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을 통해 본 생명과 인간

장 회 익(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오늘 제가 과학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종교모임에 왔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간단한 변명을 하고자 합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고,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다." 아인슈타인의 표현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그 안에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과학 없는 종교가 장님일까요? 장님이란 빛을 통해서 사물을 식별하고 확인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장님들 중에는 깊은 철학적 사고를 하고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눈뜬 사람 이상으로 세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현상 그 자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면에서는 떨어집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 역시 현상 자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그런 작업은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과학의 힘을 빌려야 할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광선을 통해서 사물을 확인하는 것처럼 종교에서도 과학을 이용해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뜻으로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는 말도 해석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과학은 현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부분 부분을 확실하게 살펴나가는 면을 있지만, 바로 그렇게 부분에 부분 부분에 치중하기 때문에 전체를 조화 있게 보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 쪽 다리가 길어지고 다른 다리는 짧아지거나 약해지는 이런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한 눈에 파악하는 종교와 상호보완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것도 서로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 한 편 종교와 과학을 비교해 보면서 느끼는 것은 둘 사이의 작업 진행 순서도 반대로 되어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우선 과학을 볼 것 같으면 부분을 먼저 보고, 부분에서 확인한 것을 다시 엮어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종교는 오히려 부분보다는 전체의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고, 그리고 그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이냐 하는 부분으로 나갑니다. 이런 점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과학을 하는 입장에서 과학 속에서 볼 때 생명과 또 생명의 중요한 부분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과학이라고 하면 첫째로 떠오르는 생각은 과학기술이라는 말입니다. 과학하는 사람은 기술적 학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통상적으로 말합니다. 저는 이런 사고가 과학 본연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을 통해서 사물을 깊이 알고 그것을 활용하면 그것을 모르고 이용할 때보다 많은 활용을 할 수 있는 것 뿐이지, 과학 자체가 원래 활용할 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학의 본래 사명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파악하자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점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살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물리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 어떤 분은 물리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생명이나 인간을 이야기하려 하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리학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 대해서 일반 사람들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조그만 일화를 이야기하면 어느 물리학자의 딸이 국민학교에 다니는데, 아버지가 무얼 하는 것인지, 물리학이 무엇인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알 수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딸 아이가 방으로 뛰어들면서 기쁜 목소리로 물리학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생물학은 산 것을 다루는 것이고 물리학은 죽은 것을 다루는 것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리학이 시체를 다루는 학문은 결코 아닙니다. 물리학은 생명 또는 생명이 아닌 것을 포함한 모든 물질적 대상에 대해, 그것 안에 적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확인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보려는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물리학을 통해 생명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사실 제가 생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매우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을 거의 마칠 무렵에야 비로소 물리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전까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이러한 물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납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위를 마치고 나서 생명에 대해 보다 깊이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학문의 방향을 바꾸어 보려는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5년 전쯤 유고슬라비아에서 과학 철학회의가 있었는데 어떤 분으로부터 생명철학에 대해서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때까지 제가 생각했던 생명문제를 정리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또는 물리학의 관점에서 생명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실상 그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 대해 저 말고 그 전에 물리학자로서 생명에 대해 상당히 깊은 직관을 줄 수 있는 책을 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유명한 물리학자이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로 널리 알려진 슈뢰딩거입니다. 