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생명'과 생태학적 윤리


장 회 익 (서울대학교 물리학)

 


인류는 오늘날 지금까지는 만나 보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바로 우리 생태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문제가 새로운 것은 지금까지는 인류의 생존활동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생태계에 결정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었음에 반하여, 이제부터는 인간의 행위결과가 생태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머지 않은 장래에 인류가 지구상에서 멸종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거의 틀림없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한 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닌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선이 악이 되며 지금까지의 악이 선이 되는 근원적인 전환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과 악의 검토를 위해서는 '과학의 눈'이 필요하게 되었다. 현대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하지 않고는 문제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생태계'자체가 과학에서 연유한 개념이며, 생태계의 기능 또한 과학을 통해 이해되는 개념이므로 과학을 통한 면밀한 성찰이 없이는 무엇이 생태계에 위해를 가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생태계는 생태계만으로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는 우주와 생명의 긴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존재이며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만이 그 의미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현대과학이 말해 주는 우주와 생명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문명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명과 온생명

현대과학의 눈을 빌린다면 우리 우주는 대략 150억년 전에 탄생하여 계속 팽창 변화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우리 태양계는 대략 50억년 전에 형성되어 적지 않은 변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서 특히 놀라운 것은 대략35억년 전에 태양과 지구를 모태로 태어난 생명현상이다. 지구상의 이 생명은 탄생이후 경이로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한 끝에 급기야 인간을 출현 시키기에 이르렀고, 이 인간이 나타내는 한 특징적 생존 양상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문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양상이 지닌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요구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 어떤 합의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긴 논의를 생략하고 생명에 대해 필자가 생각하는 결론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출발하고자 한다. 생명이라 불리는 현상은 대체로 "우주 내에 형성되는 지속적인 자유에너지의 흐름을 바탕으로, 기존 질서가 모태가 되어, 새로운 질서로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해 나가는 그 어떤 '정보적 질서'의 총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일단 생명현상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해 본다면 이러한 생명현상이 발생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물리적 여건이 무엇인가를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생명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른 질서파괴의 경향을 극복해 가며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존재인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유에너지의 공급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우주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지속적 자유에너지 공급체계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 태양-지구계와 같은 항성-행성계이다. 여기서는 뜨거운 온도를 지닌 항성과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를 지닌 행성사이에서 온도차이에 따른 에너지 흐름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우리 지구생명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이 온도차이에 따른 자유에너지 흐름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얻어진 자유에너지를 통해 새 질서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어진 자유에너지 흐름 속에서 어느 정도의 기간동안 자신의 형태를 유지해 가며 그 어떤 기능을 수행해 가는 기구가 마련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어떤 우연에 의해 이러한 장치의 매우 원시적인 형태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만들어진 이러한 장치가 영구히 그 기능을 수행해 나간다거나 점점 더 기능이 좋은 장치로 '성장'해 나간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지구사의 생명이 바로 이러한 '성장'을 거쳐 이루어지는 장치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가? 여기에 생명이 지닌 절묘한 계략이 작용한다. 이것은 사실 극히 간단한 것이기도 하다. 즉 이 기구의 주요 부분들이 지닌 기능의 하나로서 그 부분들 자체의 존속기간 이내에 그들 자신과 대등한 기구를 평균 하나 이상 형성해 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자신의 복제 작업에 해당하는 것인데, 자신의 복제물이 이루어질 여건 속에 복제 원형으로서의 자신을 투입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것 자체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나 자유에너지의 공급을 받는 지구의 여건 아래서 가장 원시적 형태의 이러한 기구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일단 가장 간단한 형태의 이러한 기구가 마련된다면 이미 잘 알려진 자연선택의 방식을 통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형태를 지닌 기구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만일 태양-지구와 같은 자유에너지 흐름이 주어지고 이 가운데에서 이 흐름을 통해 질서를 유지 저장할 기구가 발생하여 그 기능의 일부로서 자체 복제의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면 위에 규정한 성격을 지닌 생명이 출현하여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정된 형태의 단일 기구로서는 고차적 질서를 지닌 생명의 유지 발전이 매우 어려우리라는 것이며 이러한 근원적 난점을 지구생명은 복제라는 특정된 방식을 활용하여 극복해 나간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의 기구에 대해 그것의 물질적 연속성을 포기하는 대신 그것이 지닌 정보적 연속성을 취하는 전략으로, 하나의 기구가 지니는 불가피한 노쇠현상을 극복해 나가는 탁월한 계략이다. 이러한 계략에 맞추어 형성되는 복제 및 존속의 단위를 우리는 개체생명이라 부르게 되며 따라서 생명이 지닌 이러한 성격을 '생명의 개체화 전략'이라 칭할 수 있다. 한편 이렇게 마련된 개체생명들은 그 자체로서 유한한 기간동안 상당한 독자성을 부여 받아 활동하면서 집합적으로는 전체 생명을 형성하는 중요한 구성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구상의 생명이 여러 형태의 개체생명들을 형성하며 존재하게 되는 이유인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개체들이 다시 자신들 간의 일정한 유기적 관계를 통해 고차적인 상위의 개체를 형성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더욱 높은 질서를 구현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정신이라든가 문화와 같은 고차적 질서가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과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구성하는 그 어떤 개체라도 자유에너지의 원천인 태양-지구계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음은 물론, 비교적 안정적인 주변의 특정 여건 아래서만 가능하다, 특히 복제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 자체도 주변 상황이 이러한 특정의 여건이 구비될 때에 한하여 발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현상이 자족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기본 요건으로 유리는 "기본적인 자유에너지의 근원과 이를 활용할 물리적 여건을 확보한 가운데 이의 흐름을 활용하고 있는 각 단계의 개체들로 구성된 유기적 체계 전체"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를 생명의 존재양상을 대표하는 한 본질적 단위로 보아 '온생명' 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생명 개념은 우리의 경험영역 안에 놓은 각종 개체생명들을 접하는 가운데 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추상하여 얻은 개념이라 할 수 있으나, 상황의 과학적 이해를 통해 본 생명의 본질은 오히려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서의 생명 즉 '온생명'의 여러 특성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생명을 지닌 주체 즉 생명체를 말할 경우 우리는 자족적 단위로서의 '온생명'과 의존적 단위로서의 '개체생명'을 구분하여 생각함이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개체생명과 보생명

