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기독교화 과정 


 Dr. Ns-P. Moritzen(독일 에어랑엔대학교 선교학교수)


 

우리 독일의 역사에서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로마 제국으로 침입해 들어간 게르만인, 슬라브인, 켈트인과 일부 아시아인들-은 (로마제국에 비하여) 발전이 더딘 단계의 민족들로서 그들은 부분적으로 (로마제국을) 파괴하거나 모방하면서-의 이민에 관하여 말하게 된다. 이 역사의 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데, 그 이유는 유럽의 선진국인 우리가 재구성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비기독교인들에게 영주권을 허락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유럽의 국가들은 비유럽 국가들로부터 이미 수백만의 소수민들을 받아들였다.

서구 또는 유럽은 지도상으로 볼 때, 한국이나 베트남과 유사하게 방대한 아시아 대륙에 종속된 모습과 같다. 하지만 유럽은 유럽 자시의 역사를 소유하고 있다: 희랍과 로마문화의 유산들은 이주민들로부터 증대되어 왔다. 대체로 유럽은 A. D. 1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기독화가 되었다. 주변국인 폴란드,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인들을 제외하고, 로마제국과 게르만족들은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슬라브인들은 정교회로 개종하였다. 중세기의 유럽은 스스로가 기독교화가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유럽의 기독교화 과정에 대한) 자료들은 충분하지 못한 편이다. 로마제국은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을) 도서관과 고문서 기록 보관소에 보관하였지만, (유럽의) 신생 국가들은 글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자료들은 수도원에서 발견되어진다. 수도원들에서는 희랍과 로마의 많은 유산들이 보존되었다. 영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인 서기(書記)라 불리는 사람이 바로 목사 또는 성직자였다. 게르만인들은 신탁(神託)으로 사용된 문자(Buch-Stabeu)를 소유하였는데, 그 문자는 비용이 들었으며, 예언자는 오두막(부스)을 의미하는 주문을 글자마다 하나씩 읽고 마술을 행해야 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그룹을 형성하였다. 그 도시의 거주민들과 직공들과 무역상들은 차츰차츰 지위를 얻게 되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평등을 주장하는 운동이 점차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중세 초기의 도시와 마을들은 거의 사라져 버렸고, 로마제국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절반과 그들 문화의 중심이 귀족 소유의 성들과 수도원들에 남게 있었다.

추수의 십분의 일을 요구한 교회들은 항상 수도원에 속한 마을에서만 취하였다. 수도원들은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사업과 발전의 중심지였다. 남쪽으로부터 새로운 식물들이 수입되고, 의학지식과 병에 쓰이는 약초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식량과 먼 곳으로부터 새로운 소식들이 들려오는 등 수도원은 선교본부와 같은 곳이었다.

일부의 수도원과 도시에는 감독이 가르치는 대학이나 학교들이 없었다. 이러한 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전통적인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전도자나 순례자로서 로마에서 예루살렘 그리고 스페인까지 배우며 여행할 수 있었다. 교회와 의학, 법학, 건축학에 관한 서적들은 모두 라틴어와 희랍어로 쓰여졌다. 영적, 지적인 유산들은 오랫동안 위대한 사상으로서 수도원과 도서관들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종교적 삶은 신약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라틴어로 행해지는 예배의 외적으로 보여지는 절차는 -신약성경 자체에 나타나 있는 것 보다 종종 더 많은- 성자들로부터 유래된 가장 중요하고 많은 영감으로서 간주되었다. 예배에서 읽혀진 성경이 존중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심도있게 연구되어지거나, 당시의 일상 언어로 이용되지는 않았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의 중심은 되었으나, 성경에 대한 이해는 부분적으로 모호하였다.

기독교화의 과정은 그 이면에 존재하던 기독교의 정치적 세력의 타락으로서 시작되었다. 통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그들은 비기독교적 미신을 공공연히 행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로 귀의하는 것에 대하여 처벌을 하였다. 세례의식은 강압적이어서는 안되고 좋은 교훈으로서 선행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종종 피상적이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그룹: 카알 대제가 통치한 색슨족-이 전쟁과 무기에 의해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여기에서 세례는 프랑크 왕국의 세력에 종교적 복종의 표시로서 나타났다.

이러한 권력의 사용은 좋게 해석될 수 없다. 또 다른 비평의 한 가지는 독일 국교회의 형성에 관한 것인데, 처음에는 희랍식으로, 다음에는 라틴식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식으로 된 것이다. 나찌주의자들은 기독교에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은 독일의 것들이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혼합주의 가운데 유대-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독일식으로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젊었을 때 이것은 중대한 질문이었다. (독일식의 기독교화에 대한) 그 요소들은 기독교 안에서의 변화와 같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상징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졌다. 기독교화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고트족과 반달족

둘째, 프랑크 왕국

셋째, 영국민족

넷째, 동부 게르만족들(바이에른, 아르메니안, 튀링겐과 색슨족들)

다섯째, 스칸디나비안족들.

여기에서 슬라브인들은 제외된다. 이들 족속들 중 각각은 다음 기간에 선교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게르만 족속들에 대한 기독교 선교의 협력활동의 부분들은 대개 아일랜드 수도사들(탁발승)의 몫이었다. 그들 스스로 새로운 신앙을 형성한 주된 그룹으로서 중요하다.

(1) 통치자와 귀족들: 양자 모두 전통적 합법성을 상실하였으나, 또 다른 타입의 합법성을 소유하였다. (2) 지방 영주들과 협력하였던 감독들은 나중에 로마의 감독들과 협력하였다. (3) 부분적으로 독립하여 활동하였던 수도사들은 더욱 자주 성직자들을 훈련시켰다.

