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에 대한 신학적 응전

- 과학과 종교의 대화 -


 

 

알리스터 맥그라스
박창훈 번역(서울신대 교회사 교수) 


   

 

리차드 도킨스의 무신론은 그의 자연과학의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식의 흥미로운 주제를 여러분에게 말하게 되어 큰 기쁨입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큰 특권이고, 오늘 여기 서울에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 강연에서 저는 리차드 도킨스가 2006년 영어로 [망상의 신, God Delusion]이란 제목으로 출판했고, 한국에서는 약간 다르게 [만들어진 신, The Created God]이라 번역된 책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제가 처음 리차드 도킨스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1977년 그의 첫 주요 저서인 [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를 읽었을 때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신학자가 되기 전에 저는 자연과학자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후에 의학연구위원회의 실장이 되신 교수 조지 라다 경의 지도하에 생화학분야의 박사과정연구를 끝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물학적 막을 연구하는 새로운 물리적 방법을 개발하여, 어떻게 생물학적인 막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가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는 대중적인 과학서로서 생각한다면 대단한 책입니다. 그러나 도킨스가 종교를 다루는 점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의 생각에 대한 타당한 분석이나 증명의 기초를 세우지 않고, ‘믿음’의 개념을 설명하는 혼란스런 시도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서 나중에 대응하려고 몇 자 적어둔 것을 기억합니다. 25년이 지나서 그 글로 돌아왔는데, 여러분은 이것을 저의 책 [도킨스의 신: 유전자, 문화요소, 삶의 의미, Dawkins' God: Genes, Memes, and the Meaning of Life]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한편, 도킨스는 탁월하고도 도발적인 일련의 책들을 계속 썼는데, 저는 흥미와 존경의 마음으로 이것들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뒤를 이어, [시각장애인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1986),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 River out of Eden](1995), [무지개 풀기, Unweaving the Rainbow](1998), 수필 모임집인 [악마의 사제, A Devil's Chaplain](2003), 그리고 최근의 [만들어진 신](2006) 등을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어투나 초점은 변했습니다. 철학자 마이클 루스(Michael Ruse)는 [악마의 사제]에 대한 서평에서, 도킨스의 관심은 ‘대중적인 청중을 위해 과학에 대해 쓰는 것으로부터 기독교를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탁월한 대중과학자가 (제가 보기에는) 자신의 경우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함으로, 야만적인 반종교 논객이 된 것입니다. 이는 수사학적인 과장, 고도로 취사선택된 증거, 그리고 종교에 대한 분명한 지적 윤리적 장점들을 무시하고 최악의 것에 집중하는 고집 위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만들어진 신]에서 아주 분명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다수는 알게 되겠지만, 저는 최근의 이 반종교적인 책에서 제시한 그의 증명의 신뢰성과 논쟁점에 도전하여, 도킨스에 대응하는 둘째 책을 썼습니다.

   

도킨스는 복잡한 그의 전공과 폭넓은 연구서에 대한 전문가로서, 박학함과 섬세함으로 진화 생물학의 논쟁점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에 관하여 무언가 다루려고 할 때는 또 다른 세계에 들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의 깊은 증거에 입각한 논리는 뒤에 두고, 충격적인 극단순화와 (우연적이라 여깁니다만) 겉으로는 그럴싸한 것에 간혹 잘못된 제시 등으로 양념을 해서, 다소 열을 받은 열광적인 과장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도킨스는 무신론의 과학적인 필연성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무신론 자체는 믿음이 되었고, 진실임을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제가 취하려고 하는 접근법은 간단합니다: 도킨스의 책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과학과 무신론 사이의 지적인 연결에 도전하려는 것입니다. 도킨스는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확고한 무신론적 세계관을 끌고 와서 이를 예언자적 열정과 난공불락의 확실성으로 설교합니다. 그런데 이 연결이 안전한 것일까요? 다윈의 과학을 비판하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는 전체 과학 공동체가 (맡아야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의 목적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연결, 즉 도킨스가 때때로 가정하거나 또 다른 경우는 지지하는 과학적 방법과 무신론 사이의 연결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 강연이 도킨스에 대한 비판적인 것을 제시하기 때문에, 어떤 영역에서는 제가 그를 존경하고 찬양하기까지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그는 탁월한 의사전달자입니다. 1977년으로 돌아가, 제가 그의 책 [이기적인 유전자]를 처음 읽었을 때, 이는 분명히 대단한 책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도킨스의 말을 다루는 뛰어난 방법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과학적 생각을 그토록 명확하게 설명하는 능력을 존경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대중 과학서였습니다. 그 때 뉴욕 타임즈가 이 책은 ‘독자가 천재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종류의 대중 과학서’라 코멘트 한 것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숭이도 가끔 나무에서 떨어지지만, 그 같은 웅변력과 명확함은 그의 저서의 특징으로 줄곧 남아 있습니다.