그의 물음을 보면서 저는 문제를 조금 바꾸어 접근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단위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단위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생명을 하나하나 따진다고 할 때 무엇이 '하나의 생명'인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단위 자체를 체계적으로 검토한 작업이 그때까지도 또 그후에도 저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에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단위를 일단 생각해 보는 것이 매우 유익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명의 단위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평범한 주제이기도 하고 몹시 어려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평범한 주제라고 하는 이유는 누구나 생명의 단위를 다 알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을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 이것이 생명의 단위가 아니겠느냐 또 또끼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이런 것이 생명의 단위가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언뜻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가령 사람을 하나의 생명이라고 할 때에 그 하나가 언제부터 생기느냐 하는 것을 잠깐 생각해 보아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령 모태에서부터 나오는 순간, 그것이 생명의 출발이냐 하면 이미 모태 안에서 1년이나 성장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출생하는 순간에 생명이 될 수 없다면 그러면 어느 순간이 생명의 시작이겠습니까? 생물학적으로는 모체에서 최초로 하나의 세포가 형성되는 순간이 생명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하나의 세포가 분열하여 둘로 갈라지고 둘이 다시 분열하여 넷으로 갈라지고, 이렇게 분열이 계속되어 몬 전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편 생명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 되게 하는 유전정보입니다. 이 유전정보는 잘 아시는 것 처럼 DNA분자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유전정보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정보과학에서는 단위를 설정해서 그 정보의 양이 얼마다 하는 것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정보를 책에다 쓰는 정보와 비교해 보면 국립도서관 같은 대형도서관의 장서 100만권하고 맞먹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의 세포가 두 개의 세포로 갈라질 때는 처음의 세포를 완전히 복사해서 각각 나누어 가지게 되고 따라서 이들을 완전히 독립된 존재가 됩니다. 결국 하나 하나의 세포가 생명의 기본적 단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세포들이 잘 조직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단위는 세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세포가 생물의 진정한 단위가 될 수 있는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세포핵 속의 DNA의 유전자 정보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생명의 단위가 세포가 아니고 DNA분자로 되어 있는 유전자라도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DNA분자들을 떼어놓고 생각해 봅시다. DNA는 조금 복잡할 뿐이지 하나의 분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리해 놓고 보면 먼지나 돌조각의 그것과 사실상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포라는 환경 안에 들어 있을 때 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정보로서의 기능도 그때 가서야 발휘가 되지 밖에 내놓았을 때는 정보의 의미조차 상실하고 맙니다. 즉 정보라는 것은 일정한 여건 아래 있을 때 어떤 특정한 상황이 되면 그것이 본래의 기능으로 작용하지만, 그 여건을 벗어나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정보로서의 가치조차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DNA분자가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세포 안에 들어있어야만 한다는 대단히 강력한 조건이 대두됩니다. 그러면 그 세포 하나는 과연 생명인가?

예컨대, 세포 하나도, 사람의 세포를 떼어서 놓고 보면 거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동물의 세포 하나를 떼어 잘 배영하면 그것이 동물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도 그것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아주 특수한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생명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의 세포로서 조건부적 단위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생명의 진정한 단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사람 개체를 형성하는 몸 속에 세포가 들어 있을 때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떤가요? 사람은 하나의 완전히 독립된 생명일까요? 이것도 마찬가지 논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 하나를 골방에 집어넣고 한달만 두면 거의 틀림없이 사람이 아닌 생존하지 않는 존재로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구라는 환경을 벗어나서 다른 우주공간에 10분만 있으면 이미 사람이 아닌 존재로 바뀌게 되지요. 그러므로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극히 특수한 조건 하에서만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더 큰 단위인 종이나 인류라고 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개체보다는 훨씬 오래 수백만 년을 생존하는 단위가 되지만, 역시 한 종만 따로 분리시켜 놓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외적 여건에 의존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의 단위는 무엇이냐 하는 물음을 다시 해보게 됩니다.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티브 엔트로피(부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이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밥을 먹고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사느냐 하는 것을 우리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네가티브 엔트로피(자유에너지)의 공급이라는 해석과 같은 말입니다. 이러한 네가티브 엔트로피가 왜 보급돼야 하느냐 하면, 생명체라는 것은 이것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면, 대단히 낮은 엔트로피를 유지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엔트로피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즉 낮은 엔트로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외부에서 낮은 엔트로피를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단위에 대한 물음에서 다시 살펴보면, 네가티브 엔트로피를 공급받을 수 있는 그 공급원을 포함하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독립적으로 생존을 지탱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단위, 즉 생명이 지녀야 할 최소 규모의 단위는 무엇일까요? 