신앙을 전달하는 언어는 이중구조였다: 서적들과 의식들은 라틴어로 되었으나, 울필라스가 선교를 위해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이후로, 목회에 있어서 교리문답적 가르침, 설교, 목회적 양육들은 게르만 지방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정치와 연관된 이와 같은 선교를 비난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은 항상 정치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이 통상을 위하여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하도록 한 것과 같이, 게르만도 그러한 식으로 외부의 세력으로 강제된 것은 아니다. 게르만 사람들은 군사적 견지에서 강대국이었고, 심지어 우세하였다. 그러나 옛 종교는 세력을 잃고 확신이 사라졌다.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영향력은 세력이 있었다. 세력 심지어 강압이 사용되는 곳마다 게르만에서 게르만으로 사용되어졌다.

자료에 의하면, 개종의 가장 중요한 유형은 통치자의 개종이다. 콘스탄틴 황제는 한 새로운 유형을 제공하였고,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는 이러한 개종의 많은 예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경우이다. 이러한 통치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 중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 아내를 맞이하였다. 한 통치자의 회심은 그리스도가 옛 종교의 범주에 따라 이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비상하거나 승리를 얻게 한다면, 그 통치자는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 공공연하게 기독교로의 개종이 일어나고 법정에 새로운 교회건물을 짓고, 적어도 국적이 부분적으로 즉시 따라오게 된다. 새로운 신앙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면서 새로운 주장을 하도록 한다.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지속적으로 한 나라가 새로운 방침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수도원들을 설립하거나 새로운 성자들 즉, 제일 먼저 성 마르틴과 성 마우리티브스와 후에 갈루스, 안스카, 세버린, 보니페이스와 같은 다른 사람들을 전하는 것이다.

최초로 그 통치자의 사람들과 법정이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교주의는 공공의 인식을 잃게 되었다. 이교주의는 아주 먼 구석 즉, 로마제국에서는 변방에나 남아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교도는 이방인들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옛날 신들 또는 어둠의 세력들과 새로운 주님이신 그리스도 사이의 능력대결을 기억하고 있다. 모든 기독교적 영향력이 통치부족들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받아들인 무역상이나 노예들과 같이 먼 나라들로부터 온 사람들이 있다. 극소수의 옛 로마 도시들 안에 기독교 교회들과 회중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일랜드로부터의 수도사들이 이상한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한 채 이주해왔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들의 고국을 떠났고, 그들의 사역은 아주 불규칙했으나,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고트족의 개종은 갑바도기아에서 붙들려 고트 왕국으로 끌려온 노예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노예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였고, 추종자들을 얻었다. 이 그룹들은 나중에 박해를 받고 로마제국으로 건너갔다. 이 그룹에 울필라스가 감독이 되었다. 그의 첫 사역으로 성경번역과 고트족의 의식이 많은 노력 끝에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울필라스는 Asen이나 Vanen의 친숙한 지형적 용어들을 취하지 않고 새로운 용어인 하나님을 만들어 냈다. 영국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게르만인들은 이러한 식으로 그를 따랐고 많은 다른 용어들도 만들어냈다.

어떤 이는 울필라스가 성경적으로 강조하는 측면에서 아리안으로 더 정확하게 성직으로 임명되었다고 불평할 수 있다. 그것은 그를 임명하는 교회의 신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왜 로마제국 안의 울필라스의 추종자들과 게르만 왕국들이 그를 굳게 따랐는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독교적 정체성을 소유하였으나, 그들이 거리를 두고 있는 한 로마제국의 공식 니싸(Nicean?) 교회의 이방인으로 남았다: 그들이 포기하고 카톨릭 교회에 합류하였을 때, 그들의 정체성은 잃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많은 군인들은 그렇게 했다.

노르웨이로부터 정착한 아이슬랜드 사람들은 왕에게 복종하기 원치 않았다. 그들중의 일부는 기독교인이 되기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일련의 기독교인들이 조금씩 증가하였고, 갈등이 일어나고 해마다 회의에서 결정들을 내려야만 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침묵한 뒤에 결정을 선포하는 현인에게 물었다: 기독교는 전파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식으로 평화와 법이 모두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옛것을 따르는 자도 남아 있었다. 정치적 압력을 말하는 일부 책들도 있으나, 그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남아 있는 자료들은 주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새로운 신앙의 중심된 모습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왕으로 비춰지고 십자가 위에서 승리의 왕으로 그려진다. 어떤 사람은 복음전파가 중요한 것이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어떤 자료들도 복음전파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이 능력대결들 특히 능력들간의 접촉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신앙은 더 밝고, 더 인간적이며, 더 공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위험한 마술은 사라져야 한다.

혼합주의의 흔적들이 있게 되는데, 사람들은 때로 그리스도와 옛 신들을 조금씩 혼합한다. 정부의 위치는 옛 종교를 지하와 구석으로 내모는 것이다. 교회는 성공하기 전에 인내심 있게 각 세대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게르만인들의 공적인 삶에서는 존재하는 악을 고발하고 정의를 옹호하는 특별한 제도들은 없다. 피에 대하여 피를 취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여기에는 종교적 배경이 있다. 사라진 자의 영혼은 복수를 요구함으로 꿈에서 나타난다. 교회는 범죄자들을 위해 보상하는 목록들의 한 유형을 발전시켰다. 이러저러한 범죄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보상해야 하는가? 그리고 종교적 양상들은 순례의 길 안에서 보상으로서 역할을 한다. 교회는 적대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들을 다루기 위한 더욱 인간적인 방법으로 피난처의 권리를 행사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