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S. 멕페이그의 新刊을 중심하여

우주 자연은 넌지시 비치는 초월의 빛이다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1. 이 책의 원 제목은 New Climate for Theology-God, the World and Global Warming이다. 필자가 아는 바 멕페이그의 주저 중 여섯 번째의 책이라 여겨진다. 처음 <예수의 비유>(Parable Jesus)를 연구했던 그녀는 예수의 언어였던 비유를 메타포로 발전시켜 <은유신학>(Metaphorical Theology)를 썼고 지배적 메타포를 모델(Model)로 확장시켜 <하느님의 모델들>(The Models of God)을 집필했다. 이 과정에서 멕페이그는 ‘It is, but it is not'의 특성을 지닌 메타포를 신학 언어의 본질로 보고 특히 생태학적 위기 시대에 걸맞는 사실 적합한 신론을 구성하는데 전력했다. 세계를 하느님 몸의 메타포로 보면서 하느님의 모성성을 강조했고 그 빛에서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의 생태적 감수성을 일깨웠다. 이 과정 속에서 성서를 비롯한 서구 기독교 신학내의 가부장적, 초월적 언어 사용의 문제점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자리했다. 예수를 하느님의 육화로 보는 대신 그의 한 은유로 본 것도 전통 서구 신학과 변별되는 점이다. 은유 기독론으로 존재(실체)론적 예수 우상(Jesusolatry)을 타파시킨 것이다. 하느님 아들 예수가 교회 안팎에서 여성해방의 족쇄로 자리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학의 허구적 보편성을 지양코자 자신을 미국 중산층 여성을 위한 신학자로 자리매김한 것도 독특했다. 중산층 여성들의 의식과 삶의 변화가 신학이 추구하는 진정한 보편성에 일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저자의 생태신학은 이후 출간된 <하느님의 몸>((The Body of God)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초자연적 신관대신 하느님의 내재성에 초점을 둔 생태신학을 구체화시켰다. 책 제목이 말하듯 이 세계를 하느님 몸으로 상상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여성 신학자로서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을 강조할 목적도 내포되어 있다. 저자가 후일 성육신의 영성에 무게를 실을 수 있었던 것도 몸으로서의 세계이해에 기초한다. 이런 신학 작업을 근간으로 멕페이그는 2000년에 <풍성한 삶>(Life Abundant) 이란 책을 출판했다. 그녀는 이속에서 지구의 사실적 종말을 가져올 생태학적 위기상황에서 하느님의 생명의 잔치에 초대되었다는 기독교적 자각을 강조했고 그것을 탐욕적인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와의 단절로 이해하여 지구 생명의 풍요로움이 이를 것을 강조했다. 생태학과 경제학의 밀접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멕페이그는 가중되는 지구 온난화로 생명 전체를 無化시킬만한 기후 임계점의 현실을 목도하며 더욱 긴박한 심정으로 8년 만에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New Climate for Theology) 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을 누구에게 헌정할 것인가도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많은 고마운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살아야 할 자신의 두 손녀들에게 바친 것은 평생 여성 생태신학자로 살아온 그녀의 절박한 위기의식을 보여준다. 미래 세대를 염려하는 저자의 실천적, 고백적 삶이 잘 담겨져 있다.

  2. 멕페이그는 기후 임계점에 이른 오늘의 위기상황에서 신학의 과제를 인습화된 교리를 해체시키고 인간과 하느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묻고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일이라 확신한다. 당장 현장에 뛰어드는 실천력도 중요하나 이 작업은 행동을 촉발시키는 실천의 뿌리가 되는 일이기에 더없이 본질적이라 여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인간과 신의 재구성의 결과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특별히 멕페이그는 도시에 사는 중산층의 생태의식을 강조한다. 생산은 없고 소비만 있는 도시문화가 달라지지 않는 한 생태계 회복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도시 공간 내 예배의 새로운 역할과 의미가 탐색된다. 예배란 ‘새로운 세계가 가능한가?’에 대한 비젼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한 확신을 멕페이그는 새로운 신관을 통해 주고자 한다. 만물 속에 내주하는 영이신 하느님의 재발견 곧 성례전(신비주의)적 감수성을 一理있는 답으로 제시했다. 생태학적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깊고 섬세한 이런 信心을 여성 신학자 멕페이그에게 느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저자 멕페이그는 '지구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자료에 근거하여 기후변화의 위기상황을 알린다. IPCC는 환경 과학자들 다수의 합의된 의견만을 보고하는 신중하면서도 아주 보수적 단체이다. 그래서 이 단체가 말하는 것은 경청해야만 하며 위기상황은 실상 이들 보고서보다 심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온실 가스 증가로 북극의 빙하와 육지의 산림이 사라지면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되고 생명이 살 수 없는 기후 임계점에 이르게 된다. 온난화가 시작되면 그것은 스스로를 강화시켜 급기야 기후 자체 속에 내장된 지연구조를 질적으로 망가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IPCC는 여름철 북극 전 지역의 빙하를 볼 수 없는 시점을 203(4)0년으로 예견하고 있다. 인류 40%의 식수원인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가 사라지는 것도 멀지 않다고 경고한다. 