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

예배와 교육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교회의 삶에 대한 참여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심원한 선물을 함께 나누며 수세기에 걸쳐 전승된 전통을 이어 받는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성숙한 이해와 풍부한 전통과 교회의 다양한 표현에 대한 각성은 신앙교육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수세기 동안 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든 면을 가르쳐 왔다. 이 교육 사역은 또한 예배자들이 어떻게 더 의미 있게 예배드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데 중요하다. 이와 같이 예배는 교육의 한 중요한 수단이다. 교회는 자체가 지닌 어설픈 교육 커리큘럼을 가지고 교육하는 것보다 예배행위를 통해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이 장에서는 예배와 교육이 서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밝히면서 예배와 교육의 관계를 고찰하겠다.


 

1. 예배와 교육의 다섯 가지 역할 모델

교회의 중심사역인 예배는 직접적으로 기독교교육과정과 연계되어 있다. 진정한 교육은 예배를 그 자체의 최종열매로 삼을 것이다. 본 장은 교회에서 행하는 사역들에 대한 하나의 개념화를 제공하는데, 교회의 사역에서는 예전이 교제, 도전, 선포 그리고 봉사와 연결된 그물망의 중심이다.

교회의 중심사역은 지금과 영원히 그 독특한 역할을 유지할 것인데, 그것은 예배(레이투르기아, leitourgia), 축제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창조성의 표현이다. 이 사역은 그 어떤 목회를 위한 모델에 있어서도 그 사역의 우선 순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원의 중심이나 중추에 자리해야 하며 잠재적으로 교회 안에서 예배가 가질 수 있는 통합기능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하게 된 구속(救贖)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을 위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기쁨과 성령의 임재를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예배와의 관계 안에서이다. 그러한 예배는 물론 연합예배에서 절정을 이루지만 반드시 그러한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감각은 모든 삶 가운데 이뤄질 수 있고,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도 분명할 수 있다. 예배의 중심 사역은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신앙을 가르치는 자들은 우선 순위를 예배에 둔 교회의 주요 사역과 그 이론과 실제를 연계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연계가 없다면 목회사역에 대한 그 어떤 논의라 할지라도 하나의 지적 노력으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교육의 과제

기독교교육은 기독교적 가치와 태도 그리고 인생스타일(형성)과 함께 기독교적 이야기와 진리의 특징을 공유하고 취득하는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다 충분히 표현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개인과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구조의 갱신(변화)을 육성하는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과정은 하나님과 가르치기 위해 부름 받고 은사를 받은 사람들 사이의 협력(동역관계)을 포함한다. 이 과정은 또한 갱신이나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사람들이 개방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 정의는 내용이나 정보, 사람이나 형성(formation), 그리고 공동체/사회나 변화(transformation)같은 일반적으로 수용된 세 가지 교육의 요소들과 연계한다.

기독교교육의 포괄적인 비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사회의 상황 안에서 교육적 내용을 가르침 받는다고 인식하게 하므로써, 내용,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나 사회라는 "교육적 삼위일체"(educational trinity)를 정교화하는 것이다. 특히 예배에서 경험되는 내용은 인식적 감각적 차원과 인생스타일 혹은 행동적 차원들을 내포한다. 세 가지 요소들(내용, 사람들, 혹은 상황) 가운데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요소들에 대한 배타적 강조는 포괄적 비전을 육성하지 못하고 사역과 인생에 있어서 미숙한 행위나 부적당한 환원주의(還元主義)로 끝날 수 있다. 제한된 비전에서 생성되는 교육의 질은 기독교교육의 역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수 세기동안 공동체와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사한 위험은 교육과 학습이 그리스도교 교회가 지닌 다섯 가지 주요 과제들과 이 과제들과 연관된 사역형태와 연결되지 못할 때 생긴다. 교회가 지닌 다섯 가지 주요 과제들을 거미줄이나 방송망(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 거미줄은 그 바깥둘레에 네 개의 점이나 과제들을 지닌 원이나, 다섯 번째 과제를 중추나 중심으로 삼는 원으로 생각될 수 있다. 원의 네 과제들은 ?선포(케리그마, kerygma) ? 공동체(코이노니아, koinonia) ? 봉사(디아코니아, diakonia) ? 도전(프로페테이아, propheteia)을 포함한다. 중추 또는 중심은 축제 혹은 예배(레이투르기아, leiturgia)이다. 거미줄 비유는 교회의 교육사역에서 이 모든 것들이 육성되려면 상호간 친밀히 연결되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많은 부분은 사람들에게 창조주에게로 관심을 기울일 시간을 별로 주지 않으면서 이미 만들어진 것에 자신을 빼앗기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몰입은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창조된 것들에게서 자신을 분리시킬 때에만 파괴될 수 있다. 분리의 행동은 일상적인 활동, 요구 그리고 상황의 중심에서 재배치를 전제하지 않는다. 분리의 행동은 일상사와 삶의 상호작용 안에서 기꺼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의지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또한 그들의 삶에서 안식할 자리를 필요로 하는데, 안식 안에서 갖는 성스런 시간과 장소는 재창조의 기회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활성화된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사람들은 창조물로서 그 자신들 또한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예배에는 사람들이 모든 삶에서 자신들이 지닌 다양한 창조능력과 에너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활용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부여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예배와 디다케(교육)--------

예배(레이투르기아, leiturgia)와 관련된 교의 이중적 과제는 ?모든 삶을 포함하는 예배에 대한 의식을 육성하는 것이며, ? 창조적 표현을 통해 통합을 위한 길을 추구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에 있는 모든 참여자들이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때, 축제 감각은 최고조에 달하며 예배를 위한 상황이 제공된다. 부언하면, 개인이 드리는 예배와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경험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들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요구하는 바를 전망 속에 함축하도록 한다.

기독교교육이나 형성(formation)의 사역을 위한 예배의 중심성은 교육의 세 요소 즉 내용, 사람들 그리고 상황(컨텍스트)과의 관련성안에서 가시화 될 수 있다. 예배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인 하나님,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인간의 응답에 초점을 맞추는 기회를 부여한다. 인간의 응답은 전체 인격이 하나님의 놀라우심과 위엄에 대해 개방되는 것이며 바로 그 개인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며 유지자이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예배는 인간적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과 슬픔, 소원 그리고 꿈에 직면하도록 한다. 셋째, 예배는 나이, 성, 종족, 문화 혹은 능력의 차이를 초월하므로써 공동체를 보강한다. 그렇게 하므로써 예배는 창조의 다양성과 그리스도안에서 가능케 되는 연합과 일치를 반영한다. 전체 회중이 함께 드리는 예배는 교육목적을 위해 다양한 집단으로 나뉘어짐으로써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예배와 교육의 통합은 환경이 신앙에 적대적일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그 한 예는 유대인 회당인데, 회당은 포로기간동안 예배와 교육을 효과적으로 통합하였다. 다른 예는 무신론적 철학으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던 시기에 소비에트 연방국가에 있던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교회는 그 자체의 학교교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속에 있는 교육은 예배나 예전을 통해 이뤄져야 했다. 예배는 상황(the occasion)을 제공하며, 그 상황 안에서 사람들은 만남의 결과로서 학습에 개방된 마음과 새로운 방식으로 살려는 심령을 가지고 교사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

-------------예배, 교육과 케리그마(선포)----

기독교교육이 지닌 과제 하나는 그리스도교 이야기(christian story)를 나누어 개인의 삶에 적절히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선포 안에 포함되어야 할 것은 선택,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개인적 응답이다. 성서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머리와 마음과 손이 복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앎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제공된 새로운 삶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교육은 인간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와 직면하여 회개와 회심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확한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선택과 헌신의 문제이다(막1:15; 행2:38-39). 이 회심에 대한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제공된 구원의 은총에 근거한다. 비록 이 구원의 선물이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지만, 구원의 선물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사는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 케리그마(kerygma)와 관련된 교육과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의 딜레마에 관한 지식을 나누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에게 제시되고 또한 요구하는 바를 포착하려 하면 이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배, 교육과 코이노니아(교제)----

코이노니아(koinonia)의 과제는 자신과 가족 혹은 집단에 중심을 둔 삶으로부터 인간성과 연관된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는 공동체의 삶으로 전향함으로써 구체화된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선언하였듯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다." 개인과 공동체와 사회를 소외시키고 분할하는 종교적, 문화적, 언어적, 성적, 사회적 차별은 그리스도와 함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가치와 존엄성을 긍정하는 이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공동예배에서 모델화된다. 모든 신자들은 식탁친교를 위해 모일 때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

코이노니아와 관련된 교육과제는 공동체의식을 육성하는 것인데, 이 공동체의식이야말로 하나님과 다른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전체 피조물과 상호 의존하는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예배에서 모델화되는 그와 같은 전망은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포함한다.

-------------예배, 교육과 디아코니아(봉사)--

디아코니아(diakonia)는 회심한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궁극적 의미에 있어서 그 질문은 영원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관점에서 답변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차선적 의미에 있어서 그 질문은 개인과 사회와 세상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체 백성들에 대한 돌봄과 관심이란 관점에서 답변되기도 한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문적인 성직자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목회적 소명이 있으나, 선교와 봉사(ministry)의 다양한 표현에서 평신도들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디아코니아(diakonia)와 관련된 교육의 과제는 한 개인의 신앙이 신실한 봉사행동과 연결되게끔 육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사회의 모든 차원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요구에 응답하여 어떤 힘이 요구되던 기꺼이 봉사하려는 의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해야만 한다. 공동예배는 성취된 봉사를 축하하고 현재 시행하고 있는 봉사를 기도로 들어올리고, 미래의 선교 기회를 위하여 예배 참여자들에게 도전을 주는 상황을 제공한다.

