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매체와 복음 

 

L. W. Polland(장혜선 역)


 

테레사 수녀는 TV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람과 Morning Show라는 프로그램에서 대담을 하기 위해 뉴욕의 한 텔레비젼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전에도 그녀를 그 대담 프로그램에 소개했던 맬콤 머거릿지(Malcom Mug-geridge)는 TV 모니터에서 그 사회자를 "축 쳐진 녹색 콧수염에 검붉은 코, 그리고 자줏빛 머리"를 가진 남자로 묘사했다. 머거릿지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와 매체가 문화 안에서 부딪치며 만나는 극적인 순간을 설명한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의 텔레비젼 스튜디오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그녀는 계속되는 상업광고로 프로그램의 진행이 잠시 중단되고 하는 일에 전혀 익숙치 않았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는 어떤 경건한 분위기가 작용한 때문인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다양한 광고들이 방영되었다. 가령 비지방 식품이라든가 저칼로리 음식에 관한 그러한 광고들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다소 놀라운 표정으로 그 광고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물론 그녀는 그 음식들로 어떻게 하면 굶주리고 뼈만 앙상한 사람들을 살찌울 수 있을까를 궁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모순됨이 그녀를 당혹케 한 것은 잠시뿐이었다. 광고를 보고 나서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TV 스튜디오에도 그리스도가 필요하군요"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순간 정전이 되 버리고 무대감독이 차라리 죽어 버리기를 바랬다. 그와 같은 일은 전례 없는 사건이었으며 진실이 허구로 가득한 매체 가운데 하나로 개입되었던 일이었다.

성경이 기록되거나 예수께서 가르침을 펴실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매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세대를 거듭하며 전해 내려온 구전(口傳)이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문들, 공적인 칙령 등을 읽는 것, 손으로 만든 두루마리, 새겨진 석판 기록들을 제외하고는 대중을 위한 매체란 거의 없었다.

가령 약 3,500년 전에 모세가 시내산 기슭에서 200만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향해 오늘날의 우리가 그러하듯 전파 매체를 통해 연설하고 있는 모순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진탕 먹고 마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출 32:15-20)를 찍으려고 TV 카메라가 이리 저리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모세가 그토록 진노할 만 했던 이스라엘의 방탕한 모습들이 TV의 황금 시간대에 방영이 되었다거나, 성묘사가 노골적인 외설 비디오를 통해 그러한 모습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영구 보존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신들을 향해 춤추며 흥청대는 모습이 MTV를 통해 방영되어 사람들을 자극시켰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즘 사람들이 보는 Playboy나 Hustler, 혹은 그 이외에 수만 가지도 넘는 음탕한 잡지들을 그들의 장막 자리 속에 감춰 놓고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모세가 자신이 진노한 사실에 대해 들려주려고 해도 군중들의 대부분이 워크맨 녹음기에 귀를 대고 있거나 요즈음의 우리가 늘 상 그러하듯 하루에 7시간에서 9시간 정도 TV를 보는 그들이 TV의 다른 채널을 부기 위해 채널을 돌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금송아지 우상을 파괴한 사건에 대해 TV 뉴스가 보도하기를 그 사건이 단지 한 심리학자와 자유주의자인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사건으로 묘사하며, 모세의 행동은 다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쓸데없는 분노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야웨의 의로운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의분(義憤)보다도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제기하는 버려진 아이들의 겉으로 난 상처가 더 확실한 결과로 드러나는 사람들에게 성숙한 분노를 품은 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요구될 수 있었을까?)

다른 한편으로 예수의 공적 사역에 오늘날과 같은 대중매체의 홍수가 밀어닥친다고 상상해 보라. TV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이 소형 카메라로 밤낮없이 그를 미행하고 추적하며, 유대와 사마리아, 그 외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회의적인 시청자들을 위해 그의 기적에 대해 일일이 기록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지속적인 골칫거리를 어떻게 다루셨을까? 꼬치꼬치 캐묻기 좋아하는 수많은 기자들이 그의 기적이 날조된 사건들이라고 밝히고 싶어하며, 전에 소위 "빛을 보았다"는 신자들이 거짓된 증언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한낱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으로 몰아 세우려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무엇이라 대답하셨을까? 예수께서 시골 변방 지역을 지나며 가르치시는 동안 도회지의 극장에서는 "나사렛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자전적인 모습인 양 그려내며 그의 생애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예수의 인격과 주장을 훼손시킨다면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을까?

맬콤 머거릿지는 어떤 매체가 그 당시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를 유혹하는 네 번째 시험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본다. 꽤 부유한 로마의 거물급 인사가 갈릴리 지방을 통과하면서 예수의 가르치심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청중을 사로잡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 거물급 인사는 분명히 예수께서 동의하실 만 하도록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로마의 유흥산업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가 갈릴리에서 그의 주변을 따라 다니던 하류층의 구질구질한 사람들 대신 대 로마제국의 거대한 관중을 접할 기회를 쉽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예수께서는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네 번째의 유혹 역시 물리치셨을 것이다.

매체의 홍수에 파묻힌 21세기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향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매체로부터 받고 있는 유혹과 공격은 무엇이며 그 문제들은 어떻게 다뤄져야 할 것인가?

