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정체와 의미
이신건 지음, 신앙과지성사, 2013.


 

박영식(서울신학대학교)


되돌아보면 지난 한 학기 동안 나는 신학전문서적을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학적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고뇌에 잠겨 있었다. 공공성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신학적 글쓰기가 더 이상 전문 신학자들 간의 유희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창하고 주제 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제 신학은 몇몇 일부 기독교 지성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함께 생각하고 논의하는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학 언어의 문턱은 낮아져야 하고 사유는 더 깊어져야 하며 실천의 폭은 더 넓어져야 한다.

서평 부탁을 받고 신학자나 신학생, 그리고 목회자, 심지어 일반인조차도 읽기에 합당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선뜻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의 주제야말로 신학의 심장에 속하며,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전문인과 비전문인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는 글로 저술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를 먼저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흥미를 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는 누구였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누구인가?’ 라는 주제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흥미 있는 질문이다. 언젠가 무슬림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기독교는 싫어한다.’ 이처럼 예수는 적어도 인기스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웃종교인에게까지 호감을 자아낸다. 이 책은 그리 두텁지 않은 분량 안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리라 생각된다.

둘째, 예수에 대한 관심도가 높지만 실상 책을 통해, 더구나 전문 신학자의 글을 통해 접하게 되는 예수는 왠지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물로 생각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에게 붙여진 여러 가지 칭호들, 예컨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인자(人子), 어린양, 소피아, 신인(神人), 만유의 통치자(pantokrator) 등은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도 난해한 암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덧씌워놓은 교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감투와 외투를 과감히 탈각하면 그는 보다 생생하고 역동적이며 매력적인 인물로 우리 곁에 다가오지 않겠는가. 이 책은 예수에게 전통적인 호칭 대신 참신하고 새로운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21세기의 독자들에게 예수를 친근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

셋째, 예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수 세기의 세월을 꿰뚫고 달려온 예수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가 없다. 어차피 한 인격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와 사귄다는 것이고, 또한 그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그가 열어준 세계를 통해 우리의 세계를 반성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예수와 같은 매력적인 인물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예수의 과거를 추적하는 고고학적 탐사를 시행하기보다는 신약성서가 그려주는 예수의 매혹적인 그림들을 때론 은근하게 때론 강렬하고 도발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독자에게 적잖은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 분명 독자는 이 책을 읽기 전보다 더 강렬하게 예수의 매력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신건 교수의 『예수의 정체와 의미』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먼저 주목할 점은 이 저서가 니케아-칼케톤 공의회의 기독론보다는 복음서의 증언에 매우 충실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의 삶과 메시지, 그의 죽음과 부활을 쉽지만 독특한 표현으로 재구성하여 1세기의 예수가 이미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말을 걸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예수를 깊이 사랑하는 자로서 이 책을 서술했다고 고백한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 사랑은 더 깊은 앎으로 인도한다. 사랑의 앎은 객관적 정보수집의 차원을 넘어 함께 머물고 함께 떠나는 삶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신앙적 인식임과 동시에 실천적 추종이기도 해야 하며,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기도 하다.”