----------예배, 교육과 프로페테이아(도전)---

교회의 예언적 과제는 현대역사에서 쉽게 간파되거나 육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교회가 너무 안일하게 신앙을 지배적인 문화에 적용시켰고, 그리스도인들이 고도의 물질 만능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인생스타일에 동화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예언과 도전에 대한 강조는 프로페테이아(propheteia)와 관련하여 교회를 위하여 명료하게 드러나야 할 과제이다.

예언적 과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공동체 혹은 사회 안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통치에 충분히 헌신하는 것임을 이해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복음의 미덕과 한 개인이 처한 문화가 갖는 미덕 사이의 수렴점들은 축하되고 보존된다. 그러나 상이한 점과 갈등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항거의 자세, 변혁, 회심을 위하여 기꺼이 투쟁하려는 용단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첫째 충성은 기독교문화에 대한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자신의 삶을 사회를 인도하는데 기꺼이 투자하려고 해야만 한다. 개인과 공동체 삶의 차원에서 성령의 사역을 필요로 하며,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자의 책임을 기꺼이 수용하려는 의지를 요구한다.

교회가 지닌 이 예언적 과제와 결부되어 있는 도전에 히브리 성경의 예언자들이 모범적으로 보여 준 모험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 모험을 회피하는 것은 교회에 위임된 화해의 사역(고후5:16-21)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사람들과 나라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이 사명을 감당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요구를 회피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은 예언의 말씀이 공동 예배에서 존중될 것과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뜻을 나타내어야 함을 말한다.

예배와 교육의 연관성은 효과적인 사역과 교회의 지속적 갱신에 대한 관심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와 같은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고 즐거워하시는 것이다. 그와 같은 노력의 차선적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을 통하여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므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로버트 파즈미노(Robert W. Pazmino)

2. 예배와 학습

예배와 학습은 그리스도교 시대 탄생이래 서로 연결되어 왔지만, 이 결합은 교회사를 통해 항상 유지된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과 노년을 포함한 전체 회중이 예배에 참여할 때 예배(Liturgy)와 교리문답(catechesis) 사이의 역사적 연관성을 회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유감스럽게도 종교교육가들과 예배 지도자들은 각자 나름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지닌 다양한 관심을 재결합시키려는 시도들은 오히려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양자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왜곡시켜왔다. 일부 종교교육가들은 예배에 의해 혹은 함께 가르침에 대해 말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고, 그러므로써 예배를 교훈적 행위로 격하시켰다. 예배를 사용하는 것은 예배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배운다. 우리가 갖는 의례는 근본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꼴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교리문답 양자는 하나님의 계시가 알려지고 성숙한 신앙이 고양되고 활성화되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갖는 직업을 위해 준비되고 자극 받는 목회적 활동이다. 아마도 양자 사이를 분간하는 최상의 길은, 예배는 행위를 함축하고 교리문답은 신앙의 공동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양자는 함께 실천적 행위(반성적 행동)를 형성하는 바, 그것에 의해 공동체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속했는지 깨닫게 되며, 무엇을 위하고 무엇에 의해 살고 죽는지를 배우며, 무엇이 되어야 할지 뿐만 아니라 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된다. 예배는 신앙의 축제적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육성한다. 전자는 후자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과 믿음의 공동체는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신실한 삶은 그 삶의 통합성을 나타낸다.

------------------교리문답과 의례---------

교리문답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신앙이 요구하는 이중 책임, 즉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충족시키고자 의도된 목회활동이다. 교리문답은 개인적 공동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고, 내면화하고 적용하게 되는 과정이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 사망, 그리고 순종을 담고 있다. 사회봉사와 사회행동은 개인과 공동의 욕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써 교회가 증언하는 것이다. 청지기 직분은 교회가 세상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을 표현하는 것이다. 친교는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의 표적을 제공하는 것이다. 행정은 교회가 선교와 봉사의 공동생활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직화하는 것이다. 예배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면하고 그 말씀에 헌신하고 말씀에 의해 강화되는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리문답은 공동체가 교회의 사회적 행동, 복음전도, 청지기 직분, 교제, 목회적 돌봄, 행정, 예배 그리고 친교를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신앙을 갖게되고, 성숙한 지식과 이해를 습득하는 수단이다. 교리문답은 교회의 공동생활의 여러 국면을 통하여 신실한 선교와 봉사사역을 위해 개인과 공동체를 준비시키고 자극한다. 교리문답은 교회가 예배생활을 위하여 신앙에 필요한 것들을 이해하고, 신앙적 관점에서 예배를 평가하고 갱신하므로 예배에 신실하게 참여하도록 대한 신실한 참여를 위해 공동체를 준비시키는 일을 추구하는 수단이다.

아마도 공동체 삶의 그 어떤 면도 의례와 예식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우리 인간은 의례를 위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가 갖는 의례들은 우리를 만든다. 공통의 신앙과 예식 없이는 그 어떤 문화도 완전치 못하다. 한 공동체의 이해와 길은 예식 준수에서 다양하게 객관화된다.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자신들의 위치에 관하여 자기들의 신앙을 공동체의 신화로 표현하지 않는 인간집단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화를 유지하고 계승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과 의례는 분리될 수 없다.

예배는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정통주의는 올바른 의례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갖는 예식과 의례는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이 시행하고 있는 의례를 변경하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이유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순서를 변경하는 것보다 혁신적 설교를 하는 것이 더욱 쉽고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이 행하는 의례의 구조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재조직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다. 우리들이 행하는 의례는 우리의 이해와 행동방식을 규정하고, 우리를 공동체에 결합시키고, 삶에 대한 목적과 지침과 푯대를 제공해 준다. 삶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와 방식이 변화할 때 왜 우리는 과거에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우리를 지탱해 주었던 의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오래 전의 의례를 제쳐둔 후 새로운 의례를 찾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의미 있는 의례(상징적 행동)의 지원 없이 의미 있는 개인 생활과 정치적 사회적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활동인 예배는 상징적 사회적 행동을 결합시킨다. 이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지원한다. 다른 한편을 부정하는 것은 곧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례와 삶 사이의 중요한 일치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공동체의 예식 생활에 의미 있게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지 못했다.

---예배: 하나님의 비전 있는 백성들의 사역---

의례(상징적 행동)는 모든 삶의 본질적인 면이다. 실상, 삶에 형식과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질서 정연하고 반복적이며 상징적인 행동이다. 의례없이 우리는 세상 안에 공동체, 동질성, 일치성(at-one-ness)을 건설하고 확립할 수단을 갖지 못한다.

의례없이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의미 있고 통합된 변화를 창조하는 수단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의례 없이 우리는 우리들의 이해와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계승하는 의미있는 수단을 결여한다. 실상, 의례와 무의례(無儀禮)사이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나, 우리가 행하는 의례가 어떤 것이 될 지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의례는 삶에 본질적인 것이다. 교회가 자신의 영혼을 상실하였던 그 역사적 순간에, 교회는 또한 자신의 의례를 무시하였었다. 놀랍게도 교회사에 있어서 모든 개혁은 그 핵심을 의례의 개혁에 두었다. 우리의 의례가 변할 때 우리의 삶도 변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이해와 삶의 방식을 바꿀 때, 우리는 의례를 바꾼다.

다원적 세속적 기술적 도시세계에서 삶의 중심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소유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충성을 위한 요구는 많다. 그리고 우리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다양한 공동체도 많다. 오로지 정체성을 인식하고 전통을 견지하는 공동체, 의미있는 의례가 풍부한 공동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기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삶은 단편화되고 있다. 우리들은 소외되어 가는 세계 안에서 전일성(wholeness)과 일치성(at-one-ness)을 추구하고 있다. 활력있는 공동체의례만이 우리를 영적 침체와 상실에서 지켜줄 수 있다.

교회는 마치 공통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세대(世代)를 분리시키는 의례를 갖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독특한 의례를 위해 어린이와 젊은이 그리고 성인을 구분하는 것을 수용한다. 공동체는 공유된 의례의 선물이다. 개인의 욕구는 다양하고 다를 수 있으나,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차이를 함께 나눌 때에만 성장한다. 동질집단 안에서 발생하는 소외는 성장을 저해한다. 우리와 공동체의 의례가 일부 특별한 연령 집단만의 욕구에 부응하도록 허용할 때는 모든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 교회의 공동체예식을 위한 규범은 주의 만찬이나 성만찬인 바, 바로 그것의 본질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양한 연령집단을 위해 분리된 의례를 만들도록 조장받는 현대의 경향은 다양할 수 있다. 공동체 예식의 기능은 분리가 아니라 일치를 만드는 것이다. 이외에도, 각 세대는 성장하기 위해 통찰과 경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헌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마치 비전과 미래적 표현의 성육(the incarnation of futuristic expressions)을 필요로 하듯이 기억을 보존하고 전통을 유지하고자 한다. 지속성과 변화없이 우리는 현재의 안정과 동질성을 유지할 수 없다. 만일 우리 사회의 의례가 어떤 세대의 욕구를 무시하거나 어떤 특별한 세대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 모든 구성원이 안정을 느끼고 신앙과 삶의 새로운 면에 접착할 때까지 그것들은 변혁되고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린이나 젊은 층을 위해 특별한 의례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정규적인 공동체 의례 내에서 어린이와 젊은이 그리고 성인들을 언급할 장소를 필요로 한다.

