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신학



(리처드 버캠 지음, 김도훈/김정현 공역, 크리스천헤럴드, 2008년, 439쪽)



 

이신건



참으로 생게망게하다!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느라 마냥 바쁘기만 할 것 같은 한 신약학자가 조직신학자인 몰트만에 관한 연구서를 썼다니 말이다. 아니 이전에도 그가 이미 몰트만에 관해 한 권의 책(Messianic Theology in the Making)을 썼단다. 앞의 책을 원서로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도 그러했지만, 번역된 책을 대하는 느낌은 더욱 그러했다.

 

이런 느낌은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먼저, 성서신학자가 어찌 감히 조직신학자의 분야를 함부로 넘볼 수 있으랴? 자기 분야에 신경을 쓸 시간도 부족할 텐데,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도 좋은 업적을 쌓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텐데, 어찌 조직신학의 영역까지 탐할 수 있으랴! 그러니 참으로 새삼스럽다.

 

하지만 필자는 저자의 행동이 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조직신학자들은 온갖 분야를 넘나들며 눈치 공부를 하고 눈치 밥을 먹어야 하는데, 다른 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공부만으로도 충분히 밥을 먹고 더욱이 위세까지 떨치려고 한다. 그래서 종종 시기심이 발동하고, 종종 화도 난다. 아니 그보다는 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전문화 시대라고 말들 하지만, 그렇게 자잘하고 옹졸한 이론만으로 인생이 무슨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조직신학적 사고를 하지 않고도, 조직신학적인 사유 체계를 무시하고도 어찌 위대한 하나님과 거대한 세상을 놓고 갑론을박할 수가 있으랴! 그런 점에서 버캠의 배포와 용기가 적잖이 부럽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조직신학자들의 글을 해석하고 정리해 온 사람들은 대개 교회사학자들이었다. 예컨대 미국의 교회사학자 브로밀리(G. W. Bromily)는 바르트의 교의학을 개관하는 책을 썼고, 한국의 교회사학자 이형기 교수도 몰트만의 신학을 알기 쉽게 간추린 적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니 다른 시각으로부터 다양하고 풍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교차학문의 맛이 얼마나 쏠쏠하겠는가!

 

몰트만 교수의 연세가 어언 82세를 넘겼으니, 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충분히 나올 법도 하다. 몇 해 전에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제자(G. M-Fahrenholz)가 쓴 몰트만 연구서 한 권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사들고 왔지만, 여태 번역하지 못해서 독자들에게 조금 미안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제는 드디어 몰트만 교수의 자서전까지 나왔다. 이 책은 필자가 면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번역하리라 다짐하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필자가 모르는 몰트만 연구서들이 제법 나왔을 법하다. 좌우간 서두가 길어졌음을 독자들은 널리 혜량하시기를 바란다.

 

이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1987년 나는 1960-1979년까지 20년 간 몰트만의 신학의 발전과정을 해명하는 책을 출판하였다. ... 본 저서는 1993년까지 출판된 몰트만의 모든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포괄적이다."(8쪽) 유감스럽게도 1993년 이후에 나온 중요한 저작들, 곧 『오시는 하나님』(1995년)과 『신학의 방법과 형식』(1999년)과 몰트만의 자서전 『드넓은 공간』(2007년)까지 다루었다면, 그의 시야가 훨씬 더 포괄적이었을 뻔했을 텐데...! 그에게 또 한 권의 책을 기다려보는 것은 뻔뻔한 짓일까?

 

저자에 의하면 '몰트만의 신학 개관'(I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은 주해와 분석을 비판적 논의 및 평가와 병행하고 있지만, 몰트만의 기여에 대한 그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매우 긍정적이다. 비록 몇몇 요소들을 문제 삼거나 혹은 그의 일부 논증들이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할 때도 있지만, 그러한 비판조차 그의 신학적 기획의 특성과 방향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저자의 말대로 몰트만의 신학은 열린 대화 속에 발전하고 있는 미완성 기획이다. 그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메시아적 미래를 향해 선택한 길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길을 찾는다.

 

자고로 어느 누가 학문을 완성했다고 감부 자부하겠는가? 그러므로 아무리 큰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다는 인물과 사상도 서서히,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급격히 변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변화가 무슨 대수요, 무슨 창피겠는가? 다만 뒷걸음치는 행동거지(수구꼴통, 보수회귀)만은 언제나 큰 대수요, 큰 창피일 따름이다.