멕페이그는 이런 급격한 기후변화를 우리시대가 맞이할 ‘제 2차 세계대전’ 또는 싸워야 할 ‘나찌’라고 불렀다. 기후가 인간의 ‘존재근거’였음을 새삼 인식하고 그를 질적으로 파괴하는 현실과 맞서기 위함이다. 자신들이 초래한 기후위기라는 새 조건하에서 인류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인류는 지금 환경적자를 메우기 위해 자신들의 방만했던 삶과 총력전을 벌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기후변화는 심각할 정도로 인류간 정의를 위협하고 있다. 환경문제를 배부른 국가들의 엄살로만 이해 할 시점은 지났다. 주지하듯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이산화 탄소량은 전 세계 배출량의 2/3 정도이며 아프리카 대륙은 불과 3%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후변동으로 인한 희생은 아프리카로부터 시작된다. 세계 내 가난한 이들이 기후변화의 최대 희생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1세계가 3세계에 강제로 부과한 기후부채(Climate debt)가 너무도 엄청나다. 이점에서 멕페이그는 인류 전체의 (공동체적)관점에서 기후 위기를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환경문제와 가난의 문제를 함께 인식하자는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 임계점 이하- 향후 50년간 지구 온도 상승을 2도 이내로 제한하는 일-를 유지하는 일과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3세계 사람들과의 기술과 자본의 공유가 그 구체적 제안이다. 전 지구적 GNP의 3%정도면 인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 IPCC의 판단이기도 하다. 이일이 가능하려면 우리들 자신의 존재방식이 전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방식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 생명권(Biosphere)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우선 개인의 변화에서 찾고 그것을 국가기관, 정치현실 속에서 구현시키자는 것이 신학자 멕페이그의 제안이다.

3. 본 책의 제목이 지시하듯 멕페이그는 지구 온난화를 신학적 문제로 받아들인다. 기후가 인간 존재의 근거라면 그것은 의당 신학적 주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근거를 인간 스스로 파괴한 상황에서 자신이 자신의 적(敵)이 된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군사정치와 소비문화가 현실적으로 우리 자신을 환경의 我軍이 될 수 없도록 한다. 이점에서 멕페이그는 인간에 대한 공동체적 관점을 강조한다. 지금껏 서구는 개인주의적 인간이해를 선호했었다. 그러나 기후변동이 임계점에 이른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동체적 인간이해가 필요막급하다.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되어 있다는 소위 시(侍)의 자각이야말로 외적 체제를 바꿀 수 있는 근본토대라는 것이다. 개인주의로는 체제 순응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으나 공동체적 인간이해, 곧 ‘지구에 속한 존재’라는 인간관에 의해 체재변화가 가능타고 보았다. 그렇다면 ‘지구에 속한 존재’라는 새 인간학은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우리는 지금껏 하느님을 영적인 존재로 인식해왔다. 개인의 至福 및 영적 상태와 관계하는 초월적 하느님은 배기량이 큰 차를 타고 다는 것과는 무관한 존재였다. 오히려 그것을 축복이라고 영적인 교회가 가르쳐 왔다. 종교지도자들 치고 온실가스 배출량이 작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 만날 수 없었다. 이점에서 멕페이그는 환경위기를 신학적 문제로 이해한다. 인습적 신관에 의지하는 한 ‘지구에 속한 존재’인 새 인간이해는 불가능하다. 저자는 생태학의 어원이 되는 오이코스(oikos)가 경제적(Economic)인 것과 일체적(Ecumenical)말의 뿌리인 것을 환기시킨다. 역사적으로 신학은 교회가 하나의 그리스도적 보편교회임을 강조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교회가 우주적 차원을 버릴 수 없고 먹고 사는 땅(경제)의 문제를 함축해야 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심리적 맥락으로 복음과 신학을 축소시키는 것이 요즘 교회 현실이다. 반면 가난한 지역에선 정치적 차원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임계점에 이른 오늘의 상황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우주론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실 성육신 종교로서 기독교는 하느님이 육신을 입고 지구위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우주론적 그리스도와 성육신 사상은 모두 현대 진화론적 생태 세계관과 모순되지 않는다. 성서의 하느님은 더 이상 개인주의적이지도 인간 중심적이지도 않고 피안적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역시 죄로부터의 속량, 내세에서의 영생과는 다르다. 이런 식의 종교 私事化는 오히려 현실에서의 탐욕적 삶을 부추길 뿐이다. 지구위에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기독교적 구원의 핵심이다. 타자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자신만을 구원하는 배타적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는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의 기초적 요구가 충족되는 至福에 관심한다. 이점에서 하느님은 시편 104편이 노래하듯 사려 깊은 생태학적 경영자이시다. 이는 인간을 이익 창출을 위한 존재로 인식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비주의를 숭상하는 시장 제일주의를 죄로 인식하며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는 ‘생태적 인간이해’가 필요한 때이다.