-------------예전적 교리문답--------------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하나의 도전은 교육, 예배, 친교 그리고 봉사를 통합하는 것이다. 사역에 대한 이 일치된 이해의 중심점에 예배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한다. 그러나 그 뒤에 따르는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 통합을 대변하는 교회 안에서의 어린이, 젊은이, 성인들의 공동생활에 대한 영상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성만찬을 재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삶의 규범은 성만찬 축제이다. 우리는 이 축제를 신앙을 선포하고, 공동체 안에 결속시키고, 세상에서 하는 사역을 위하여 새롭게 하고 강화되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공동식사를 나누는 하나님의 이야기백성(God's storytelling people)의 즐거운 모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축제 모임은 사적(私的)이고 수동적이며 개인주의적인 행사가 아니라 공적이며 능동적이며 공동의 행위이다. 축제 모임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행하는 주관적인 행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나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객관적인 행위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즐겁게 하나님을 만나는 공동체를 위한 행사이며, 우리 자신과 변화된 삶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위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이 거룩한 성례전을 우리의 극단적 무가치, 부패, 죄, 죽은 친구에 대한 기억이나 우리들이 처한 상황을 비판하는 거룩한 각성으로 생각해 왔다. 또한 거룩한 성례전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하나님 앞에 기쁘게 서는 부활 - 즐거운 감사, 하나님의 복음을 축하하는 승리의 파티 - 에 의해 우리가 가치있는 존재가 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와 같은 축제적 성찬이 공동생활의 심장을 차지하고 있는 회중을 상상해 보라. 그러한 회중에서는 목회자들과 함께 어린이, 젊은이, 성인들 모두가 정규적으로 자성(自省)하고 주(週)마다 축하하기 위해 모일 것이다. 아침에 갖는 가족 성만찬 전에 한 시간에 걸친 교리문답을 위해 모이는 회중을 상상해 보라. 성만찬 후에는 가족의 친교식사가 뒤따르고 세상에서 행하는 사역을 위한 보고와 계획이 입안되고 축하될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를 가르치고 중시하는 창조적 공동생활이 발전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분명하다. 우리는 성령으로 채워진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고 있는 봉사와 선교생활을 통합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므로써 이 세례받은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의미있게 성만찬을 준비하고 축하하기 위해 주마다 모이며 그런 후 세상에 흩어져서 성만찬의 삶을 살도록 갱신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는 신실한 공동체 내에서 교리문답과 예배를 통합하는 의미이다.

요한 웨스터호프(John H. Westerhoff)

3. 예배와 기도의 교리문답

기도를 여러 가지 방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인간 존재의 기본적 표현으로 남아 있다. 신앙에 대한 인식적이며 분석적인 표현을 선호하므로 종종 직관과 삶을 변화시키는 국면들이 등한시되고 있으므로 기도의 학습방법은 종교경험인 직관의 회복과 삶을 변화시키는 국면들을 요구한다.

20세기는 영성시대로 알려진 것 같지는 않다. 더욱 납득할 만한 것은, 20세기는 퇴보한 의례(儀禮)의 시기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장부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상실했거나 망각했다. 아직도 우리는 무언가 신적인 것 즉, 신비적 제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 서구종교, 묵상 그리고 개인종교체험을 바라고 추구하고 있다. 마치 우리 인간은 우리가 이성적 존재 이상인 것 그리고 진리가 이성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알고 있다. 우리 현대인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다. 기도와 의례는 여전히 우리 인간성의 기본 표현이 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는 종교의 특별한 지붕이다"라고 썼다. 루터의 판단에 의하면 신앙은 "기도이며, 오직 기도"였다. 베이론 폰 휘겔(Baron von Hügel)은, "기도는 모든 삶의 본질적 요소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슐라이엘마허(Schleiermacher)는 "종교적이 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같은 일이다"라고 논평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기도라는 말은 불투명하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하늘을 향한 비탄한 부르짖음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식사나 만남 이전에 갖는 형식이나 산 정상에서 갖는 경험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들에게 기도는 자발적인 정서적 방출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 기도는 암송되어야 하는 고정적인 이성적(理性的) 형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말씀으로서의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님과 갖는 의식적 관계의 모든 면을 설명하는 포괄적 용어이다. 기도는 영적인 삶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존재 - 이거나 혹은 경건이며, 경배와 고백, 찬양과 봉헌, 감사와 간구/중보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활동이다.

경배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초점을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두는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여 간구하는 것이다. 경배하는 삶은 사랑과 꿈과 비전의 삶이며 삶의 모든 국면을 기적으로 보게 한다. 고백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아래서 사는 삶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적 경험과 신앙을 사회적 외적 실천과 행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찬양의 삶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동을 기억하는 삶이다. 그것은 황홀과 살아 있는 춤과 노래와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다.

감사는 우리가 사는 역사의 한 복판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행동을 축제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가시덤불을 계속 불태우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현대문화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포착하는 삶이다. 봉헌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과 노동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간구/중보기도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것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충성스러움을 도덕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충성하며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와 세상 안에서 활동하려는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사의 하나님과 능동적인 연대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절정은 계몽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행동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역사적 각성과 의식(意識)이 지닌 수용적이며 능동적인 양식 양자의 통합을 전제한다.

성경에 있는 무수한 기도의 예들은 이 이해를 뒷받침해준다. 성경은 역사적 전망(a historicist perspective)을 전제한다. 그 전망을 가지고 역사하는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그들의 직관 능력을 활용하였다. 그들은 의를 결핍한 사람들과 정의를 결핍한 나라들 위에 심판을 선고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성을 활용하였다.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가졌던 모세의 경험은 그의 백성들을 해방의 비전과 메시지로 인도하게 만들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투쟁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의식적인 결단으로 이끌었다. 엠마오에서 떡을 뗄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각성은 제자들을 사도직을 수행하는 삶으로 이끌었다.

다메섹 도상의 바울의 경험은 그를 박해자에서 신앙의 변증가로 변화시켜 놓았다. 이 모든 경험가운데 그 어떤 것도 혹은 그들이 취한 결과적인 그 어떤 행동도 순수히 이성적이거나 직관적인 것이 아니었다. 개개의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세속적인 직관적 경험을 나타내는데, 그것들은 지성을 현대적으로 사용하므로써 새로운 종류의 도덕적 행동을 낳았다. 개개의 경험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세속적 각성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실천을 나타낸다. 개개의 경험은 기도의 실례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를 위한 교리문답(catechesis)은 먼저 기적을 행하고 창조하도록, 꿈을 꾸고 환상에 젖으며, 사유하고 묵시를 보며, 노래하고 기절하고 춤추며 행동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람들이 얻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기도를 위한 교리문답은 황홀을 위하여 새롭고 기적적인 일을 깨닫기 위하여, 감각적이며 운동 감각적인 각성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을 정서적으로만 아니라 몸짓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갖춘 자연적 능력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기술적 지식은 우리가 처한 문화의 영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술적 지식은 대체로 분석적이고 음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의식의 다른 양식을 덜 강조하고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적 지식은 음성적(音聲的) 지적 지식에 대하여 갖는 관심과 계획과 조직과 실천을 강조하므로써 다른 종류의 지식과 삶을 가시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우리들 개개인은 미완성된 산물로 자연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자연의 한계 내에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우리가 살고 심판할 수 있는 인간 세계를 건설한다. 대체적으로 무의식적인 수단을 통하여 우리는 사회화되어 특이한 의식의 양상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를 결정한다. 우리들의 문화는 더 큰 가치를 하나의 의식의 양상 - 지적인데 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사회 안에서 갖는 우리들의 정서적 프로그램들은 음성적, 분석적, 논리적 사고기술을 강조해 왔다.

인간 삶의 신호적, 개념적, 분석적 면들에 대한 강조와 상징적, 신비적, 상상적, 정서적 면들을 등한시하는 경향은 우리들의 영적 발달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왜곡시켜 왔다. 영적인 삶을 사는 전체 백성은 의식(意識)의 수용적인 양상과 능동적인 양상 모두를 충분히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두뇌의 시각적, 예술적, 상상적, 관계적 그리고 합리적 활동들에 대한 새로운 각성은 언어적, 논리적, 지각적 이성과 분석과 직선적 활동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무디게 하거나 제한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 종교적 활동과 경험의 내적 삶은 결합되어야 한다.

요한 웨스터호프(John H. Westerhoff)

4. 예배 안에서의 신앙 - 이야기경험

예배환경은 성경적 신앙 안에 본질적으로 포함된 역사적 전망을 전달하도록 독특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예식과 의례의 드라마를 통하여 예배자는 신앙-이야기(faith-story)를 경험하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배우는 바, 이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동질성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한다.

종교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역을 꾸준히 관망하면, 창조적인 것보다는 인식적 학습에 대하여 우선적인 관심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신실하고 양육적이며 헌신적인 사람들이다. 일부는 예외적인 교사들이다. 소수의 교사들은 참으로 창조적인 학습경험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학습하는 일은 인식적 기술과 지식, 사실, 개념들을 직접 전달하는데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교사들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 만일의 경우 활용되고 있다면 창조적 활동은 보충적일 뿐이다.