   

둘째로, 저는 증거에 입각하여 논의를 발전시키는 그의 관심을 존경합니다. 그의 저서를 통하여, 명제를 정당화하는 계속적인 요구를 발견합니다. 주장은 편견이나 전통이나 무지가 아니라 증거에 기초해야만 합니다. 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의 무신론에 열정과 힘을 주는 증거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입니다. 도킨스의 저서를 통해서, 종교인 들은 진정한 세상에 대해 정직하게 대응할 수 없는 부정직한 거짓말쟁이, 바보, 무뢰한으로 악의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부주의하고 어리고 순진한 이들을 유혹하는 거짓의 사악한 몽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더글라스 아담스(Douglas Adams)는 도킨스가 한 때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앞에서 나와 같이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참을 수 없다.’ 아마도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전설적인 자기의를 생각나게 하는 이 문장의 오만함에 우리는 주춤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증거의 기초위에서 논쟁해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력이 그 문장에 스며있습니다.

   

이 강연에서 저는 도킨스의 저서들에 나타나며, [만들어진 신]에서 최고조에 달한 4가지의 중요 주제를 보려고 하는데, 이는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위해 적합한 것입니다. 이는: 1. 자연 과학은 신에 대한 신앙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한다. 2. 종교는 믿음에 근거하여, 자연과학에서 발견하는 확고하고 증거에 기초한 진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후퇴하려는 주장을 한다. 3. 종교는 허약하고 희미한 세계관을 제공한다. ‘제도화된 종교가 제공하는 우주는 작은 중세의 우주이며, 매우 제한되어있다.’그와는 대조적으로 과학은 뚜렷하고 탁월하며, 크고 아름답고 경외를 일으키는 우주관을 제공한다. 4. 종교는 악으로 이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을 감염시키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다.

   

도킨스도 종종 주장하듯이, 과학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는 엄밀히 과학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과학은 무엇이 윤리적인가를 결정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이것은 서구문화와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종교에 대한 도덕적인 거부이며, 이는 가장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문제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이것들을 자세히 살펴볼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킨스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들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를 여러분에게 알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과학은 신에 대한 신앙을 불가능하게 한다.

 

도킨스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신을 문화의 변방으로 추방시키고, 여기서 신은 기만당한 광신자들에 의해 포옹되기에, 과학은 신에 대한 믿음을 좌절시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명백히 문제가 있습니다. 즉 오히려 많은 과학자들이 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들어진 신]은 2006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또 다른 3권의 책이 선두적인 연구 물리학자들에 의해 출판되었습니다. 저명한 하버드의 천문학자인 오웬 진저리치(Owen Gingerich)는 [신의 우주, God's Universe]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우주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는데, 이러한 믿음은 과학체계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는 [신의 언어, Language of God]를 출판했으며, 자연의 경이와 질서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개념을 따른 창조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콜린스는 무신론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선 자신의 회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과학자는 무신론자라는 도킨스의 경직된 주장에 결코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우주론자 폴 데이비스(Paul Davies)는 [금발의 수수께끼, Goldilocks Enigma]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우주에 “조정자”의 존재를 주장했습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우주의 생-친화성은 어느 정도 우주를 생명과 마음의 발전으로 이끄는 중요한 원리를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우주 안에 어떤 목적이나 계획의 증거가 있다는 생각은 물론 도킨스에 의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버려진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어떤 신이 존재하며, 그분은 우리가 관찰하는 것에 대한 최고의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미국 최고의 진화 생물학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지적합니다: 과학은 (타당한 방법으로) 단순히 자연에 대한 ‘신이 수행하는 감독’이라는 주제를 판결할 수 없다. 우리는 이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과학자로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쉽게 코멘트할 수 없다.

