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

예배와 환대(歡待)

 


회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예배의 관심은 하나님과 예배공동체의 욕구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세상을 지향한다. 예배 드리는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의 요구를 기억하므로써 세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구도자들(seekers)을 찾음으로써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상처입은 세상의 요구를 위해 사역하신다. 예배에서 교회는 기도로 그 요구를 하나님께 드리며, 환대(hospitality)와 선포(proclamation) 그리고 축제(celebration)를 통해 그 요구를 채워주고자 한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세상에서 사는 삶 사이에 있는 이 결속은 아마도 거의 무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종종 예배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된 차원이다. 이 결속을 무시하면 교회는 자신만을 위한 갇힌 존재가 되며 교회가 존재하는 바로 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이 결속에 대한 단순한 생각은 예배를 단순한 복음전도 형태(Evangelization)로 격하시킨다. 또한 교회의 기도, 찬양, 선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축하하는 일을 수적(數的)으로 큰 회중을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다음 장들은 독자들에게 큰 것을 좋아하는 이런 오류들을 피하도록 도전을 주고, 세상 안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성령으로 충만한 비전을 줄 것이다. 선택된 내용들은 모든 질문에 대해 완전한 해답이 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기된 질문들은 그들이 편승하고 있는 세상의 한 부분을 위해 통전적인 목회를 추구하는 그 어떤 교파, 회중, 그리고 예배집단들에게 풍부하고 도전적인 의제를 제공한다.

소홀히 여겨지고 있으나 예배의 중요한 상징은 예배를 위해 모이는 단순한 행위이다. 함께 모여드는 행위에서 교회는 자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공동체라고 증거한다. 중요한 것은, 예배 공동체(Worshiping Community)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낯선 이들은 항시 환영받는다.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낯선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면서 예배공동체는 그들을 위해 섬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을 증거한다. 이 사실은 예배를 위해 교회가 모일 때 제공하는 환대 사역은 그냥 틀에 박힌 형식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본질적인 행동임을 나타낸다. 이 장은 예배자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환대를 베풀 수 있는 많은 방법 가운데 몇 가지를 탐구할 것이다.



1. 예배와 환대(歡待)의 신학

예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적 표현이다. 교회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습을 제공한다. 교회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제공하는 환대사역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뤄지는 교제의 실제를 전달하며 낯선이들을 몸 안으로 환영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일 날 행하는 일을 갖고서 월요일을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가 주일에 실천하는 한 가지는 환대이다. 예전적 환대(liturgical hospitality)를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환대 자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하며 그런 뒤 예전이 행하는 바를 정확히 살필 수 있다.

환대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환영함으로써 공동의 선(善)을 진작시키기 위해 계획된 일련의 공식적이며 공적 행위들이다. 이 행위들은 우선 오랜 기간이나 혹은 지속적인 우정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행위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모호한 사건의 기간(the duration of the event in question)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이 행위들을 통해서이다.

물론 사람들이 먼저 교회에 오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의문을 가지고 줄곧 그들의 삶에서 상실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찾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공동체, 기도, 친교, 헌신 혹은 의무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말이든 간에 신적 존재(the Divine One)가 그들의 탐구의 대상이다. 우리가 서로 돕고 우리들 가운데 있는 낯선이들(새신자)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 환대하는 행위의 실천을 통해서이다.

이런 추구에서 실패한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아마 다른 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들은 거짓 신들을 찾을 것이다. 돈, 마약, 술, 혹은 섹스같은 찰나적인 것들이 탐구자들의 진공상태를 대신 채울 것이다. 짧은 기간동안, 탐구자들은 더 좋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순간적인 성취와 평안조차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서 만족은 시들고 탐색이 다시 시작되고 빈번히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들 것이다.

이런 현실을 직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물론 첫째로 우리는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매주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에게 과연 힘을 불어넣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누군가 예배모임에 참여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최후의 노력일 수도 있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코자 하는 마지막 시도일 수도 있다. 당신의 교구나 주간(週間)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런 사람에게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경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당연시 될 그 무엇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신앙과 존재의 살아있는 표현인가? 우리는 어떻게 탐구자들에게 우리들의 신앙을 "보여주고" 또 그것을 전달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지닌 신앙의 충분하고도 분명한 표현은 주님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든 몸이다. 최소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예배는 견고한 다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이르는 다리이다. 예배는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메워주는 다리이다. 예배는 약속된 땅, 천국향연, 아버지의 집으로 연결해 주는 다리이다.