용어의 정의

이 질문을 연구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우리는 몇 가지 용어에 대해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위해 나는 매체를 대중의 의사전달을 담당하는 도구 즉 영화, TV, 라디오, 비디오 및 녹음 기술, 그리고 인쇄물 등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것이다. 이 중에서 나는 내 임의대로 어떤 범위에 있는 참고서들은 여기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가령 미술이나 음악, 연극, 기타의 여흥을 위한 참고서적들을 말한다. 물론 이 분야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영향력 혹은 매체의 권력 구조의 일부분이 되는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또한 본 글에서는 메시지의 내용을 만들어 내거나 통제하지 않고 단지 다른 이들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만 하는 것들 - 예를 들어 전화나 위성, 유선, 팩시밀리, 컴퓨터 등 - 의사전달을 위한 산업은 이 용어의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한편 임의적으로 medium의 복수 형태인 media를 다양한 매체의 광범위한 공동체에 대해 언급할 때 하나의 단수명사 혹은 집합명사로 사용할 것이며, 광범위한 공동체의 다양한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쓰일 때에는 복수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물론 이 분야에 관한 전문가들은 내가 실제로 엄연히 다른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을 일으킬 테지만 좀 더 간략하게 하기 위해 나는 몇 가지 산업을 "매체의 집합체"로 종합할 것이다.

매체(media)를 이와 같이 정의하는 작업은 대중의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기 보다는 매체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는 도구라는 것은 단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몇몇 신앙심이 깊다는 신자들은 루시퍼가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이며, TV나 라디오와 같은 매체들이 공중을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체계에 있어서 사람과 권력에 대한 구조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결코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구성 요소들이 본 연구의 초점을 이루고 있다.

현대의 매체가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두드러진 특색

앞서 모세나 예수께서 매체의 압력을 받으시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은 그러한 기술문명이 없었던 시기에 기술공학의 특징이 시대착오적인 모습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 문명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풍토에 기초한 매체의 영향력은 다른 여타의 영향력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우리가 고투하는 현대 생활의 여러 현상은 구약이나, 신약 시대의 신자들과 다소 그 형태가 다를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똑같이 겪었던 문제들이다. 전쟁, 간음, 폭력, 이단, 탐욕, 매춘, 착취관계, 도둑질, 살인, 우상숭배, 심지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변태적 성욕의 문제 역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한 가치에 대한 매체의 특별한 영향력 행사에 대해서는 성경의 어느 곳에 언급되어 있는가? 성경의 어느 해설자가 사탄의 영감을 받은 록음악에 노출됨으로써 우리 영혼의 적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으며, 영화나 TV, 혹은 노골적으로 성묘사를 하고 있는 글들을 통해 대리적인 성경험을 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였는가?

성경은 이러한 도전들에 대해 단지 어떤 원칙을 가르쳐 주거나 그런 원칙으로부터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예를 들어 다윗 왕이 그의 지붕에서 벗은 몸의 아름다움에 취해 간음의 유혹에 빠졌다면(삼하 11장), 우리는 영화나 TV, 혹은 인쇄물을 통해 그러한 장면을 보는 것은 한 사람의 도덕적 순결이나 결혼의 유대를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매체와 관계된 영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바로 최근에 생겨난 일이라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를 수 천년이라고 가정해 볼 때 - 물론 그 정확한 역사가 수 억만년전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의견은 말할 것도 없이 - 그 역사에 비해 대중매체에 관계된 문제는 아주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 나는 임의적으로 대중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해주는 발명품들을 36개로 정했는데, 가령 활자 인쇄, 전보, 유선, 사진, 타이프라이터, 전화, 축음기, 영화, 녹음 기술, 라디오, 텔레비젼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이 모든 발명품들은 구텐베르그의 활자만 제외하고 모두 최근 155년 동안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중의 의사소통이 이처럼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이 문제가 전에는 결코 대두된 적이 없었던 새로운 문제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매체와 관련된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의 세 번째 특징은 매체가 신자를 악한 경향으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만일 누군가가 매춘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매춘이 이루어지는 집단을 찾아가야만 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TV를 보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또는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벗은 몸을 보려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혹은 나신(裸身)이 여흥이 되는 은밀한 상황에서만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외설 비디오나 TV 유선방송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또한 부도덕한 사람과 성적으로 노골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예전에는 그러한 가치기준을 가진 사람과 이런 종류의 긴밀한 말을 나누기에 충분한 관계를 가졌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전화 섹스를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랜 옛날부터 한 인간이 무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보려면 아마도 목숨을 내건 전투에 참전하거나, 투사의 시합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소위 "R"이라는 등급이 매겨진 영화나 TV 채널을 선택하거나 혹은 "실제 사건"이라는 뉴스 프로그램을 보면 된다. 성행위를 보고 싶다면 예전에는 자신이 그 행위에 참여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성인" 비디오나 잡지를 보면 간단하다. 폭력이나 변태적 성행위, 마술 등에 대해 알고 싶었다 해도 예전에는 그러한 것들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검열 받지 않는 서점"이나 도서관을 통해 쉽게 그러한 것들을 접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죄악의 대부분이 우리들의 집에서 몇 구역 혹은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정의 벽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이러한 죄악들이 신자들의 개인적인 환경과 가정을 침해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죄악을 추구하며 살지 않는데도 과거에 비교해 볼 때 그 당시 당돌하게 이렇게 죄 된 생활을 추구하며 살았던 도덕적으로 패역한 불신자들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이러한 죄악에 접하고 있다. 대중매체는 이러한 사악함을 우리 사회에 거의 편만하게 만들고 있다. "매체의 도덕성"(Morality of Media)을 창립한 고(故) 모턴 힐(Morton Hill) 목사는 이러한 현상을 외설에 대해 선언하면서 지적한다. "이제 그 문제는 더 이상 도심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단지 모든 매체를 없애야 한다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매체가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혜택에 대해 매우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전체적인 지식의 확대와 다른 문화나 교육, 사회, 정치 등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해준 것, 한편 건전한 오락과 영감을 주는 프로그램들, 그리고 즉각적이고도 전체적인 내용전달을 할 수 있는 훌륭한 능력에 대해 감사한다.