저자가 예수를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전문 신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일까?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이상인 듯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그려주는 예수의 이미지는 오늘날 비인간적이며 반생명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을 폭로하고 전복시키며, 이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 새로운 현실을 향한 우리시대의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무의식적이라도 저자는 그리스도론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게 “그리스도론은 일차적으로 구원론”인 것이 자명하다. “그리스도론의 일차적 목적”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우리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류에게 선포하고 가져오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해만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말을 덧붙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그가 조직신학 강의의 네 번째 책으로 그리스도론을 저술하면서 현대과학자들에 의해 복원된 예수의 얼굴을 책 표지에 담은 이유도 알 수 있다. 예수는 이제 구시대의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만나고 경험해야 할 새로운 현실이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아직 구현되지 못한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저자의 열망과 열정을 이 책에서 감지할 수 있음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성서적이고 실천적이며 현실 비판적인 그리스도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저자를 사로잡아 이 글을 쓰게 했던 매혹적인 예수의 구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자. 먼저 그는 “어린이 예수”(80-98)를 소개하는데 소위 예수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허구적으로 보충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귀찮은 존재,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던 당시의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세우시는 예수의 모습과 더불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정한 어린이”로 사셨던 예수를 소개한다. 예수는 어린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안에서 심지어 죽음의 고통조차도 수용하셨고, 굳어버린 어른의 심성과는 달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을 보여줌으로써 어른사회의 배타성을 넘어선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산술적인 계산에 익숙한 어른들의 경제관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굶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순진무구한 동정심에서는 가능한 기적의 사건으로 읽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또한 저자는 “민중 예수”(100-118)를 소개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민중신학과는 달리, 저자는 오늘날 민중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민중은 결코 메시야가 아니라고 못 박으며 민중을 우상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하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인 민중에 대한 복음의 우선권을 강조한다. 예수는 “가난한 민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아무 조건도 없이 선포했으며, 그들을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된 하나님 나라를 통해 이들을 부자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버림받은 자들로 생각했던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사함으로써 이들의 자존심을 회복시킨다. 더 나아가 예수는 “부자들의 폭력과 탐욕과 차별”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촉구한다. 부자들에게는 “가난한 자들과 연대”와 “탐욕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는 민중에게 회개하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개로 번역된 메타노이아의 본래적 의미가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나 종교적 윽박이 아니라 삶의 방향전환을 뜻한다면, 기죽어 살던 민중들도 예수의 선포와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예수와 함께 일어서는 회개에 동참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한편, 저자는 “생명 예수”를 소개한다(120-145). 예수는 이미 요한과 바울에게서 ‘생명의 떡’, ‘생명의 빛’, ‘나의 생명’으로 고백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생명이신 예수와 관련해서 “영원한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충만하게 된 생명”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저자는 무엇보다 예수께서 사후의 생명이 아니라 현재적이며 신체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예수는 생명을 사랑하며 삶을 긍정하며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충만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병자치유와 귀신축출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속으로 돌입해 온 선취적 사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예수의 권능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고난과 무력함을 역설한다. 즉 예수는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처럼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도 질병을 치료한다.” 하지만 치유는 1세기 예수와 그 주변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던가? 저자는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귀신 추방 사건과 심리상담요법인 ‘그리스도 요법’을 소개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과 실재성이 예수신앙을 통해 오늘날도 구현됨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자연인 예수”(148-178)를 통해 우리의 사소한 일상에 바짝 다가와 있는 예수를 소개한다. 예수는 위대한 인류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지만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언어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고 자기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장광설을 널어놓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우리와 동일하게 먹고 입고 거주하는 자로서, 삶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면면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개한다. 우리 모두는 옷을 입고 산다. 예수에게 옷은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함으로써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위장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옷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먹지 않고 살 순 없다. 예수에게 양식은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께 구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양식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도 양식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예수의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 속에 잘 드러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굶주린 자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고, 이를 통해 기근 속에서 괴로워하고 죽어가던 가난한 자들이 배부름과 즐거움과 생명의 풍성함을 실컷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저자는 집과 관련된 예수의 언급을 추적하면서 예수께서 집을 복음 선포를 위한 중요한 은유로 사용하셨음을 환기시킨다. 집은 곳곳에서 구원을 위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때도 구원은 피안의 현실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재적이며, 생생한 현실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상의 친근한 사물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 예수는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자연을 노래할 줄 아는 위대한 시인”이다. 또한 그는 “자연을 하나님에 관한 설교자”로 삼을 줄 아는 참된 자연의 신학자였다. 구체적으로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무화과나무, 곡식, 참새, 해와 비, 저녁놀과 남풍, 번개, 들개, 좀과 동록, 독수리, 밀과 포도와 가시나무와 엉겅퀴 등등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효과적인 도구와 비유”로 사용하였다. 이에 반해 예수는 “로마 제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화려한 궁전과 도시, 황제의 즉위식이나 군대의 사열식, 궁전의 아름다운 장식과 행사 등에 빗대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지 않았고, 화려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온갖 보석과 보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예수와는 달리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화려하고 분주하지만 생동감 없는 삶에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고, 현학적이고 딱딱한 언어 속에 하나님의 신비를 봉합해 버린 어리석음을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저자가 그려주고 있는 예수는 자신을 신앙한다지만 자신과는 다른 우리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예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을 직시하게 하며 드러나게 하는 거울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메시지를 통해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자아와 사회적 현실을 오롯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왜곡됨을 드러내고 심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고 이로써 자유의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저자는 “자유인 예수”(180-202)에 대해 말한다. 결국 예수의 삶과 메시지는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그것은 곧 인간을 온갖 억압과 굴레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는 인간을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가? 저자는 권세, 재물, 율법, 염려, 미움, 그리고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제시한다. 나의 이목을 끄는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왜냐하면 당시 율법의 잣대로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죄인과 악인을 양산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인간적인 억압과 굴레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압과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는 예수의 선포와 행위는 자비롭고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억압적인 경계를 넘어서 계신다.