   

굴드가 과학은 자연주의적인 설명과만 함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굴드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다윈주의가 실제적으로 신의 존재나 신의 속성을 견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굴드에게 있어, 진화 생물학자는 무신론자이며, 유신론자라는 점이 관찰 가능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도주의적 불가지론자인 심슨(G.G. Simpson)과 러시안 정통교인 테오도시우스 도프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와 같은 예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로 하여금 다음의 결론에 이르도록 합니다: 내 동료의 한쪽 반은 엄청난 바보이거나 아니면, 다윈주의 과학은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또한 마찬가지로 무신론과도 조화를 이룬다.

   

다윈주의자들이 종교의 문제에 관해 독단적인 주장을 한다면, 곧고 좁은 과학적 방법 너머에서 길을 잃는 것이며 철학적 불모지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한 가지 결론은 그와 같은 문제에 다다를 수 없거나 아니면, 또 다른 영역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굴드가 기본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노벨의학상을 받은 옥스퍼드의 면역학자 피터 미다 경(Sir Peter Medawar)과 같은 많은 탁월한 과학자들에 의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처음과 나중과 관련한 어린아이같은 초등학교식 질문, 즉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왜 우리 모두는 여기에 있나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와 같은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으로 분명해집니다.

   

2. 믿음은 증거로부터의 후퇴다.

 

믿음은 ‘증거없는, 심지어 증거에 반대하는 맹목적인 신뢰다.’ 1976년에 시작된 이러한 견해는 도킨스의 종교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신념’ 중에 하나를 표현한 것입니다. 1989년 그는 그의 견해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믿음은 이제 ‘일종의 정신병’과 같은 것이다.

   

현재 도킨스는 어떠한 종교적 의미의 단어와도 관련 없는,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의에 변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교적 견해를 대표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지지하기 위해 어떤 권위도 인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믿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신학자를 이제껏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는 어떤 기독교 교단의 공식적인 신앙선언에 의해서도 변호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킨스 자신의 정의이며, 그가 비판하려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처럼,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주제와 함께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도킨스가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킨스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믿음은 유아적인 것인데,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채우기 좋지만, 어른에게는 터무니없이 비도덕적이고 지적으로 우스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른이 되었으니,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도킨스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산타클로스나 치아요정을 믿는 것과 같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른이 되면, 여러분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니까요.

   

이는 우연히 어른들의 토론에 끼어들려는 학생들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설득력이 없을 정도로 미숙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나 치아요정과 같은 범주로 여긴다는 진지한 경험적 증거는 없습니다. 저는 6살 무렵 산타클로스와 치아요정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년 동안 무신론자로 있다가, 18살 때, 하나님을 발견했고, 한 번도 이를 유아적인 퇴보라 여긴 적은 없습니다. 저는 [무신론의 황혼]을 집필하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말년에, 즉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산타클로스나 치아요정을 믿게 되었다는 사람을 여태 만난 적은 없습니다.

  

만약 도킨스의 이러한 단순한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하나님과 산타클로스의 존재의 유비가 요구됩니다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그러한 유아적인 신념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물론 도킨스는 그들이(하나님과 산타클로스) 모두 비존재의 실재에 대한 신념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토론에서 결론적인 것과 가정적인 것에 대한 초보적인 혼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킨스에 따르면, 믿음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비이성적입니다. 이것을 지지하려고, 도킨스는 이러한 근본적으로 퇴화된 종교적인 믿음의 측면을 증명해줄 것이라 믿는 그리스도인 신학자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초기 저서에서, 그는 3세기 그리스도인 저술가 터툴리안이 다소 우습게 말한, ‘모순되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들을 주장합니다. 이를 전형적인 종교적인 몰이해라고 해소해 버립니다. 그는 ‘광기는 그런 식으로 나간다’고 말합니다. 다행히, 제가 터툴리안이 실제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후로, 그는 이제 이 인용을 그만두었습니다. 터툴리안이 ‘모순되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쓴 적은 없습니다. 특히 무신론적으로 논쟁적인 글에서, 이 잘못된 인용은 그에게 돌려집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지적이며, 그렇게 수 십년동안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도킨스가 직접 터툴리안을 읽지 않았다는 것과 이 인용을 신뢰할 수 없는 2차 자료에서 취했다는 것을 당연하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판단이 얼마나 믿을만한가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도킨스는 그의 자료들을 점검하지 않는 함정에 빠져서, 오랜 무신론 저술가들이 말한 것을 반복하는 것만 같습니다.

   

최근의 무신론의 특징이 된 것은 바로 오래된 주장을 끝없는 반복하는 지루한 또 다른 예입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터툴리안의 견해는 도킨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터툴리안의 인용을 통해 예를 들어보지요.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을 보겠습니다.


