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약성서

이스라엘과 맺어진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과 보증은 어린이였다.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선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음을 가장 큰 손실로 여겼다(창 15:1-3).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수많은 자손의 번영에 대한 약속은 성서적 계약의 뿌리에 놓여 있었다(창 12:1-3). 창조보도에 따르면, 첫 여인이 이브라고 불린 이유는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미'였고(창 3:20), 그래서 타락한 첫 부모들에게 희망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자녀들의 우선성을 고려할 때, 친숙한 이메지는 식탁에 둘러앉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많은 자녀들의 이메지였다(시 128:3-4/ 네 집 내실(內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와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모든 출생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여겨졌던 반면에, 나이가 많은 탓으로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같이 보였던 출생은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으로 생각되었다(창 17:17, 21:6). 성서의 초기에 불멸은 부모의 이름을 계승한 자녀들을 통하여 살아 있는 것과 연결되었다(창 48:16). 후손이 없을 때, 레위기의 율법은 이 이름을 계승하는 것과 가장 가까운 친척을 통한 계승을 보장하였다(신 25:5-10). 어린이들은 예배, 기도와 제의에서 중요했다(출 13:8, 14, 신 4:9. 6:7). 성서는 특히 부모가 죽기 전에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일에 특별한 중요성을 두고 있다(창 27, 48, 49). 고대 유대인의 축복관습은 이 분문의 제의를 따르고 있다. 그들을 위해 사제의 축복도 사용된다(신 6:24-26).

어린이들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히브리인들의 밑바탕과 다른 고대 사회에서 힘이 없는 자들이었다. 전통과 관습은 노인들에게 가장 큰 중요한 자리를 부여하고 있다(잠 16:31, 욥 12:12, 시락 25:4-6).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고, 자녀들은 종종 심한 육체적 형벌에 의해 강제되는 엄격한 순종을 통해 교육되었다(잠 13:24/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9:18/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잠 22:15/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 23:13-14/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 시락 30:1, 12). 율법은 부모의 권위를 강하게 승인해 줌으로써 그 권위를 강화하였다(출 21:17/그 아비와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 20:9/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가 그 아비와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렇지만 인간의 길과는 대조적으로 성서는 하나님이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활동하신다고 말한다. 지혜는 어린 사람들에게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잠 2:6-7). 하나님은 젊은 요셉에게 꿈을 해몽하고 이집트 나라를 다스리는 은사를 주신다(창 41:38). 젊은 솔로몬은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은사를 통하여 지혜를 하나님에게 구한다(왕상 3:5-9). 지혜서는 이 이야기를 확장하여, 솔로몬이 어린아이처럼 지헤를 구하였고 젊은 시절 동안 내내 마치 신부를 구하듯이 지혜를 구했다고 묘사한다(지혜서 6:3-7, 7, 8장). 시편기자는 창조와 관련하여 선언하기를, 어린 아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우주의 기적을 깨달을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다고 한다(시 8:1-2/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세를 세우심이여...).

일반적인 인간의 기대에 대한 생각을 뒤집기라도 하듯이, 성서는 하나님이 젊은이와 어린이를 통하여 일하시는 경우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장자인 가인보다는 젊은 아벨을 사랑하신다(창 4:4-5).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하나님에게 하나님에게 간구하였을 때, 그녀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다(창 25:23). 야곱은 죽기 전에 그의 열한 명의 자식들을 축복하지만, 젊은 요셉에게는 갑절로 축복해 준다(창 48:1-22, 49:22-26). 요셉은 그의 형 므낫세를 위하여 야곱의 특별한 축복을 간청하지만, 오히려 더 젊은 에브라임이 축복을 받는다(창 49:13-20). 예언자 사무엘이 사울을 대신할 새 왕을 찾을 때, 그는 이새와 그의 일곱 아들을 방문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인상적인 건강과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기름을 부을 자가 아니라고 말하신다. 그 대신에 종종 어린이들에게 할당되는 일을 하는 들 밖의 '어린 아이'와 목동인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는 자가 된다(삼상 16:1-13). 하나님은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나 어린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 군인 골리앗을 이기게 하신다(삼상 17).