 

'몰트만의 신학 개관'(I장)에서 저자는 몰트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짤막한 개관을 제공한다. 그리고 몰트만 신학의 방법론적 원리로서 (1) 그의 신학이 실천과 송영을 지향하며, (2) 대화에 대한 개방성을 특징으로 가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특히 자신의 신학의 특징이 '성서적 토대'와 '종말론적 방향 설정'과 '정치적 책임성'에 있다고 말한 몰트만의 생각과 일치한다. 다만 다른 책(『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에서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이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호기심과 환상일 따름이었다."고 고백한 적도 있음에 주목할 필요도 있겠다. 여기서 저자는 몰트만의 종말론, 신정론, 교회론, 창조론, 정치신학, 기독론, 성령론을 압축적으로 정리한다. 그러므로 성미가 급하시거나 공사다망하신 분은 이 부분이라도 정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몰트만에게 제기되었던 몇 가지 비판적인 문제들도 소개하고, 나름대로 해석한다. (1) 몰트만의 주제들은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그렇지만 각 책의 일방성은 다른 책들을 통해 균형을 잡는다. (2) 몰트만의 변증법적 언어가 때로 지나치게 단순하고 정치 영역에 적용되고 있다. (3) 몰트만이 하나님의 자존성과 수난불가능성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타협하고 세계역사를 하나님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헤겔식'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리고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 삼신론과 구분되지 않는다. (4) 몰트만의 글이 철학적 분석과 논리적 엄격성을 결여하고 있다. (5) 사변적 요소들이 통제되지 않고 등장하고, 후기 저작에서는 역사비평적 해석을 무시하는가 하면, 해석학적 원리를 위험할 정도로 모호하게 내버려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성서적 신앙과 근대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해석학적 구조들을 열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실재를 인간 역사로 이해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을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점을 몰트만의 가장 큰 업적으로 본다. 그리고 저자는 몰트만의 해석학적 비옥함과 새로운 상황과 통찰에서 접촉점을 발견하는 그의 비전의 놀라운 능력을 높이 산다.

 

II장(『희망의 신학』다시읽기)은 신학적으로 가장 탁월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의 하나인 『희망의 신학』을 평이하게 풀이한다. 저자는 이 책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듣는 이유로서 당대의 상황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근대 세계에 대하여 비판적 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든다. 이 책은 1960년대에 지배적이던 낙관주의적 분위기에 호소하였지만, 이 책이 말하는 희망은 낙관주의의 얕은 흙보다 훨씬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바로 예수의 부활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종말론적 약속의 사건이요, 이 세계의 새 창조를 향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진정한 기독교는 항상 급진적인 희망이었다고 저자도 덩달아 말한다.

 

III장(하나님의 고통)에서 저자는 몰트만이『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을 상호 관련시키고 있음을 본다. 몰트만이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세 가지 이유는 (1) 그리스도의 수난, (2) 사랑의 본성, (3) 인간 고통의 문제 때문이다. 하나님의 고통의 핵심적인 요소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예수의 외침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은 삼위일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적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교부의 기독론을 필연적으로 수정해야만 했다고 저자는 몰트만의 편을 적극적으로 든다.

 

IV장(신정론)에서 저자는 오늘날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고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신정론’에 관한 몰트만의 견해를 소개한다. 특히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까마조프의 형제들』과 까뮈의『반항아』와 위젤의『밤』과『황혼』의 내용들을 적절히 인용하는 기량을 발휘하면서, "불가해하고 무의미한 고통 앞에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를 몰트만의 견해를 중심으로 맛깔나게, 그러면서도 처연하게 풀이해 나간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지고, 그와 함께 고통에 맞서 저항하는 분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자발적인 연대고통으로 응답함으로써 희생자들과 사랑 안에서 연대할 것을 촉구하며, 고통에 대한 어떠한 정당화도 거부할 것을 종용한다. 이것은 비록 새 창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유일한 자기정당화이다.

 

V장(정치신학)에서 저자는 몰트만의 기독교 희망 이해는 혁명적인 실천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기독교 희망 안에서 정치적 변화를 위한 동력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핵심적 요소들은 예기(豫期)라는 개념과 희생자들과 사랑 안에서 연대하는 실천, 그리고 인권을 통한 인간의 창조된 존엄성과 운명의 실현이다. 새 창조라는 종말론적 목적은 그 상대적 근사치들을 현재 속에서 실현하려는 시도들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시도들에 힘을 불어준다고 한다.

