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과 우주생명

 

장회익(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1."아는 것이 눈 이다"

베이컨-"아는 것이 힘"

이제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로 넘어간다, 또는 새로운 천년이 온다고 해서 여러 가지 기대와 우려들을 하고 있습니다. 2천년이라는 것은, 기독교적 산출방식에 근거한 것이죠.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특별히 더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간의 기준은 임의로 잡을 수 있고, 그것이 10, 100, 1000이라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십진법을 쓰다보니까 거기에 맞췄을 뿐이죠. 사실은 1999에서 2000으로 넘어간다 할 때 특별한 이유를 붙이고, 의미를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물론 사회적, 심리적 맥락에서 의미가 있고, 기독교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이해하고 있는 역사를 통해 볼 때, 이 시기는 묘한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생존을 위한 여건의 부족을 느꼈습니다. 쉽게 말하면 궁핍을 느꼈던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필요한 소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찾아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역사의 추진력이 되어왔습니다. 열심히 하면 뭔가를 얻게 되고, 그것이 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근면 자체가 선이 되고 우리 가치관의 기반이 되었죠. 그런데 이 시기를 넘어가면서 이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마련했고 어느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얻는다는 것이 불분명해졌고,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하다보니까 오히려 안한 것만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선 영산강 간척사업을 벌이다가 취소하고, 네덜란드도 상당한 땅을 바다로 환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 독일에서는 강변에 쌓아둔 둑을 다시 허물고 자연적인 것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젠 무엇을 어떻게 발생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주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주된 추진력으로 되어갈 분기점이 이 시기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서구의 근대문명을 이룩한 가장 유명한 말은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힘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과학을 발전시켰고 그 힘에 의해서 엄청나게 뭔가를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복합적인 의미지만 순수하게 에너지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오로지 우리 체력, 그 다음엔 소나 말을 사용해서 그 힘을 약간 빌리는 것이 활용할 수 있는 동력의 전부였다가 지금은 그것의 천 배, 만 배를 손쉽게 쓰고 있어요. 보통 자동차는 쉽게 얘기해서 100마력 동력을 냅니다. 100마력이라는 것은 말 100마리가 끄는 힘입니다. 말 한 마리가 사람의 힘의 대여섯 배 힘을 내니까 사람의 500배를 들여서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으로서의 과학

그러나 이젠 힘으로서의 과학보다는 눈으로서의 과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눈이다' 또는 힘으로서의 과학에 대해서 이제는 '눈으로서의 과학'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과학은 눈이 먼저고 그 다음이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알았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사물을 넓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목적이 이미 설정되고, 목적 수행을 위해서만 알기 때문에 좁은 분야의 정밀한 지식만을 중시했습니다. 그것을 엮어서 전체 시야를 열어주는 지식은 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부분은 있지만 전부 엮어서 우리의 앞날과 과거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측면을 중히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놓은 것들을 대략 엮어볼 때 도움이 될 거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데 대한 시각에 상당한 차이들이 있는 거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신뢰하고 있습니다. 경제력을 가지고 해결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상당히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과학이라든가, 생태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인간 중심적 가치관을 비판합니다.

기계론적 세계관

기계론적 세계관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대조되는 것은 목적론적 세계관입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뭔가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성에 해당하는 것을 돌이나 자연, 냇물, 바람 등 자연계에 다 깔고 자연을 이해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나무에 가서 빌기도 하고 어떤 신을 달래보기도 하고 그렇게 해왔는데, 자연은 법칙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라는 새로운 사고, 이것이 근대 과학을 일으킨 생각입니다. 그것을 목적론적 사고에 비해서 기계론적인 사고라고 명칭을 붙인 거죠. 그리고 그것을 기계라는 것으로 모형화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흔히 기계론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얘기하는 갈릴레오, 뉴턴, 이러한 사람들의 고전역학만 하더라도 그러한 단순한 기계론적인 사고를 넘어선 것입니다. 기계론적 사고란 것은 쉼없이 맞물려 서로 힘을 미치는 것인데 고전역학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힘을 주고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인데 자연에 대한 합법칙적 질서로 움직이는 자연관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립적인 표현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계론적 사고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거예요. 사물, 사람을 기계로 보는 걸 기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과연 우리가 뉴턴의 고전역학을 얼마나 흡수하고, 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별로 해보고 있질 않아요.