어린이의 이메지는 메시야 기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윗의 혈통의 어린이가 많은 고난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7:14, 16/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9: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또 같은 예언자는 에덴 동산의 어린이와 같은 무죄함으로 되돌아가는 전원적인 복귀를 말하면서 이런 모습을 묘사한다(11:8-9/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스가랴는 성읍 거리에서 소년들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장난하는 평화와 기쁨의 시기인 메시야의 시대를 환상 중에서 본다(슥 8:5).

2. 마태복음

예수의 탄생과 어린이 시절에 관한 이야기에서 마태는 그의 중심적 복음주제의 일부를 이끌어 들인다. 예수의 탄생과 그 뒤에 오는 사건은 그를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어린이(사7:14, 16)와 동일시한다. 어린이 예수는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임마누엘이라고 불린다(마1:23). 별과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동방박사의 여행에서 드러난 대로, 이 어린이는 이방인의 희망이 될 것이다. 이 어린이는 역사 속에서, 특히 이집트 포로살이 속에서 고난당하는 그의 백성과 하나다. 유대왕 헤롯은 '새로 태어난 왕'을 죽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를 몰라 두려워한다. 어린이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바로로부터 죽음을 면한 모세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바로 모세가 목숨을 걸고 그의 백성을 해방시켰듯이, 어린이 예수는 고난, 유배와 위험을 통하여 자신을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된다.

마가처럼 마태는 그의 제자도 단락에서 어린이에 관한 두 이야기 주위로 하나의 문학적 뼈대를 구성한다(18:1-5, 19:13-15). 그러나 마가와는 달리 제자와의 첨예한 대립은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지 예수에게 묻는 단순한 질문이 있다(18:1). 마태는 이 이야기를 교회 제자도에 관한 전체 담론의 서론으로 삼음으로써 어린이의 위치를 높인다(18:1-19:1). 그래서 어린이들은 교회 안의 많은 더 큰 집단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된다. 첫 이메지는 회개의 이메지이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두 번째 이메지는 겸손의 이메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셋째 이메지는 예수와의 동일시의 이메지이다. 그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18:5)과 그와 반대되는, 어린이를 실족시키는 것. 마태는 그의 복음에 중심적인 '예수와의 동일성' 주제를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는 모든 어린이들이 하나님이 임명하신 특별한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어린이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18:10).

이 담론에서 마태는 무엇보다도 읽어 버린 공동체 회원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어린이 혹은 소자의 이메지를 확장한다. 청중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으려는 목자처럼 그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명의 소자라도 망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18:14). 그 다음에 마태는 소자를 찾는 다른 두 모델을 제시한다. 첫째는 공동체 내에서 심각한 죄를 범한 경우인데, 그가 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첫 단계는 은밀한 일대일 대화이고, 그 다음은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는 것이고, 마지막은 전 공동체가 잃어버린 사람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18:15-20). 약하여 넘어진 자들을 위하여서는, 한계없이,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18:22) 용서가 확장되어야 한다. 어린이 문학적 뼈대는 19:13-15에서 끝맺는다. 마태는 마가에서 나타난 의미심장한 축복이 없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가 두 번 어린이를 안수한 것을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에서의 안수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린이/소자의 주제는 이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중요하다. 구약성서의 지혜 모티브를 따르면서 예수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11:25)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수가 마지막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마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의 격분하는 태도와 예수의 놀라운 행위를 보고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여"(20:15)라고 외치는 어린이들의 태도를 대조시키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이 어린이들의 말에 반대하자, 예수는 어린이가 하나님의 우주의 놀라움에 열려 있다고 설명하는 시편 8:2를 인용함으로써, 그들에게 응답한다. 마지막 심판(25:31)은 예수가 소자,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마태의 주제를 요약한다. 소자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굶주리는 자, 집이 없는 자를 포함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그와 반대로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은 곧 예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25:45). 