이성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성으로 예지하지 않고, 정돈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으신 것은 없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이성으로 연구되지 않기를 바라거나 이해되지 않기로 바라는 것은 없다.


터툴리안에게 있어서, 이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탐구와 표현에 그 이성이 사용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다수 그리스도 신학자들이 과거에도 서 있던 곳이요, 오늘날도 서 있는 곳입니다. 물론 이제는 예외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 고도의 의문투성이 결론을 지지할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예외가 규칙인 것처럼, 예외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킨스는 신에 대한 신앙은 이성적인 반영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침입한, 매우 전염성강한 바이러스 감염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1990년대, 도킨스는 신에 대한 생각을, 그러지 않았으면 건강했을 마음을 감염시킨 정신적 바이러스의 한 종류로 소개했습니다. 이는 강력한 모습이어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의한 육체적인 감염과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한 소프트웨어 감염의 위험에 대한 점증하는 공적인 우려에 호소했습니다. 바이러스는 도킨스가 신에 대한 신앙에 관하여 전하려고 하는 비열하고 파괴적인 메시지입니다.

   

(도킨스의 주요 신념 가운데 하나로) 신에 대한 신앙이 철저히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왜 세계 인구 중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망상에 빠지는 희생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도킨스는 이것이 전 인구 사이에 퍼지는 전염성 바이러스로 감염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신앙이 바이러스와 같다는 유비는 존재론적인 실재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에 대한 신앙은 마음의 바이러스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바이러스는 단순히 가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식별되며, 관찰되고, 그 구조와 존재방식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설적인 ‘마음의 바이러스’는 도킨스가 싫어하는 생각을 불신하기 위해 고안된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구성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생각은 마음의 바이러스입니까? 도킨스는 이성적이며 과학적이고 증거에 기초한 생각들과, 위조되고 비이성적인 생각들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끌어냅니다. 전자의 것들이 아니라, 후자의 것들이 정신적인 바이러스라 설명합니다. 그러나 누가 ‘이성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결정합니까? 도킨스는 염소 가운데서 양을 구분하듯이, 자신이 이와 같은 생각을 쉽게 범주로 나눌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만 빼고는, 훌륭한 생각을 나타내는 단순함과 우아함을 잃고, 모든 것이 끔찍하게 복잡해져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세계관은 ‘신앙체계’의 범주 안에 맞아떨어지는 것이 되는데, 엄밀히 이는 증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계관의 속성이며,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누군가 세계관을 갖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 다음으로 완벽한 지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그와 같이 수행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킨스의 생각은 쉽게 붕괴되고, 무엇이 이성적이고 진리인가라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의 희생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과학 공동체 안에서 진지하게 취해진 생각이 아니며, 무시해도 안전합니다.

   

3. 종교는 우리의 세계관을 가난하게 만든다.

 

종교에 대한 도킨스의 계속되는 불만 중에 하나는 종교가 미학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주관은 한계가 있고, 가난하고, 과학에 의해 알려진 아름다운 실재에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우주는 원래 신비하고, 웅대하고,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종교인이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우주관은 실제 우주와 비교하여 미약하고, 측은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기존 종교에 의해 제시된 우주는 비좁고 작은 중세적인 우주이며, 극도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대담한 주장의 논리를 추적하기는 다소 어렵고, 그 실제적인 기초는 놀랍게도 사소한 것입니다. [뉘른베르크 연대기](1493)는 당시 풍미하던 생각들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중세적’ 우주관은 사실 근대의 개념보다는 더 한계가 있고 제한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원인이나 결과로도 종교와는 관련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늘에 관한 논문에 기초한 당시의 과학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세의 종교인이 실제로 ‘폭이 좁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주는 그와 같다고 얘기한 당시 최고의 우주론자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학적 진실이라고 확신을 받았고, 그것을 수락한 것입니다. 믿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과학책이 그들에게 옳은 것을 말한다고 믿을 정도로 소박했던 것입니다. 도킨스가 그토록 무비판적으로 추천하는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이러한 신뢰로 인해, 그들은 다른 누군가의 우주관에 자신들의 신학을 짜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연에 대한 접근법은 3가지로 확인되는데, 이로 우리가 관찰하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 경외감이 일어납니다.