우리 지구의 경우는 태양계가 될 것입니다. 뜨거운 항성(태양)과 차가운 행성이 있어서 항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유에너지를 공급받는, 즉 뜨거운 태양과 차가운 행성 사이의 특별한 조건에서 네가티브 엔트로피의 지속적인 공급이 있는 이것이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태양-화성, 태양-수성에는 생명이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유에너지의 공급원이 확보가 되어야만 비로소 독립적이고 더 이상 외부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진정한 단위가 이루어집니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 지구상에는 하나의 생명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생명은 현대 과학의 추적에 의하면 35억년이 되었습니다. 즉 35억년 전에 지구상에 처음 생성되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해서 살아오고 있는 하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이 생명만이 진정한 의미의 본질적인 단위가 되는 생명입니다. 나 자신은 무엇이냐 하면 생명의 한 부분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독자성을 상당히 부여받은 그러한 개체 생명이지만 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상대적인 조건부적 존재이지 내가 생명의 진정한 단위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저는 이 진정한 하나의 생명을 global life라고 명칭을 붙여 보았습니다. 우리 말로 옮기기가 더 어려운데 현재는 '온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온생명과 비교되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명이라고 불러왔던 것은 '개체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개체생명은 조건부적 단위로서 전체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생존가능한 것입니다. 또 이 개체생명을 중심으로, 개체생명 이외의 나머지 부분, 즉 온생명에서 한 개체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온 생명에서 한 개체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이 개체생명의 보생명(co-life)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면 이제 요즘 우리가 이야기하는 환경문제가 단순히 환경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환경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만이 하나의 독자적인 생명이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부분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체가 하나의 몸, 하나의 생명이고 나 혹은 우리 인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보생명' 즉 그것과 함께 완전한 생명이 되는 우리 몸의 나머지 부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대로 현대 과학에서는 생명의 기원을 35억년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 여기 모여있는 우리 전부는 나이가 35억살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것은 우리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유전정보라고 했는데 그 유전정보가 달라지면 사람이 아니라 개구리가 될 수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전정보는 35억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걸러지고 다듬어져서 그 경험한 결과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 들어와서 우리를 만들고 있으므로 우리는 35억년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생성한 최초의 세포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고 부모는 또 그 위의 부모에게서,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35억년 전의 생명의 기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나머지 생물들도 사실은 그 생명의 기원에서부터 함께 갈라져 나온 우리의 몸의 다른 세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 여러 가지 세포가 있지만 이들은 어느 시기에 서로 갈라져서 우리 몸의 다른 부분을 형성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죠.

사람의 경우에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공통 조상이 누구이고 어느 때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냐 하는 것을 계산할 수도 있습니다. 모계를 따라 계산해 올라가면 대략 20만년 전 동남아, 또는 아프리카 북부 어느 곳인가에 살았던 어떤 한 여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여인의 후손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여인의 이름을 이브(Eve)라고 부르지요. 그러니까 우리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들의 촌수를 따져보면 대략 몇 천촌을 벗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개구리하고도 친척인데, 개구리의 DNA구조와 우리를 분석해서 조사해 보면 역시 50만촌이다, 혹은 70만촌이다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도 우리의 친척인데 촌수를 따져보면 한 5천만촌이거나 천만촌쯤 될 것입니다. 어쨋든 이러한 것이 우리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혹은 우리 몸의 또 다른 세포들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사실들입니다.

이 과정을 더 깊이 밝혀내기 위해서 진화과정을 연구하면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모임에서 진화론을 말씀드리기가 적당한지 모르겠는데, 특히 기독교 일각에서는 우리 존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화론을 고의적으로 도외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진 존재인지를 밝히는 과정인 진화론은 마치 우리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느냐를 밝히기 위해 사회역사를 공부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진화의 역사는 우리의 문화사에 비해서 만배 정도 깁니다. 만배 정도 길뿐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예컨대, 본능은 어느 시기에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어 왔느냐, 그 다음 우리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또 어느 시기에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또 우리의 고차적인 이성은 어느 시기에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 등 정신적인 문제까지도 상당히 의미 있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을 심장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심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두뇌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능도 우리 몸이나 뼈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두뇌에 있습니다. 