3. 마가복음 

마가는 로마제국에 의해 억압당하고 박해당하는 청중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몇몇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예언자들은 예수의 임박한 권능에 찬 재림을 선포하였고, 기적과 표적을 통하여 그들의 메시지를 지탱해 나갔다(13:6-22). 이러한 견해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마가는 어린이들을 제자도의 모델로 제시한다. 예수와 어린이들에 관한 두 이야기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예언의 테두리에 형성된 중심적인 교훈부 안에서 중요한 문학적 뼈대를 이룬다(8:31, 9:31, 10:32-34). 디레트(Dirrett)가 제시한 대로(1983), 이 어린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작은 이에 대한 예수의 동정의 본보기로나 초대 교회의 유아세례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대신에 그것들은 그 문맥의 빛 안에서, 그리고 구약성서의 모델(창 48-49)을 따르는 예수의 축복의 중요성의 빛 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첫 이야기(9:33-37)는 예수의 두 번째 죽음예언(9:31) 다음에 나오며,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자인가에 관한 그들의 논쟁 구절과 연결된다. 권력과 권위를 생각하는 제자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이 일어난다. 예수는 행동만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도 그 자신의 반응을 실증한다. 예수는 어린이를 품에 껴안는다. 디레트는 구약성서의 병행구로부터 이것이 입양절차의 한 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이런 행동을 말씀에 의하여 확증한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영접하는 자는 자신을 영접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리하여 그는 마태복음 10:40과 요한복음 13:20과 유사한 말로써 계승동기를 끌어들인다. 장면의 단절이 없이 예수는 다시금 열둘 외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을 금하려고 하는 요한과 대결한다(9:38). 그리고 예수는 소자를 죄로 이끄는(실족케 하는) 위험성을 강조함으로써 다시 한번 더 어린이를 우대한다(9:42).

어린이의 문학 뼈대의 마지막(10:13-16)은 예수가 이혼에 관하여 바리새인과 논쟁한 후의 의미심장한 지점에서 일어난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느끼고서 집에서 그에게 질문한다. 여기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한층 더 강한 대결이 일어난다. 그들은 예수에게 어린이를 데려온 자들을 나무란다. 예수는 겉으로 격분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의 제자들을 공개적으로 논박한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0:14).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이들처럼 받아들일 필요성을 말한다(10:15). 이 두 번째 문맥에서 어린이들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소유자들'만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어린이처럼 수용하는 행위의 모델이다. 두 구절은 예수의 축복으로 끝맺는다. 디레트가 지적한 구약성서의 병행구와 누가복음 24:20에서 나타난 예수의 결론적 축복의 능력을 고려할 때, 이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어린이와 젊은이는 마가의 드라마틱한 연속물에서 분명한 역할을 한다. 예수의 가장 큰 기적은 야이로의 12살난 딸을 일으킨 것이다(5:35-43). 가장 긴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는 간질과 유사한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던 어린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8;14-29). 수난 이야기에서 마가만이 다른 제자들이 다 도주한 후에 한 젊은이가 예수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고 말하고 있다(14:50-51). 그런데 이 사람도 군인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발가벗은 몸으로 도망갔다.

학자들은 이 제자와 예수의 부활을 알린, 빈 무덤에 있던 젊은이(16:16)와의 관계에 대해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텍스트는 마가복음의 결론부 안의 중심적 역할만이 아니라 그 동일성을 상세히 제시한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이 예수의 무덤에 왔을 때, 그들은 서로 말한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16:3). 그런데 텍스트는 여인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에 앉아 있던 젊은이를 발견하고는 놀랐다고 언급한다. 그 다음 텍스트는 그들이 놀란 것은 바로 젊은이야말로 거대한 돌을 옮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청중에게 마지막 드라마틱한 놀람을 준비한다. 발가벗은 채로 도망간 이전의 약했던 젊은이(14:51-52)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기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힘이 없는 자, 어린이들과 작은 자(소자)들을 통하여 활동하심으로써 인간의 기대를 뒤바꾸어 놓는다는 마가의 주제를 요약한다.