또한 매체의 공학이 놀라운 진보를 이룬 결과, 이것이 우리 세대를 주님의 지상명령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도 당연하다. 공식적으로 이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들의 1/3 이상이 대부분 최근의 올림픽 경기를 보고 듣는 시대이다. 또한 영화 제작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예수라는 영화가 가장 널리 번역되고 상연되는 그러한 시대이기도 하다. 기독교 단파 방송이 지구를 몇 층으로 쌓을 수 있을 만큼 수없이 많이 복음 전파를 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미국에서만 보더라도 교회가 322개의 기독교 TV 방송국과 1350여 개의 라디오 지국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이 도구들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으며, 결코 17세기나 18세기의 의사전달 수준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도리어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사람과 메시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심한 갈등을 야기 시키는 매체의 힘에 대해 밝히려는 것이다. 아는 매체를 대중의 의사전달을 가능케 하는 도구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사람들의 단체라고 정의한다. 이 공동체의 가치와 반 기독교적인 세상적 견해에 대항한 복음적 열정이 대부분의 매체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주저함 없이 이러한 갈등을 이 연구의 초점으로 삼을 것이다.

갈등(The Conflict) :  노출과 경험 대 순수

대중매체가 그 이 전보다 신자를 더 악한 경향으로 이끈다는 주장을 세우는데 있어서 첫 번째로 직면하는 문제는 매체와 성경적 가치, 혹은 순수에 대한 매체의 공격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순수함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순수함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미덕이며 그것은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반면 매체는 폭로나 누설, 여흥, 심지어는 순수함을 훔쳐서 가장 사악한 죄인들의 기괴한 세상 속으로 빠뜨리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어떤 달(月)이든지 그 달의 낮 시간에 방영되는 토크쇼의 주제나 출연한 초대 손님들의 명단을 보면 이러한 점을 분명히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매체 공동체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즉 "당신이 매체를 이용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다면 구태여 그 문에 노크하지 말라"는 것과 "이제까지 본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비평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이러한 표현은 매체에 있어서 "경험하는 것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가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며, 그것은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선행조건이 된다.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지혜로운 조언을 통해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매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성서적 지침을 세우고 있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 만하며, 덕이 있으며, 칭찬 받을 만한 것들이 바로 성실한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과 서로에 대한 보답에 초점이 되어야 한다(빌 4:8). 이러한 지식에는 분명히 거짓되며, 천박하며, 불의하고, 불순하며, 사랑스럽지 못하고, 비열하고, 그저 그렇게 2류이며, 가증스러운 것들은 제거되어 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사고방식에 결코 적절치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매체의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후자에 나열한 형용사의 내용에 맞아떨어진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비루한 것을 눈앞에 두지"말 것을 분부하신다(시 101:3).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악에 대해 자신의 순전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노아의 아들 함이 그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벗은 것을 보고 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순전함을 포기함으로써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창 9:20-27). 좀 더 신중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던 두 형제들은 아버지를 덮어주기 위해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갔으며,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순점함을 지켰던 것이다(창 9:23). 사도 바울은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엡 5:12)고 선언함으로써 오늘날 소형잡지나 주간 토크쇼의 의사전달 철학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만일 매체가 바울이 말했던 금지사항을 실제로 수행한다면 그것은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그리고 슈퍼마켓에서 파는 모든 소형 책자판들을 죽이고야 말 것이다.

기독교인의 순수에 대한 매체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교회는 양자 택일이라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순전함을 지키기 위한 좀 더 적극적인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하는데, 우선 ⑴ 순수함을 훔치려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설득하는 일, ⑵ 법적인 조치를 취해서라도 순수함을 침해하는 불신자들에 대한 공격적 방어행동, ⑶ 기독교인 가정에서 매체 사용의 좀 더 빈틈없는 운영 등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조차 자신들이 사용하는 매체의 도덕적 내용을 설명할 때에 "나쁜 것은 겨우 한 장면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는데, 위에서 말한 적극적인 방어는 이러한 류의 말과 결코 공존할 수가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독약을 먹을 때 큰 알약을 먹는 것보다 작은 알약을 여러 개 먹는 편이 훨씬 더디 죽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리를 규정짓는데 있어서 증대되는 매체의 영향력

기독교인의 삶과 메시지가 의존하는 하나의 중대한 기초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요 3:33)과, 그가 예수로 성육신하신 것(요 14:6)과,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유케 된다는 절대적이고 포괄적이며 객관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비극은, 마치 본디오 빌라도처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등대를 보지 못하고 자신만이 고집하는 지식과 가치라는 암초에 부딪혀 버린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리와 성실과 위엄을 결코 잃지 않으신다. 그는 결코 실제 존재하는 것과 허구 사이를 혼돈하지 않으시며, 보편적인 진리와 맹목적인 우상숭배 혹은 협잡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아시는 분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큰 불행은 사도 바울이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롬 1:25)라고 요약한 것처럼 인간이 그 가치를 하나님과 바꾸어 놓은 것이 결국은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한 문화의 진리와 오류, 선과 악, 순수와 불순, 심지어 실재와 부재라는 개념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그처럼 작은 우연한 발견이 오늘날 미국에서 매체가 그러한 것과 같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주 작은 소그룹에 불과하다는 나의 주장은 11년 동안 헐리우드와 뉴욕에서 영화와 TV의 전문 분야에서 일한 사람들의 의견에 기초한 것이며, 초소한 3년간의 연구 결과 권력자를 움직여 공작하는 막후인물(power brokers)은 이 두 개의 매체를 통제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처음에는 약 700여 명의 사람들이 영화나 TV의 3/4을 조정한다고 추정했는데, 연구 결과 한 사람씩 이름을 밝혀 가는 가운데 우리 연구진은 그 숫자를 약 500여 명으로 줄이게 되었다.