--------------------예배의 기능--------------------

예배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그림을 제공하기 위하여 상호 작용하는 상징의 복합적인 체계로 이뤄진다. 사도 바울은 그것은 마치 어두운 유리잔을 통해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전체 예전(liturgy)은 상징의 사용에 의존되어 있다.

상징은 자체보다 더 큰 실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결혼반지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상징이다. 우리들의 사랑은 반지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반지는 우리들의 결혼을 말해주는 복합적인 실제(complex reality)의 한 부분이다. 결혼 반지는 우리들의 사랑을 증명해 주며 그 사랑을 지시한다.

상징화된 것이 더 복합적인 실제가 되면 될수록 상징은 더 복합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상징은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경쟁적이고 심지어는 모순적인 의미를 갖는다. 세례의 상징인 물을 생각해 보라. 물에서 비롯되는 얼마나 많은 상이한 경험들이 입사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 의해 거론되겠는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단 정지신호는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평평하고 문자적이다. 그것은 단 하나의 의미만 갖는다. 그것은 일단정지의 의도에 관해 그 어떤 의심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충분한 효과를 갖는다.

상징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상징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씨름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의 상징들을 효과 있게 하려고 애쓸 때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결과가 의미를 평평하게 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만찬을 위해 사용하는 빵을 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실제적인 빵은 부스러기를 남긴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회막 안에 저장될 수 있다. 빵을 찢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기 싫어한다.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옮겨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혀 복합적이지 않은 평평한 물을 준비하므로 가면을 씌워 향연의 복합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설명할 강력한 상징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손과 마음이 설명할 수 없는 분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한 가까운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서 우리는 많은 상징을 채용하고 그것들을 의례형태로 조직하여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제적인 표현을 한다. 우리는 상징을 주일날 드리는 예배에 사용함으로써 "당신은 무엇을 믿으며 왜 그것을 믿습니까?"라는 탐구자들의 질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주일은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환언하면, 주일 예배는 환대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왜 환대인가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는 낯선자들을 항상 환영하셨다. 그리스도는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벗은 자들을 입히셨다. 그리스도는 병든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 가셨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일치의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주일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지역교구에서 행하는 환대---------------

각 공동체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져야 할 비평적인 질문은 "우리는 환대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예"라고 답변할 수 있기 위해 교회공동체가 해야만 하는 세 가지 기본적인 것들이 있다. 처음 두 가지는 이미 논의하였다. 첫째,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가진 신앙의 복합성을 표현하는 강력하고도 풍성한 상징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성만찬(Eucharist)의 중심적인 상징들을 축소시키고 희석시키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 상징들의 사용을 통제하는 예전 구조(liturgical structure)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 이유는 구조 자체는 상징적이고 거룩하신 분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전에서 사용되는 환대의 형식적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회중가운데 특별한 회원들을 환대 사역자로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은 긍정적인 발전인 반면,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한 공동체가 정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자신의 집단적 책임을 회피하는 한, 주일 날 교회 문 앞에 안내자를 세워 인사를 나누는 환대사역은 하나의 어릿광대극이다. 만일 월요일에 우리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주일날 문 앞에서 하는 인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행하는 주일환대는 실제적이며 상징적이다. 우리는 교회 문을 들어서는 자들에게 진지한 인사를 보낸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인사는 또한 한 주간을 통하여 만나는 다른 낯선이들을 환대하는 헌신이다. 우리가 행하는 악수는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사회로 손을 내뻗치는 헌신이다. 우리들의 이웃을 발견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한 헌신의 식탁을 발견한다.

그런데 환대 사역자에게 부과하는 짐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지워주신 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혼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교회 문에서 인사하고 예배 순서지를 나눠주는 안내자들은 우리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환대적 통치에 관한 소식을 성령에 의해 전달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몸 이외의 것이 아니다.

닉 와그너(Nick Wagner)와 페기 로브린(Peggy Lovrien)

2. 예배공간과 환대

복음주의적 교회를 염두에 두고 개신교적 전망에서 기록된 다음의 기사는 예배를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이 어떻게 교회의 환대사역을 도울 것인가에 관한 몇 가지 도전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언젠가 윈스톤 처칠(Winston Churchill)은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사는 건물을 조형하고 건물은 우리를 조형한다고 말했다. 그가 한 언급은 웅대하고 고색창연한 국회의사당 건물을 세울 목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의 말은 교회와 교회건물에도 또한 적용된다. 일단 우리가 교회건물을 세우면, 우리는 거기에다 어느 범위의 지도력을 부여한다.