4. 누가복음 

누가복음은 "어린이들의 복음"이라고 불릴 수 있다. 예수의 탄생과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는 나중에 이 복음에서 찾을 수 있는 중심 모티브를 이끌어 들인다.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어린이 예수는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다. 탄생 이야기는 구약성서에 대한 명상을 닮고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예언자 사무엘을 인도하여 들에서 양을 치는 '작은 아이', 가장 젊은 다윗을 장차 왕이 될 자로 선택하게 한다(삼상 16:1-13). 비슷한 방법으로, 약속된 어린이는 다윗 자신의 도시 베들레헴 가까이 있는 들판에서 목자에 의해 발견된다. 목동들은 이사야가 말한 구유를 통해 어린이를 알아본다(1:1-2, 눅 2:7, 12, 16). 어린이가 마굿간 안에 있다는 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목자와 양식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점을 상징화한다. 이것은 복음서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길을 예비한다. 여기서 예수는 빵을 떼는 일 가운데서 인식된다(24:30-31)... 두 어린 시절의 지혜이야기(2:40, 52)는 예수를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의 관점에서 지혜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나중에 누가는 하나님이 작은 자, 어린이에게도 지혜의 선물을 허락하신다는 주제를 택하려고 한다(10:21-22).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 중에서 큰 자는 젊은 자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22:26)

누가복음은 9:51로부터 시작하는 특별한 여행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일하다. 여기서 그의 특별한 자료의 대부분이 발견된다. 그는 어린이를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제자도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을 위한 모델로서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코델(J. Kodell, 1987)은... 누가가 어린이와 소자의 모델에 근거하고 있는 대립하는 짝을 통하여 어떻게 가르치려고 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예수는 제자는 어린이를 자기 자신처럼 영접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 중에서 가장 작은 이가 가장 큰 이라는 것을 가르친다(9;47-48). 첫째 대립그룹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제자들이다(9:46-48). 둘째 대립그룹은 열두 명 외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는 일을 금지하는 요한의 태도이다. 사마리아인을 대하는 요한과 야고보의 태도를 꾸짖는 예수의 입장은 이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9:49-56). 어린이 이야기의 결말은 누가의 여행단락의 끝과 가까이 있다(18:15-17).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이처럼 영접하는 데 있다(18:17).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지극히 작은 자와 낮은 자를 포함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확장시킨다. 대립하는 짝은 부자 관원과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세리이다(18:9-30).

5. 요한복음

요한복음 서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그리스어: 테크나/어린이들)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고 선언한다.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혹은 위로부터) 태어날 필요에 대하여 언급한다. 공관복음은 어린이들을 이 새로운 탄생의 모델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은 실제 인물, 사랑하는 제자를 통하여 이 모델을 표현하려는 것같다(Brown 1979). 비록 몇몇 학자들은 그를 이상화된 제자나 청중의 모델로 생각하지만.

이 사랑받는 제자는 가장 젊은이였던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가 돌아올 때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보도가 있기 때문이다(21:22-23). 마지막 만찬 때에 그가 예수의 품에 있었다는 것은 젊은 나이를 추측케 한다. 예수에 대한 그의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관계 위에 모델화되었다. 예수는 그의 아버지의 품에 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비밀을 드러낸다(1:18).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품에서 사랑받는 제자는 그로부터 유다가 배반할 것을 듣고 이를 베드로에게 알린다. 그가 특별히 예수의 옆에 앉았다는 것은 그가 그의 특별한 계승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The Anchor Bible Dictioary. Vol. 1. Ed. by D. N. Freeman. Doubleday 1992. 904-907.

6. 도마복음

도마가 썼다는 복음서(일명 도마복음)에는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는 흥미있는 구절이 발견된다.

그의 제자들이 말했다. 언제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겠으며, 언제 우리는 당신을 보게 될 것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부끄럼 없이 너희 옷을 벗을 때다. 그리고 너희 옷을 벗어 어린아이들처럼 너희 발 아래 놓고 그것을 밟을 때다. 그러면 너희는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을 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젖을 먹는 어린아이들을 보시고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젖을 먹는 이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와 같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으로 만들고 밖을 안으로 만들 때, 위를 아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그래서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니게 될 때, 그 때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7. 히폴리트가 전하는 말

교부 히폴리트(Hypolit)는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고 전한다.

나를 찾는 자는 어린이들에게서 찾으라. 왜냐하면 내가 거기서 계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