저는 과학서적을 통해서 언제, 누가 최초로 우리 동양에서 또는 한국 지성인 중에서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했나 하고 살펴봤더니 없어요. 적어도 17세기부터 서구사상들이 들어왔지만 19세기말까지 뉴턴의 고전역학을 제대로 언급하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어요. 아주 피상적인 이해만 하고 있고 아마도 외국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물리란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이해한 사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의 한국인들은 얼마나 뉴턴의 고전역학을 이해하고 있을까. 저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또 직접 배워봤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얘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눈을 감고 내가 고전역학을 아는가 자문해보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질 않아요. 한두 문제를 푸는 것까지는 쉽지만 전체의 고전역학의 모습이 어떤가, 이것이 어떠한 사고의 패턴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기까지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고전역학을 아주 쉽게 얘기하면 합법칙적인 질서를 가지고 자연계를 설명하는 건데, 그 질서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물을 설명하는 모범적인, 가장 간단한 패턴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면 그것이 절대 진
리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사물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형태를 제대로 갖춘 최초의 이론이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미 자연 파괴가 일어나고 있지요. 그런데 어째서 고전역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파괴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느냐 이거예요. 전혀 맞는 얘기가 아니예요.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들은 자생적으로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엄연히 말하면, 그 중에 극소수에 가까운 사람들만이 고전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그 고전역학에 따른 기계적인 사고 때문에 우리가 자연계를 이렇게 파괴했다는 것은 전혀 얘기가 되지 않아요. 물론 이런 점은 있습니다. 자연을 합법칙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계가 어떤 영을 가지고 있고 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면 나를 해칠 수가 있다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요. 그러니까 맘대로 만질 수 있게 하죠. 과거에는 산을 건드리면 큰일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저 단순한 물질에 불과해요. 산을 건드리고 싶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정도가 넘으면 문제
죠. 정도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지 고전 역학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기계론적 세계관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을 밀어내는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시에, 진정한 원인을 찾는데 방해가 되는, 가짜를 갖다 놓고 저게 주범이다 하고 있는 사실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저는 과학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말씀을 드립니다.

그 다음에 인간 중심적 가치관이라는 또 하나의 얘기가 있습니다. 과거의 신 중심, 또는 좁은 의미의 종족 중심, 신분 중심, 제도 중심, 물신 중심 등등의 부정적인 가치관- 제일 처음의 신 중심에 대해서는 별도로 얘기하겠습니다만 - 에 대해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선 생태 중심이라든가 생명 중심 등의 가치관에 비해서는 이것이 문제가 있는 거죠. 사실 우리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얼마 안돼는 과거입니다. 그전까지는 타 인종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사람은 위험하니까 없애야 한다는 사고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암묵적으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속에는 그러한 내용도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거기에 대해서, 또 물질을
인간보다 더 중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지금도 거기까지 도달도 못했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생태문제로 넘어 갈 때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지금도 환경윤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중심 가치관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지 않고, 생태계를 보호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이 해를 입는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 현재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야 될 그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많이 있어요. 우리가 완벽하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한테 편리한 쪽으로 결정을 해버린다 이거죠. 또 우리가 살면서 얼굴 보는 사람, 저 사람이 지금 밥을 굶고 있는데 10년, 100년 후에 있을 사람이 밥을 먹기 위해서 지금 저 사람이 밥을 굶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가치관이 거기서 멈춰버리면 굉장히 위험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로서 인간중심 가치관을 철저히 신봉한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간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거죠. 저도 인간중심 가치관으로서는 부족하고 뭔가 한 단계는 넘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태를 중시한다고 할 때, 우리가 그걸 보호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해가 오기 때문에 한다면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 속에 있는 거죠. 인간 이외의 대상에 본원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논리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 그걸 넘어서기가 어려운 거죠.

패러다임의 전환과 그 의미

그래서 이것을 극복한 방안 몇 가지를 내세우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우리의 세계관, 가치관을 유기체적인 것으로 전환을 해야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부터 목적론적인 세계관, 다시 과학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보자는 거죠. 우리가 몰랐던 것을 알아서 그렇게 넘어온 측면이 많은데 다시 알았던 걸 취소하고 모르는 걸로 가자. 이것은 아무리 현실적인 도움을 주더라도 대단히 어려운 거죠. 흔히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패러다임은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라 부정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찾는다 해도 결국 따지고 보면 또 하나의 패러다임에 묶여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장 진리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거지, 무슨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후에 보면 아, 그 때 그 사람들은 이러한 패러다임에 묶여 있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패러다임을 바꿔서 유기체적인 것으로 가자고 아무리 부르짖어야 우리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앞서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데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그것을 내가 가지느냐 이것은 전혀 현실적으로 통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대단히 부적합하다. 물론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도 '생태적 삶' 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생태적인 의식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고 사실을, 생태적인 상황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측면이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그래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의 구호일 뿐이며,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뭔가 더 얹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될것 같습니다.