생명이 지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특히 생명의 성격을 논의함에 있어서 온생명과 개체생명 사이의 관계는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각각의 개체생명은 온생명 안에 놓이지 않고는 생존이 가능하지 않으며 온생명 또한 이러한 개체생명들을 통하지 않고는 높은 질서의 유지가 대단히 어렵게 된다. 하나의 개체생명을 기준으로 온생명을 해당 개체생명과 그 나머지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한 개체생명의 생존은 온생명의 이 나머지 부분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셈이다. 따라서 하나의 개체생명을 볼 때 "자신을 제외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이를 우리는 해당 개체생명에 대한 '보생명' 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개체생명들은 이들이 생존해 나간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불가피한 몇 가지 특성을 지니게 된다. 한 개체생명은 보생명이라는 주어진 여건 아래서 스스로의 생존을 지속시켜 나갈 내적 구조가 마련되어 있어야 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개체생명 자체를 보존하려는 일종의 생존의지와 이를 구현 시키려는 생명활동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생명의 영역 안에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 즉 보생명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각각의 개체는 자체보존의 성향 뿐 아니라 보생명과의 원만한 공존상태를 지속시켜 나가려는 성향을 함께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모든 개체들의 본능 속으로 유입될 것이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개체들의 행위 성향 속에는 개체의 상대적 이점을 중시하는 개체중심적 성향과 보생명과의 관계유지를 중시하는 생태중심적 성향이 공존하게 된다. 개체생명과 온생명의 성공적 생존을 위해서는 일견 상충되는 듯한 이 두 성향의 균형과 조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인간 역시 이러한 생명의 세계 즉 온생명 안에서 그 보생명과의 관계를 통해 생존해 가는 하나의 개체생명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존 방식 또한 개체생명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보편적 생존양상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다. 더구나 인간은 그 생태계적 위치가 최상위에 속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여타 생물종이 마련한 매우 특별한 형태의 자유에너지 공급에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이는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까다로운 제약조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그 어느 생물 종 보다도 더 깊고 광범위한 생태계적 의존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는 곧 그 보생명과의 종적 그리고 횡적 관계가 그 만큼 더 깊고 광범위하게 엮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대체로 인간 활동의 생산소비적 측면과 사회구조적 측면이 바로 이러한 종적 그리고 횡적 관계를 나타내는 외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보생명과의 종적인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초기의 수렵에 의한 '먹이'의 직접적 채취 방식에서 벗어나 점차 먹이의 인위적 재배를 위주로 하는 농사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도구를 비롯한 각종 생활 이기들을 제작하는 공작 기술들을 발전시킴으로써 보생명을 제압하는 강력한 인위적 장치들을 마련해 왔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산업기술로 이어지고 있는 다양한 생산소비 활동들이다. 이러한 활동을 수행함에 있어서 인간은 당연히 개체 즉 인간 생존에 유리한 활동을 해야 할 뿐 아니라 보생명과의 공존 즉 행태적 배려를 함께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혀 왔다. 예컨대 일방적인 수렵채취 만으로는 부족을 느낀 인간은 이를 생태적으로 활동하는 재배의 방식으로 전환해 간 것이다. 한편 인간은 이러한 종적 관련을 맺음과 동시에 횡적으로 동류 개체들과 결합하여 유기적 조직체를 이룸으로써 고차적 개체 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각종 사회조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조직체들을 이루어 나가는 주요 구성양식이 이른바 사회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회체제의 구성 원리는 인간이 지닌 기본적 속성 즉 경쟁과 협동 성향에 두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개체생명이 지닌 두 상반된 성향 즉 개체중심적 성향과 생태중심적 성향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속성 가운데 어는 것의 발현을 우선하느냐에 따라 경쟁적 방식을 위주로 하는 경쟁적 체제와 협동적 방식을 위주로 하는 협동적 체제가 존재하게 된다.

