 신학의 중요한 항목을 거의 포괄하고 있다. 칼 바르트의 "생애"에 이어 "로마서 강해"(53쪽)와 "바르멘 신학선언"(89쪽)에 대한 설명이 나오며, 그 다음에는 교의학적 주제들(계시론, 예정론, 신론, 창조론, 화해론, 윤리학)이 망라된다. 다만 앞의 주제에 비해 결코 비중이 떨어지지 않는 다른 교의학적 주제들, 곧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이 빠져 있는 것은 아쉽다. 개정판에서는 이런 주제가 보충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 다음에 이 책은 예상 밖에 교의학적 주제로부터 벗어나 "바르트 신학의 발전과 사회주의"(285쪽)라는 조금 독특한 주제로 달려간다. 그런 다음에 이 책은 "바르트 신학과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307쪽)이라는 주제로 끝을 맺는다.

 

이 책이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을 들라면, 저자의 의도대로 바르트 신학 속에 나타나고 있는 신학적 변화와 발전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로마서 강해 제1판과 제2판(53쪽 이하)의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과 1936년의 예정론과 1942년의 예정론의 차이(150쪽 이하)를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네 번에 걸쳐 입장을 달리한 바르트의 입장(285쪽)을 소개하는 부분은 특히 흥미롭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이 책의 모든 주제를 일일이 소개하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의 특징, 아니 그보다는 바르트의 신학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만을 슬며시 들여다보기로 하자. 먼저 “바르트 신학의 특징"(37쪽)으로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 '하나님의 은총의 신학',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신학'을 들고 있다. 바르트가 스위스 개혁교회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성장하였고, 결국에는 개혁파 신학자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주권'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특별히 강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특징이 '말씀'을 강조한다는 사실에 있다면, 바르트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는 것도 역시 자연스럽다.

 

다만 '예정론'(147쪽)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바르트가 깔뱅(Calvin)의 예정론을 고스란히 계승하지 않고 철저히 비판하고 새롭게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개혁교회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서적이라고 해야 더 알맞다. 실로 바르트는 자신을 낳고 길러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 교회를 위해 신학하려고 힘썼지만, 그는 종파적인 한계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혁교회를 넘어서 온 세계의 신학자에게 폭넓은 사랑과 아낌없는 존경을 받는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물론 바르트가 조용한 고향 스위스를 떠나 온갖 사건과 사상이 소용돌이치는 독일, 아니 유럽의 중심에서 몸으로 복음을 증언해야만 했던 사실에도 있겠지만, 그의 신학이 철저히 성서 위에서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에도 있다. 그의 글, 특히 『교회 교의학』은 성서의 주석과 해명에 엄청난 양을 할애한다. 그래서 그는 특정한 종파를 넘어선 복음적이고 세계적인 - 에큐메니칼한 - 신학자로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바르트가 하나의 전통에만 집착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무엇보다도 저자의 말대로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실은 바르트가 죽기 바로 직전에 절친한 친구 투르나이젠(Thurneysen)과 나눈 대화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분명히 통치하신다."라는 대화 말이다. 바르트 신학의 핵심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활동을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하나의 원리로 고정화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원리처럼 굳어진 전통적 예정론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하나님의 은총의 신학'이라고 지적한 저자의 설명은 매우 타당하다. 이미 베르카우어(G.C. Berkouwer)가 바르트의 신학을 '은총의 승리의 신학'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저자의 말대로 분명히 바르트는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에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나라와 결코 동일시할 수 없었다(49쪽). 그러므로 그는 한편으로는 인간(이성, 경험, 감정, 역사, 민족 등)을 절대시하는 문화개신교(이른바 신개신교 혹은 자유주의 신학)과 더불어 치열하게 싸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전통을 고착화하려는 가톨릭 신학과 더불어도 서슴없이 싸웠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할 수 있었겠는가! 특히 '하나님과 세상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였던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는 이 점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로마서 강해 제2판의 신학을 "천상의 독백"(짜른트)이라느니,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밖의 게토 지역으로 쫒아내는 신학"(판넨베르크)이라는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로마서 강해 제2판의 역설의 신학이 사회주의 운동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300쪽 이하)라는 저자의 입장도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관해 더 상세히 알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단네만(U. Danemann)이 쓰고 필자가 번역한『칼 바르트의 정치신학』(한국신학연구소)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여러 신학자들(골비처, 마르크바르트, 단네만)이 주장하였다시피, 종교사회주의를 위한 바르트의 친화성(당파성)은 그의 신학의 다양한 단계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였다. 더욱이 바르트는 상아탑 속에서 사색하던 '이론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려고 애쓴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학' 혹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신학'으로 표현되고 발전되었다는 사실도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싶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특별히 우리의 흥미를 끄는 글은 "바르트 신학과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307쪽)이다. 바르트에 의해 대변되는 신정통주의 신학과 메이천에 의해 대변되는 근본주의 신학 간의 갈등이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더 나아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상히 설명하는 저자의 폭넓은 지식과 혜안이 돋보인다. 바르트의 사상이 아무리 웅장하고 독창적일지라도, 그의 사상이 우리의 삶의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묻는 독자들은 특별히 이 부분에 주목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리석은 명분과 추악한 욕심으로 한국교회를 더 이상 분열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독자들은 이 책에서 소중한 깨달음만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용기까지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