수세기 동안 교회건물은 예배공간에 집중되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교회건물 여러 곳은 이 강조를 반영한다: 앞 쪽을 바라보는 여러 줄의 회중석과 강대상을 갖춘 직사각형의 성소이다. 전체 건물은 하나님과 백성사이에 이뤄지는 대화로서의 예배개념을 모델화 한 것이다. 목회자와 강단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회중석과 예배자들은 백성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종종 대화의 개념조차 묵살된다. 그리고 유일한 강조는 독백적인 형태의 가르침에 있다. 성소는 교사의 강단 앞에 일직선상으로 늘어선 의자를 갖춘 구식(舊式)의 교실같다.

------------------------환대를 위한 계획수립-------------------

어떻게 회중은 환대를 제공하는 건물을 계획하는가? 환대하는 건축물은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방문자들은 주차시설이 부족한 교회에서는 환영받는 느낌을 좀처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장을 원하는 교회는 넉넉한 주차시설을 마련하되 특별히 방문객들을 위해 다섯 내지 여섯 대의 차량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교회 입구에 있는 눈에 띄는 독특한 표식은 예배자들에게 육아실, 화장실, 담임목사실, 그리고 성소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나르텍스(the narthex: 교회입구의 넓직한 홀)에는 방들이 많아야 하는데, 방문객들이 그 교회와 소속교파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센터가 되어야 한다.

육아실은 오늘날의 부모들이 기르는 자식들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야단법석이라는 사실을 교회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하도록 신중히 설계되어야 한다. 방과 방들은 깨끗해야 하고 부대시설이 넉넉해야 한다. 만일 가능하다면 육아실은 자체의 화장실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 화장실은 두 세 연령그룹이 사용할 수 있도록 분할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안내자가 방문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서 매주일 어린이들을 등록하는 것도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예배공간 그 자체는 밝아야 하는데 - 회중석이나 의자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돈되어야 한다. 결국 예배는 이중적인 대화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말할 뿐 아니라 피차간에 말한다. 회중 의자는 비교적 짧아야 한다. 긴 의자 한가운데 앉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다. 잘 훈련된 안내자들은 예배자들이 골고루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앞줄 의자와 강대상 사이의 공간이 그랜드 케년(the Grand Canyon)처럼 보여서는 안되며 플렛폼은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리만큼 많은 방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새로 짓는 교회들이 목회자와 백성들간의 강단 방벽을 허물기 위해 플렉시유리(plexiglass)강단 사용을 시작하였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노래와 말씀을 듣고 지도자의 말이 플렛폼 어디서든지 들릴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음향효과가 부적당한 곳에서는 청중들은, 만일 가능하다면, 보다 나은 음향시스템을 위해 투자해야할 것이다. 스크린 또한 훌륭한 투자이다. 영화를 보여준다던가 오에이취피(OHP)나 슬라이드를 사용해 찬양할 수 있다.

------------------------올바른 설비의 선택----------------------

교회 건축물은 더 이상 직사각형을 그리고 교실들을 교회의 복도나 지하에 설비하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들은 종종 자기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에 관한 긴 논의과정을 종종 경험한다. 건축위원회는 다른 교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견학하기 위해 곳곳을 순회한다.

새로운 교회 건축 경향을 검증하는데 시간을 소요하는 어떤 위원회는 몇 가지 흥미롭고 유익한 정보를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교회의 좌석배치는 부채꼴 모양의 성소를 만드는 경향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조는 친밀감을 증진시키고 확장성(expandability)을 제공해 주는 가치를 지닌다.

