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어린이들은 "희망의 상징"이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어린이와 함께 원초적이고 유일회적이고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이 새로이 시작된다.  물론 우리는 이런저런 어린이가 "누구를 닮았는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이미 알고 있는 것, 비슷한 것과 서로 비교해 볼 때만 새롭고 진기한 것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어린이의 전적으로 새로운 면, 전혀 비슷하지 않는 면도 목도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사랑하고 미래에 대해 열려있으려고 한다면, 어린이를 존중해야 한다.

모든 생명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평화와 정의의 나라를 향한 희망은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어린이들에게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초월적인 관점 안에서 어린이들을 바라보고, 어린이들을 우리 세상의 형상에 맞추어 형성시키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생명의 모든 새로운 시작은 구원을 받지 못한 이 세계 안에서 고향을 찾는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시작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린이의 생명 탄생에서 새로운 시작 혹은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은 단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것에 대한   희망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시며, 우리에게 기대를 거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요, 그분의 세계를 위한 그분의 꿈이며, 그분이 사랑하시는 지구를 위한 그분의 형상이다. 모든 어린이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다운 인간", 그분의 메아리, 그분에 대한 화답, 그분의 무지게를 기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고, 인간 역사의 폐허를 견디시며, 한 세대가 지나면 다른 세대가 오게끔 하시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다운 인간을 기대하신다.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에 따르면,   영원하신 하나님은 메시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한다. "모든 예언자들 속에서 나는 너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야 네가 왔구나"

만약 새로 태어나는 모든 어린이에게 이러한 초월적인 기대가 있다고 한다면, 어린이들에게 미래를 열어주고 그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어른들, 자매들과 교사들의 임무이다.

(Kind und Kinheit als Metaphern der Hoffnung, in :Evangelische Theologie, 2. 2000)

경이로움 속에서 우리는 사물들을 처음으로 인지한다. 경이로움 외에는 인식의 첫 경험을 가질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의 인지에서 우리는 대상의 인상들에게 아무 보호도 없이 내맡겨진다. 그들은 우리를 압도한다. 경이로워하는 어린이는 모든 면에서 그 자극들이 모든 감각 기관들에게 몰려오는 인상들을 파악할 수 있는 표상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어린아이는 이 대상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을 전혀 회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각이 반복될 때, 대상의 인상들이 그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회상들이 형성된다. 그래서 자기를 엄습하는 인상들에 대한 반복될 수 있는 태도가 생성되며, 어린아이는 이 인상들에 대하여 익숙하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된다. 이제 어린이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며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다. ...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연구가들, 예술가들, 그리고 사상가들은 경이로움의 어린이다움과 새로운 것, 놀라운 것에 대한 감각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존하였다. 그들은 인식의 근원에 가까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리지널하다. 

위르겐 몰트만(과학과 지혜,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