동양사상의 모색

또 하나의 얘기는 동양사상으로 복귀해보자 하는 얘기들입니다. 물론 동양사상은 서구사상하고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사실 대인지식(對人知識), 또는 인품, 인격 쪽과 물질을 분리함으로써 각각 독립적인 학문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정교한 과학이라고 하는 것을 성취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그 둘을 한데 섞어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또 의미 있게 만드는지 관심을 갖습니다. 즉 동양에서의 학문추구라고 하는 것은 앎 자체가 아니고 앎을 통해서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본적인 전제가 상당한 균형을 잡고 있어요. 그래서 그 틀 안에서의 사물에 대한 이해는 곧 그 틀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하고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큰 의미에서는 지금 서구문명과 같은 이런 불균형을 초래하지는 않는 측면이 있지요. 따라서 만약 동양적인 사고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현대문명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는지 모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동양적인 것으로 가보자 하는 것은 이것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적인 것의 장점도 있지만 약점은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
게 보는 눈이 상당히 어둡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의 '눈으로서의 과학'이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이 사물을 명료하게 본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술문명도 만들 수 없는 거죠. 우리가 과학기술의 힘을 이만큼 발휘한다는 자체는 그 밑에 그만큼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내다보는 눈은 과학에서도 부족합니다.  사실상 지금 현대과학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 점이라고 봐요. 현대과학이 아는 것도 꽤 있는데 이것을 종합해서 전체적인 시야를 열어주는 데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과학자들은 부분부분은 굉장히 많이 알지만 그 사람보고 옆에 것에 대해 얘기해 보라, 그러면 내 전공이 아니다 하고 전부 피하죠. 수백 개의 전공으로 갈라져서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연결해서 전체적인 시야를 얻지 않으면 지금 이 문명의 기계는 굉장히 위험하게 달릴 수 있다는 상황에 놓여 있고 그것을 해내는 것을 저는 과학의 문화적 측면이라고 얘기해 보았습니다.


2."온생명,낱생명,보생명"이란?



과학과 생명


과학은 꼭 여기에 있는 것을 들여다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기본법칙과 질서를 파악하면 그 중에 일부를 가지고 나머지도 알게 되는 합법칙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달에 직접 가보지 않았지만 우리가 현재 여기서보고 있는 달, 지구상에서 보고 있는 상황을 가지고 달은 이렇고 이렇고 이럴 것이다 하고 가보면 실지로 그렇다 이거죠. 이러한 지식을 공간적으로도 넓히고 시간적으로도 넓히는 겁니다.