   

1.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즉각적인 경이감. 이는 즉각적으로 일어납니다. 윌리암 워즈워스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서 묘사했듯이,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은 그것이 암시하는 것에 대한 의식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이전에 일어납니다. 심리학적인 범주를 사용한다면, 이는 지각이라기보다는 감각입니다. 신을 믿는 것이 경이감을 줄인다는 주장에 저는 정당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점에 관한 도킨스의 주장은 증거에 의해 확증되지도 않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에, 제가 그것을 잘못이해하고 있지나 않는지 우려가 됩니다.

   

2. 그로부터 생기는, 실재에 대한 수학적 이론적 표현에 대한 파생된 경이감. 도킨스도 이 ‘경외적 경이’의 두 번째 근거를 알고 인정하지만, 종교인은 ‘그것이 설명되었을 때, 신비에 반항하고, 속았다고 느낀다’고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있다면, 새로운 경이감이 나타납니다.

   

3. 자연세계가 지시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더 고양된 경이감. 기독교 신학의 중심 주제중 하나는 창조물은 그 창조자를 증언한다는 점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도다’ (시 19: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창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신의 영광에 대한 표시이며, 가리킴이고, 특별히 이러한 이유로 소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킨스는 그와 같은 초월적인 설명을 자연 세계 안에서 배제합니다.

   

도킨스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접근은 무엇인가를 놓친다고 주장합니다. [무지개 풀기]와 [만들어진 신]을 읽으면서, 여전히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세계에 대한 기독교식 해석은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실재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는 자연주의 고집을 빼고요. 만약 있다면, 자연세계와의 기독교적인 연관은, 도킨스의 설명에서 내가 부재하다고 발견한, 풍성함을 더하는 것입니다. 결국 존 칼빈은 생리학이나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그가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말했는데, 이는 신의 창조의 경이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신은 자연의 경이를 연구함으로 감상될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4. 종교는 인간성을 손상시킨다.

 

결국, 저는 종교는 나쁜 것이라는 도킨스의 저서에 스며있는 중심 신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지적이면서 도덕적인 판단이 분명합니다. 부분적으로, 도킨스는 사고를 거부하는 믿음에 근거했기에, 종교를 사악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것이 증거를 앞에 두고 지지할 수 없는 매우 의심스러운 관점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도킨스가 믿지 않는 신은, [만들어진 신]에서 인용하면, ‘사소하고, 부정의하며, 관대심이 없는 괴짜이며; 복수심이 강하고, 잔인한 인종청소자이며; 여성혐오, 동성애공포, 인종주의, 유아살해, 대량학살, 자식살해, 악 조장, 과대망상, 가학피학성 등의 변덕스럽고 사악한 불량배’입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나는 이와 같은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을 믿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적어도 도킨스는 친절하게도 이 주장을 다룹니다. 제가 알고 사랑하는 신을 도킨스는 메스껍고, 구역질나는 ‘겸손하고 온유한 정중한 예수’라는 생각으로 얼버무린 ‘무의미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독자 중에서 이러한 묘사에 대해 적의를 느낀다면, 이 묘사는 아마도 이 책에서 종교에 대해 퍼붓는 가장 부드러운 비판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도킨스가 종교적인 폭력을 폭로하고 도전하는데, 전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여기서 이 주장의 힘이 [만들어진 신]이 남긴 바보 같은 부정확함으로 인해 모호하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의 분노는 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특별히 지하드 형태에 대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종교적인 폭력의 사악한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저는 도킨스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의 필수적인 모습인가요? 여기서 저는 모든 종교는 다소 차이는 있지만 같은 것을 말한다는 구식 생각을 버릴 것을 주장합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모습과 의지와 특성이 나사렛 예수 안에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씁니다. 도킨스도 알다시피, 나사렛 예수는 어느 누구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력을 당하는 대상이었지,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폭력에 폭력을, 분노에 분노로 마주서는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편 뺨을 대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요청받습니다. 이는 바로 폭력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요,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의 중요성은 2006년 10월 [만들어진 신]이 출판된 일주일 안에 있었던 미국에서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사례는 종교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모두를 보여줍니다. 일종의 종교적으로 원한을 갖은 한 명의 총을 가진 남자가 (그는 ‘하나님에게 화가 났습니다.’) 펜실바니아의 아미쉬 학교에 들이닥쳐서, 일단의 여학생을 쏘았습니다. 5명의 어린 소녀들이 죽었습니다. 아미쉬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을 도덕적 권위로 받아들이기에 어떠한 형태의 폭력에도 반대하는 개신교 종파입니다. 그 불행한 여학생들이 살해당했을 때, 아미쉬 공동체는 용서를 강조했습니다. 폭력도 보복도 없었고, 오직 용서만이 있었습니다. 총을 쏜 남자의 미망인은 감사와 감동으로, 어떻게 이러한 일이 그녀와 3명의 자녀에서 ‘너무도 필요한’ ‘치료’를 주었는지를 말했습니다.