4.  본 책 3장에서 멕페이그는 ‘다른 세상’을 위한 생태적 인간관을 구체화 시킨다. 이는 개인주의의 세 축인 사적인 영혼구원(종교), 이익 추구를 위한 인간 욕망(경제), 자유주의(정치)가 극복될 때 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해 인간만이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과학자들이 발견한 우주적, 진화론적 생태적 이야기를 주목해야하는 것이다. 우주가 자신을 인식한 존재가 인간이긴 하지만 우리는 결코 만물의 잣대라 할 수 없다. 여전히 우주(지구)속에 속해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물, 식량, 토지 그리고 기후 등에 철저히 의존되어 있다. 기후야 말로 인간이 관계의 그물망 속에 있는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구 온도가 2-3도만 올라도 생존이 불가능하며 지구상 산소의 비율이 1%만 늘어도 지구가 불바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학은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의 하느님이라는 우주중심주의로 나가야만 한다. 수백 년 동안 인류가 자신에게로 집중했던 과거 역사를 접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있다’는 생태적 지식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앙적 명제와 일치시킨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숲의 비유를 통해 생태적 인간상은 이렇게 설명된다. 수많은 나무들이 모여 숲(전체)을 이뤄 상호 의존되지만 개개 나무들의 존재가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생태적 통일성, 곧 하느님 사랑은 항시 생명 공간(오이코스) 의 본질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 세계는 타자(다수)를 희생시켜 전체 혹은 부분이 특혜를 입는 실상이다. 생태적 통일성이 전체주의(하나)도 자유주의(다수)도 아닌 한 생태적 인간상은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한다. 멕페이그는 세상을 호텔처럼 살지 않기를 요구한다. 세상에 대한 ‘클리넥스 관점’을 버릴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세상을 호텔로 상상한다면 클리넥스 관점은 사라질 수 없다. 인류가 모두 중산층 미국인처럼 살려면 지구와 같은 혹성이 몇 개 더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환경 부도가 눈앞의 상황이기에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기후변화, 식량, 에너지 소비, 숲과 수자원 관리 등이 긴박한 신학적 문제가 된다. 자신(인류)만 알던 철없는 시절을 벗어나 우주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몫을 분명히 아는 성숙한 생태적 인간상(어른)은 그자체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5.  앞서 언급한 대로 생태적 인간상은 기독교의 신관의 재구성을 통해 더욱 힘을 얻을 수 있다. 종래 신학은 하느님 사랑(관계성)보다 힘을 더욱 강조하고 내재성 보다 초월성(피안성)에 역점을 두어왔다. 절대적 초월적 하느님이 당신의 권능과 호의를 갖고 세계를 無로부터 창조하고 전 피조물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보존(섭리)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성육신 신앙에 근거하여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창조와 섭리-를 재해석한다. 하느님이 나사렛 예수 한 몸으로 육화되었기 보다는 세계(panta)속에 육화되었다는 것이 구성신학자인 저자의 출발점이다. 사실 이는 지혜문학서의 빛에서 요한복음 1장 14절을 해석할 때 얼마든지 가능한 통찰이다. 전통 창조론이 이원론적 위계적 구조 하에서 피조물을 배제시켰던 것에 비해 성육신에 토대를 둔 창조이해는 하느님이 우주 안에 계시며 인간 및 삼라만상은 하느님을 들어내는 표시이고 임계점의 위기상황에서 세계의 고통은 하느님 자신의 상처인 바, 이를 해결할 수 있을 인간학적 길을 적시하고 있다. 세계가 하느님 몸이라는 모델과 생태적 인간상이 함께 조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선 멕페이그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어거스틴 말에 의거하여 창조론과 성육신 사상이 다른 것이 아님을 논증하였다. 하느님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으나 세계를 하느님 육신의 육화라 봄은 전혀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느님 몸으로서의 세계이해는 神을 천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위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우주 및 세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실천의 문제와 직결된다. 굶주린 이를 먹이고 병든 이를 치유하고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이 세계 내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인 것이다. 우주 안에서 의식을 갖게 된 우리는 하느님 몸이 건강하게 양육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한다. 하느님 형상이란 神께서 지은 피조물에 대해 은총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베풀듯 그 행위에 상응하는 삶을 살라는 동적인 뜻이라는 구약학자 붸스터만의 해석이 떠오른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 몸을 구성하는 타자들에 의존되어 있고 동시에 그것을 돌보는 존재로서 하느님의 파트너라는 사실은 상호 모순이지만 그것 자체가 창조와 섭리의 본질인 것이다. 하느님이 지금 여기 세계(지구)내 현존하기에 지구를 돌보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우주가 존속되는 방식(섭리)인 것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하느님이 당신이 지은 우주 만물에 대한 책임을 우리 인간과 공유한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 곧 생태학적 통일성의 본질인 것이다. 그럼에도 신학자인 저자는 부활신앙에 근거, 하느님이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Alles in Allem)되는 현실을 깊이 신뢰한다. 대부분의 악, 심지어 자연 악이라 불리는 것도 인간 자신에 근거한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멕페이그는 하느님에게서 찾고자 했다. 부활을 가능케 한 생명의 힘이 죽음의 현실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이 책임 질 분량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여하튼 과학의 시대에 속량의 기독교대신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잔치에 참여하는 창조(우주)의 기독교를 주창한 것은 구성신학의 공헌일 것이다.

