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 지음, 최규명 펴냄, 도서출판 한국성결교회역사박물관, 2010)


 

이신건



성결교회는 정빈, 김상준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래서 성결교회는 자생교단이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이것은 성결교회가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가 외국인에게 아무런 정신적,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자생(自生)이라는 단어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에게 자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하나님 모독에 해당하는 엄중한 잘못이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흔히 자생(自生)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엄밀히 말해서, 우주 안에는 완전히 독립된 개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거대한 고리 혹은 그물망이다. 그렇지만 같은 생물의 진화 과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형태를 띠는 존재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되며, 그래서 그에게 ‘자생’이라는 단어를 자주 붙여 주곤 한다.

성결교회가 과연 자생적이며, 또 어느 정도 자생적인지는 이 좁은 지면을 빌어, 그리고 좁은 식견을 지닌 필자가 다루기는 벅찬 주제다. 다만 성결교회는 한국인에 의해 주도되고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교회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다른 교회와는 달리 성결교회는 외국 교단에 의해 이식되지 않았으며, 외국 선교사들의 일방적 선교에 의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성결교회는 교단의 초석을 놓은 정빈과 김상준을 길이 기념하고, 늘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니 아쉽게도 두 분은 일찍이 성결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정빈은 교회 사역 외에는 후손이 읽을 만한 글을 전혀 남겨놓지 않았다. 그가 왜 후손들을 위해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목회와 전도에 전념하느라 글을 쓸 여유가 없었거나, 글을 쓰기를 싫어하거나 필력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시 그가 글보다는 삶으로 말하는 법을 더 원하지는 않았을까? 

김상준은 비교적 많은 글을 남겼고,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상준은 한국성결교회의 실제적인 창립자로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한국성결교회의 정신적 수원지와 보화로서 길이 반추되어야 할 존재다. 특히 매우 의미심장한 점은 김상준이 1921년에 한국성결교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중교리』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매우 열악한 출판 환경에서 등사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잘 보존되지 않았고, 다른 저술가들(이명직 등)의 저술의 그늘에 가려 오래토록 빛을 보지 못했으며, 그래서 까마득히 잊혀졌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김상준을 잊지 아니하셨다. 비록 매우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매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최규명 목사를 통해 이 소중한 책이 다시 빛을 볼 수 있도록 되살려 놓으셨다. 최규명 목사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이 책에 대한 소회를 몇 마디 적고자 한다.


1. 최규명 목사의 말대로 이 책을 해독하기가 보통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난해한 문장과 어려운 고어와 한문도 해독하기 어려웠겠지만, 전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거나 새까맣게 인쇄된 원문을 어떻게 해독했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최 목사가 오랜 시간 동안 뜨거운 열정과 불타는 신념, 놀라운 지혜를 발휘한 결과로 이렇게나마 김상준의 책이 되살려진 것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최선을 다한 최 목사의 각고의 노력에 새삼 감사와 경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예스런 문장을 현대인의 정서에 맞게 옮겨놓은 최 목사의 공로도 결코 작지 않다. 그러므로 읽기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경우는 원문보다 훨씬 더 유려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도저히 판독이 불가능하여 보류된 부분을 어떻게 되살려야 할지도 고민해야 하겠지만, 해독이 정확히 이루어졌는지도 계속 점검해야 할 것이다.


2.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 제목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사중복음(四重福音)이라는 용어를 즐겨 쓰고, 이런 용어에 익숙해져 왔다. 하지만 김상준은 분명히 사중교리(四重敎理)라는 용어를 썼고, 서문에서도 그는 “사중교리가 기독교의 허다한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사중(四重)의 교리이니 ...”라고 말하며, 이것을 ‘복음의 진수(眞髓)’라고 불렀다. 왜, 그리고 언제부터 사중교리가 사중복음으로 바꿔졌는가? 아마도 이명직 목사의 강력한 영향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명직 목사는 『기독교의 사대복음』이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의 서언(序言)도 “사대복음(四大福音)이라는 것은 무엇이뇨?”는 말로 시작한다.

사실 복음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용어를 나열해 왔고, 심지어는 다른 것과의 차별성 드러내려는 뜻에서 ‘순전한 복음’이니 ‘온전한 복음’이니 하며 형용사를 붙여 왔다. 사중복음(四重福音)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전이해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무슨 인상을 대뜸 받게 될까? 혹시 네 겹 혹은 네 폭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복음이 네 가지 복음으로 오해받기 쉽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차라리 사중교리를 계속 써 왔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랬더라면 사중복음은 단순한 전도표제에 불과하다는 오해와 공격은 덜 받지 않았을까? 만약 사중교리가 단순한 전도표제나 교단의 신학적 구호에 그치지 않고 김상준의 말대로 기독교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교리와 복음의 진수라면, 지금이라도 사대교리라는 용어를 회복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3. 김상준이 사중교리를 설명하는 순서(중생, 성결, 재림, 신유)는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순서(중생, 성결, 신유, 재림)와 다르다. 이명직의 책 『기독교의 사대복음』도 김상준의 순서를 따랐다. 왜, 언제부터 순서가 바뀌었는가? “순서가 무슨 대수인가?”라고 힐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사대교리 혹은 사중복음이 ‘구원의 순서’대로 설명된 것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생과 성결은 선후관계에 놓여 있지만, 신유의 위치는 신학적으로 불분명하다. 언제부터 신유가 가능한가? 중생 후 혹은 중생과 동시인가, 아니면 성결 후 혹은 성결과 동시인가? 아니면 김상준과 이명직의 순서대로 재림 후인가? 왜 재림이 마지막에 놓이지 않고, 신유가 마지막에 놓였는가?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신학적으로 분명한 근거가 있는가? 이 부분도 신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소홀하게 취급되는 신유는 해가 갈수록 있으나마나한 너절한 부록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더욱이 영양 상태와 의료 혜택이 날로 개선되는 마당에 누가 신유에 목맬 것인가? 차제에 한국성결교회는 신유의 신학적, 실제적 위치와 의미에 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김상준의 『사대교리』는 이명직의 『기독교의 사대복음』과 내용적으로 대동소이하다. 아마도 두 분이 배운 신학적 전통 혹은 두 분을 가르친 스승이 동일하거나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명직이 김상준의 신학을 상당히 수용했다면, 김상준의 신학적 비중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상준의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신학적 가치와 의미도 엄밀하게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지금 김상준은 이명직에 비해 과소평가되어 있다. 그리고 두 분의 신학적 차이도 연구되어야 하지만, 두 분의 신학이 얼마나 성서적이고 현대적인지도 연구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김상준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과거의 인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오늘 우리가 시급히 재평가하고 논의해야 할 소중한 신학적 보화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온갖 난관을 뚫고 김상준을 오늘 우리에게 되살려주려고 애쓰는 최 목사에게 다시금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