많은 의미있는 변화가 최근의 종교교육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창조적인 교수방법들이 채용되는 반면, 종교교육은 근본적으로 특유하고 구체적이며 경험적인 것보다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것을 발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형국이다. 많은 고무적인 혁신에도 불구하고 종교교육에 있어서 학습은 여전히 음성적, 개념적, 분석적인 것이 지배적이며 지성의 발달이 우선적이다. 직관과 감동에는 별관심이 기울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교육적 불균형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실로 엄청나다. 학습은 기도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효과적인 학습을 위하여 좀 더 구조적인 기회뿐만 아니라 예술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만지고 냄새맡고 인생을 즐기는 일에 게을리 하도록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느낌을 표현하는 일과 예술의 활용을 통해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회피하도록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그러나 감동에 대한 관심과 인식의 직관적 양식(樣式)을 육성하고자 하는 관심의 재탄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가 역사적 전망의 발전을 등한시하는 현재의 교육관행을 고집하는 한, 참된 그리스도교 기도는 우리를 회피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각성의 발달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전망 위에 서 있다 .축적적인 신앙 전통 내에서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분, 즉 세상과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목적에 따라 그 모든 피조물들과의 상호관련을 통하여 세상을 유지하시는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은 성육하신 대리자로서 세상 위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행동하신다. 그러므로 역사는 의도적이며 방향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계시적인 역사행동을 통하여 우리는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얻는다. 우리들의 삶과 삶 그 자체는 그 이야기의 빛에서 의미와 목적을 갖는다.

행동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역사 전체 과정에 대한 이해 즉,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역사를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가 갖는 비전으로서의 역사의 궁극 목적이란 관점에서 우리는 현재를 이해하고 과거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교육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 안에서 살며, 반성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실천하므로써 자신들을 완성하는 일에 헌신된 역사적 대리자들로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위치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이나 견해를 획득하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은, 우리 인간은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 방식들 즉 사유와 감정과 행위를 통해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경험에 대한 개개의 접근방식은 세계를 조망하는 특이한 방식을 낳는다. 사고의 지배는 세속적 세계관, 즉 실재의 깊이와 미래에 관한 통찰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욕구를 등한시하는 견해를 양산한다. 또한 카우프만은 삶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형성하는 일에 감정이 지배적 위치를 점유할 때 종교적 세계관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그와 같은 세계관은 감동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반면, 의지적 삶의 도덕적 차원을 등한히 여긴다. 우리가 오로지 행동을 세계관의 지배적 양상으로 삼을 때, 우리는 카우프만이 설명하는 유신론적 세계관, 즉 인간과 세계보다 실재에 대해 말하는 전망을 확립한다.

"유신론은 세계를 하나님의 의지에 뿌리를 둔 의도적이며 목적있는 활동에 의해 세계 그 자체를 초월하여 질서화된 것으로 간주한다"(Gordon Kaufman, God the problem [Cambridge, Mass.:Havard University Press, 1972], 219). 이러한 후기의 세계관에 따른 삶은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서 얻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들 개개인은 사고하고 느끼고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자아(自我)이다. 너무 오랜 기간동안 우리는 종교교육에 있어서 사고나 감정적 본성 한 면을 강조해 왔다. 우리는 이제 실천(praxis)으로서의 삶 - 의지적이며 열정적이며 반성적인 행동으로서의 삶을 재강조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 표현하면 신앙은 무엇인가 다른 것 - 사람, 장소나 사물에 대해 말하거나 지시하는 명사이다. 만일 우리가 신앙을 하나의 사물로 생각하면, 우리는 쉽게 "나는 그것을 발견했어" 혹은 "그것을 잃어 버렸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은 개인적 구원, 영(여호와 안에서의 기쁨), 개인의 삶을 위한 자원이나 지식으로 이해되는 소유물이다. 그러나 신앙을 중심이 있는 통합된 행위, 하나의 동사(동사)로 이해하는 것이 더 희망적이다.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라는 말 대신 "신실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신실함에 대해 올바르게 말하는 것은 사고, 감정, 의지의 통합을 강조하는 행위이다. 신앙은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응답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시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신앙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를 위해 우리는 역사적 인식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역사적 전망은 역사를 지탱하는 신앙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므로써 고무되어지는데, 이 공동체의 과거는 현재가 되고 개인적인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들의 이야기만 말했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빈번히 마치 그 이야기가 개인적인 의미는 별로 없는 과거의 분리된 사건들의 연속인 양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셨는지를 회상한다. 이 사실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것은 훨씬 더 의미심장한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속박에서 우리를 치유하셨고 지금도 자유케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하여 종교교육의 강조점을 교리(사람들이 믿어야 할 내용)나 성경(학습되어야 할 성문서)에 둔다면, 우리는 기도를 위해 필요한 역사적 전망을 얻기에 힘들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교육적 노력을 이야기구전(story-telling)에 방향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의미있는 방식으로 우리들의 신앙 이야기,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을 전해줄 필요가 있다. 신앙공동체를 축하하는 초기 상황에서 어린이, 젊은이 그리고 성인들은 노래와 춤과 연극과 가시적인 예술을 통해 신앙이야기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거를 현재와 미래로 만드는 방법으로 "우리들의 이야기"(our story)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우리들의 이야기'로 전달할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런 류의 종교교육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기초를 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기도(개인과 사회의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적인 각성)가 우리들의 삶의 한 자연스런 부분이 될 때라야 의례기도(ritual prayer)는 목적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의례기도에서 기도로 진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다른 방식이다. 훌륭한 의례는 우리의 경험을 표현하고 확장시킨다. 경험없이 의례는 죽은 시체로 남게된다.

-------------------계시와 응답------------

신앙은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계시와 신앙은 마치 신학과 종교가 그런 것처럼 서로에게 속해있다.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제도, 문서, 관습, 예전, 종교적 서술, 그리고 행동양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신앙은 깊은 차원에서 개인적이며 역동적이다. 신앙은 순수히 이성적 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신앙은 감동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인 바, 전체인간을 포용하며 객관적인 것이 되기에 어려운 것에 관여한다. 확실히 신앙은 자체를 항상 종교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서 종교는 우리들에게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다. 구원의 교리에 관한 학습과 구원받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믿음으로 얻는 칭의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종교와 종교경험을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을 갖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신앙은 진리나 아이디어에 관한 지식이거나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인격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에 대해 갖는 우리의 생각은 중요하다. 실상,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가 갖거나 갖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의 종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통하여 가능해지는데, 그것은 전통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경험은 우리들의 생각을 만든다. 1세기의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빵을 뗄 때 그분의 임재를 경험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새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이성적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축하할 때마다 우리는 그 경험을 갖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인 계시의 깨달음은 의식의 직관적 양상을 육성한다.

우리들의 신앙경험은 항상 종교적 신념으로 해석된다(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제도화의 과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므로써 이루어지는 상징적 변형(symbolic transformation)을 궁극적 형태(the ultimate form)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성(聖)을 세속적 구조 안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한 반면에,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딜레마를 제공한다. 계시에 대한 신앙경험이 자발적이며 창조적이기 때문에, 필요한 계시의 제도화는 그와 같은 경험을 감소시킨다.

-------------------의례와 재생------------

의례는 사회적 드라마인데, 그것은 공동체의 기억과 비전을 구체화한다. 우리가 초기의 사건에 대한 감정을 환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 상징적 행동을 반복하므로써 되는 일인데, 그 상징적 행동은 공동체를 그 사건의 현재성에 영향을 미치는 힘 안으로 이끈다. 환언하면, 의식(意識)의 직관적 양상을 통하여 의례는 계시를 재표현한다. 한 가지 실례는 세례나 주의 만찬인데, 이 두 가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재표현한다.

상징적 행동의 힘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들의 경험에 질서를 부여한다. 상징적 설화(narrative)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한다. 의례는 개념적인 것을 강조하는 실존적인 실재의 차원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례는 원시적 진리를 지시하고 거기에 참여하는데, 그 진리는 보편 상식이나 사고가 아닌 감정과 직관에 있어서 확장되는 앎의 지평 끝에 위치한다. 의례 없이 삶은 세속화된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것, 즉 성(聖)이 의례적 표현을 통해서 그리고 의식(意識)의 근본적 직관적 양상을 통해 가장 잘 알려지고 표현된다.

우리가 의례에 참여할 때, 우리는 공동체를 경험한다. 우리는 의례를 물려준 우리들의 선조들과 화해하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위한 비전과의 연속성을 재확립한다.

의례는 드라마(劇)이다. 그것은 의식(意識)의 수용적 양상(the receptive mode of consciousness)의 세계 안에 있는 삶이다. 우리들의 직관이 위축될 때, 의례는 그 힘을 상실한다. 따라서 의미있는 의례는 의식(意識)의 직관적 양상을 고양하고 활성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례가 자체의 중요한 자리를 갖지 못하면 우리들의 영적 삶은 무능해질 것이다.

요한 웨스터호프(John H. Westerhoff)

5. 예배와 인격적 회심

그리스도교 신앙이 삶에 대한 다른 이해와 역행하기 때문에 회심 의식(儀式)과 입사(入社)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교 헌신의 출현과 함께 발생하는 가치의 방향설정(reorientation)은 육성(育成)의 패러다임 안에 전적으로 편입될 수 없다. 교회 내에서 자란 자들마저도 어떤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회심될"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입사식(Initiation rites)은 한 개인의 종교적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낳는 의례적인 행동과 구술 가르침으로 구성된다. 전형적으로, 일련의 고된 시련을 통하여 사람들은 성인(成人) 공동체의 방식과 이해를 배우며 성(聖, the sacred)을 직면하며, 죽음과 재출생을 경험하며 새로운 존재로 출현하므로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가 뚜렷이 변형된다.