인간과 온생명

생태계 안에서의 인간의 이러한 여러 활동들은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에 의해 크게 고양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지적 능력이 지닌 보다 큰 의의는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문화 즉 정신문화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제 이러한 정신적 능력의 소유로 인하여 창조적 정신활동이 가능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인간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이러한 정신적 능력을 기반으로 인간이 이루어 낸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총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주변 생태계와의 종적, 횡적 관계로 대표되는 물질적, 사회적 차원의 삶을 변형시키는 것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삶 즉 정신적 차원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이러한 지적 관심을 지닌다는 점에서 인간은 온생명을 구성하는 수많은 개체생명들 가운데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최초로 자신이 속한 생명의 전모 즉 온생명을 파악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온생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인간의 출현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신을 파악하는 존재가 생겨났다는 것은 곧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그 중추신경계를 이루는 신경세포들의 활동에 의해 몸 전체를 자신이라 여기는 하나의 의식 주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개체적 지능을 바탕으로 서로 사이에 정보적 연결을 지닌 문화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집합적 지혜에 의해 전체생명을 시간 공간적으로 꿰뚫어 파악하는 새로운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만일 문화공동체를 통해 파악한 이 전체를 자신이 기왕에 지닌 중추신경계 활동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확대된 전체 의식 공간을 새 주체의 의식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는 인간이 온생명을 '나'로 의식하는 새로운 의식의 단계에 이른 것이 된다. 이것이 객체로서의 대상 인식과 다른 것은 기왕의 주체인 '나'가 그 중심에 놓임으로써 자신의 의식을 내부로부터 확대하여 그 전체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온생명의 주체성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관건은 인간에 의해 하나의 객체로 파악되었던 온생명이 객체적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의 자아로 느껴지는 인식의 전환에 있다. 흔히 '나'라고 느끼는 존재가 한계 지워지는 것은 '나'를 이루는 신경세포들의 주된 정보활동 및 통합 기능이 자신의 신체 안에 국한하고 있으며 소중히 보존해야 할 대상범위가 자신의 신체를 이루는 세포들에 한정된다는 본능적 자각에서 온다. 그러나 우리가 교환하며 통합하는 정보의 내용이 체외에까지 뻗어 나가고 협동하고 보존해야 할 대상이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대될 경우 우리는 흔히 이를 우리의 확대된 주체로 느끼게 된다. 가족을 비롯한 각종 사회공동체에 확대된 일인칭인 '우리'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를 의미한다. 온생명이 주체로서 이해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확대가 생명의 최종 단위인 온생명에 까지 이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의식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지구상의 생명은 35억년이란 긴 세월동안 미처 자아를 의식하지 못하는 유아적 상태에 있다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비로소 스스로를 의식하는 그 어떤 주체적 존재로 깨어날 계기를 얻게 되는 셈이다. 이는 물론 온생명의 생애에 있어서 각별한 의의를 가지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의식을 지닌 온생명'이 앞으로 펼쳐 낼 예상을 불허하는 상황들을 생각해 볼 때, 이는 가히 우주사적 전환에 해당하는 엄청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과 과학기술문명