6. 5장에서는 상술한 생태 신학적 틀에서 지구 경제학의 문제와 씨름한다. 우리는 경제학이 신학과 무관하지 않다는 멕페이그의 주장을 앞서 보았다. 그것 역시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정의)를 말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 내 어느 종교도 탐욕을 가르치는 종교가 없음을 주목한다. 만족할 줄 모르는 개인을 지지하는 종래의 경제이론은 생태학은 물론 종교들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불행스럽게도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경제모델을 지지해왔다. 그래서 빈부격차의 악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란 소리를 들어 온 것이다. 오늘의 세계를 지배해온 경제학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사치로 보고 인간의 이익추구를 개인주의 가치관 하에서 맘껏 추동했다. 과도한 소비를 통해 재화획득에만 관심할 뿐 지구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알게 뭐야’로 일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직면한 지구 온난화는 이런 경제 모델의 멈춤을 급격하게 요구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주는 혜택이 개발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작지 않음을 알라는 것이다. 멕페이그는 이를 자연이 주는 ‘공짜 서비스’라 불렀다. 식량, 어류 목재를 공급하고 서식처를 제공하며 물 공급과 기후조절, 공해통제 등이 그것이다. 임계점에 이른 지구 온난화는 하지만 일시에 이런 서비스를 앗아갈 수 있다. 생명의 그물망이 깨짐으로 지구 전체의 건강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생태적 경제모델에 관심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인간이 생명의 세계인 지구에 초대받아 모든 것을 공짜로 빌려 쓰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늘나라 잔치에 누구라도 초대받았다는 성서의 비유가 이를 잘 설명한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만든 일체의 사회 신분적 경계를 박살내고 육체의 차원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나눠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누구나 초대 받았다’는 인식은 지구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고 그를 지속가능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이익이 아니라 몸과 필요에 초점을 둔 경제는 성서가 지향하는 바이다. 그렇기에 특권적 중산층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죄임을 저자는 강조하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적선만으로 구원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별의 생존, 하느님 몸의 생명력을 위해 저자는 서구 백인 중산층들에게 구원과 죄, 제자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본회퍼의 말대로 개인이 아니라 세상의 복지에 관심하는 ‘세상적(지구적) 기독교인’이 될 것을 바라는 것이다.

7. 이 책 3부에는 이런 의식이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깨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강조한다.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근거로 그것이 지구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의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대다수 도시인들에게 생태의식을 환기시켜 생태적 삶의 길을 제시코자 함이다. 생태학의 문제를 관심하는 저자의 삶의 자리가 어딘 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우선 적으로 멕페이그는 신학을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God-talk' 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실천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삶 자체를 긍정하는 일‘ 로 이해했다. 살아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 이것을 저자는 ’초월을 넌지시 비추는 것‘이라 하였다. 존재론적 신학을 부정하는 탈현대적 해체주의자들과 달리 멕페이그는 하느님 몸인 세상에 대한 찬양과 연민 그리고 감사 속에서 초월의 흔적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존공간인 지구를 하느님 현존의 자리로 인식하는 것이 기후변화의 시대에 종교를 재론하는 근거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저자는 신학적으로 칼 바르트적 초월신학과 질적으로 맥을 달리한다. 초월 대신 환경이 하느님 현존의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 속죄신학도 이곳에서 의미를 얻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종교언어로서의 ’은유‘(Metaphor)이다. 은유는 형이상학적 절대 주장이나 존재론적 초월개념과 무관하다. 가리키는 바에 실존적으로 참여해야하는 상징과도 다르고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말해온 카톨릭의 유비(Analogy)와도 구별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It is but it is not)의 특성을 지닌 은유는 동일성의 원리를 배격한 채 이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것을 상상케 함으로 인습적 사고를 전복시킬 실천적 힘을 지닌다. 예수의 언어가 비유였고 성서의 하느님 진술이 모두 찬양의 언어였다는 것은 신학적 언어로서의 은유의 정당성을 보여준다. 예컨대 세계를 기계가 아니라 하느님 몸으로, 하느님 자체를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로 부를 때 인습화된 교리와 그에 기생한 이데올로기는 힘을 잃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토록 할 수 있다. 은유적 언어는 일차적으로 진리를 지시하지 않고 언제든 생명의 선물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기독교 전통의 두 축인 성례전적 입장과 예언자적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대비시킨다. 