역사적으로 입사식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실제적 역할을 감당한다. 실상, 우리는 개인적 신앙행동이나 의례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극화되는 회심에 의해 공동체에 입사하는 한에서 종교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에 헌신한다. 정교한 입사식은 - 그것에 의해 교회의 회원이 되는데 - 1세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특징이었다. 비밀스럽게 포장되어 몇 주간동안 준비된 후, 이 예식들은 종교 경험을 고무하는 심원한 회심의 사건을 축하하기 위해 시행된다. 입사는 모든 순수한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현대 서구세계에서 의미심장한 입사식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 생존해 온 그 편입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 신앙헌신 편입의식(faith commitment incorporation rites) ? 제도적 편입 입사식(institutional incorporation initiation rites) - 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교회에 가입한다 -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신앙헌신 입사식은 종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비교연구에 관해 보도된 것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첫 3세기 동안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한 훌륭한 실례이다. 이 이해에 대한 흔적이 여전히 일부 교회에 남아 있으나, 제도적 입사예식은 현대의 주요교파교회들이 지닌 전통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회심과 입사------------

몇 가지 개념들은 자유주의적인 주요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 더욱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우리는 좀처럼 회심(conversion)이란 말을 사용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도 빈번히 우리들의 관심을 회원수를 늘리는 일(membership campaigns)에 한정시켜 왔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교육사역(educational ministry)에서 회심을 위한 장소를 발견하기까지 교회의 선교는 무능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실상 회심자들 없이는 교회가 육성 공동체가 되는데 어려움이 상존할 것이다.

복음전도는 여기서 사용되는 바로는 말과 행위로 복음을 선포하므로써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가 교회 안팎에 있는 사람들을 혁신적인 삶의 방향의 재설정, 즉 회심으로 이끄는 과정이다.

복음전도는 신앙 주입이 아니다. 복음전도는 신앙공동체의 안팎에서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말과 행실을 통해 증언한다. 그리스도의 주권,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God's new possibility)에 대한 복음, 그리고 모든 거짓 종교성에 대항하는 복음의 예언적 항거에 대한 이 증언이 없다면, 교회는 자신의 영혼을 상실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문화적인 변화의 삶을 살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해 나가는 문화적 연속성의 제도가 된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교회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화해의 사랑을 역사적으로 중재하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체의 삶과 교회 백성들의 삶을 헌신된 신자들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에 대한 수많은 보편적인 이해와 방식에 역행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회심되고 훈련된 몸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역사적 대리자가 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만들어지거나 육성되지 않는다. 삶의 새로운 방향설정, 마음과 정신과 행동의 변화인 회심은 교회 안에서 성장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성숙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수적인 면이다.

교회는 더 이상 신자 안에서나 혹은 교회 안에서 거듭난 신자를 육성하는 일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불을 지필 수 있거나 지필 것이라는 망상에 굴복할 수 없다. 우리는 육성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걸어왔다. 우리는 개인들을 제도적 종교 안으로 들어오도록 육성할 수는 있으나 성숙한 그리스도교 신앙 안으로 들어오도록 육성할 수는 없다. 본질상 그리스도교 신앙은 회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되게 교육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세례를 받아 신앙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회심하는 것이다. 회심은 우리들의 인식의 재조정, 그것 없이는 더 이상의 그 어떤 성장이나 학습이 불가능한 혁신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심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회심은 한 개인의 삶의 새로운 방향설정이며, 무관심과 우유부단, 의심이나 초기의 미숙한 경건에서 열정과 확신과 깨달음과 새로운 이해와 방식으로 신중히 전환하는 것이다. 회심은 단지 불신앙이나 다른 신앙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바뀌는 변화가 아니다. 회심은 또한 모든 세례 받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원이다.

어린아이 시절에 세례받고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들 역시 회심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모든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신앙으로 충분히 내면화되고 복음의 권위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할 선택에 직면하므로써 그들 자신의 신앙을 확증해야 한다. 교회에 편입하려면 개인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헌신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회심은 인간 성숙과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장년 신앙의 요구와 회심을 인간 성숙이 덜 된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그들이 받는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의 회원이 된다. 그들은 이 신앙공동체의 이해와 방식 안에서 육성된다. 그들은 또한 성숙하여(장년시기) 회심의 순간과 시기를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말씀으로 복음화된다.

헌신은 하나의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독자적인 종류도 아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부모들과 교회는 신앙에 헌신한다. 첫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신앙에 대해 처음으로 헌신하며 양육과 전통을 계승하는 가족의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구를 선포한다. 후기에 그 헌신은 개인적 의심이라는 낯설고 불안정한 양상을 취하며 우리를 육성하는 공동체와 갈등을 이룬다. 최종적으로 성년기에 회심의 경험을 따르면서 개인적 헌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실현된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 헌신은 의미심장한 새로운 출발의 특질을 갖는다. 그러므로 헌신은 그리스도인 가족 내부에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신앙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가는 긴 과정의 한 중요한 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공동체 안에서 양육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회심은 성격상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회심은 이 모두일 수 있거나 어느 한 가지일 수 있지만 항상 급작스럽고 극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회심은 "주어진 신앙"(양육을 통하여)에서 "살아있는 신앙"(회심을 통하여)으로 바뀌는 혁신적 변화이다. 회심은 내면화와 삶의 변화(transformation)를 의미하기 때문에 혁신적이다. 회심은 신앙에 대한 증언의 결과이며,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이 갖는 전형적인 한 신앙 스타일로부터 성인들에게서 가능한 다른 신앙 스타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부언하자면, 신자가 되려고 한다면 교회의 교육에 회심과 육성 이 모두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육성에 대해 갖는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전도의 능력과 사회적 역동성 모두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빈약한 부흥운동을 거부하는 동안에 우리는 양육을 통해 하려는 거짓된 복음전도를 만들어 놓았다. 참된 복음전도와 회심은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회의 고백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세상 안에서 그의 증인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교육사역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교리문답(복음전도에 유용한)과 복음전도(복음전도는 교리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이다. 육성과 회심, 회심과 육성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신앙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걷는 신앙 순례 과정의 여러 순간에 다른 형태와 모습을 취한다. 신앙의 은사는 우리가 항상 배우고 있는 그 무엇이다. 한 개인의 삶 전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과 무수한 회심들로 이해되는 회심이 살아 있는 신앙의 기초이다. 건강한 의례는 우리들을 회심시키고 육성한다.

-------------------학습과 변화------------

우리들이 시행하는 의례들은 목적있는 행동을 하게 하는 인간 정서와 사고에 효과적인 영향을 미친다. 죽은 의례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자극하거나 환기시키는 힘을 갖지 못한 의례들이다. 입사식은 우선적으로 한 개인의 심리적 성향의 변화 - 회심 - 한 개인을 공동체 내부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아 가게 하는 과정을 목적으로 삼는다. 입사의례 과정은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지위나 상태에서 의미있는 분리를 경험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과경험(experience of liminality 혹은 in-between-ness), 심리적 절정 경험 또는 회심이라 부르는데, "재출생한" 하나의 새로운 인격으로 공동체 안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회심은 새로운 전망을 낳으며 - 여러 해가 걸리든 아니면 단지 몇 분이 걸리든 하나의 단순하거나 복잡한 경험이다 - 그런 것으로서 신앙에 필수적이다. 우리들의 신앙과 불신앙, 그리고 재신앙(再信仰)은 우리가 경험에서 기대하는 것과 연관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모두는 경험과 동질성의 자료를 전제(前提)와 가정(假定)들의 관점에서 여과시킨다. 만일 한 개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데이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이 무시되거나(여과된 것이다) 적의(敵意)에 의하여 무언가 다른 것을 지시하도록 적의에 의하여 규정되어 버린 것이다. 경험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은 불가피하게 하나의 전제조건으로서 출생에서 얻은 어떤 신비적인 최초의 상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실제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경험에서 인지하는 가능성들을 우리 안에 축적시킨다. 그 상징들은 가장 심오하게 우리들이 시행하는 의례에서 연속된다.

사회학자 밀턴 로케(Milton Rokeach)는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치체계에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가치에 대한 극적이고 지속적인 변화가 것이 가능함을 발견하였다. 반대가치를 고백함으로써 갈등을 억압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갈등에 대한 각성이 고통스러우리만큼 피할 수 없을 때, 갈등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자가 된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 안으로 편입시키는 그리스도교 입사(Christian initiation)는 방향설정으로부터 재방향설정으로 옮겨가는 변화를 필요로 한다. 종교경험과 예언적 행동에서 얻어지는 통합된 영적 삶의 가능성은 이 재방향설정(re-orientation)과 회심을 필요로 한다. 의례는 이 과정을 위한 근본적인 배경이다. 그러므로 교리문답은 그 자체의 관심을 인간 삶의 변화(transformation)에 둘 필요가 있다.

------역사적 전망에서 본 그리스도교 입사---

신앙공동체의 탄생은 공동체 회원들이 공유하는 종교경험 - 제자들에 의해 경험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가시화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대의 변화(passing)는 신앙공동체가 원초적인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상, 우리들의 문화에 편승한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탄생하나 변화된 존재가 갖는 능력을 결코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아 있는 교회"의 "산" 회원이 될 수 있을까? 더욱 의미심장한 입사식이 의식과 삶의 변화(transformation)를 위한 상황(배경)과 자극제가 될 수 있었다.

제 1세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한 성인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회심하였을 때, 그 또는 그녀는 신앙을 갖고자 하는 후보자의 욕구의 신실성을 증언하였던 후견인에 의해 회중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래서 교리문답자의 도덕적 삶이 검증되었다. 만일 가치가 있었다면, 그 사람은 안수와 십자가를 긋는 성호(聖號)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선포되었다.