건축위원회가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놀라운 경향은 전통적 교회건물 형태에서 탈피하는 변화이다. 새로 짓는 많은 교회들은 상업 건물화 되어 간다. 건물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일부 회중들은 전통적인 학교 강단이나 체육관 대신 웨어하우스(warehouse: 회원권을 사용하므로 비교적 값싼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대형 잡화점; 역주) 공간을 세내어 빌려쓴다. 왜 그런가? 웨어하우스의 회합공간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건축물을 계획하거나 개조할 계획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최근의 이러한 경향 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회중의 기본 성격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한 교회 건물은 목회에 대해 갖고 있는 회중의 개념과 어우러져야 한다. 적은 상상력과 통찰력으로 세워진 건물은 회중예배에 영감을 부여하고 분위기 있는 능력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더크 하트(Dirk Hart)

3. 예배 안내자와 환대

종종 간과되나 극히 중요한 것은 예배 회중에게 끼치는 예배 안내자의 공헌이다. 안내자의 사역은 회중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살피는 일 뿐 아니라 기도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환대 사역에 따르는 예술성을 포함하여 특이한 형태와 미(美)를 제공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소속감을 고양하기 위해 초대받지만, 안내자들은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을 돌보는 의식을 창조하는 유일한 사역을 갖는다. 통상 안내자들은 예배자들이 성찬을 기념하기 위해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가면서 만나는 첫 예배 사역자들이다. "언제 우리가 집을 멀리 떠난 당신을 영접했나이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7-40)

축제 시작부터 끝까지 안내자들은 회중 가운데서 돌봄의 사역(a caring presence)을 계속한다. 회중의 한 통합적인 부분이 되는 안내자들은 교회건물의 주요 부분에 항상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예전 경험 전반에 걸쳐 성경봉독에 기울이는 주의, 찬송화답, 그리고 기도와 경외하는 태도를 통해 참여의 모델(models of participation)이 된다.

수년간 우리들의 교구는 예배 안내자들을 봉사 사역자(service ministers)로 인정해 왔다. 봉사는 지속적으로 모든 환대사역의 중대한 특징이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회중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위해 행할 뿐 아니라 모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시간을 갖는 특별한 "표지"(signs)이다. 환대 사역자들이 갖는 중요한 특질은 예전기도의 감각(a sense of liturgical prayer)인데, 이 감각은 목회자가 공동기도에 들어가도록 하용하고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하도록 격려한다.

이 사역이 갖는 두 번째 본질적인 특질은 은혜스러운 선물(the gift of graciousness)이다. 어떤 이들은 자발적인 접대 감각을 갖지만, 어떤이들에게는 이 선물이 간혹 잠들어 있어서 격려받을 필요가 있다. 수년간 안내를 담당했던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회중이 기대하는 바를 알 필요가 있다.

안내자들은 남성이나, 여성, 부모나 자녀, 가족, 십대, 장애자와 다른 인종문화를 대표하는 자일 수 있다. 웃음과 돌봄의 은사를 지닌 자라면 환대 사역에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어린이들 역시 회중을 탁월한 환대 경험으로 이끄는 역할을 발견한다. 갱신 시간 뿐 아니라 훈련프로그램은 그 어떤 다른 예전 사역을 위해서 그런 것처럼 환대 사역을 위해 중요하다. 그와 같은 훈련기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갖는다. 첫째, 주일 성경(sunday Scripture)에 대한 깊은 이해뿐만 아니라 예배신학에 대한 기본이해가 필수적이다.

둘째로, 어떤 역사적 전망은 매우 유익하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성전 문지기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열왕기하 22장은 이 사람들을 제물을 가지고 대제사장에게 보냄받은 자들로 말한다. 역대하 9장은 그들을 지파의 책임있는 자들과 높이 존경을 받는 자들로 내세운다.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권면한다. 안내자들은 회중의 특별한 움직임을 도울 때 확실히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 사도행전 6장에서, 공동체는 모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 위해 어떤 사람들을 구별한다. 제 1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유입됨으로써 몇 가지 새로운 직책이 마련되었다.

신학적-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차원을 초월하여, 환대 사역자들은 어떤 기대와 책임이 자기들의 몫임을 아는 것을 고맙게 여긴다. 그들은 일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래서 정규적인 회원이나 새신자들을 진실로 환영하며 지체 부자유하여 앞줄에 앉아있는 자들을 돕기 위해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낸다.

헌금 수거와 유연한 예배 흐름은 그들이 담당한 실제적 책임들 가운데 든다. 예배가 끝날 무렵, 은혜로운 웃음과 파송인사와 더불어 소책자가 그들에 의해 회중에게 전달된다. 안내자들의 책임이 예배에 앞서 잘 이뤄져야 하는 것처럼, 그 책임은 예배 후 교회 건물이 깨끗이 소제된 이후라야 끝난다.