분명히 모든 지역방송과 정기 인쇄물 등에 그와 같은 막후 인물이 속해 있다면 TV유선방송과 잡지의 주도권이 그에게 더해질 것이며, 이러한 구조들로 더 파고 들어가다 보면 어떤 직무상의 수준에 다다를 것이고, 그 숫자는 수천 혹은 수만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 인구의 천 번째 혹은 만 번째 사이에 있는 어떤 숫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작은 소수 집단이 그토록 편만한 매체의 내용과 매세지를 통제한다. 이 극소수 사회집단은 우리가 볼 것과 보지 않는 것을 선택하며 사람들이 영웅과 악당을 밝혀내는 것을 결정하며, 자신들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것에 웃게 하는 궤도를 만들어 놓고,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더 불려 놓기도 하고, 자신들의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맞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은 걸러내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은 만일 매체가 그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으면 실재하지도 않았던 일, 즉 존재할 수도 없었던 일로 "매체 사건들(media-events)"이라는 가상 뉴스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매체의 영향력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측정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보고 듣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할 때, 매체는 보통 미국인들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들일만큼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다는데서 그 영향력이 나타난다. 미국의 일반인들은 보통 하루에 7시간에서 9시간 정도 TV나 비디오를 보는데 시간을 허비한다. 이 시간은 보통 전형적인 가정에서 하루에 TV수상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며, 실제로 각 사람으로 평균해 볼 때, 하루에 평균 4시간씩 TV를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거의 모든 연령대의 미국인들이 매일 수 시간 동안 무엇에 대해 실제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TV 시청은 미국인들이 수면 다음으로 제일 많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되어가도 있다. 심지어 3학년 학생들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1년에 평균 900시간인 반면, TV를 보는 시간은 1년에 평균 1,170시간이나 된다.

그러나 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매체의 영향력은 더 잘 측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문제는 진지를 재 정의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루이스(C. S. Lewis)의 작품가운데서 형님 악마인 스크류테잎(Screwtape)이 초보자 마귀인 웜우드(Wormwood)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도록 하자.

네가 다루려는 사람을 일련의 동심원이라고 생각해보렴. 그의 의지는 가장 깊이 들어있고, 지성은 바로 그 위에 오고, 마지막에 그의 환상이 있단다. 저는 단숨에 적들의 냄새를 맡는 모든 것들을 그 동심원에서 빼앗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 너는 모든 미덕들을 계속해서 밀쳐내고 결국 환상이라는 원안에 다다를 때까지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네가 원하는 것들을 의지라는 원안으로 넣어야 한단다.

어둠의 권세자는 우리의 문화 안에서 루이스가 말하는 가장 내부인 원인 "의지"로부터 가장 밖에 있는 "환상"이라는 원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밀쳐내기 위해 매체를 사용해왔다. 오늘날 절대적인 기준으로 아내를 맞이하려는 사람, 여성이 생식의 권리를 선택할는지에 대해 묻는 사람, 동성 연애의 도덕적 수준에 대해, 그 옳고 그름의 여부에 대해 도전하는 사람, 말기 환자의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 외설물의 적나라함을 반대하는 사람을 곧 요정의 존재를 모두 믿는 사람쯤으로 매체를 통해 소개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분명히 환상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으로 비춰질 것이다.

나는 내 임의대로 허버트 슐로스베르크(Herbert Schlossberg)가 도덕의 현상태에 대해 요약해 놓은 글에서 "역사"라는 말 대신 "매체"라는 말로 바꾸어서 그 의미를 생각해보려 한다.

20세기말에는 기독교 신앙에서 돌아선 세대가 성서적인 기준으로 제한 받는 것이라고는 없으며 비 기독교화된 매체는 어떠한 도덕적 제한도 받지 않으며, 자신들이 신적인 권위를 부여한 구세주들을 죽이려고 날뛰는 것 같다. "정의"란 움직이는 목표물이요 사실과 감상이라는 강행군으로 몰아세워 간다. 절도, 동생애, 외설, 대량학살, 고문과 같은 것들이 전에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지만, 오늘날 누가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 역사의 판단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회는 다른 어떠한 것이라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젊은 세대와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며 훈련하는데 적극적이었다면, 이와 같은 상황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TV로부터 새로운 뉴스의 대부분을 취할 뿐 아니라 진리에 관한 확신, 그리고 매체의 오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증대되는 매체에 의해 "진리의 재정의"에 직면한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래왔듯이 바로 선포하는 일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영적인 성장의 도구들에 대한 매체의 공격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어떤 훈련이 있는데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성숙에 절대적으로 기본적이다. 이러한 훈련이 매체가 자신의 목적을 만족시키려는 시도들로 파괴되거나 손상되어진다.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격노하는 질투심 많은 남자처럼, 우리는 신자라면 그들의 사랑하는 자와 즐기는 깊고 친밀한 관계를 더럽히거나 훔치려는 시도에 대해 성난 분노가 타오를 것을 생각할 수 있다(잠 6:32-36에서처럼). 그와는 반대로 많은 신자들은 잠언의 어리석은 청년처럼 그들의 가슴으로 매체의 불길을 끌어들이고서, 타죽지는 않기를 바란다(잠 6:27).

그러면 매체가 그렇게 효과적으로 손상시키는 믿음의 훈련은 무엇인가? 첫째, 사랑하는 자와 의사소통하는 마음과 영혼의 자유에 있다. 그것은 정신을 흐트리는 다른 것이 없는데서 오는 자유이다. C. S. Lewis는 우리 시대와 장소에서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매우 쉽다고 선언한다.