전자가 하느님과 세계간의 연속성을 말했다면, 후자는 양자 간의 불일치를 강조했었다. 앞의 것이 자연을 중시하는 카톨릭 신학과 유관했다면 나중 것은 오직 성서만을 말하는 개신교적 에토스를 대변해 왔다. 성례전적 입장이 가시적인 것에서 신적인 것(아이콘)을 보는 데 익숙했다면 예언자적 시각은 전적 타자인 신을 말하며 이를 우상숭배로 보곤 하였다. 이처럼 초월을 구체화시키려는 입장과 그를 거부하는 시각에 반해 구성신학의 매체로서 은유는 양자를 탁월하게 중개한다. 세상 속에서 초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흔적과 표징 곧 하느님의 뒷모습을 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철학자 카푸토의 말을 빌어, 초월은 반드시 세상적이지 않은 것을 뜻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초월을 초월하는 것이 세상일 수 있다는 것이 성육신 신비라고 본 것이다. 예수 역시 하느님의 한 은유라는 맥락에서. 그래서 저자는 은유를 통해 세상 한가운데서 ‘초월을 넌지시 비추는 빛’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하느님 몸으로서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일로 이어진다. 지구 속에서, 우리의 육신 안에서 평범한 일상에서 초월을 느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를 보는 것, 개구리가 연못 속에 뛰어드는 소리를 듣는 일에 주목하고 나와 이웃의 몸의 필요를 배려하는 일, 그것이 초월을 넌지시 경험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몸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성육신 신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하느님의 관계를 어머니 자궁 속의 아기와도 같다고 본 저자는 유기체적 세계관의 빛에서 초월을 새롭게 묻고, 찾고자 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의 궁핍함과 고통에 눈떠 모두가 몸의 차원에서 다르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 하는 것이 성례전과 예언자 전통을 통합한 은유신학의 과제이자, 예배의 본질인 것이다.  
  말했듯이 저자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자리는 도시이다. 이곳에선 자연을 소위 문화로 바꾸는 일들만 일어난다. 생산은 없고 소비만 있는 곳이다. 자연에 대한 의존감을 상실한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다. 조만간 인류 절반이 도시에 모여 살 것인바 도시에 의해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 될 것이다. 저자는 도시인을 가리켜 ‘에너지 돼지’(energy hogs)란 말을 서슴지 않는다. 도시란 자연을 수탈하는 탈자연의 결과물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제 도시는 자연이 자신의 존재 기반임을 깨닫고 그것의 자리매김을 새롭게 해야만 한다. 저자가 도시 생태학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시간과 역사 대신 기독교가 공간을 강조하는 종교일 것을 권면한다. 영지주의와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소홀히 여긴 기독교는 실상 너무도 영지주의 적이었다. 공간을 중시하는 기독교는 천국의 종교일 수 없고 지구를 관심하게 된다. 지구란 식량, 물 거주지, 노동, 여가 등 몸적 요구들이 발생하는 곳이다. 이는 정신과 영혼, 천상의 구원에 초점을 둔 기존의 기독교와 판이한 모습이다. 기존 도시에 자연을 융합시킨 혼성물(Hybrid)모델에 저자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연 없이 도시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종시키기 때문이다. 자연 망각은 도시적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음식 문화를 통해 자연은 온통 문화로 바뀌고 있고 교육과 종교는 몸을 정신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은 자연 은총의 산물, 하느님의 몸으로서의 세계이다. 일상의 식탁이 聖餐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타당하다. 그러나 도시인들은 이런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자연을 유용한 환경으로 변모시키는 일에만 관심하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혜택 중 거의 70%가 사라져 버렸다. 음식을 공급하고 기후를 조절하며 문화적 정서적 가치를 제공하는 자연의 혜택 대부분을 훼손시킨 것이다. 도시화로 자연의 자본금을 축낸 결과이다. 하지만 부유한 소수들은 여전히 도시 속에서도 자연혜택의 수혜자로 산다. 돈으로 좋은 환경을 사기 때문이다. 빈부격차가 자연혜택의 유무와 직결되고 있는 현실에서 생태학과 정의의 문제가 나뉠 수 없는 주제임 재차 분명해 졌다. 이제 생태적 가치들을 내면화시켜 생태적 시민으로 사는 과제가 도시인들에게 주어진다. 기계속의 부품처럼 살지 말고 ‘지구 몸과 더불어 존재하는 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유기체란 새로운 정체성이 주어졌다. ‘몸’의 모델은 이제 도시인들에게 전혀 다른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인간은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여타 생명체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으며 세계 인구 20%의 에너지 독점이 지구상 빈곤의 원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생태적 감수성을 위해 기독교 역시 예배를 통해 새로운 상상력을 부여한다. 성육신론에 근거하여 몸, 공간 그리고 공기와 물, 음식 모두가 그자체로 종교적 사안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성례전은 세계가 본래적 가치를 지닌 무수한 몸들로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는 의례로, 예언자적 선포는 그 몸을 돌보고 그에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축소시키는 케노시스적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예배는 첫 창조 시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환호를 오늘 여기서 지속시키는 일일 수밖에 없다. 작은 차를 타고 비행기 여행을 줄이고, 제 땅 제 철에 난 음식을 먹고 작은 공간에서 사는 일 그래서 늘상 ‘충분하다’고 말하는 삶 자체가 예배란 것이다.