환대의 예술성은 실로 교회의 모습을 만든다. 환대 사역자인 안내자들은 믿음이 충만한 여성이나 남성들인데, 그들의 태도는 기도로 충만한 예배(prayer-tilled worship)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자기들의 사역이 예술임을 발견하는 예배 안내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을 환영하는 중대한 기회를 갖는다.

진 악커멘(Jean Ackerman)

4. 평화의 전달과 환대

예배 동반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는 단순한 인사 제스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가 속한 교회의 심원한 모습을 그려낸다. 그 제스처는 다른 예배자에 대한 개개의 예배자의 헌신을 나타내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화해를 구현한다. 본 단원은 이 단순한 의례 제스처의 의미를 상술하고, 사려 깊은 예배자가 예전에서 어떻게 모든 행위에 접근할 수 있는지 그 실례를 제공한다.

예전이 제 2차 바티칸 회의에서 개혁되기 전,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거룩한 미사를 드리는 동안 서로간의 입맞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입맞춤을 사용하였다. 주교가 집전한 미사 동안에 그들은 입는 제의(祭衣)에 입맞춤을 하였다. 제단에도 입을 맞추었다. 책에도 입을 맞추었다. 향로에도 입을 맞추었다. 성반(聖盤)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성만찬 시간에 성찬을 받는 사람에게 빵을 전달하는 대주교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대상이 사람이 되었을 경우, 소위 구식 예전에서 있었던 "평화의 입맞춤"(kiss of peace)은 화해의 의례이기보다는 거부의 의례를 닮은 "밀어내는, 팔거리에 떨어진 제스처'(push-away, at-arms-length gesture)였다.

다행히도 오늘날 평화의 인사는 비교적 인간적인 형태로 회복이 되었다. 사람들은 눈, 웃음, 포옹 혹은 악수로 서로를 응시하고 뺨에 하는 입맞춤과 따뜻하고 환영하는 말을 교환한다. 확실히 예전에서 그 순간은 단정치 않다. 그리고 회중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므로써 역사하려는 약간 무분별한 예배자들이 항상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평화의 인사는 주일의 사람의 얼굴(sunday's human face)의 한 중요한 부분이 되어왔다.

만일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잠시 동안 단순한 관찰의 차원에서 의미의 차원으로 옮아간다면, 우리는 평화의 인사가 나타내는 바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 다소 어려움을 알게될 것이다. 평화의 인사는 단순히 예전에서 허용된 일종의 "포옹과 입맞춤"(huggy-bear-kiss-face)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친근감(neiborliness)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교리화의 입사는 (일부 비평가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함께 함"(togatherness)에 대한 중간계층의 의식화(儀式化, a ritualization of middle-class)이며 인가 받은 집단에 속한 회원자격"(membership in approved groups)인가? 평화의 인사는 단순히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먼저 가서 화해하라"(마5;23-24)는 복음명령에 응답하는 고대의 전통적 제스처이기 때문에 예전으로 회복되었는가?

평화의 인사가 의미하는 바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예전의례(liturgical ritual)에 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가브 훅(Gabe Huck)이 말한 대로 의례는 "삶의 재현"(the rehearsal of life), 소리와 제스처와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모든 예술을 유형화한 것이다. 의례는 삶을 재현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기분의 흐름이나 피상적인 감정보다는 "삶의 방식을 위한 훈련"(training for a Way of life)과 더 관계가 있다.

의례 몸짓인 평화의 인사는 "내가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가," 신앙공동체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관계한다. 평화의 인사는 우리를 천박한 연회에 가담시키지 않는다 - 더더욱 그것은 우리가 예배 속에 있거나 다른 사람들의 임재에 포함되어 있다는 "좋은 감정"으로 우리를 조종하지 않는다. 평화의 표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화해사역의 대리자로서 우리가 공유하는 의미(고후5:18)를 지시하는 의례 표지이다. 도리스 돈 넬레이(Doris Donnelley)는 감동적인 말을 주었다:

화해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꿈이다. 화해는 깨어진 관계의 회복, 우리가 지닌 깊은 내면의 상처의 치유,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이뤄지는 마음의 변화를 내포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분열된 자아와, 이웃과 그리고 하나님과 분열된 자아를 경험하는 소외와 친숙해지지 않는다면 화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꿈-------------------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꿈을 재현한다. 모든 개인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존재"(the greastest)로 동등하게 인정받는 사람들이 둘러앉는 식탁과 연결시키는 이 하나님의 꿈은 "지극히 적은 자"(the least)의 중요성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는다. 이 꿈은 예수님의 종교경험을 지배한 꿈이요, 그의 가르침을 뜨겁게 한 꿈이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범상한" 비전을 촉진했던 꿈이다. 이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 상호수용과 공유된 가치가 사람들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분하는 카테고리, 그래서 결국은 경쟁, 억압, 증오와 폭력으로 이끄는 경쟁적인 카테고리를 허물어뜨린다. 예수의 비전은 급진적으로 존재방식을 개조하므로 인간을 상호간에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되게 한다. 하나님은 충성과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경쟁적인 자아를 가지신 분이라는 관념을 예수는 파괴하셨다. 하나님은 오로지 한 사람의 이웃 안에서 그리고 이웃으로 알려지시는 분으로 제시하셨다.

그러한 견해의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다. 하나님은 설명될 수 있는 자아를 갖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수치와 죄책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 가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이며, 우리는 순수히 용서받은 우리들의 삶을 자유롭게 경험하고 축하할 수 있다. 여기서 용서는 빛을 취소하는 것이나 죄를 감면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giving forth), 즉 하나님의 자기헌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재 순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한다. 용서로서의 삶에 대한 경험은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아낌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힘과 에너지를 경험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우리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용서의 이 세상 안으로 서로를 환영한다. 우리는 치료받고 화해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꿈을 나누기 위해 피차에 초대한다.

하나님께서 꿈꾸는 세상은 우리들을 갈기갈기 찢는 전쟁무기와 장벽 혹은 쐐기가 없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은 곧 무시당하고 소홀히 취급받는 "약자들"을 위해 정의, 긍휼, 그리고 자선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이 된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떠밀려 나간자들을 강화시킬 때 경험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독단적인 삶으로 인하여 깨어지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선한 의지, 평화에 대한 의지가 된다.

다시 한 번 평화의 표지로서 서로에게 나누는 인사 의례 행위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서로에게 우리 각자가 의미하는 바를 실행하는 것이다.

----------------------------자발적인 사랑------------------------

예전에서 우리가 교환하는 평화의 상징에는 아직도 더 깊은 차원이 있다. 하나님의 꿈의 세계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타자의 요구에 민감하게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례표지(ritual sign)는 공허하고 한가로운 제스처가 아니다. 그것은 피차간에 신앙을 유지하자는 서약 - 능동적으로 그리고 성실히 - 서로 돌보는(to care) 서약이다. 이것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관심이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판에 박힌 듯 소홀히 취급되는 영역에서 더욱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개인적인 문제나 선택사항에 대하여 책임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 사실인 반면, 우리들의 마음과 운명은 하나님의 존재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퀘이커 신학자 더글라스 스티어(Douglas Steer)가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가 하는 기도가 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무한하신 돌봄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믿음으로, 진실로 타자를 돌보는 위험을 우리가 감수하도록 도전하는 "예민한 사랑의 형이상학"(metaphisic of vulnerable love)이 존재한다.

우리가 교환하는 평화의 인사는 서로를 위하여 우리 자신이 "거기에 있기"(being there)위한 헌신을 의미한다. 스티어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역에 스스럼없이 가담하는 영적 대가(지불)를 기꺼이 떠맡으려는 의지"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값비싼 은총의 일부이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마5:40-41). 그리스도인의 섭리(the Christian dispensation)상 우리가 행하는 돌봄은 말, 심지어 거룩한 예배기도에 국한 될 수 없다. 그것은 봉사에 있어서 육(肉), 피(血) 그리고 뼈까지도 수반한다.

스티어는 말한다:

이 사랑의 관련에 따른 육체적 대가없이...[우리의 돌봄은] 타자를 위해 물리적인 책임을 불가피하게 포함한다. 이런 돌봄은 방문하는 시간, 음식의 선물, 서적, 편지, 그리고 가끔은 여러 가지 물질적인 후원으로 이뤄질 수 있다. 이것들은 단순히 티켓과 함께 건네진다. 만일 당신이 충분히 돌본다면, 되돌아오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순수한 사랑의 요구에 우리의 눈을 열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의 언약을 갱신하고, 화해된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상 안으로 모든 사람을 환영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팔을 다른 사람에게 벌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중심에 놓여있는 역설적 진리를 재발견한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기꺼이 주고자 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포기할 때에 라야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단 미첼(Nathan Mitch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