공간과 시간적으로 넓혀나가고 또 작은 세계, 미세한 세계로도 줄여 나가서 굉장히 많은 시야를 확보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생명이라는 것, 우리 자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과학에서는 그것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해주느냐, 이것이 사실 우리한테 더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 자신도 물리학이라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인데 자꾸 생명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 물리학은 생명 아닌 것만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물리학자 한 사람이 자기 딸 얘기를 농담 섞어서 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물리학이 뭔지 자기 딸한테 설명해줘도 몰랐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 갔다 오더니 싱글벙글 하면서 이제 물리학이 뭔지 알았다
하길래 뭐가 물리학이냐 했더니 산 것을 연구하는 것은 생물학이고 죽은 것을 연구하는 것은 물리학이다 그러더랍니다. 흔히 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보편적인 법칙을 다루는 것, 즉 대상이 아니고 법칙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면 결국 가장 주 관심사는 생명이 뭔가 하는 건데, 물리학적인 배경 지식을 바탕에 깔고 봤을 때 생명 아닌 것과 생명 사이에 차이가 어디서 오느냐 이것이 제가 보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본 생명의 모습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생명이 뭐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정의가 없어요. 대형 백과사전을 찾아보더라도 여러 가지 다른 정의를 내놓고 이것은 이런 장점이 있지만 이런 문제가 있고 저것은 저래서 문제가 있고, 그래서 생명은 정의가 안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에 대해서 어떤 답을 얻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생명의 단위가 뭐냐 하는 질문으로 바꿔 봤어요. 그런데 사람 한사람, 강아지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이게 하나 하나의 생명이라는 아주 상식적인 얘기도 당장 생물학자들한테 가면 그 답이 달라져요.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생명의 단위가 아니고 세포 하나 하나가 생명의 단위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이거죠. 사실은 우리도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했어요. 모태에서 태어날 때 최초로는 적어도 하나의 세포입니다. 넷으로 되고 여덟 개 되고 열 여섯 개 되고 해서 그것이 쌓여서 지금 적어도 모태에서 태어날 때쯤만 해도 적어도 수천만 개의 세포가 되어서 태어나는 거죠.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죠. 하나의 세포라고 해서 그것이 생명이 아니라고 하면 사실 문제가 있죠. 그러면 그것이 어째서 생명이냐, 거기에 본질이 뭐가 들어있나, DNA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유전자라는 것이 뭐냐하는 것을 과학자들이 보니까 하나의 분자덩어리예요. 흔히 있는 몇 가지 탄소, 질소, 산소 이런 것들이 뭉쳐 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죠. 생명이 어디로 갔나. 우리가 생명을 타고 내려가 보면 생명이 없어집니다. 생명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가 놓친 거죠. 그러면 어떻게 다시 찾을까.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와봐야 돼요. 유전자 혼자 떼어놓으면 생명이 아니예요. 세포 안에 들어 있어야 생명이 되죠. 물론 유전자 혼자 다니는 바이러스 같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이건 다른 세포 안에 들어갔을 때 생명 노릇을 하지 그 안에서 그 자체로는 아무 역할을 못해요. 그러니까 역시 주변의 다른 물질과 함께 세포를 구성할 때에 생명노릇을 하죠. 사람의 세포도 내 몸에 붙어 있을 때에 사는 거지, 일단 떨어져 나가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물론 요즘 복제기술이 있어서 어쩌면 사람 세포 하나 떼어 가지고 잘하면 사람 하나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양에서 성공했지요?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거 하나 떼어서 아무 데나 얹어 놓으면 되는 게 아니예요.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려고 한다면 엄청나게 공을 들여야 합니다. 양 한 마리의 그걸 가지고 복제하기 위해서 굉장한 공을 들였어요. 그러한 특별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양의 세포가 양이 될 수 있는 거고, 사람의 세포도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 거지, 혼자 세포하나 분리시켜 놨을 때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포도 사람이면 사람처럼 조직이 되어 있어야 생명이다 하고 우리가 이해를 하게 되죠. 그러면 사람은 그럼 완전한 생명이라고 볼 수 있느냐. 그건 또 그렇지 않아요. 사람 하나 딱 떼어 가지고 우주내의 어느 한 위치에 딱 갖다 놓으면 5분을 견딜 수가 없지요. 숨을 못 쉬니까. 공기가 없쟎아요. 공기가 있다는 것은 이 우주 안에서 보면 굉장히 특별한 상황입니다. 지구 표면에서도 조금 높이만 올라가도 벌써 곤란을 느끼죠. 아주 특별한 상황이 바로 공기고, 온도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옷을 벗고 상온에서 스물 몇 시간 있으면 얼어죽습니다. 물론 음식물도 있어야 될 건 말할 것도 없지요. 굉장한 여건 아래에 있을 때만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까지 다 포함할 수 있는 생명은 뭘까 하고 또 우리가 한 걸음 더 올라가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한참 더 가면 우주의 아무 데나 떼어다 놓아도 살 수 있는 생명이 되느냐, 그것이 제 관심사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생명이 가능하게 되는 여러 가지 자연 법칙, 예를 들면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 같은 거죠. 결국 생명은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있고, 그 안에 특별한 조건이 만족되는 이러한 상황이 있어야만 생명이 되고 그리고 그러한 상황만 된다면 우주 내에 어디다 갖다놔도 살아갈 수 있다 이거죠.