8.  이제 본 책 4부 마지막 두 장에서 저자는 ‘정말 다른 세계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이뤄 질 수 있을 까?’를 실존적으로 고민한다. 두 명의 손녀를 둔 노년의 여성 신학자로서 자신의 실존적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 시대의 2차 세계대전(기후위기)과 맞서고 있다. 너무 감상적이고 성서적 신앙으로 귀결된 감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귀담아 들을 부분이 적지 않다. 저자는 이사야서 65장 17-25절을 읽으며 창조 보전과 인간 존엄성이 지켜지는 세계를 상상한다. 지구온난화로 인류와 지구의 미래가 망가질 것을 믿기 보다는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노니는 성서의 비젼을 공유코자 한다. 기후변화에 의해 수없는 생명체들이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이사야서를 읽는 기독교인들은 우선 이전의 삶을 참회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며 다르게 살아 갈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은 하느님께서 만든 피조물을 사랑치 않고서는 하느님을 살아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모든 생명체들은 있는 그대로 가치를 지닌 진여(眞如)의 존재임을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입장에서 유/무용을 따지는 구분을 중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를 다르게 보는 첩경이다. 그것이 이웃이든 원수이든 피조물이든 타자 존중의 감수성을 키우는 일이 다른 삶의 시작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구 안(in)의 존재로서 생명의 연속선상에서만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이 관계 하에서 존재한다는 생태학적 통일성- 숲의 비유를 생각하라- 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본(소비)주의적 인간이해와는 전혀 다른 인간관을 적시한다. 이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전적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그 실현을 적극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탕자의 비유, 큰 잔치의 비유 등 예수의 비유들은 모두 인습적 가치를 전복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가? 성서가 말하는 죄는 기후 임계점의 현실에서 치유책이 있음에도 그 길로 들어서지 않음을 말한다. 산 속의 오솔길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첫발을 디딘 사람이 있었기에 좁지만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이 된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듯 정행(正行)이 전통 신학자들이 주장해온 정교(正敎), 바른 교리(믿음)보다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정행은 영적이란 말보다 몸적이란 말과 좀 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성육신 종교는 마실 물과 숨 쉴 공기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지 않고 영생을 약속하는 기독교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서식지를 잃는 곰들에게 관심하는 것을 성육신 종교는 ‘몸의 영성’이라 칭(稱)하고 있다. 이웃과 자연 피조물의 물질적 필요를 영적인 문제로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부정(축소)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픈 욕망과 유혹에 저항할 때 자신 및 자연 속에 내재된 야성, 야생의 공간이 깨어날 수 있는 법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듯 ‘선의 평범성’이란 말도 존재한다. 일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는 만큼 세상적인 삶의 방식과 거리를 두는 습관을 지니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 우리 자신만의 공상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꿈이기도 함을 믿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나쁜 상황이 도래해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자연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힘에 대한 신뢰이다. 만물이 '하느님의 자궁'(within God as womb) 속에 존재한다고 믿은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 새롭게 하신다는 신학자의 믿음이 참으로 숭고하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중심주의를 대신하는 말이 자연(생태)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주의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 절대 권능에로 회귀치 않고 하느님을 반영하는 존재(하느님 형상)로서 인간의 진정한 회심을 강조했다. 단순히 하느님을 반영하는 여타의 피조물과 달리 인간만은 하느님 모상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전통 신학이 생각했던 하느님 흔적(자연)과 하느님 형상(인간)의 구별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힘이 세계에 내주하고 있음은 ‘영’의 표상(은유)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느님은 만물을 완성시키는 힘을 주시는 영이다. 영으로서의 하느님이 만물의 몸속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으로서의 하느님이 성례전적 신학의 전거라면 앞서 말한 인간의 진정한 회심은 예언자적 신학의 토대라 보면 좋을 것이다. 