침묵을 피하라. 고독을 피하라. 습관으로 인도하는 어떤 사고의 맥락도 피하라. 돈, 섹스, 지위, 건강, 그리고 (이상의 모든 것과) 너 자신의 불만에 집중하라. 라디오 (그리고 TV)를 켜 놓아라. 군중 속에 살아라. 진정제를 많이 사용하라. 만일 네가 부득이 하게 책을 읽어야 한다면, 아주 신중하게 선택해라. 그러나 너는 잡지에 매달리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너는 선전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특히 섹시하거나 속물적인 것이 말이다.

기도, 예배, 명상, 찬양, 감사 및 탄원 모두 하나의 선결조건을 요구한다. 즉 세상, 육체 및 악령으로 인한 혼란으로부터 정신과 영혼이 자유로와야 하는 것이다. 정신과 영혼이 세상의 소리에서 충분히 떠나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는 한, 어떤 인도하심에도 응하지 못하며 어떤 평화나 확신도 얻을 수 없고 어떤 가르침도 받지 못하며 꾸짖음이나 징계도 참지 못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행보에 있어서 이러한 역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광야에 홀로 있는 것이겠지만, 만일 소음이 거의 없거나 혹은 소음의 가청지수가 충분히 낮아서 침묵의 속삭임이나 그 이상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환경에서라면 "뛰면서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첫째, 매체들이 우리 영혼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일 인간의 마음이 ⑴ 매체를 후원하는 상업 광고들의 과정에 몰두하지 않거나 ⑵ 다음 상업광고가 나올 때까지 마음을 "붙들어 두도록" 만든 내용의 과정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매체에게는 헛된 결과만이 있을 것이다. 만일 텔레비젼 공공 서비스 전달문을 통해 1달러를 벌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끔찍하게 낭비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들에 우선 순위를 두어 오셨다: "세계는 온갖 말초적 욕구들로 가득 차서 진부하게 되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는 결코 진부하게 되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기도, 예배, 명상, 찬양, 감사, 탄원, 인도, 평화, 확신, 가르침, 꾸짖음, 징계 등의 신앙의 유익을 추구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부인할 기독교 신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직한 신자들은 사회 안에서 이러한 영적 추구들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치료 불능한 "매체 광들"(mediaholics)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나 이상의 매체 형태에 채널을 맞추고 있다. 전에는 고요한 안식처였던 해변이나 숲속으로도 매체를 가지고 다닌다. 마치 변기보다도 매체 기계들이 살아가는 데에 더욱 필수적인 것인 양 변기 보다 더 많은 수의 매체 계기들로 집을 꾸민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매체에서 나오는 소음은 주님과의 모든 의미 있는 대화를, 모든 명상을, 모든 헌신적인 생각을 그리고 교통함을 잠식시킨다. 귀청이 터질 것 같은 불협화음이야말로 지옥의 앞잡이들이 노리는 것이다. 스크류테입에 의하면, 지옥의 모든 시공은 소음으로 점령당해 왔다: "소음, 그 엄청난 세력, 들을 수 있는 의기양양하고 잔인하며 남성다움의 모든 표현 - 소음이야말로 바보 같은 불안과 절망적인 양심의 가책과 불가능한 욕망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결국 우주 전체를 소음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영적 성장 수단에 대한 매체의 두 번째 공격은 의로우며 인격적인 교통, 성령에 기초한 친교 및 사랑이 오가는 행위들에 대한 공격이다. 챨스 콜슨(Charles Colson)은 우리 문화 내의 급진적인 개인주의와 매체가 우리를 소외된 수동적인 수용자들로 만드는데 상당히 기여해 온 사실을 비난한다. 그는 교회의 많은 부분을 "거실에서 초코렛을 갉아먹으며 TV가 자아낸 눈물과 조언과 간지럽힘에 빠져 표현력 있는 이기주의자들이 기대어 있는 안락의자 더미들"로서 묘사한다. 이러한 묘사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비극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친밀한 영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그리고 깊은 인격적인 교통으로 말미암아 짐을 견디는 것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히 10:25, 갈 6:2). 특히 그리스도인 가족간의 관계들이란 모름지기 성령이 충만하고 조화로운 교통,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서로간의 행동들, 기쁨의 기도,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들로 특징 지워져야 되는 것이다(엡 5:15-6:4).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적이 매체를 통해 가족간의 그리고 소집단간의 상호 인격적인 교통을 방해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몇 년 전 내가 출석하던 교회로 요청이 왔는데 어떤 집을 방문하여 매우 심각한 상황들을 처리해 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집주인 부부는 문으로 나와 내 친구를 환영했고 우리를 거실로 안내하여 자리를 권했는데 그곳에는 TV가 크게 켜져 있었다. 나는 그 가족들과 심각한 대화를 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할 수 없었고, 그들은 텔레비젼을 끄거나 볼륨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자녀 중 한 명은 우리를 완전히 무시했고 어른들은 TV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과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명백히 드러날 정도로 규칙적으로 우리 건너편의 TV를 흘끔거리면서 우리의 대화를 근근히 이어갔다. 떠날 때가 다 되어서 우리가 기도하자고 했을 때에도 집주인은 여전히 텔레비젼을 끄려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내가 텔레비젼을 끄고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 주인은 내게 무언의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인 후에 그 아이에게 텔레비젼을 줄이라고만 하고 끄지는 않았다. 우리의 요구는 분명 불쾌했을 것이다. 우리는 가족관계를 방해받았는데, 서로 서로 방해한 것이 아니라 매체에게 방해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관계는 무엇보다 우선적이었던 것이다.

몇몇 신앙인들은 매체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인간 존재에 관심 갖는 것을 희생시키고 또한 의사소통의 내용에 관계없이 "주의 집중을 요구하는" 도구들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TV 시대 이전에도, Henry David Thoreau는 이러한 위험을 이해하였었다: "우리는 Maine에서 Texas까지 마그네틱 전신을 세우기 위해 몹시 서두르고 있다." 일단 그 전신이 세워지면, 단지 그 유용성이 의사소통이 수송되도록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의사소통 매체는 의사소통이라는 그 자신의 정의를 창출하도록 고안되며, 권한이 부여되고, 의사전달의 내용과 관계없이 누구에겐가 속박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컴퓨터 회보판과 시민 주파수의 라디오는 단지 말하고 듣고, 그리고 듣게되는 것 외엔 사람들의 의사전달로 가득 차 있다.

