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학교 어린이와의 깊이 있는 만남

강 신 덕 / 성결교회 교육목회 연구회, 이수교회

활천, 2000년 3월호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어린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던 어린 사람이 길 한 켠에 쓰러져 있었다. 레위인이라던가. 그가 도움을 청했던 사람은 황망히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이 노신사는 “내가 아는 율법적 상식으로 저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이곳은 이미 해가 지고 말았군. 난 법의 명령과 질서에 따라 저 어린 사람을 도울 수 없겠어”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어린 사람은 몸의 상처가 더욱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작은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 역시 몇 마디 소리만 남긴 채 떠나갔다. “이보시오, 다친 사람. 내 급한 볼 일을 좀 보고 내일 아침에 와서 도와주리다. 이 밤만 참고 계시오.” 어린 사람은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런데 그 절망 속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대한 의식을 잃어가던 어린 사람은 그가 혹시 다른 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불쌍한 어린이구나... 얘,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도와 줄께... 많이 아팠지?” 그는 곧 몸을 구부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린이들을 쉽게 만난다. 교회학교에서 혹은 새신자 반에서 우리는 어린이들을 만난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취급되어야 한다, 저렇게 취급되어야 한다”며 많은 말들을 한다. 그러나 어린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어린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의 지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교회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교회의 내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교회가 어린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오늘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른이라 불리는 목사님, 장로님, 전도사님, 부모, 선생님, 형, 누나, 오빠가 주일 한낮에 무심코 마주치는 어린이는 누구인가? 어른들은 그들에게서도 그리스도의 영적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신앙의 일상 가운데서 가장 쉽게 마주치는 ‘소자’(小子)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교회의 귀한 손님처럼; 교회의 모든 어른들에게

지난 세기 동안 교회의 문턱은 계속해서 높아져 왔다. 20세기의 교회는 세상 것들이 교회로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으로 교회의 문턱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다행스럽게도 교회는 세상의 거센 죄악의 파도가 교회를 침수시키는 것을 훌륭하게 방어해왔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 피신했어야 할 작은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어린 사람들이 그 높은 문턱을 바라보며 20세기의 어두운 밤을 보내야 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 중에는 분명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영적인 소자들이 속해 있었다.

 

20세기에 우리는 우리보다 어린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분명한 안목을 얻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들의 습성 가운데 하나를 직접 경험해 보려는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어린이들은 여전히 교회의 높은 문턱 저편에 서 있는 낯선 존재들이다. 우리의 생각에 아직도 어린이들은 코흘리개이며 귀찮게 떼를 쓰는 존재들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멀리 떨어뜨리고 격리시켜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 어린이는 어른이 될 때까지는 거룩한 성전 밖에서 예배가 끝날 때까지 자동차들과 함께 기다리는 존재였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어린이들에 대한 생각은 혁명적인 수준으로 진보했음에도 어린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야 한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어린이를 귀한 손님과 같이 대접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교회의 담임목사님에서부터 그 어린 사람을 교회로 인도한 모든 이들이 깊이 주지해야 할 이야기이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주인이며 하나님의 귀한 사역의 예정자이고 무엇보다 섬김을 받아야 할 ‘작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성서적인 작은 자’가 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어른들이 단순한 의무감과 율법적 판단으로 아이들을 만나지 말 것에 대한 요구이다.

교회의 어른들은 깊이 있는 십자가의 영성으로 어린이들을 대해야 한다. 아이들은 영적 섬김과 돌봄을 받아야 할 귀한 손님이다. 당회로부터 교회의 모든 어른은 어린이들이 귀한 손님으로 편히 쉼을 얻고 넉넉한 돌봄을 받아서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이어야 한다. 결국 교회의 어른은 어린이들이 온전한 어른이 되어 여유롭게 그들만의 영적 여행을 떠날 때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는 돕는 이요 안내자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께서 창조와 십자가와 인도하심의 사랑으로 모든 어른들의 어른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어린 손님에게 진지하게; 교역자들에게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훌륭한 손님으로 대접하기 위해 좀더 깊이 있고 진지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가치 있고 진지한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그들만의 세계를 탐험하는 독자적인 바다의 여행자들이다. 사실 누구도 그 어린이가 여행하고 돌아온 그곳을 알 수는 없다. 그곳은 피터팬의 네버랜드처럼 신비하다. 따라서 어른들은 그 어린이들이 생각의 닻을 올리고 그들만의 여행을 출발하는 바로 그 항구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사히, 어린이답게 그들의 신나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의 여행에 어른이 선장이 되려는 생각은 무의미하다. 결국 이 일에 능숙한 사람들은 바로 부모들이다. 이 세상에서 어린이의 출발지와 도착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또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는 이들은 바로 부모이다. 그래서 교회의 어른들이 가져야 할 것은 바로 부모의 마음이다.

