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순진무구함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늘 어린아이들의 아름다움을, 들에 핀 꽃을, 백합꽃의 순수함을, 그리고 새들의 순진무구함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순진무구함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은 미리 그것을 잃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말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그대는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일단 그대가 지식의 맛을 알았다면 돌이킬 수는 없다. 그대는 지식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다.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그것을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이전의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대가 다시 보통의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다. 어떻게 그대가 이미 안 것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을 넘어갈 수는 있다. 그것을 초월할 수는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어린아이의 흉내는 낼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방은 교활한 것이며 계산적인 것이다. 예수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대는 어떻게 어린아이와 같아질까 하고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결코 연습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는 자기가 어린아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순진무구함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가 연습을 한다면 그대에게 자의식이 있다. 그러면 어린아이다움은 가짜에 불과하다. 그대는 어린아이와 같은 흉내는 할 수 있어도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가 되지는 못한다.

성자나 현자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어린아이와 같게 된다. 그는 머리의 헛됨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초월했다.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의 모든 무의미함을 이해했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싶다는 욕망,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한 욕망을 다 버린 것이다. 그는 이러한 욕망의 무의미함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 이해에서 초월이 일어난다. 그것을 이해하는 즉시 그대는 변형되어 하나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때 거기에 어린아이 시절이 다시 도래한다. 이것을 제2의 어린 시절이라고 부른다 .그대는 다시 한번 태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탄생이다. 이것은 그대 자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220-221).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은 빈약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시절의 순진무구함은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자의 순진무구함에는 그 부족한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삶의 형태들을 알고 있다. 그는 움직이면서, 경험해야 하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그는 아주 반대쪽으로도 가보았다. 죄인이 되기도 했고, 아주 깊숙이 탐닉했으며, 그리고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이다. 그의 순진무구함은 아주 풍요롭다. 그는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누구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다. ... 그대가 이 단계에 이르면 - 처음에 그대는 하나의 어린아이였고 마지막에 다시 하나의 어린아이가 된다. - 그대는 하나의 완전한 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완성이다(224).   

마음을 통해서 보지 말라. 마음을 버리고 보라. 어린아이들은 마음을 가지지 않고 세상을 본다. ... 아이가 태어나면, 첫째 날에 아이가 보는 세상은 하나다. ...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 종교는 분리하는 것이 아니고 합일시킴으로써 경계선을 긋지 않고 경계선을 없애버림으로써, 궁극의 것, 하나에 도달했다. ... 모든 경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실체 속에는 경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230-233).  

삶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아라.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단지 그렇게 바라보아라. 그렇게 순수한 바라봄은 그대에게 새로운 지각을 가져다 줄 것이다(272).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홀로 있는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즐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가지고 놀며, 자동적으로 성적인 흥분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빤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를 예쁘게 생각하는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모든 어린아이들은 아름답다. 그대들의 의견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추한 아이가 탄생되는 일은 없다. 모든 아이들은 차츰차츰 추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모든 아이는 아름답다. 모든 어린아이라 아름답게 태어난다면, 그들은 아름답게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아이는 자족적이다. 그것이 그들의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스스로 빛처럼 존재한다(510-511).

Bhagwan Shree Rajneesh

라즈니쉬 강의, 박노근 옮김, 도마복음 강의(예문,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