매체의 여왕인 TV의 강제하는 힘은 - 또는 아마도 나는 "매춘부"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전시자(exhibitionist)이기 때문이다 - 시청하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성서를 믿는 자들에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눈은 보아도 다함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전 1:8). TV 화상(image)은 매 초당 3만개 이상의 점(drops)들을 제공한다. 그들 중에서 시청자는 단지 몇십회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매 3.5초나 그보다 적은 시간에, 그 화상을 바뀌며, 새로운 화상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그래서 빠르고 새로운 이미지로, TV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보도록 유혹한다. - 계속 그 내용과 상관없이 말이다.

신앙인과 비 신앙인의 모든 문화는 모두 비슷하게 TV를 지켜보는 것에 많든 적든 중독 되어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시청하는 프로그램의 유형이나 TV 시청 시간의 차이를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연구도 본 적이 없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TV 세트를 가진 가정은 TV가 작동중일 때 가족 구성원들간에 의미 있고, 품위 있는 개인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공간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TV외에도 가정에 있는 라디오, 스테레오, CD 플레이어 그리고 정기간행물과 매체를 통한 세계적인 체계로부터 나오는 "잡음"은 모든 영적인 의사소통의 맥을 꽉 채워서 방해할 수 있다. 사람 사이의 나눔은 하나의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나눔은 사람들이 매체로 휩쓸려 드는 것을 저지하기 때문이다. ("나를 버려둬!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려고 한단 말야!") 이것이 몇몇 가정 심리학자들이 친밀한 의사소통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 즉 식당이나 침실 같은 곳에서는 절대로 TV를 틀지 말라고 충고하는 이유이다.

더 나아가 그 결과는 대중매체와 TV, Video 세대로부터 자란 젊은이들이 매체에 의해 제공되는 버팀목이 없이는 작은 집단들에서 의미 있는 사회적 상호관계를 만들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크게 소리나는 레코딩이나 또는 빠른 속도의 비디오 혹은 TV들은 사회적인 경험들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것은 많은 교회들에서도 그렇다. "친구들끼리 파티를 열자! 비디오 빌려와!"라는 것은 고정화된 양상이 된 것 같다. Charles Colson은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인기 있는 대중 매체인 TV가 얼마나 개인주의를 반영하며 또 강화하고 있는지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간적이지만 생생한 감동을 상연하는 TV를 통해 간단히, 전적으로 하나의 청중으로 구속된다. 불필요한 인간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교회는 반드시 이러한 매체에 대하여 가정의 가장들과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매체 소비를 조절하고 제한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권고를 하도록 충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바로 그러한 과정들이 질식당하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회는 도구들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세미나, 강좌, 지도하는 방법, 체크 리스트 등과 같은 실천적인 자료들과 그 밖의 다른 자료들, 그리고 책임 있는 조직들 - 지도력, 부모들, 그리고 젊은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인과 가정의 가치를 부식시키는 매체의 영향력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보호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믿는 자들의 영의 보호자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의 매체의 성공

성경은 모든 믿는 자들이 영혼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의 영을 지키기 위하여 영구히 보호자를 두어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전쟁중의 보초처럼, 어떠한 환경에서도 이러한 보초병은 잘 수 없다. 잠언에서 우리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라고 듣는다. "이것이 네 생명"이기 때문이다(잠 4:13). 그리고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예수는 자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적들, 거짓 선지자들(막 13:22-23, 33), 탐욕과 같은 죄(눅 12:15), 그리고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외식에 대하여 경계해야 함을 권고하였다(마 10:17).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이 깨어서 믿음에 굳게 서라고 명령한다(고전 16:13). 점술(占術)과 마술을 행하는 것에서 마약을 사용하는 것까지, 술취함에서부터 영적인 은사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데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에 대한 성경은 금지는 우리의 영의 문에 보호자를 두어 방심하지 않고 활동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어떤 물질 혹은 낯선 영적인 영향력에 대해 믿는 자의 영을 통제하는 것(그것은 성령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이다)을 포기하는 결과는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치명적이다. 이러한 배경적인 사고를 갖는다면, 매체의 잠재적인 위험들이 새로운 빛 아래 드러나게 된다.

제리 맨더(Jerry Mander)는 그의 책 "Four Arguments for the Elimination of Television"에서, 텔레비젼 화면과 시청자간의 상호관계란, 화면이 종종 시청자의 의식을 무시하는 관계에 있다고 지적한 연구 보고를 인용하고 있다. 켄버라에 있는 오스트렐리아 국립대학 내의 계속교육 센타(the Center of Continuing Education)의 한 연구팀은 1975년에 텔레비젼 시청의 신경 생리학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그 연구자들은 텔레비젼 시청 중에는 인지능력, 상상력, 분석력 및 사고를 바탕으로 한 학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텔레비젼은 시청자의 주의력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직접 간접의 신경 통로 복합체를 점령함으로써, 주의집중은 특정한 자극을 유도해 내어 유기체가 행동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일반적인 흥분 상태인 주의력(vigilance)를 감소시킨다. … 그렇다면 텔레비젼 시청자의 계속적인 혼수상태와 같은 집착은 주의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 방심한 상태인 것이다.