지구하고 태양계를 함께 딱 떼어서 다른 은하계에 갖다 놔도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족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단위는 태양, 지구 그리고 이 안에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춰져 있는 물리적인 필요조건이예요. 그런데 사실 현대과학으로 추적해 나가보면 이 생명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하는 것을 대략 알 수가 있어요. 대략 35억년 전에 아주 쉽게 얘기하면 아주 초보적인 세포 하나가 우연히 생겨났어요. 그런데 그 세포는 어떤 성질이 있느냐. 있다가는 조금 지나면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자꾸 깨지고 없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없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태양과 지구라는 여건 아래서는 자기하고 비슷한 걸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없어지기 전에 최소한도 자기와 비슷한 걸 하나 이상 만들 수 있는 영향을 끼치고 말면 그러면 하나가 생기고 그 하나가 없어지면 또 하나가 남는다는 거예요. 또는 두 개가 남아요. 그것도 그걸 그대로 본받았기 때문에 역시 그런 기능을 가지게 되면, 그런 정보가 전해지면 그러면 그것은 계해서 생겨날 수 있지요. 이것이 우리 지구 생명의 최초의 상황입니다. 그런 여건이 대략 35억년 전에 만들어졌다 이거죠.

그러면 그것이 처음에는 둘, 넷 되면서 물론 중간 중간 파괴되고 없어진 것도 많지만 그래도 역시 살아남은 것이 계속 있어서 35억년간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이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들한테까지 내려왔어요. 여기 계신 모든 분이 그걸 거꾸로 추적해 볼 수가 있지요. 추적을 해보면 결국 하나로 가게 되는데 그 중에 한번도 단절이 없어요. 단절이 있다면 우리가 없는 거지요, 35억년 동안 죽 연결된 단계가 지금까지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각자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서로간에 연결을 가지면서 존재하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다른 생물체가 만들어주는 영양을 먹음으로써 살게 되고 이것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생태계라는 모습으로 상호의존하고 있지만 그 뿐이 아니고 과거로 올라가면 정보를 전부 공유했습니다. 그러면 이 전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될까요. 이것이 각 사람하고 굉장히 비슷해요. 사람도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는데 둘, 넷, 여덟이 되면서 지금 나는 그 세포를 안 가지고 있어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세포는 이미 다 없어졌지만 여전히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라고 부르죠. 세포라든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보면 10년 전의 나하고 전혀 다르지만 10년 전에도 나고, 지금도 나예요. 정보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내가 기억을 하고 있고 그때 심정을 내가 지금도 느끼고 있고 이러한 뭐가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앞으로 더 길게 존재하고 싶다 이거예요. 앞으로 존재할 나는 지금 이 물질 덩어리는 아닐텐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역시 나고 또 계속 내가 생존하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전체는 하나인데 물리적으로는 하나가 아니예요. 그럼 어째서 하나일까요. 이러한 정보적인 연속을 통해서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지구생명에서 처음 출발해서 지금 나까지 연결된 이건 뭘까요. 이것이 더 큰 하나입니다. 그것은 기억을 못하지 않느냐. 사실은 기억을 하고 있어요. DNA가 바로 그 기억의 덩어리예요.

그러니까 이 DNA의 정보는 35억년 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정보적으로 연결이 돼 있는 거죠. 그러나 지금까지는 의식을 못한 겁니다. 우리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정보가 35억년 동안 이루어진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의 정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젠 과학의 힘을 빌려 거꾸로 추적을 해나가고
있어요. 5억년 전에는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다, 10억년 전에는 어땠다 하는 것을 이제 상당히 많이 봐나가고 있어요. 그러면 아,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성장해서 이렇게 지금까지 왔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된 거죠. 그런데 이 상황이 참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저는 이것을 하나의 실체라고 보고 있어요.