향후 2년간 교리 문답자는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에 따라 자신의 삶을 형성하기 위하여 준비기간에 들어갔다. 이외에도 도덕 교육에 참여하므로 단지 의례의 처음 절반부분이었지만 회심자는 공동체가 행하는 주간(週間) 의례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성경봉독, 설교와 기도에 뒤이어 회심자들은 평화의 키스를 교환하였고, 주의 만찬을 증언하거나 그 만찬에 참여하지 않고 되돌아갔다.

이 준비 기간동안 회심자들은 정기적으로 회중 앞으로 인도되어 검증을 받았다. 누군가 준비되었을 때, 사순절 첫 주일에 그 또는 그녀는 교회의 등록부에 올랐고 곧 뒤이은 부활절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기간에 영적인 삶과 교회의 교리(도그마)를 강조하는 더욱 엄격한 학습이 이루어졌다.

성 고난주간 의례에 참여하는 것은 교리문답자가 신앙공동체에 입사되는 것이었다. 세족식 목요일(Maundy Thursday)은 축귀(逐鬼, exorcisms)로 축하되었다. 그런 뒤 부활주일 저녁에 최후의 의례가 시작되었다. 교리 문답자에게 다시 한 번 축귀가 시행되었는데, 눈, 귀, 코에 기름을 발랐다. 그 또는 그녀는 귀신을 추방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구원 이야기(salvation story)가 진술되었다. 후보자의 옷이 벗겨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널통 모양의 세례 통에 들어갔다. 다른 한쪽으로 가서 그 또는 그녀는 기름부음을 받고 흰 옷(가운)을 입었다. 제단 앞으로 나아가서 감독에게 안수를 받음으로써 세례가 확증되었다. 최초로 회심자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였다. 세례식 옷을 오순절까지 입었다. 교리 문답자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고 자기들이 참여했던 의례의 의미를 배우기 위해 매일 교회에 출석했다. 그렇게 해서 입사식은 종결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종종 그와 같은 의미심장한 의례를 결여하고 있다. 실상, 교회의 여러 부분들이 의례를 포기하고 그 의례들을 세속 사회에 내어주고 말았다. 우리 앞에 하나의 도전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위한 의미있는 의례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세례는 그리스도인 입사의식(the rite)이다.성 고난주간 의례에 참여하는 것은 교리문답자가 신앙공동체에 입사되는 것이었다. 세족식 목요일(Maundy Thursday)은 축귀(逐鬼, exorcisms)로 축하되었다. 그런 뒤 부활주일 저녁에 최후의 의례가 시작되었다. 교리 문답자에게 다시 한 번 축귀가 시행되었는데, 눈, 귀, 코에 기름을 발랐다. 그 또는 그녀는 귀신을 추방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구원 이야기(salvation story)가 진술되었다. 후보자의 옷이 벗겨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널통 모양의 세례 통에 들어갔다. 다른 한쪽으로 가서 그 또는 그녀는 기름부음을 받고 흰 옷(가운)을 입었다. 제단 앞으로 나아가서 감독에게 안수를 받음으로써 세례가 확증되었다. 최초로 회심자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였다. 세례식 옷을 오순절까지 입었다. 교리 문답자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고 자기들이 참여했던 의례의 의미를 배우기 위해 매일 교회에 출석했다. 그렇게 해서 입사식은 종결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종종 그와 같은 의미심장한 의례를 결여하고 있다. 실상, 교회의 여러 부분들이 의례를 포기하고 그 의례들을 세속 사회에 내어주고 말았다. 우리 앞에 하나의 도전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위한 의미있는 의례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세례는 그리스도인 입사의식(the rite)이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편입된다. 세례에 더 큰 중요성이 부여될 필요가 있고 또한 신중하게 시행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례 받은 날을 축하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또한 세례예식이 거행될 때마다 우리가 한 세례 서약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 안에서 시행되는 의례에 관하여 배울 것이 많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립되어야 할 중대한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우리는 생각하고 탐구해야 할 많은 교육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예배와 교리문답은 서로에게 속해있다. 교회의 교육사역과 선교의 미래는 현금의 이탈과 역사적 연합에 대한 각성에 의해 도전 받는다.

요한 웨스터호프(John H. Westerhoff)

6. 예배와 그리스도안에서의 개인의 성장

그리스도안에서 이뤄지는 개인의 성장은 예배자가 통합된 직업과 삶 안에서 또는 그녀가 속해 있는 예배공동체가 전해 준 신앙으로부터 끊임없이 확장되는 성숙한 신앙으로 옮겨갈 때 수반된 일련의 신앙단계를 거치는 통과의례(passage)를 포함할 수 있다. 신앙의 순례를 거치는 동안, 올바른 의식(儀式)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옮아가는 통과과정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들 역시 신앙 양식인데, 그것은 일생을 통한 예배자의 삶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는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부여해 준다. 더 나아가 세례는 한 성례(聖禮), 즉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입사의례로 이해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동을 반대하거나 그것에 대해 항거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의 행동을 근거하지 않는다. 세례 당시 외면적이며 가시적 표식인 물을 통하여 내면적 영적인 은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가족으로 입양되는 것이다. 세례는 새로운 출생, 새로운 삶, 그리고 새로운 이름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것을 축하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입사됨으로써 개인의 삶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개인은 양자됨과 유업을 거절하거나 부인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누구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속해있느냐 하는 사실을 변경할 수는 없다.

세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회원(지체)이 되는 수단이다. 성만찬, 혹은 주님의 만찬(Holy Communion)은 그리스도인이 지속하는 의례, 계속적인 은혜의 성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가족 감사 식사(family thanksgiving meal)이다. 세례는 - 세례만이 - 한 개인에게 빵이 담고있는 외적 가시적 표지와 포도주가 담고 있는 내적 영적인 은혜를 부여하는 성찬(the Eucharist)에 참여할 권리와 특권을 부여한다. 이 성만찬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 안에 있는 신자와 공동체를 유지시켜 나간다.

견신례(confirmation)는 성례행위(필요하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인데, 이에 의해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인식하고 확증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세례를 받고 부르심의 소명을 가진 자를 위한 사역을 맡아 행한다.

이런 맥락 안에서 이해된 신앙은 사람들의 중심있는 행동, 그들의 성장과 발전에 일치한 삶을 통하여 표현된 지성(신앙), 마음(애정), 그리고 의지(행동)의 구체성을 나타낸다. 그런 것으로서의 신앙은 하나의 행동(verb)이다. "신앙하는" 활동은 연령 제한이 없지만, 성격상 그 자체를 드러내며 한 개인의 신앙순례에 있어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신앙양식과 단계들-----------------

신앙은 하나의 행동, 지식과 존재와 의지를 포함하는 행동방식이다. 신앙은 극히 개인적이며 역동적인 행동, 우리들의 성장과 발전에 따른 마음과 지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인격(personality)의 중심있는 행동이다. 각 개인의 신앙이 자체의 유일무이한 특성을 갖는 반면, 신앙순례에 관한 일반적인 현상은 양식(style)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에게 신앙을 주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출생시에 신앙을 갖고 있다. 우리들의 신앙 내용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faithing)과 상호교류를 통해 얻어지는 반면, 한 개인의 신앙은 확장, 즉 더욱 복잡해 질 수 있다. 확장된 신앙은 더 위대한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 양식은 판단되어질 수 없다. 즉 신앙은 적당한 환경이 존재해야만 확장된다. 만일 이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은 적당한 환경이 수립될 때까지 확장하는 일을 중단한다.

신앙의 확장은 느슨하고 점진적이며, 보충적인 특성을 얻기 위해 시간이 경과하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신앙은 정상적인 성장율을 초과하여 속도를 낼 수 없고, 다양한 신앙양식이 갖는 특성들이 회피되거나 무시될 수도 없다. 새로운 양식이 되는 신앙의 확장은 이전의 신앙 양식이 추구하던 욕구를 제거할 수 없다. 반대로 신앙이 확장할 때, 신앙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만일 초기의 신앙 양식의 욕구가 부정되거나 무시된다면, 한 개인은 모든 욕구가 충족되어질 때까지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자유롭게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된다. 신앙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우리들의 잠재력이지만, 우리들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신앙을 확장하려는 욕구는 주어진 선물에 대한 감사행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조종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과 확장을 격려할 수 있을 뿐이다. 자칫하면 우리는 그 확장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신앙에 대한 우리 자신의 증언, 공동체 안에 있는 "믿는" 신자들과 갖는 교류를 증언하는 것이다.

이런 통찰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신앙의 네 가지 기초 형태와 단계를 설명할 수 있겠다.

경험된 신앙(experienced faith) : 경험된 신앙은 초기 아동기의 신앙을 규명한다. 아마도 전(前)신앙단계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초기의 아동기 발달에 있어서, 한 아이는 부모의 행동이나 다른 역할 모델을 관찰하며 모방한다. 역할 모델들은 아동의 통합된 신앙과 행동을 성장시키는 기초가 된다. 아동은 다른 의미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동하고 반응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생을 통하여 이상적으로 유지되는 기본 신뢰(basic trust)를 형성한다. 아동은 부모나 다른 권위들과의 관계에서 행동을 추구하고 행동의 제한을 검증한다.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후기의 삶의 특성을 이루는 개방성(openness) 혹은 폐쇄성을 형성한다.