이 연구자들은 텔레비젼 시청시의 반복적인 가벼운 자극들(반짝이는 빛, 점의 형태들, 제한된 눈의 움직임)과 정적인 육체적 상태에 대해 인간이 "습성화"되는 반응을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왼쪽 두뇌의 "공통 통합 부분"(common intergrative area)은 일종의 일시 휴지 상태로 들어가고 "몽유병의 의식 수준"에 있음을 보여준다. 맨더는 "만일 그들(연구자)이 옳다면 … 텔레비젼 정보는 걸러지지 않고 전체가 모두 기억장치로 직접 들어가지만, 의식을 분석할 수 있거나 이해하거나 학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면학습이다."라고 결론짓는다.

텔레비젼을 오래 시청하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마비가 나를 엄습하는 것을 나는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심지어 신년 가두 행렬과 축구 등의 자극적이고 흥미 있는 내용을 볼 때조차도 그러하다. 나는 오랫동안 세속적인 음악을 듣거나 세속적인 영화를 본 후에도 유사한 잠재 의식적인 효과들, 즉 영이 둔해지고 생명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체험하곤 하였다.

더욱 심한 것은 ⑴ 내가 수 십년 전 영화나 잡지에서 보았던 불순하거나 음탕한 장면들을 연상하고 그런 공상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⑵ 내가 결코 의도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으며 내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던 가사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 노래들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식에 모순된다고 여겨 경멸하던 윤리적, 철학적 전달문들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생각과 사상, 상상과 환상들이 매체들을 통해 내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 와서 내 영혼의 건강과 풍성함을 파괴한다.

매체들은 잠재의식 가운데 의사소통을 통해 감시망을 뚫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으로 그 내용들을 주입시킬 뿐 아니라,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잔인하고 설득력 있는 이교사상의 교사자이기도 하다. 나는 연방 커뮤니케이션 위원회의 전 위원이 "모든 텔레비젼은 교육용이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교육하는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이 나라에서 모든 텔레비젼, 라디오, 신문 및 잡지는 상업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거의 전적으로 각 매체의 고객에게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려는 사람들의 선전비용으로 운용된다. 이런 현실로 인해 매체를 지배하는 전달 내용과 동기는 소비주의이다. 정당한 인간의 필요란 존재하지 않으며, 생산품들과 서비스를 팔기 위해 필요는 "창조된다" 광고란 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들을 팔기 위한 것으로서, 만일 사람들이 정말로 그것들을 기본적인 인간 생활에 혹은 생존하는 데에 필요로 한다면 광고의 유무를 떠나서 그것들을 구입하게 될 것이라고 한 분석가는 주장한다.

벤 스타인(Ben Stein)은 그의 고전적인 작품, "The View from Sunset Boulevard"에서 일단 "안녕! 안녕! 안녕!"이라는 메시지가 나가면 다른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매체에 대한 그의 연구는 매체 엘리트의 가치 기준 내에서 "엄청난 동질성"을 관찰하였고, 매체들을 통해 나오는 일반적인 시각 중 많은 것들이 성서의 진리와 상반된다고 지적하였다. 다음은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들 중 몇몇 실례들이다.


스타인은 내가 12년간 헐리우드 및 뉴욕에서 매체의 주도자로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도울 수 있으리라 지적한다; 이런 견해들은 매체의 내용에 반영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의 매체의 제작자, 작가 및 창조적인 진행과정을 제어하는 당국자들의 개인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매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써내고 제작하고 감독하고 창작하여 매체 생산물을 만든다.

매체에 빠진 그리스도인에게 위험한 것은, 전형적인 미국인에게 이상하게 여겨지고 성서적 가치에 전혀 상반되는 것을,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묵인하다가 결국 매체적인 가치와 야합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매체의 소비량을 줄이고 소비하는 매체 내용의 도덕적 질을 높여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부모들은 자녀들이 매체 소비를 합법적인 여가 활동으로서 여기지 않도록 양육하고 그들이 매체의 전달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성서의 말씀을 구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만 할 것이다.

신앙심 없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매체를 다루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매체를 사람들 - 무종교자들로서 다루어야만 한다. 무종교자들은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의식에도 결코 참여하지 않거나 거의 참여하지 않는 93%를 말하며, 그들은 일반적인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글을 읽거나 뜻깊게 기도하는 것이 아마도 보다 상당히 적을 것이다. "매체"에 대한 나의 처음의 정의는 도구, 기술, 또는 어떤 메시지가 아니라 매체를 통제하고 작동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사람은 매체 뒤에 있다. 그러므로 산업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가치가 변하는 것은 내용, 가치, 메시지, 스타일, 그리고 매체의 다양한 부분들이 갖게 되는 책임성에 극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널리 퍼지고, 강력하고, 무신앙적인 모든 영향력에 직면했다면 세 가지의 전략이 가능하다.

첫 번째 전략은 공격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국제적인 반응을 동원하며, 매체의 지도부에 그들이 한 일을 책임지도록 주장하고, 매체와 사회에 정의의 기준을 제기하며, 이러한 기준의 방향에서 매체의 내용을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행동단체와 조직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접근을 선택해왔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라는 것과 사회에서 기독교적인 가치인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이 분명한 성경적인 위임이라는 것을 믿지만, 나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노력이 실패하리라고 믿는다. 매체는 저항하고 배척하는 노력, 단지 그러한 노력들로부터 나오는 압력이 그들의 결정을 변화시키는 원인이 될 정도로 충분히 자극적이고, 희생을 치루거나 문제가 될 때에만 제한 받는다. 잠깐 동안의 압력이 포기된다거나 매체를 저지하는 장애의 수준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일"로 되돌아간다. 게다가 매체에는 구조적 다양성 때문에, 이러한 전략이 사실상 손에 닿을 수 없는 어떤 부분들이 있다; 영화 산업, 음악 산업, 그리고 포르노영화 산업들은 가장 중요한 예이다.