   

도킨스는 그 아미쉬들에게 역겨운 생색을 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의미를 밝히면서,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만약에 세상이 좀 더 나사렛 예수와 같아진다면, 폭력은 진실로 과거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도킨스가 편안하게 느낄 대답이 되지는 않습니다.

   

북아일랜드에서 자란 사람으로, 저는 종교적인 폭력을 너무도 잘 압니다. 종교가 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정치적 극단주의가 어떻게 동일하게 폭력을 조장하는가를 무서울 정도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우파 정치인들과 그들의 병력에 의한 무자비안 폭력적인 작전의 결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 백성 수백만을 제거했습니다. 소련이 발흥할 때는 특히 주목할 만했습니다. 레닌은 종교의 제거를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으로 여겼고, ‘장기적인 폭력의 사용’을 통해, 종교적인 신념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인간 역사에 있어, 이 암흑기의 끔찍한 비극의 하나는 폭력과 압제를 통해 종교적인 신념을 제거하려던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국가 이상의 어떠한 권위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는 없었습니다.

   

무신론자로서, 더 별난 신조적인 진술 가운데서, 도킨스는 무신론이 사람들에게 나쁜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준다는 증거는 ‘조금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놀랍고, 순진하고, 슬픈 진술입니다. 도킨스는 분명히 20세기의 실제적이고 거친 세상과 관계가 끊어진 상아탑의 무신론자입니다. 사실은 그와 다릅니다. 1918-41년 기간 동안, 무신론적인 관념론을 강요하기 위한 노력으로, 소련 정권은 조직적으로 대다수의 교회를 파괴하고, 대다수의 성직자를 제거했습니다. 그 통계는 엄청납니다. 이러한 폭력과 억압은 무신론의 주장을 실현하고, 종교를 제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도킨스의 또 다른 신조적인 진술에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메카, 샤르트르, 요크성당, 노틀담을 위협할 무신론자가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슬프게도, 이 고귀한 감상은 개인적인 믿음에 관한 진술이지, 사태의 진실은 아닙니다. 소련의 역사는 불타고, 폭파된 수  많은 교회로 가득합니다. 무신론은 그가 종교와 연관 짓는 폭력과 압제에 결백하다는 그의 주장은 지지할 수 없고, 주요한 맹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는가라는 도킨스의 토론은 극악하게 편견을 가진 일화와 절망적인 비본질적 일반화로 어질러져있습니다. 수사학이 주의 깊은 관찰과 분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종류이든 특별한 믿음의 형태이든, 개인이나 단체를 고려하건대, 종교의 영향을 다루는 증거에 기초한 문학은 확대되고 증가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일종의 병리학이라 주장하는 것이 한 때 유행이었지만, 여러 형태의 종교가 실제로 여러분에게 좋다고 주장(아직 결론적이지 않지만)하는 경험적 증거들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견해는 후퇴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형태의 종교는 병리학적이고 파괴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들은 여러분에게 좋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도킨스의 교리적인 주장에 반대하여, 증거에 기초한 과학이 스스로 이 중요한 주제에 빛을 비추는 곳입니다.

   

2001년에 행한, 종교와 인간 복지의 관계를 조직적으로 연구한 100개의 증거에 기초한  연구조사는 다음을 보여 주었습니다:1)