두뇌 속에는 모두가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왜 가슴이 뜨거워지느냐 하면, 일단 감정에 해당되는 두뇌 자극이 발생하게 되면 두뇌가 심장에 명령을 내려 체내의 혈액을 빨리 돌도록 만들기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두뇌라는 것이 어느 시기에 어떻게 발전해 왔느냐, 또 그 기능이 어떻게 성장을 해왔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을 추적해 볼 수 있어요. 두뇌 자체를 보면 대개 삼층 구조가 있는데 가장 안쪽에 본능을 지배하는 구조가 있고, 그 다음에 감정을 지배하는 구조가 있고, 마지막이 고차적인 이성을 지배하는 고조가 있습니다. 바로 이 구조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순서입니다. 그리고 이 두뇌의 지능의 크기도 고학적으로 추적할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동물이 지구상에 사는데 이것들의 지능이 다 달라요. 그러나 지능은 다르지만 지능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길 수 있는데, 우선 행동심리학적으로 그 등급을 매길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두뇌가 크면 지능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지요. 두뇌가 가장 큰 것이 지능이 높다면 지구상에서 지능이 가장 높은 존재는 고래가 될 것입니다. 고래 중에는 사람 두뇌의 열배 정도 되는 고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고래는 사람보다 지능이 낮습니다. 코끼리도 사람보다 두뇌가 크지만 지능은 낮지요. 그렇다면 행동심리학적으로 알아낸 지능의 수치와 딸 들어맞는 지능의 수치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동물의 두뇌를 신체의 크기로 나눈 수치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의 일치합니다. 정확하게는 두뇌를 신체크기의 2/3승으로 나누면 됩니다. 이것은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즉 신체의 크기로 나누는 것보다 신체 표면의 크기로 나누면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화석을 조사해 보면 많은 동물들의 화석에서 그것들의 두뇌 크기와 신체 크기의 비를 알 수 있고 지능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직계 선조의 지능이 어느 시기에 어떻게 발달해 왔느냐를 알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세번에 걸쳐서 커다란 변화가 옵니다.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본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단계에서 지능이 커집니다. 이 단계에서는 개구리, 도롱뇽, 악어 같은 파충류들도 함께 지능이 커집니다. 그 다음 지능이 크게 증가하는 단계가 감정이 형성되는 단계인데, 이때는 또끼나 돌고래 같은 고대 동물들이 다 우리처럼 지능이 커집니다. 세번째는 우리 인류의 두뇌만이 2,3백만년 전에 갑자기 커지게 되는 단계입니다. 사실은 2,3백만년전 그 시기 이전에는 우리 직계 선조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존재가 못 되었습니다. 가장 지능이 높은 존재는 돌고래였습니다. 돌고래의 선조가 우리보다 지능이 더 높았어요. 그런데 그 마지막 단계에 가서 가장 지능이 높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의 이런 역사적 형성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볼 때 지구상의 생명은 사실은 하나의 생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다른 동식물도 우리와 같은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하나의 생명 속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냐를 생각해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은 같은 동료 생명체들 중에서도 가장 특수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독특한 지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사람의 몸을 온생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사람의 위치는 사람의 두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사람 속에서 정신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탕이 신경세포입니다. 이 신경세포들이 사방에 깔리고 특히 두뇌에는 많이 모여서 활동을 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다운 면을 나타내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이제 전체 생명 속에서,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가장 지능이 높은 인간은 전체 생명계의 중추신경계를 이루고 있고, 우리 각자는 신경세포에 해당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위치는 막중한 중요성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우선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우리 온생명이 35억살이 되었는데도 우리가 35억년된 존재라는 것을 최초로 자각한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한편 우리가 그것을 자각한 바로 현 시점이야말로 지구 진화사 중에 대단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그 생명 속에서 그 생명의 자의식이 최초로 발생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과거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하고 달리 매우 중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경세포라고 하는 것은 온 몸에 퍼져 있으면서 신경세포가 아닌 다른 어떤 부분에 어려움이 닥치면 즉시 그것을 본부 즉 두뇌로 알리는 신호를 보내줍니다. 본부에서는 아프다, 차갑다, 뜨겁다는 느낌을 받아들이고 손을 피한다든가 보호를 한다든가 등의 행동을 하게 되지요. 즉 신경세포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 전체의 아픔을 느끼면서 보호하는 그런 기능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제 우리 참 몸의 다른 세포인 동료 동식물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아픔이 우리에게 느껴져야 비로소 우리의 중추신경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문제는 바로 우리가 이 생명 속에서 중추신경으로서의 역할을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대단히 불행하고 걱정스러운 상황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몸으로 보면 전체 생명 중에 일부 세포들이 암세포로 바꾸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암세포라고 하는 것은 다들 알고 있듯이 우리 몸의 세포입니다. 우리 몸에서, 첫번째 세포에서 같이 갈라져 나온 동료 세포입니다. 동료 세포일 뿐 아니라 이것은 여러 면에서 대단히 건강한 세포입니다. 단지 한가지 문제라면 자신의 위치를 살짝 망각하고 있는 것인데, 왜 망각했는지 그 이유는 우리가 잘 모릅니다. DNA 기록 속에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기록이 살짝 지워졌어요. 그것이 바로 암세포입니다. 그뿐입니다. 