 

VI장(교회론)은 몰트만의 세 번째 역작『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몰트만의 교회론을 설명한다. 저자는 먼저 (1) '메시야적 교회론'과 (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구조와 방법을 설명하고, 이어서 (3) '고통과 기쁨'과 (4) '성숙하고 책임 있는 회중'과 (5) '세상을 위한 교회'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VII장(삼위일체 안에 계신 성령교회론)에서 저자는 몰트만의 성령론을 삼위일체적 구조 안에서 규명하려고 애쓴다. 저자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 헤겔식의 변증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사회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관해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에 계속된 작품 속에서 나타난 몰트만의 실패를 지적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와 별개로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하고자 시도한다면, 우리와 함께 하는 역사 안에서 그분이 그분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말만 해야 하는데, 몰트만이 이 한계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면생활을 너무 깊숙이 넘본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메츠와 나눈 몰트만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비엔나의 가톨릭 신학자 메츠(J. B. Metz)가 어느 날 밤에 몰트만을 이렇게 비꼬았다고 한다. "자네는 부인 엘리자베트의 내면생활보다 하나님의 내면생활을 더 잘 알고 있군!" 몰트만은 어떻게 대꾸했겠는가? "사랑하는 밥티스트, 자네가 하나님에 관해서는 그처럼 조금 밖에는 알고 싶지 않다니,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군."(『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그리고 몰트만의 후기 작품 안에서는 해석학적 무책임성과 관련된 무절제한 사변이 발견된다고 한다. 굳이 필자의 스승을 변호하자면, 인간은 늙을수록 집중력이 점점 떨어지지 않을까? 아니 늙은 노인은 단순해지고 순수해져서 어쩌면 젊은이보다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누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부, 그리고 정확히 알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아니 사람 앞에서도 우쭐댈 수 있겠는가? 신비 앞에서는 차라리 침묵하고 찬양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지면의 제약 때문에 VIII장(삼위일체와 인간이 자유)과 IX장(창조와 진화)과 X장(메시아적 기독론)과 XI장(신비주의)을 소개하지 못한 점이 조금은 아쉽지만, 이 부분은 독자들의 노력에 맡겨두기로 한다. 혹시 독자들이 이 짧은 정보만으로도 몰트만을 좀 알게 되었다고 헛되이 자랑하지나 않을지 내심으로 걱정이 되는 마음도 솔직히 작용하였음을 숨기지는 않겠다.

 

끝으로 번역자의 노고를 진정으로 치하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다. 번역은 고행과 같다. 고행은 누가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므로, 번역의 허실한 열매를 보고 굳이 투정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번역에 무심하고 태만한 학자들은 이 기회에 제발 좀 반성하시기를!

 

다만 독자들을 위해 이 자리를 빌려 어색하거나 잘못된 번역을 지적하고 싶다. 57쪽 4, 5줄에 나오는 '전유'라는 단어는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어려운 한자어로서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차라리 '적용' 혹은 '특징'도 괜찮을 듯하다. 127쪽 10줄에 나오는 "어렵다는 그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어색하므로 "어렵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로 바꾸는 것이 좋다. 253쪽에 나오는 '인격'은 '위격'으로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직도 인격(=인간)으로만 취급하고 '위격'과 '인격'을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섞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물론 성령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라 신격이지만, 인격적이고 그래서 인격성도 지닌다.

 

그리고 저자의 이름(Bauckham)이 한국말로 정확하게 표기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필자로서는 '버캠'보다는 '보캠'이 더 나아 보이는데 말이다. 괜한 기우인가? '옥에 티'가 되겠지만, '리처드'와 '리차드'의 혼용,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와 '성 안드레' 대학의 혼용도 발견된다. 결정적인 오류는 317쪽 4줄에 '몰트만'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난데없이 '바르트'가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몰트만의 작은 실패가 몰트만의 큰 성공을 결코 떨어뜨리지 않듯이, 이런 작은 실수가 번역자의 큰 공헌을 결코 깎아내리지는 못하리라!

 

하물며 저자의 노고는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가! 말머리에서 필자가 '생게망게하다'는 말을 썼기 때문에 혹시 독자들이 "이 말이 무슨 뜻이고, 무슨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지?"를 몰라서 당황하셨을 지도 모르겠다."성서학자라는 사람이 성서주석이나 잘 할 것이지, 주제넘게 조직신학자까지 주석하려고 드는가?"라는 이유 있는 항변과 "성서학자가 무슨 깜냥으로 감히 조직신학을 논하는가?"라는 성급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분석과 해석은 참으로 탁월하다. 공시적, 통시적 해석을 넘나들며, 독자들을 몰트만에게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자상하게 인도하려는 그의 진지한 노력 앞에서 나의 항변과 비판은 완전히 덧없어졌다. 이제는 상당히 거대하고 비대해진 몰트만의 신학이라는 거선(巨船)에 어떻게 승선할지를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먼저 이 책을 유용한 도선(導船)으로 활용해 보시기를 간곡히 권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신명나게 춤추지는 않을지라도, 흥겨워서 노래하게 되리라. 그리고 좋은 신학자, 좋은 저술가, 좋은 번역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