저자 멕페이그는 언제라도 이 두 전통을 결합시키려 했다. 그래서 본 책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누구인지를 또한번 되묻고 있다. “하느님은 미풍이 나뭇잎을 흔드는 속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서, 굶주린(행복한) 아이의 얼굴 속에서, 벌목된 숲에서 현존 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영)은 언제든 보이는 몸(자연)을 통해서 알려지는 법이다. 하느님을 ‘몸’(자연)속에서 보는 철저한 성육신주의야 말로 기독교 신비주의의 본질이라 하였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신비주의는 거짓일 뿐이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물로 심지어 끔찍한 일들, 그리고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하느님은 세계가 가장 완전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장엄함을 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하느님이 만물 밖에 있지 않고 만물 안에 있다는 것, 만물의 상호 의존성과 하느님과의 관계성-우리는 세계를 통해서 하느님 안에 있다-그것들을 말함이 삼위일체론의 핵심이다. 이렇듯 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해석을 토대로 저자는 자신의 신학적 인간관 또한 다르게 설정한다. 우선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오히려 우주 안에서 자신의 삶의 좌표를 찾는 것이 신앙의 화급한 과제임을 역설하였다.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발견한 순간이 영적인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까지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기후 임계점의 현실에서 인간에게 예언자적 책무를 부과한다. 인간에게 세계가 하느님을 잘 들어내는 그래서 그 분의 장엄함을 현시토록 돕는 조력자, 파트너가 되라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한 첫걸음은 기후 변화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숙지하는 일이다. 기후 위기의 현실에 둔감, 나태하지 말고 불편한 현실에 눈감지 말라는 지적이다. 즉 피조물의 건강과 지복을 위한 관찰과 돌봄 그리고 책임을 다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금 인간의 책임만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요구한다. 성례전적 시각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닌 것을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조력자란 사실은 하느님 자신이 이 일의 최고 책임자임을 기억토록 한다. 그렇기에 황폐한 세계 속에서도 힘과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영)을 희망하자고 권면한다.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지만 황폐한 세계라도 그의 현존은 하느님을 소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인간 잘못으로 파괴 중에 있는 지구이지만 하느님은 중단 없는 창조적 사랑, 유지하는 사랑 그리고 구원하는 사랑으로 종국에는 만사를 좋게 만드실 수 있다. 세상의 실재는 지복을 향해 방향지어 졌고 우리 인간이 그 일을 위해 불려 졌다고 믿는 것이 창조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9.  이처럼 멕페이그는 기후 임계점 상황에 직면하여 은유를 매개로 생태학적 신학을 새롭게 구성했다. 앞선 그의 저서에 견줄 때 그리 새로운 내용이 소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 책은 머리로 쓰지 않고 마음으로 썼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신학자로서, 어머니를 거쳐 손녀를 둔 노년의 여성신학자로서 멕페이그는 세계를 염려하고 후세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절실하게 이 책을 집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지루할 여지가 없었고 어느 책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종전의 책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여성적 종교언어의 두드러진 강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부장적 초월개념에 대한 비판을 의당 전제하여 인간 보편적 감성에 호소한 흔적이 보인다. 여하튼 이 책의 핵심은 은유(Metapher)라 신학방법론을 매개로 세계를 하느님 몸으로 상상했고 몸적(지구 생태적)인 현실에 대한 관심을 성육신 신앙의 본질로 정의한 데 있다. 도처의 몸적 현실이 자신의 실재(초월)을 넌지시 비추고 있는 하느님 자신이란 것이다. 그래서 성육신신앙과 신비주의가 상호 다른 개념일 수 없었다. 성서 및 기독교 전통 내 두 흐름인 성례전과 예언자 사상을 생태학적 시각에서 통전시킨 것도 흥미로운 신학적 작업이었다. 그로써 그녀는 생태학과 정의의 문제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입증했다. 기독교의 속죄사상을 인간 영혼이나 초월과 관계시키지 않고 몸적 현실의 회복에서 찾은 것은 본 책, New Climate for Theology 의 결론인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과 세계의 일치(범신론)를 끝까지 거부하고 인간의 책임만이 아니라 세계가 결국 하느님의 책임 하에 있다는 신학적인 신념도 유지하고 있다. 생명을 수여하는 영(靈)이신 하느님 실재를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 책에 대한 논쟁점 몇 가지를 지면 관계상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서평자의 소임을 다하려고 생각한다.