인간이 지닌 정신적 능력을 활용하여 문명을 이루는 한 중요한 방편이 사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한 지식을 확보하는 일이다. 사실상 인간은 일찍부터 많은 유용한 지식들을 찾아내었고 이를 문화라는 기구를 통해 전수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 가운데서도 현대문명의 형성을 위해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특별한 형태의 지식이 바로 '과학'이다. 과학 그 자체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물리적 활용을 위한 도구적 지성으로 뿐 아니라 기존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아 나갈 비판적 지성으로 활용될 소지를 지닌 중립적 성격의 존재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술적 능력의 한계에 부딪쳐 불편과 빈곤에 시달려 온 인간의 손에 이것이 주어지자 인간은 곧 이를 물질적 활용에 사용하기 급급하게 되었다. 즉 인간은 이를 생산기술에 적용하여 이른바 과학기술을 탄생시켰고, 이는 다시 인간 삶의 물질적 여건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새로운 문명을 낳게 하였다. 현대문명은 한마디로 오늘의 물질적 여건을 구성하는 생산기술이 현대과학과 제휴함으로써 과학기술이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산기술을 낳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삶의 물질적 기반이 엄청나게 강화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문명을 형성하는 물질적 사회적 정신적 제반 요인들은 서로 독립적인 것일 수 없다. 가령 그 어떤 이유로 인해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하면 이를 관리 운영하는 조직과 생산된 재화를 분배 활용하는 양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보여야 할 것이며, 또 이에 따르는 여러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이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학기술에 의해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될 사회체제는 어떠한 것인가? 한 개체가 보생명과 맺는 종적 그리고 횡적인 관계들 사이의 상호관련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한 조직체가 외적 개척 국면에 있을 때는 대체로 경쟁적 성향에 호소하는 것이 유리한 반면 내적 분배 국면에 있을 때는 협동적 성향에 호소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외적 개척의 여지가 많을 경우에는 이를 위한 구성원간의 경쟁적 성취를 고취함이 부의 절대량을 증가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나, 제로 썸(zero-sum)적인 상황에서는 내적 경쟁이 오히려 안정을 해치는 소모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학기술에 의해 개발의 가능성이 크게 고양된 것으로 해석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를 다투어 개발하려는 경쟁의 방식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 체제가 협동의 원리를 중시하는 사회 체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생존력을 지니리라는 점이 예상된다. 즉 과학기술에 의해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를 가져 온 현대문명은 이에 부합되는 사회체제로서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를 선호하게 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사실상 오늘의 시장경제 체제가 현실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현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결국 그 어떤 역사적 연유로 과학기술이라는 엄청난 행위 능력을 소유하게 된 인간은 이를 그 개체생존의 전략으로 활용함으로써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인간이 지닌 욕구를 상당부분 충족시키기에 성공하였으며 또 이에 부합되는 강력한 사회적 장치로서 경쟁위주의 사회체제를 확립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쟁 원리에 입각한 상업주의적 산업사회는 단순히 기왕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더욱 부추김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욕구는 다시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더욱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욕구와 기술의 끝없는 상승작용이 현대 기술문명의 새로운 특징으로 떠오르게 된다. 인간을 중심에 둔 시각에서는 이것을 소망스런 상황전개라고 볼 수도 있다.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인간은 드디어 이 지구의 주인으로 자리잡아 그 동안 염원해 오던 풍요와 편의를 누리게 되었으며, 경이로운 새 문물의 창조와 함께 무궁한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각 속에 심각한 문제점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온생명에 대한 고려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온생명 이야말로 인간의 이러한 문명으로 인해 치명적인 위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 인간의 기술적 능력이 미미했던 시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생태계에 대해 오직 국지적 영향밖에는 주지 않았으며 이는 곧 복원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전체 생태계에 대한 우려할 만한 손상은 불러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과학기술로 인한 인간 행위능력의 대대적 신장에 의해 온생명에 대한 전역적인 영향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는 곧 온생명에 대해 암적인 질환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온생명의 암적 질환