친밀성 신앙(Affiliative Faith) : 이 신앙은 반드시 그 시기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아동기에 전형적이다. 실상, 수많은 부모들은 욕구가 만족스러우리만큼 충족되지 않았거나 필요한 격려와 환경을 제공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 신앙양식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표현한다. 우리들의 신앙이 확장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 특징적인 욕구나 그 어떤 다른 신앙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발전적인 양식의 필요성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이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일을 중단한다면, 우리들의 신앙이 제아무리 넓게 확장된다 해도 그 욕구가 충족되기까지 우리는 이 신앙 양식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친밀성 신앙은 세 가지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가장 중요한 첫째 특성은 애정(affections)에 중심을 둔 신앙이다. 그것은 머리나 의지보다도 마음의 종교로 표현된다. 이 신앙을 가진 개인들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해와 방식이 지닌 권위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와 비슷하게 그들은 공동체의 삶에 대한 소속 참여(belonging participation)와 봉사를 추구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앙 내용과 형태를 위해 공동체에 의존한다. 그들은 육성과 의례를 통하여 공동체의 이해와 방식을 경험하고 상(象)을 만들고 싶어한다. 말로 표현되고 삶으로 경험된 기억들을 통하여 뿌리가 내리어진다. 창조적 표현을 통하여 애정이 육성되고 목적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나타난다. 신뢰, 돌봄, 긍정, 반응의 수용을 통하여 자기 가치와 정체성이 형성되고 현재는 의미있게 된다. 이런 욕구들은 결코 무시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이 신앙 단계나 형식에서 사람은 "우리들의 이야기"(our story)를 "우리들의 방식"(our way)으로 삼는다. 친밀성의 신앙 발달은 확신, 즉 신념, 태도 그리고 가치의 확고한 정착을 추구하는 추구의 결과이다. 이 단계는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는가를 배우는 단계이다. 다양한 종교제의가 있는 오늘날, 젊은 층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그들에게 공동체 의식, 다원적 세계 안에서 갖는 강렬한 종교경험, 궁극적 진리를 주장하는 일련의 신앙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신앙의 근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특별한 시간적 길이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의 충족을 위해 우리가 너무 뒤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기의 사회적 조건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과반수 이상이 아마도 많은 성인들처럼 이 신앙 양식의 제한된 경계선 안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의례 생활은 이 신앙 양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으며, 친밀성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그 경계선을 넘는 자들을 포함하여 우리들을 위해서도 그 신앙양식이 지닌 욕구를 말할 필요가 있다.

친밀성 신앙의 욕구가 만족스럽게 채워진다면 청소년기를 지나는 동안 어떤 때에 사람은 새로운 신앙양식을 획득할 수 있다. 즉 새로운 특성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확장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신앙양식을 "추구하는 신앙"(searching faith)으로 지칭할 수 있다.

추구하는 신앙(searching faith) : 추구하는 신앙은 머리의 종교(the religion of the head)가 마음의 종교를 지배할 때 시작된다. 이데올로기와 행동에 대한 단기간의 복합적인 헌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이해와 방식에 대한 비평적 판단이, 드디어는 사람들이 살만한 가치와 죽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닌 확신을 발견하려고 애쓸 때 나타난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던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가진 확신을 따라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운다.

아동기 시절에 정체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신앙을 추구하는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씨름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전형적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다. 때로는 혼자서 속으로 하는 질문들 -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공동체는 소속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살 가치가 있는가?" - 이 기쁘고, 고통스럽고, 자유롭고, 혼란스러운 낮과 밤을 지배한다. 아직도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은 소속감, 특히 열정적인 행동, 비평적 사고, 그리고 실험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함께 나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추구한다. 공동체의 구조적 권위와 씨름하고 저주하는 동안, 그들은 도덕적, 지적, 카리스마적 혹은 인격적 권위를 갈망한다.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 이는 통과기관(betwixt - and - between)인데, 청소년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들은 - 이 조건들은 한 개인을 아동기와 성년기(13세에서 30세까지 이르는 기간) 사이의 중간상태(a state of limbo)로 내어 던진다 - 추구하는 신앙의 고된 시련을 공동체의 변방에 있는 자신의 존재감각과 연합시킨다. 이 때는 신앙이 사라지고 공동체의 육성이 힘을 잃는 시기이다. 그리고 또한 어느 날인가 성인으로 성숙된 시기이며 초기 아동기로 퇴행하기도 한다. 개인이나 공동체 양편에게 곤혹스러운 시기이므로, 이 불안과 폭풍우의 시기는 신앙이 그 자체의 충만한 차원들을 나타내기 이전에 와야 한다.

성숙한 신앙(mature Faith) 성인기의 신앙은 "성숙한 신앙"으로 불릴 수 있다. 성숙은 모든 성인들에게서 반드시 보이는 특성은 아닌데, 그 이유는 추구하는 신앙을 통과한 자들만이 자기 중심성(centered-ness)과 정체성의 특징들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양심이 지시할 때 그들이 속한 양육공동체에 대항할 힘을 갖고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정되어 있다. 타율적인 자아로서 시작하여 자율성(自律性)으로 옮아갔기 때문에, 신율적(神律的)인 자아 - 의식(意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아 - 가 출현한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여전히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갖고서 그 자신들을 내면 지향성과 타인에 대한 개방성을 가진 자들로 나타내지만, 그들 자신의 신앙 정체성은 분명하고 안정되어 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개인들은 수사적(rhetoric)인 것과 삶 사이의 불협화음을 제거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의지(意志)의 종교는 비록 성숙한 신앙이 마음과 정신 양자를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행위와 말을 믿는 신앙에 대한 자체의 증언을 가지고 마음과 정신의 종교를 지배한다. 믿음과 행위의 통합이 실현된다. 물론, 성숙한 신앙이 항상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숙한 신앙은 도달이나 결론상태로 이해되지 않는다. 새로운 깊이와 넓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초기의 신앙 양식이 지닌 욕구와 특성이 지속된다. 의심과 지적인 질문이 끝나지 않는다. 비록 이 욕구들이 자체를 다소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지만, 소속감의 욕구, 애정을 육성시키고자 하는 욕구, 혹은 권위의식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다.

사실, 이 다양한 신앙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숙한 신앙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이 욕구가 채워질 때까지 초기의 신앙 형태로 되돌아간다.

예를 들어, 추구하는 신앙으로 성장하기 위해 개인은 자아존중감(self-esteem)과 가치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계속 성장하며 자기 확신(self-confidence)을 갖고 살려는 희망 안에서 살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강점과 약점을 수용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들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아동기 기간에 사람들은, 희망이지만, 소속된 친밀감과 돌봄의 친교 속에서 말씀의 권위와 성례전적 공동체(Sacramental community)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는바, 이 공동체에는 말씀의 권위와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확신이 소속된 친밀감과 돌봄의 친교 속에 살아있다. 하나님과 일치감을 갖는 것,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 이해받고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공동생활과 의례를 통해 표현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물이다.

그러나 많은 청소년들의 경우, 심지어 교회 안에서 자란 청소년들에게도 고독, 자기증오, 가족갈등, 소외, 불안정, 마음의 폐쇄성, 교조적 권위, 그리고 애정이 사라진 환경들은 추구하는 신앙을 얻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친밀성 신앙을 육성하는 공동체를 원한다.

그러나 추구하는 신앙으로 이미 옮아간 사람들은 사회적 관심과 행동이 있는 공동체, 공동체의 신앙이 정의에 대한 관심으로 머리와 마음을 결합시키는 공동체, 비평적인 지적 판단이 고무받고 의심이 인정되며 실험이 허용되는 공동체를 원한다. 몇 몇 경우, 사람들은 이 욕구들을 총족시키기 위해 할 수 없이 교회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는 진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공동체의 이야기와 방식 안에서 안정되기 위해 애정이 넘치는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고 참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앙양식은 그 자체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초기의 양식 위에 세워진다. 그러므로 성장이 나타날 때 신앙은 더욱 복잡해진다. 과정은 느슨하고, 점진적이며, 발달과 성숙을 육성하는 환경과 연계된다. 삶은 정체된 것이 아니다. 우리 개개인은 새로운 상황에 대해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들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따른 균형(equilibrium)을 재확립할 방법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세대는 개인과 공동체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처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의식(儀式)과 의례(儀禮)들은 이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신앙단계들과 회심 : 친밀성 신앙의 발달은 특히 회심 전통을 가진 북아메리카 제국에서 의미있는 종교경험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신앙은, 나이든 아동들이나 성인들의 반응이든, 새로운 삶과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각성을 지닌 공동체 안으로 입사하도록 하는 요청에 대하여 종종 강렬하고 극적인 응답이 될 수 있다.

추구하는 신앙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회심은 질문과 의심의 맥락 안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회심들은 종종 조명(illuminations)으로 경험되는데, "보고 듣는" 새로운 방식에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 조명들은 극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나, 보다 전형적으로 신실한 예배자들이 지원하는 증언의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지적, 감정적 경험의 점진적 과정을 내포한다.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친밀성의 신앙이나 혹은 추구하는 신앙과 관련된 회심 경험들을 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한 번 또는 그 이상 추구하는 신앙으로부터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회심을 경험했다.