첫째, 멕페이그는 성육신 신앙에 근거하여 하느님과 세계의 이분법을 철폐했으나 철저하지 못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세계의 동일성을 막기 위해 하느님의 영(정신)과 몸을 다시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하느님의 몸이지만 그의 영(정신)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초월적 존재 개념으로서의 신관을 파괴시키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신과 세계의 상즉상입관계를 말해온 동양적 세계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유대 철학자 레비나스 개념인 ‘하느님 뒷면’을 강조하고 '초월의 넌지시 비추는 빛‘을 말하는 것도 동양적 범신론과의 변별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로써 저자는 하느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특별한 역할을 주려했고 생태적 위기의 궁극적 희망이 하느님께 있음을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멕페이그는 부정하려했던 인간과 자연간의 이원론으로 부지불식간 되돌아 가버렸다. 인간을 하느님형상으로, 자연을 하느님흔적으로 이해했던 전통신학의 족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로부터 멕페이그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있다. 하느님의 몸인 세계가 상처를 받더라도 하느님 자신은 여전히 환경적 재해로 상처받을 수 없다는 전제(숨어계신 하느님)가 그 속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하느님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이 상호 구별 없이 결합되는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자연죽음과 신의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숙고하라고 주문한다. 우주만물을 하느님 영의 단편들(Fragments)로 보는 것이 하느님 ’몸‘이란 유비로 말하는 것 보다 훨씬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가 부언하고 싶은 바는 인간만이 자연을 지키는 힘(하느님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가이아이론 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시도 인간의 역할 이상으로 생태계를 유지 보존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에서 如如한 자연 그 자체를 부처라고 보는 것도 이런 인식과 무관치 않다.
둘째로 하느님과 자연, 혹은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논할 때 자연에 대한 멕페이그의 이해가 다소 부족한 듯 여겨진다. 우선 저자는 현대 과학의 성과인 진화에 대한 고찰을 본 책 속에 너무 적게 담았다. 자기 조직화하는 우주로서 자연의 진화는 저자의 성례전적 자연관에 더욱 풍부한 내용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생태계 파괴로 대표되는 몸적 현실에 주목한 결과 자연 자체의 긍정적 이해에 소극적이었다. 그의 성육신 사상도 결국에는 예언자적 관점으로 귀결되었기에 우주적 그리스도 이해로까지 전개되지 못한 것이다. 자연을 이해함에 있어 인간과 대비되는 관점만 부각시킨 것도 한계로 보여 진다. 주지하듯 저자는 하이라키적 세계관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헤테라키를 세계의 실상이라고 인식한 것 같지도 않다. 하느님과 인간을 결국에는 자연과 구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에 걸 맞는 세계상을 제시했어야 하는데 말이 없다. 필자는 이를 켄 윌버의 ‘홀아키’(Horachy) 개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 자연 실재를 보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양자는 不二의 관계로만 존재할 수 있다. 물질, 생명, 정신 그리고 영혼, 즉 신과 인간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다. 여기서 물질과 생명이 자연에 해당될 것이다. 비록 정신이 물질, 생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불가역적 측면을 지니기에 내재가치로서 우월하지만 그러나 앞의 것들이 없다면 나중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기저가치는 전자가 훨씬 큰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나뉠 수 없는 전체로서 상호 공진화한다는 사실이다. 본 책에서 진화 개념이 첨가되고 우주적 그리스도의 빛에서 그것이 해석될 수 있었다면 우주로서의 자연이해가 좀 더 설득력을 지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비판적 내용이기 보다는 아쉬운 일면에 대한 지적이다. 기후 임계점을 말하면서 저자는 특히 도시 중산층들에게 인간의 생활방식 자체를 달리 할 것을 여러 모양으로 강조하였다. 인간들이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달리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비행기 타는 횟수를 줄이고 작은 차를 타는 방식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삶의 양식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설명 속에 미국 내 육식문화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국내외적으로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고 아마존 밀림이 벌목되고 원주민들이 쫒겨 나는 현실을 모를 리 없었을 터인데 본 주제에 관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먹이사슬 구조를 파괴하는 쇠고기 사육방식은 물론 소들로 인해 생겨나는 어마어마한 온실가스 그리고 운송 및 도살과정에서 발생하는 반생태적 실상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 것이 너무도 의아스러웠다. 더욱 여성 생태신학자로서 육식문화가 가부장 체제와 유관하다는 사실을 지적했어야 함에도 말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이 책이 기획되어 집필되는 과정에서 세계 금융시장의 붕괴조짐을 저자가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너무 간략하게 변죽만 울림으로 책의 깊이를 경감시켰다. 물론 저자는 개인 영혼의 구원만을 강조한 종교의 사사화, 개인 행복의 증진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는 정치철학 그리고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극대화 시키는 신고전주의적 경제체제가 오늘의 월가를 만들었다는 논거는 제시했으나 좀 더 비중 있게 이 문제를 다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을 토로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