아직까지 온생명 자체의 건강을 진단할 수 있는 일반적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사람의 건강과 대비시켜 봄으로써 유익한 추단을 해 볼 수는 있다. 사람의 건강을 진단하기 위해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검사를 실시한다. 우선 체온을 확인하고 혈액 등 각종 체액의 성분 및 농도를 측정하며, 체중의 유지, 신진대사의 이상 여부를 살핀다. 그리고 신체의 모든 기관이 정상적인 모습을 지니고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지를 살펴보고, 특히 악성종양(암세포 무리)과 같이 균형을 깨는 이상현상이 나타나지 않는가를 확인해 나간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우리가 온생명을 검진해 나간다면 이것이 엄청난 질환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체온에 해당하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하고 있으며, 온생명의 체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구상의 토양, 물, 대기 등의 성분과 농도들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말하자면 체온상승, 체액농도의 변화와 같은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신진대사에 이상이 생겨 신체내의 필수 영양소가 소진되고 노폐물이 배설되지 않아 독성물질이 체내에 쌓이듯이, 대체불능 자원들이 급격히 고갈되고 처리 곤란한 폐기물들이 쌓여 나가고 있다. 더욱 두드러진 증상은 지구상의 대다수 생물 종들이 서식처를 잃고 이미 멸종하였거나 멸종 위기에 빠져 있다는 점인데, 이는 신체의 많은 주요 기관들이 절단되어 나갔거나 절단되어 나갈 위기에 놓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결과는 어디에 기인하는가? 우리는 바로 인간이란 생물종이 이루는 이상번영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신체의 어느 부위에 암세포가 번성하고 있듯이 온생명의 주요 부분을 인간이 점유하면서 비정상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스스로 번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정확히 인간이 암세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암세포는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균이 아니라 엄연히 신체에 속하는 자체 세포로서, 오직 그 어떤 이유로 신체 안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망각함으로써 자신이 지닌 생존 기술을 무분별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번영과 번식만을 꾀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물론 인간이 공해문제를 비롯하여 온생명의 병적 상황에서 오는 증상들을 전혀 못 느끼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를 느끼면서도 이를 오직 자신의 번영에서 오는 부작용 정도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를 온생명의 병적 상황에서 오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문명의 발전에 부수되는 필요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온생명의 주체로서 온생명에 미치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암세포로서 암세포에 미치는 불편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녹색운동이나 공해퇴치에 나서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인간에게 느껴지는' 증세를 제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암적인 증세에 대한 진통제적 처방밖에 얻을 것이 없다. 인간의 출현이 지구생명의 탄생이후 35억년 만에 처음으로 온생명의 자의식을 일깨울 놀라운 우주사적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능력을 부여 받은 인간이 온생명을 죽이는 암세포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역설적인 우주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생태윤리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생태윤리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바로 이러한 온생명을 희생시키는 우리의 행위강령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암적 질환이 치유하기 어려운 것과 같이 온생명의 질환은 현재 매우 어려운 고비에 놓여 있다. 온생명의 병적 양상을 대표하는 현대의 물질문명은 증폭적인 악순환에 휘감겨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키고 있다. 오늘의 산업기술은 시장경제를 통한 경쟁사회로 연결되고 경쟁적 시장경제는 다시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부추긴다. 상승된 요구는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갈구하고 이는 다시 보다 격화된 형태의 경쟁사회로 인도한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 증폭되는 인간의 산업활동이란 다름 아닌 온생명의 신체 위에서 신체의 각 부위를 각가지 방식으로 변형시켜 '인간만을 위해 유용한' 그 무엇을 짜내는 행위이다. 그러나 미처 감각과 의식을 갖추지 못한 온생명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처도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처할 가장 긴급한 사항은 우선 온생명으로 하여금 의식을 갖추어 통증을 느끼고 상황에 대비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보아 온 바와 같이 '온생명의 자의식'은 곧 '인간의 온생명 의식'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의 온생명 의식을 일깨우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온생명이 바로 내 몸임을, 내 생명임을, 그리고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자신이 암세포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인간이 암세포적 죄악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 즉 온생명으로서의 '나'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는 종교적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는 먼저 온생명이라는 것의 정체를 바로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파악된 온생명이 곧 자신의 확대된 주체로 느껴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즉 기왕의 주체인 '나'를 다시 새로 파악된 온생명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내 주체가 객관적으로 파악된 온생명의 주체와 혼연한 일체로 느껴지는 단계에까지 나가야 하는 것이다. 과학이 온생명 속에 내가 위치함을 보여 준다면, 내 의식은 이를 '느낌'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느낌으로의 전환은 물론 나 이외의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주체적 결단이며 종교적 결단이다. 여기서 과학이 해야 할 과업은 바로 하나의 실체로서의 온생명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가능하도록 생명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며, 종교가 맡아야 할 과업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나'로 거듭나게 하는 기적을 베푸는 일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생각하라"는 교훈을 듣는다. 우리는 이제 이 교훈을 통해 내 '이웃'의 의미를 좀더 깊이 파악해야 할 것이다. 내 '이웃'은 이제 내 주위 사람들만이 아니라 내 '보생명' 이며 이 이웃과 내가 하나 되어 더 큰 나 곧 온생명을 이룬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 됨 속에서 이 기념강좌의 대주제인 "만물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