어느 날 나는 네트워크 부책임자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방금 그의 회사가 기독인의 조직으로부터 그들의 프로그램 내용을 반대한다는 250,000장의 카드를 받았다고 언뜻 고백하였다. 내가 그에게 그러한 캠페인이 그의 네트워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물었을 때, 그는 간단히 말했다. "적습니다. 당신같이 우리가 알고 신뢰하는 한 책임성 있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한 통의 편지가 더욱 큰 효과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 캠페인은 별 효과가 없었다: 어떤 프로그램도 변하게 할 수 없었다. 영화 또는 TV의 역사에서 기독교에 기반을 둔 가장 거대하고 광범위한 저항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와의 갈등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다른 분야에서는 멋진 성공을 거둔 반면에, 그 저항은 그 영화와 비슷한 다른 사악한 영화들을 제작하고 개봉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두 번째 전략은 실재하는 왕국을 위해 기술의 정치적인 힘을 이용하는 "기독교 매체 산업"을 설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적인 동기와 제작물을 가지고 세속적인 매체의 힘의 구조와 경쟁하는 것이다. 수백만 달러의 산업은 기독교 라디오와 TV 방송에서, 프로그램 제작, 케이블과 유선 방송, 기독교 음악, 그리고 기독교 서적 판매 등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능한 모든 수단들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지만, 이러한 "기독교 매체 산업들"은 세속적인 매체 체제의 힘, 가치, 내용에 많은 영향을 줄 수는 없으며, 세속적인 매체들은 계속 우세하게 독점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매체업계가 평가한 것에 의하면, 모든 기독교 TV는 국내 TV 시청자의 4%도 안 되는데, 이들은 기독교 교회 안에서는 거대한 것이다. 유사한 통계들은 기독교 라디오, 음악 그리고 도서 판매 산업에 집중되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 매체"의 엘리트는 그러한 이상하고, 부적절하고, 또는 하위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의 고정관(Sterotypes)을 종종 영속시켜 왔는데, 국내적으로 그들은 심각한 사려나 영향력을 가진 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매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손에 가득한 이용할 만한 부패상을 더하여, 이러한 전략은 세속적인 매체 권력 구조에 중요한 충격을 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사실상 "The Day America Told the Truth"라는 책의 기초가 되어진 국내적인 조사에서, TV 설교자들은 "정직과 성실을 소유한 미국인들의 순위"라는 범주에서 맨 밑바닥에서부터 3번째 순위를 차지하였다. - 조직적인 범죄단의 두목과 매춘부 사이에 있었다!

챨스 콜슨은 기독교 매체의 본질에 대하여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판단하기를 교회는 이방인의 침입에 의해 가치와 관습 내에서 불구가 되어 왔다. 이것은 전파 교회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에서 지나치게 많은 목사들이 청중을 나누고 시청자들의 돈을 갖고 경쟁한다. 실제로 순위와 광고비를 위해 네트워크 프로그램이 경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많은 전파 교회는 소문이 나도록 맞서기 위해 존재한다는 문화적인 분위기를 널리 퍼뜨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세 번째 전략은 그리고 나는 이것을 성서적인 명령의 중심이 된다고 간주하는데(그리고 결과적으로 더욱 효과적이다) 세속 매체 기구 가운데 강력한 기독교인의 현존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믿기에는 ⑴ 매체의 지도자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의 총동원; ⑵ 매체의 매 단계에 영향을 주는 매체 전문가에 대한 전도 ⑶ 현재 있는 매체 안에서 기독교 전문가들이 더욱 강력한 증거와 그들의 매체 기술을 더욱 구속적인 방법으로 활용하도록 준비시키는 훈련; ⑷ 방송망의 형성, 지원 그리고 중요한 영적인 충격을 위해 매체에서 헌신된 신자들의 총동원, 그리고 ⑸ 훈련되고 헌신된 기독교 전문가들에 의하여 매체의 권력구조를 침투하는 것을 통해 성취되어져야 한다.

죠셉 베일리(Joseph Bayly)가 6번째로 쓴 책 "The Gospel Blimp"에서 한 기독교 가정이 그의 이웃과 공동체에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시도에 대한 풍자가 있다. 그 책에서 복음전파의 시도는 점점 더 우스꽝스러워진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복음을 뿌리고 그리고 그 지역에 "복음의 폭탄"을 떨어뜨리기 위해 한 기구(blimp)를 갖게 되었다. 결국에는, 복잡하고 비인격적인 모든 시도들은 실패하였다. 그 이웃은 결과적으로 사랑 깊은 관심과 인격적인 증거에 의해서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나는 매체에 충격을 주는데 있어서 사랑 깊은 관심과 인격적인 증거의 힘을 입증할 수 있다. 수 년 전에 NBC의 부사장은 나와 함께 Burbank 레스토랑에서 그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하는 기도를 했다. 그는 방송망의 프로그램을 하는 모든 내용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진 개인주의적인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가 결심한 후 90일이 못 되어, 나는 그의 사무실에서 이 새신자를 방문했다. 그는 책상 너머로 한 종이를 던져주며 나에게 그것을 훑어보라고 하였다. 더러운 말, 불결한 느낌들에 빨간 연필로 표시했고, 그리고 프로그램의 제목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 간부는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후 내가 승인하려는 것에 아주 더 보수적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종종 하나님의 영이 일하신 자연스러운 결과인 그 사건을 숙고해본다. 이것은 항의, 저항 또는 기독교 매체 구조의 경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사랑 있고 인격적인 증거를 통한 결과를 위하여 이익이 되는 한 걸음이었다. 나는 매체를 다루는 교회의 요구는 로마의 다신교도들에서부터 지적인 그리스의 사상가들에게까지 다른 모든 적대적인 집단들에게 존재하였던 것과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응답하는 사람들을 훈련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