온생명, 낱생명, 보생명

이 전체, 말하자면 내가 태어나서 자란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인간이라고 부르고 나라고 부르죠. 그렇다면 이 전체도 어떤 실체인데, 그럼 뭐라고 부를 거냐.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름이 없어요. 아무도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의미 있게 생각하고 이름을 붙여놓지 않던 거예요. 도리 없이 제가 이름을 붙였죠. 그래서 영어로 global life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먼저 이름을 지은 이유는 제가 그 논문을 영문으로 제일 먼저 발표를 했기 때문이예요.  한 10여년 전 유고슬라비아 과학철학 모임에서. 그리고 나서 우리말로 번역하려는데 잘 안돼요. 지구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참 답답하고, 우주생명이라는 표현도 써봤는데 이건 너무 크고, 여러 가지로 어려웠어요. 지금은 '온생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구에서 최초로 발생해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성장해온 그 존재, 그것이 온생명이고, 생명의 진정한 단위입니다. 다른 태양 근처에도 다른 계열의 것이 있다면 그건 또 하나의 온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보통명사예요. 그러나 전 우주에 하나의 온생명이 있는 건 아니고 우리가 볼 때에 거시적인 기본단위라고 얘기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지구상에서 여러분과 나는 같은 온생명의 부분들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의 이해를 온생명이라고 하는데 까지 가야 비로소 무리 없이 생명의 전체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생명 자체의 생리라든가 여러 가지 얘기해야 할 것이 많고, 역사를 보면 아주 재밌는 게 많아요. 가령 우리가 언제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겼느냐, 또 어느 시기에 왜 본능이라는 것이 생겼느냐 하는 것도 지금은 추적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시기에 왜 생겼는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본능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어야 하느냐, 감정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그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서 얘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과학적으로 제대로 파악한다면 많은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안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이 온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묘한 것이 한 덩어리로 완전히 그냥 기계처럼 묶여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떨어진 낱생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개체생명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 있는 한분 한분은 낱생명이예요. 이것이 조직을 잘 해서 또 하나의 큰 낱생명을 만들고 또 더 큰 규모를 만들고…. 이런 식으로 아주 묘한 모임으로 자꾸자꾸 짜여집니다.

그런데 이 낱생명들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실 개인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낱생명의 의식이거든요.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생명이라 함은 이 낱생명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은 이 낱생명으로 구성된 온생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하나의 낱생명을 기준으로 임의의 또 다른  낱생명을 생각할 수 있어요. 이것은 저 개인일 수도 있고, 인류 전체를 얘기할 수도 있고, 토끼 한 마리를 얘기할 수도 있죠. 낱생명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이것을 '보생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전체는 온생명이지요. 그래서 이런 구조를 가지지요. 이것은 하나하나 열심히 생존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개체를 유지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어야 온생명이 되고 자기 개체도 생존합니다. 그래서 항상 두 가지 성질을 갖는데, 사람으로 치면 경쟁과 협동입니다.  
그 다음에 생태계에서 무얼 가져와야 하지만 그 생태계를 보존해야 되는 상반된 두 가지를 반드시 갖게 되는데 온생명이 항상 이 개체 단위로써 엮어지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본능 속, 우리 심정 속에도 함께 있습니다. 사람은 이기심이 있으면서도 이타심이 있죠. 자기들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또 다른 사람도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이중적인 것이 있을까요. 이 생리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다 도태가 된다고 얘기할 수 있죠. 그러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온생명에 최종적으로 나온, 상당히 늦게 태어난 존재인데 역시 온생명의 다른 개체들과 공존하면서, 또 그것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 존재입니다. 사람이야말로 사람만 딱 추려놓으면 전혀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른 데 의존을 대단히 많이 하면서도 하나의 특징적인 개체가 되었는데 묘한 개체입니다. 물론 그전부터 생기긴 했는데, 의식이라는 게 차츰차츰 생기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정신구조를 추적해보면 사람에게 와서 이 의식이 굉장히 선명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졌습니다.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우선 나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까 자아라는 것을 느끼고 동시에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 혼자뿐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는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낱생명 중 사람밖에 없습니다. 만약 자기를 의식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식물인간이라 말하죠. - 불행하게도 그렇게 되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크게 동정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온생명이라는 것을 보면 큰 생명의 단위인데, 35억년 동안 의식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나타남으로 해서 자각을 갖게 되었지요. 온생명 입장에서 어렴풋이 나라고 하는 의식이 태어난 상황이죠.

"이후로 장회익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내용이 녹음되지 않아 옮겨적지 못하게 되어 아쉬움이 큽니다. 교수님과 그의 강의에 관심을 갖고 읽어내려오신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다음은 강의안
과 함께 주셨던 그의 글 중 일부를 옮겨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고차적 의식 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일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그 어떤 집합적 지성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온생명이라 하더라도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자아를 의식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인간의 이러한 온생명 의식이 객체로서의 온생명 의식 뿐 아니라 주체의 연장선에서의 온생명 의식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객체로서의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체로서의 자아에 이르게 되는 것은 기왕의 주체인 작은 '나'가 그 중심에 놓이면서 자신의 의식을 내부로부터 온생명 전체로 확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생명가치관