또한 어린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홀로 된 인생 여행을 시작하는 고단한 순례자이기도 하다. 어른들에 비교하면 작을지 모르지만 어린이의 어깨에 지워진 짐 역시 어른이 느끼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어렵다. 또 어린이가 가는 순례의 길목에는 그 생명과 아름다움을 빼앗으려는 세상의 존재들도 있다. 그들은 온갖 탐욕과 쾌락과 이기심과 교만의 무기를 들고 호시탐탐 어린 여행자들을 노린다. 어린이는 이외에도 힘든 계단 길과 벼랑, 험한 산길을 스스로 지나야 한다. 인생의 과제들도 풀어가야 한다. 마음이 아픈 것은 그 순례의 길을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길을 안내하고 영적인 쉼과 능력의 생수를 주고 힘을 북돋우는 쉼터와 돕는 이를 만나는 것은 어린이에게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깊고 진지한 생각이 있다. 모든 교회의 어른은 스스로 지나온 순례의 길에서 만난 도우시는 분 예수님임을 경험해 알고 있다. 이제 예수님은 어른이 받았던 그대로를 어린이들에게 동일하게 베풀 것을 요청하신다. 결국 교회의 어른들은 그가 한 어린 영혼의 인생순례를 위해 돕는 이로 세움을 받은 깊이 있는 사역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돕기 위해 서야 할 분명한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어른들은 먼저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적인 전지전능함을 포기해야 한다. 어린이를 로봇으로 만들겠다는 심산을 품지 않는 한, 교육과 훈육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해야 한다. 부모나 교사들 특별히 교역자들이 오히려 품어야 할 것은 교육적인 겸손함이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해줄 만한 일, 해봄직한 일들을 끊임없이 찾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의 어른들은 어린이가 방문하고 돌아온 생각의 여행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린이가 한아름 갖고 돌아온 생각의 보따리를 풀어서 어린이가 원하는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스크림 장사로, 때로는 즐거운 놀이동산의 안내원으로 때로는 멋진 영화 감독으로 아이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보따리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어른들은 본인들도 생소해마지 않는 컴퓨터의 세계 안에서 어린이와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린이는 아직도 철의 장막이 가로막고 있는 북녘 땅에 가서 그곳의 아이들과 놀고 싶다고 떼를 쓸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교회의 어른들은 엄격하지만 친절한 부모로서 또는 단호하지만 친절한 순례 길의 인도자로서 충실해야 한다.

교회의 어른은 어린이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을 줄 수 있다는 환상보다는 어린이가 즐거워하고 어린이에게 필요하다 여겨지는 곳으로 안내하는 것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진리를 손에 쥐고 즐거운 것을 손에 넣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파송의 찬양; 선생님들에게

“여러분 우리 동무여 가만히 가만히 예수님 손을 붙잡고 집으로 갑시다. 오늘의 배운 말씀을 잊지는 마세요. 또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어린이 찬송가 52장, 대한기독교서회 발행).

 

파송의 찬양을 부르는 때가 바로 어른들이 어린이에 대해 가장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어린이가 좀더 성숙한 자기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향해 결단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활동과 예배를 마친 어린이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그들의 예배와 삶을 인도하였던 예수님, 그리고 어른들과 함께 파송의 찬양을 나눈다. 이때 어른들은 모든 가르침의 시간을 통해 훌쩍 커버린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놀라움과 함께 가르침의 모든 시간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파송의 찬양 속에 어린이는 처음 예배실로 안내받고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던 너무나 작아 보였던 아이가 아니다. 어린이는 이제 주 안에서 넉넉하게 순례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과 영혼, 두손에는 독특하고 깊이 있는 영성과 인격적인 성품과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질서 정연한 지식이 들려 있다. 그에게 맡겨질 세상과 사랑해야 할 이웃을 향하여 서 있는 대견스런 모습이다.

 

부모들과 교회의 모든 어른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이 하루 동안 어린이를 만나셨다. 어린이는 그 따뜻한 대접과 진지하며 사려 깊은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어린이는 아름답고 대견스러운 주님의 어른으로 자라났다.

결국 어른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파송의 찬양이 어린이들에 대한 대견스러운 변화와 자랑스러운 성장에 대한 기대감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 기대감은 어른들의 이기적인 기대치와 견줄 수 없는 것이다. 어른들의 세상이 말하는 기대치는 파송의 찬양에서 예찬될 모습이 아니다. 참 아름다운 기대감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어린이에게 창세 전부터 품으셨던 생각들이다. 하나님께서 어린이를 창조하실 때 품으셨던 그 생각들이다. 어른은 그 생각들을 즐거이 발견하고 기쁨으로 계발해야 한다. 참 가르침의 시간들을 가졌던 부모와 교사, 그리고 교회의 어른들이 아름답게 자란 어린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쁨과 눈물로 하나님께 파송의 찬양을 드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어른들과 교역자, 그리고 교사들은 어린이를 통해 참된 영성의 가치를 얻게 된다. 어린이를 통해 인간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어린이를 깊이 마주 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일상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