반면 내 손가락을 형성하고 있는 이 세포는 더 이상 여기서 더 번식을 해서 자라 올라가지 않는데, 이것은 수십억년을 내려오는 지혜 속에서 손가락이 되면 너는 더 이상 거기서 다른 것으로 번식하지 말고 네 위치를 다하라는 정보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대로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정보가 살짝 지워지면 암세포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암세포가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 보면서 이게 참 살기 좋은 세상이구나, 영양보급도 잘 되는데 왜 증식하고 번영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증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들로 보면 대단히 왕성하고 건강한 생명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여기에만 있냐 하면서 다른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간이나 위장에 옮겨 붙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암이 퍼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의사는 '아 며칠 안 남았구나' 이렇게 진단을 내리는 것이지요. 만약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 온 생명을 바깥에서 볼 줄 아는 의사가 우리 생명을 보게 된다면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야, 이제 35억년을 지나고 나서 비로소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막 의식하기 시작했는데 암이 걸려 버렸구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바로 신경세포가 되어야 할 그 세포들이 이제 과학기술이라는 것에 눈을 떠서 우리 동료 세포들로 구성된 실체의 주요 부분을 마구 훼손시켜 가면서 증식, 번영을 하고 있는데, 이게 지구 전체를 뒤바꿔놓는 중증의 암이라고 판정을 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기서 환경의 문제, 특히 공해문제를 상당히 다행한 것, 고마운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해문제라는 것은 우리의 몸에 퍼진 암 때문에 생긴 통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암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암이 그런 것처럼 처음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잘사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 공해를 통해 그 통증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이제 우리가 잘못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느낌을 이 공해문제를 통해 비로소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공해를 통해 통증을 느끼기 전에 얼마나 많은 우리 동료 동식물들을 멸종시켰는지 알 수 없습니다. 35억년을 같이 살아온 우리 동료들을 우리가 죽인 것입니다. 우리 전체 생명에서 잘라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예컨대, 손톱이 자라면 잘라내고 수염이 자라면 깍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가락을 자르고 다리를 절단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도로를 아스팥트로 포장하고 도시를 건설하면서 또 자동차로 편하게 다니기 위해서 많은 동식물을 희생시키는 것이 바로 이런 행위일 것입니다. 내 다리를 한번 자르면 다시 생겨나지 못하는데 다리없이 휠체어에 올라타고 앉아 빨리 달리니까 좋구나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는 환경문제를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생명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자각할 때에 비로소 그것에 대한 올바른 처방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환경문제에 대치하는 방식은 이런 올바른 처방에 의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몸이 따끔 따끔하고 아프니까 병원에 안 가고 약방에 가서 진통제 먹으며 통증만 없애는 그런 일차적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가 생각됩니다. 만약 이렇게 해서 임시방편으로 공해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불과 며칠 안 가서 35억살 먹은 우리 생명의 끝이 온다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 생명의 존폐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년, 백년, 천년을 더 사는 것이 아니라 십억년, 백억년을 더 사는 존재입니다. 십억년, 백억년 동안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현재 지구상에 있는 제한 된 이 자원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과학이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과학을 마치 요술방망이처럼 착각합니다. 현대과학은 결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현대과학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자원뿐입니다. 그것외에 일부 자원을 다른 천체에서 가져올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비현실적 전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부수되는 새로운 쓰레기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그러므로 지구의 자원은 앞으로 수십억년을 함께 사용하여 살아야 할 자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불과 수십년 길어야 수백만 년에 없애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령 우리 집에 몇 백년을 내려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책에다 기록으로 남겨놓은 많은 유산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것을 발견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는 마침 날씨가 추운데 좋은 연료를 발견했다고 좋아하며 10분만에 이 모든 것을 난로에 태우면서 잠시 즐기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바로 석유나 석탄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석유나 석탄은 수십억년 동안의 우리 선조들의 유해가 녹아서 만들어진 것인데 다시 재생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씨가 추우면 수십억년의 역사를 삽시간에 태워 없애며 '야, 따듯하고 좋다'하며 즐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명으로 비교하면 단 몇초만에 와장창 태워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것도 끝나가니까 대체에너지가 무엇이냐, 그러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 생각에는 앞으로 몇십억년 동안 우리 후세들에게는 한방울 한방울의 석유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문화유산을 우리는 에너지로 생각하고 가져다가 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원을 활용한다든가 또 지구상에 살면서 앞으로 우리 문화의 방향을 정하면서 우리가 어떤한 존재인가 그리고 얼마나 살아야 될 존재인가에 대해 자아의식을 가져야 할 때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한 개인이 십년 혹은 이십년 더 살겠다 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정도만큼이라도 온생명을 생각해야 비로소 환경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