이 책이 그려주는 예수의 삶 속에서 자꾸 나와 우리시대의 삶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게 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아마도 저자가 단순히 예수에 관한 교리적 논의들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관통하는 예수 자신의 신학, 예수 자신의 길을 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저자는 예수의 삶을 도외시 한 채 단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만 집착하는 협소한 예수 신앙을 비판하고, 우리의 신앙이 예수의 삶을 곱씹어 추종하는 삶이 되도록 유도한다. 오늘날의 현실에 도전하는 예수의 면면을 속속들이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삶에 친화적이고 성서적인 그리스도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저자는 이제 예수의 죽음과 지옥행, 그리고 부활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서술한다.

먼저 저자는 예수의 죽음을 라틴식의 보상만족설이나 종교개혁의 형벌대속론으로 해석하는 것이 예수의 삶의 역사를 뒤따라갈 때 탐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삶의 현실에도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전통적인 속죄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반드시 피를 보아야만 만족하는 잔인한 몰록”으로,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분노 때문에 유일한 아들의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독재자나 가학적인 군주”로 오해하게 만든다고 혹평한다. 저자가 이처럼 전통적인 속죄사상을 비판적으로 응수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예수의 죽음은 예수 삶의 연장선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자명한 전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구원에서 인간의 참여와 헌신을 배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구원은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그 길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구원의 은혜는 값싼 은혜일 뿐 아니라 “가짜 은혜”로 드러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예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짜 은혜가 가짜 교인과 가짜 교회를 양산해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음을 저자는 에둘러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예수 죽음의 신비는 세상 끝 날까지 풀리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죽음을 통해 불의한 세력이 폭로되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예수의 참혹한 십자가 처형은 불의한 폭력을 드러낼 뿐 아니라 “비폭력 무저항의 길”을 통해 악을 극복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본회퍼의 산상수훈 해석에 크게 힘입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은 오직 저항하지 않음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물론 예수는 비폭력적이었다. 하지만 무저항적이었을까? 차라리 저항적 비폭력이나 비폭력적 저항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어쨌든 저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악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체제는 고난을 온전히 수용하고 감내했던 예수의 희생적 삶에서 종말에 이른다.

저자가 말한 대로 예수의 죽음은 인간을 위한 대리적 삶의 귀결이며, 인류를 위한 대리적 희생이다. 여기서 대리란 그 사람을 완전히 대신하거나 무엇인가를 대체한다는 뜻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누군가를 위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는 대용인간이 아니라, 대리자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체될 수는 없지만, 대리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다시 말하면, 우리 대신에 죽었다.” 하지만 “예수는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형벌로서 속죄의 죽음을 죽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하나님의 대리자와 인류의 대리자로서” “인류의 악과 고통을 대리적으로 감당했다.” 대리 그리스도론을 통해 저자는 예수의 대리적 희생은 또한 우리를 대리적 고난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예수의 대리적 희생은 우리도 예수처럼 다른 사람을 책임적으로 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지시한다.

저자는 우리말 사도신경에 생략돼 있는 예수의 지옥행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예수의 자기비하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도 맛보셨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희망을 의미하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가 지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이제 희망이 없지 않다.” 이는 동시에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은 예수를 지옥에까지 보냈고, 예수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알아도 믿지 못했던 완강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렇다면 예수의 지옥행은 만인구원설을 위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까?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면서 먼저 부활의 역사성을 묻는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빈 무덤과 부활현현을 언급하지만, 그 무엇도 부활의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저자는 부활사건은 현대인의 역사범주에서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될 수 없지만, 역으로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역사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의 부활로 인해 역사의 지평은 확대되고, 삶은 참으로 미래를 향해 추동하며 개방되는 역동적인 역사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가? 저자에 따르면 부활은 죽음 의미에 대한 동어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은 예수가 살아온 삶과 그의 메시지가 옳았다는 하나님의 판정이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을 전복시켰던 그리스도의 길이 겉으로 드리운 실패의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결코 패배가 아니라 최후승리임을 선언한다. 즉 부활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고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이다.” 동시에 부활은 새로운 몸의 부활로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며 “죽어야 하는 허무한 존재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동”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예수의 삶과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수와 함께 세상 속에서 고난의 길을 걷고 최후승리를 희망하도록 한다.


많은 저서와 역서를 출간한 저자지만, 그는 이 저서에 대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저술했다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론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의 친구와 추종자로서 자신의 삶의 고백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가 여기서 제시한 그리스도론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자신이 희망하고 살아가고픈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저자가 그려준 그리스도론이 왜 나 또한 희망하고 살아가고픈 삶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예수와 저자, 그리고 저자와 내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정의 동반자와 조력자로 함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예상하기로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도 생활세계 한복판에서 우리 자신을 부드럽지만 매서운 눈으로 직시하며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예수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