79개는 종교참여와 복지는 적어도 하나의 긍정적인 상호관계가 있다고 보고했고,

13개는 종교와 복지는 어떠한 의미 있는 관계도 없음을 발견했고,

7개는 종교와 복지는 혼합되거나 복합적인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고,

1개는 종교와 복지가 부정적인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도킨스의 전체적인 세계관은 엄밀히 종교와 인간 복지의 이 부정적인 관계에 의존합니다, 여기에 실험결과의 1%만이 동의하고, 마찬가지로 79%가 부정합니다. 결과는 적어도 1가지 점에서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개인적인 편견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의 관점에서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킨스에게 있어 주제는 단순합니다: 문제는 ‘여러분은 건강에 가치를 두느냐 아니면 진리에 가치를 두느냐’입니다. 그의 저서를 통해 반복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신념인 바, 종교는 거짓이기 때문에, 무슨 결과가 있든, 믿는 것은 비도덕적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신앙이 거짓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그가 종교는 여러분에게 나쁘다는 추가적인 주장을 덧붙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가 실제적으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증거가 늘어가는 것은 그에게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많은 증거는 비판적으로 기능하는 무신론의 주장을 전복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진리성에 대하여 매우 곤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 강연은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들이 제기하는 일련의 흥미로운 질문의 표면만을 살폈습니다. 사실상 몇 가지는 직접적으로, 또 다른 것들은 간접적으로, 종교적인 것들입니다. 어느 것도 필요한 만큼 상세하게 다루지 못한 것 같다는 마음이 듭니다. 몇몇 문제는 추후 토론을 위해 열어놓고, 여기서 제기한 주제들이 중요하고 흥미롭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도킨스는 모든 종류의 정당한 질문들을 제기했지만, 몇몇 흥미로운 대답을 했을 뿐입니다. 분명히 그것들은 특별히 신뢰할 만한 대답은 아닙니다. 보기에 따라서 종교인들은 ‘맹목적인 믿음’과 말할 가치도 없는 것에 빠진 과학을 혐오하는 바보들이라는 것을 믿게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만들어진 신]은 도킨스에게 있어 변화의 시기 마지막을 표시합니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제가 알고 존경하는 도킨스는, 제가 1970년대 옥스퍼드에서 연구과학자로 일할 때, 진리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과학자였습니다. 모든 증거의 단편들은 가치가 있고, 소중했습니다. 누군가의 이론에 심각한 어려움을 일으킬지라도, 진리의 탐구는 증거의 전적인 신뢰성을 요구했습니다. [만들어진 신]에서 우리가 만나는 도킨스는 잡동사니 종교를 시작하려는 독단적인 무신론자입니다. 특히 이것이 곤란할 때, 공정하려는 시도나, 증거를 중시하는 시도는 없습니다. 적어도 제 견해로는, 이것은 도킨스가 대중과학자로부터 종교의 조롱자로, 진리를 위한 열정의 사람에서 독단을 위한 열정의 사람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을 표시합니다. 매우 단순하게, 이것은 무신론 근본주의 작품입니다. 반대자들의 주장에 대한 시간을 할애하지도 않고, 독단적인 확신으로 스스로의 확신을 삼는 교조적이고, 과격하고, 단순화한 믿음입니다. 미래의 문명에 대해 진정한 도전이 근본주의라면, 도킨스는 또 다른 모습의 근본주의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보다는 문제를 더했습니다.

   

토론으로 넘어가, 도킨스가 제시한 과학과 종교에 대한 신뢰할 수 없는 설명에 밑줄을 그을 시간입니다. 신이 없느냐 있느냐, 그 신은 무엇과 같은가라는 질문은, 자만심이 센 다윈주의자들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다윈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았고, 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남았습니다. 어떤 마음은 닫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증거와 논쟁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 공부할 분을 위한 참고도서


Davidson, Luke. "Fragilities of Scientism: Richard Dawkins and the Paranoid Idealization of Science." Science as Culture 9 (2000): 167-99.


Dawkins, Richard. The Selfish Gene. 2nd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Dawkins, Richard. The God Delusion. London: Bantam, 2006.


Gould, Stephen Jay. "Impeaching a Self-Appointed Judge." Scientific American 267, no. 1 (1992):118-21.


Koenig, Harold G., and Harvey J. Cohen. The Link between Religion and Health : Psychoneuroimmunology and the Faith Facto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McGrath, Alister E. Dawkins' God: Genes, Memes and the Meaning of Life.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4.


McGrath, Alister E., and Joanna Collicutt McGrath, The Dawkins Delusion? Atheist Fundamentalism and the Denial of the Divine. London: SPCK, 2007.


Poole, Michael. "A Critique of Aspects of the Philosophy and Theology of Richard Dawkins." Science and Christian Belief 6 (1994): 41-59.


Sterelny, Kim. Dawkins Vs. Gould: Survival of the Fittest. Cambridge: Icon Books, 2001.




1) Harold G. Koenig and Harvey J. Cohen. The Link between Religion and Health: Psychoneuroimmunology and the Faith Facto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