--------------통과의례(Transition Rites)---------------

통과의례(passage/transition rite) 혹은 삶의 위기로 알려진 의례의 범주가 있다. 공동체의 의례가 행하는 것처럼 월력을 따르는 대신, 이 의례는 우리들의 삶의 변화를 말해준다. 어떤 이들은 출생, 월경 그리고 죽음같은 생물학적 변화들에 응답한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 졸업 그리고 은퇴같은 사회적 변화에 응답한다. 그와 같은 변화된 역할이나 지위의 순간들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의례는 우리들을 도와서 이 변화들을 목적있게 한다. 그 변화들은 공동체 안에 질서를 재확립하며 변화의 가능성과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통과의례들은 세 가지 상태, 즉 분리, 과도기, 그리고 재통합으로 이뤄진다. 의식(儀式)은 기념축제나 의례로 시작하고 끝난다. 중간의례(the intermediate ritual)는 이 세 단계들을 하나의 단순한 예식(ceremony)으로 압축한다. 예를 들어, 결혼의식은 약혼식으로 시작하고 신혼여행 후에 끝난다. 결혼의례(the ritual of marriage)(이 세 단계를 결합시키는)는 혼례(wedding ceremony)이며, 분리된 한 쌍으로 시작하여 함께 들어와서 그들의 결혼의사를 공포하고, 약속을 하므로 남편과 아내로 공포된다. 결혼의례는 결혼한 부부로서 축복을 받고 공동체 안으로 통합되기 위해 함께 출발하므로써 끝난다.

삶의 위기의례(life-crisis rite)에 있어서 한 사람의 지위나 역할로부터의 분리가 실현되고 새로운 지위나 역할을 가지고서 공동체 안에 재통합되면, 중대한 과도기적인 기간이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한 개인이 중간상태(a state of being betwixt-and-between), 즉 림보기간(a period of limbo)이다. 일단 한 개인의 약혼이 선포되면, 옛 친구들은 신중해지며 이전 행동의 타당성을 점검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 약혼한 당사자들은 분리를 경험한다. 즉 그들은 결혼한 부부의 파티에 초청을 받거나 그들이 사귀어 온 홀로 있는 친구들의 파티에도 초청받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호교류는 감소되었고, 지난날의 모든 합당한 행위들이 일시 중지되었다. 이 과도기가 너무 짧거나 고된 시련의 역동성이 부족하다면, 결혼과 부부의 역할 지위는 덜 안정적이 되기 쉽다.

이 고된 시련이 주는 선물은 공동체의 경험이지만, 이 과도기의 가장 중요한 면은 "교육"이다. 이 과도기는 한 개인의 새로운 지위나 역할에 합당한 행동(사고, 감정, 행위)에 대하여 이해와 방식을 습득하는 시간이다. 전형적으로, 이 교육은 약혼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비형식적이다. 과거에는 한 여자의 어머니는 자기 딸과 다른 여자들을 위해 파티를 열 수 있었다. 여자들은 부엌기구들과 같은 선물들을 가져오고 요리법을 교환하기도 했다. 간혹 오늘날의 여성들은 부호(signals)와 혼란된 교육을 혼합시켰다. 즉 그들의 친구들 역시 남녀가 함께 참여하는 파티를 열어 약혼녀에게 앞치마와 요리법을 줄 수 있다.

삶의 위기의례에 관하여 한 가지 실례를 더 제시한다면, 한 때 "최후의 의례"(last rites)는 분리의식의 기능을 담당했다. 결혼식과 장례식 사이의 고된 중간적 기간동안, 한 개인의 친척과 친구들이 죽음을 위해 준비되었다. 그래서 장례는 새로운 상태, 즉 성도들의 공동체 안으로 통합되는 재출생을 의식화(意識化)하였다.

내가 영국의 한 목회지에서 목회사역을 할 때 처음으로 의례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추운 겨울에 사람들을 장사지낼 수 없었다. 한 겨울에 일어난 비극적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죽음보다 봄철에 일어난 동일한 종류의 비극적 죽음으로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장례식과 하관식이 동시에 집행되었을 때 이별에 대한 적응(family adjustment)이 더 빨랐다. 만일 비형식적 교육이나 준비가 마련된다면 이 중간상태(liminal state)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는 그때 깨달았을 것이다.

교육은 항상 통과의례의 중심적인 국면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지위와 역할을 위해 준비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비형식적 학습은 의당 그들이 처한 새로운 상황의 도움으로 성취한 기본지식, 태도 그리고 기술을 포함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지난날의 모든 학습을 재현할 필요가 있다거나 배우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그들이 처한 새로운 상황 아래서 삶을 위한 근본적인 학습이 필요하거나 타당하다는 말이다.

전형적으로 입사기간동안 비형식적 교육은 입사하는 자의 가정으로부터 먼 곳에서 일어난다. 비형식적 교육은 입사자가 그의 또는 그녀의 새로운 역할이나 지위를 위해 충분히 준비된 것을 확신하기에 필요한 기간동안 지속된다. 매우 중요한 것은 학습을 위해 사용된 교육방법은 본질상 "상징적"이다. 예를 들자면, 춤을 통하여 소년 소녀들은 상징적 성행위를 수행한다. 사실 소년 소녀들은 게임을 통하여 성인역할을 연습한다. 젊은이들은 퍼즐과 수수께끼를 통해 공동체의 이해에 대한 자기들의 지식을 검증받는다. 흥분된 무대, 노래, 춤 그리고 성스러운 이야기들 안에서 이뤄지는 연합된 삶을 통하여 젊은이들은 공동체 생활의 의미를 배운다.

그러므로 과도기는 교육적 요소를 구체화하는데, 그것은 형식적 교육 프로그램과 비교해서 비형식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상호교류를 통해 가장 잘 작동된다. 개개의 교육적 요소는 또한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방식과 욕구와 일치하여 그 자체의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신앙과 삶의 순례에 대한 신비가 있다. 그것은 결코 프로그램화되거나 조직될 수 없다. 특히 중요한 것은 통과의례는 교회의 정회원들의 신앙과 삶에 의존되어 있다.

---------------그리스도인 정체성 의례---------------

그리스도인은 만들어지지 태어나지 않는다. 신앙의 순례과정 동안 일어나는 정체성과 변화(transition)는 교회가 지닌 중심 문제이다. 옛 이스라엘에 속한 회원자격이 결코 자연이나 출생의 문제가 아니었듯이(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새 이스라엘에 속한 회원자격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례는 초대교회에서 그 사실을 기념한 것이었다. 즉, 세례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 안으로 이끌어 들이신 상징적, 성례전적 행동으로 이해되었다. 세례는 - 종교사(宗敎史)에서 남자나 여자들을 위한 동일한 입사식이 독특하였다 - 한 사람이 현존하는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단이었다.

부가적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사회에 남자와 여자를 위한 다른 입사식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남자를 위한 입사의식이 가장 성대했다는 사실을 살피겠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는 모습이 전혀 다르다. 남녀 공히 동일한 입사식인 세례를 공유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남녀가 동등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남자나 여자, 헬라인이나 유대인, 어른이나 아이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혁명적인 진술을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들의 공동생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 본질적인 확신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

세례 : 본질상 세례는 그리스도교 입사의 중심 의례이다. 세례는 하나님이 주역이신 성례이다. 세례에서 그리스도교 교회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은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기념한다.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응답을 하기 전에, 물리적 대상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활동하신다. 나중에 우리가 반대하고 항거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행동이나 우리들 자신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 우리는 말과 행동을 통해 자체의 신앙을 선포하는 전통을 가진 공동체 안에 통합된다. 이 하나님의 혁신적 행동이 실현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응답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회의 입사식을 위한 규범이 왜 성인 세례인가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양육받은 신실한 아동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이 관심의 결과는 아동세례(child baptism)이다.

성찬 :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 성만찬(The Eucharist 혹은 Holy Communion)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의식(儀式)이다. 주의 만찬은 세례에서 축하된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실감나게 한다. 세례는 한 개인을 교회의 완전한 회원으로 만들고 주의 식탁에서 성찬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가족식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므로 첫 성찬은 어린아이의 결단이며 어린 아동의 부모에 의해 준비된 이후 허락된다.

견신례 : 만일 청소년들의 신앙순례가 확인되고 격려된다면 초기 성년기에 있는 개인들은 견신례를 위해 준비될 수 있다. 견신례는 아마도 "회심"이나 변화(transformation)라는 특성이 나타나는 그리스도인 성숙의례(a rite of Christian maturity)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견신례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한 것을 축하하고 사역에 자신들을 헌신한다. 신앙순례가 지속되는 동안에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다. 출생시에 신앙순례를 시작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세례예식, 첫 성찬참여, 그리고 견신례는 신중하고도 긴(2∼3년) 준비기간에 따른 하나의 입사식으로 통합될 수 있다.

이것들은 예배와 교리문답사이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상(象)이다.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 있으나 새로운 통찰과 자극들이 교회의 교육 사역을 위해 제공되어 왔다.

요한 웨스터호프(John H. Westerhoff)

8. 예배와 교육에 대한 참고도서목록

Brown, Kathy, and Frank C. Sokol. Issues in the Christian Initiation

of Children: Catachesis and Liturgy. Chicago: Liturgy Training Publications, 1989.

Browning, Robert L. The Sacraments in Religious Education and

Liturgy: An Ecumenical Model. Birmingham, Ala: Religious Education Press, 1985.

Buono, Anthony M. Liturgy: Our School of Faith. New York: Alba

House, 1982.

Neville, Gwen Kennedy, and John H. Westerhoff. Learning

through Liturgy. NY: Seabury Press, 1978.

Ostdiek, Gilbert. Catechesis for Liturgy: A Program for Par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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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erhoff, John H. Learning and Liturgy through the Life Cycle.

NY: Seabury Press, 1980.

_________. A Pilgrim People: Learning through the Church Year`.

NY: Seabury Press, 1984.

Wilde, James A., ed., Before and After Baptism: The Work of

Teachers and Catechesis. Chicago: Liturgy Training Publications,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