우리가 일단 생명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이 안에서 생명가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생명 즉 자신에게 부여된 낱생명을 그 어떤 절대적 의미를 지닌 기본 가치로 인정한다면 이를 포함하는 본원적 생명인 온생명에 대해서는 최소한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상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도 내 손가락 하나의 안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몸 전체의 안위는 그것보다는 한 차원 더 중요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일단 온생명의 본원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낱생명들의 집합적 그리고 개별적 가치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온생명이 가치롭다는 판단에 이르는 것은 바로 우리 각자가 지닌 낱생명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이며, 우리가 온생명에 참여하는 것 또한 이 낱생명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므로, 온생명의 가치를 인정한다 하여 낱생명이 지닌 가치의 절대치가 결코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상위 가치로서의 온생명 가치를 인정하고 나면 개별 낱생명들이 지니는 기능적 차별화를 또한 규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함께 온생명의 부분들을 이루고 있으므로 모두가 그 어떤 절대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음이 사실이나, 그 생사와 생존의 방식에 있어서는 온생명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위계와 질서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일견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 안에 나타나는 하나의 유비를 살펴봅시다. 오늘 날 우리가 아무리 인간의 생명에 대해 그 어떤 절대적 가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예컨대 살인 등의 극단적인 반사회적 행위를 하는 일부 개인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 그 생명을 제거하는 제재마저 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정이 반드시 인간의 생명가치를 폄하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 생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하나의 고차적 기준에 의해 기능에 따른 이들의
차별화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낱생명들의 가치가 온생명이라고 하는 제삼의 가치를 위한 도구적 가치 혹은 종속적 가치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낱생명들에 부여하는 이러한 가치가 하나의 절대적 가치 예컨대 그 어떤 절대자를 위한 기여의 정도만으로 평가되는 도구적 성격의 가치와 과연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컨대 어느 누가 낱생명의 가치를 온생명만을 위한 도구적 가치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 그 어떤 차이가 나타나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의 대답이 가능합니다. 그 하나가 기여중립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차이이다. 도구적 가치만이 인정된다고 할 때 만일 이것이 기본적 가치에 대해 아무런 기여 또는 해악이 없는 기여중립의 상황에 머무른다면 그 자체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임의로운 처리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을 것이나, 개체로서의 절대적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설혹 이러한 기여중립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존재의 지속이 존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이러한 낱생명들의 주체적 의식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낱생명의 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에 온생명은 이미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객체가 아니라 더 큰 '나'의 일부로 인정되므로, 이 두 가치는 분리된 두 개의 가치가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즉 이는 별개의 두 가치 사이의 가치 종속적 상황이 아니라 동일 가치의 구성상에 나타나는 내적 구획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컨대 한 유기체의 경우 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으로 인정되면서도 이들은 또한 유기체의 정상적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에 따라 그 상대적 가치를 부여받게 됨과 흡사합니다. 온생명의 경우 각각의 낱생명들은 생명으로서의 기본적 가치를 부여받음과 동시에 온생명의 '건강한' 전체 기능 수행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또 하나의 판정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온생명의 건강한 존재양상 더 나아가 이것의 이상적인 존재양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한 각 개체생명들의 기여도를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하나의 좋은 상대적 가치 척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온생명에 그 어떤 이상적인 존재양상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있다면 이를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선험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위해 불완전하나마 그 어떤 최선의 추정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최선의 지식 예컨대 온생명의 역사적 성장과정과 온생명의 생태적 존재양상 등에 관한 지식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온생명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생명은 풍요롭고 다채로운 생명 현상들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으며, 특히 인간을 비롯한 영특한 지적 존재들을 빚어내어 그들을 통한 또 하나의 창조작업을 이루어나가는 실로 경탄해 마지않을 그 어떤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온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온생명의 바람직한 존재양상이란 최소한 이러한 창조적 다양성을 지속시켜 나가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만일 온생명이 지닌 병적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바로 이러한 창조적 기능과 성과를 그 어떤 이유로 인해 상실하거나 상실해버릴 위험에 처하는 상
황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각각의 낱생명들이 지니는 절대적 가치와 함께 이들에게 부여할 기능적 가치의 판정 기준이 마련되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그 어떤 존재가 온생명의 이러한 바람직한 존재양상에 기여하는 방향의 결과를 초래하면 이는 좀더 가치로운 존재가 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면 이는 상대적으로 덜 가치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판정일 뿐 절대적 판정은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