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

예배와 전도

 


예배와 전도의 관계는 미국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숙고되어지고 있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증거를 강화하려는 시도들은 복음전도 활동(evangelistic outreach)과 예배에 새로운 접근 방식들을 도입하게 했다. 심할 나위없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와 같은 발전은 교회의 삶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인데, 특히 그것들이 신중한 성경연구에 뿌리를 둘 때 그렇다. 본 장은 예배와 전도의 중요한 관계의 성서적 신학적 근거를 개괄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이 두 가지 생동력 넘치는 사역의 중요한 관계를 논의하는 필요 불가결한 맥락을 제공한다


 

1. 예배와 교회의 선교

예배행위는 그 자체가 세상에 대한 한 증언이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만찬(the Eucharist)이나 주님의 만찬(Lord's Supper)인데,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이런 논의는 두 가지 극단을 저지한다: 한 편으로 예배와 선교의 관계에 대한 부정과 다른 한편으로 단순히 복음전도적 봉사(evangelistic service)로서의 예배의 개선이다. 다음의 글은 상세하나 이런 신학적 논쟁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의 통합성에 직접 비례하여 선교의 능력을 갖는다." 이 논제에서 스탠리 하우어바스(Stanley Hauerwas)는 예배(liturgy)와 선교는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지극히 포괄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 근거와 최후의 완성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분명한 증언이다.

선교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사람들을 회심으로 부르는 일, 교회에 입사시키는 부름을 포함한다. 그러나 부르심(소명), 회심, 입사는 그 자체가 선교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더 큰 교회의 선교,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언이 된다.

예전(liturgy)은 원래 헬라 국가사회의 협동적인 삶을 위한 시민들의 책임이행을 의미하였다. 교회의 맥락에서 해석되어 예전은 반복된 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세례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데, 이 예전을 통해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표현한다. 성만찬만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공동체가 행하는 합당한 주일 예전인데, 그 이유는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축하하는 것이며 또 미리 맛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만찬의 부재는 마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은 것처럼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전(前)종말론적 백성(pre-eschatological people of God)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만일 모여든 공동체는 성찬을 축하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교회가 될 수 없을 뿐더러 부름받은 목적대로 증언할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말론적 사건---------------

사도신경(the apostolic Scripture)에 나타난 궁극적인 고백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예수는 그리스도, 메시아이시다. 이 두 진술은 같은 사건을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메시아이다"는 고백이 신앙의 본질이다. 이 두 가지는 성격상 "종말론적"이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미래로 승천하시고, 미래의 능력으로 현존하신 종말론적인 메시아로 만났을 때, 그들은 미래를 다시 조명하고 과거를 재해석해야 했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려는 그의 주장이 사실로 옳았음을 의미했다. 박해에 의한 십자가상의 죽음은 그의 사역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 죽음은 그의 사역의 핵심적인 표현이었다. 이스라엘을 갱신하고 "잃은 양들"을 모으고 이방인들에게 문을 연 그의 선교는 사실 하나님의 선교였다. 그의 가르침은 신성모독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의 행한 표적은 곳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재한 것을 가리켰다. 십자가를 택한 것은 제자도의 길과 그 결과였다. 제자공동체가 부활 이후의 빛의 "아-하"(the "a-ha" of post-resurrection insight)로 예수 이야기를 재론했을 때 과거는 재해석되어야 했다.

그러나 더 급진적으로 제자들은 미래를 다시 보아야만 했다. 부활은 예수께서 뒤에 죽음을 갖고 계심을 의미했다.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주관할 수 없었다"(롬6:9, NRSV). 미래는 그 분에게 속한다. 그는 죽음에 의해 조건지어지지 않는 약속을 하실 수 있다. 죽음의 지배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는 최후의 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결과적인 고백으로 이끌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최후의 말을 가지신 모든 것을 의미한다면, 예수는 지금 하나님에 의해 교회가 의미하는 것을 정의하며 결정하신다. 예수와 "아바"(Abba)(그가 성취하신 선교)와 성령(종말론적 미래 위에 바친 "지불"[down-payment] 엡1:14)은 이제 최종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결정적인 무슨 일이 세상에 일어났다. 죽음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에 의존하고 있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었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세상이 아니다. 죽음이 아직도 최후의 말을 가진 것처럼 보일 때 그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모든 "옛 시대"의 능력은 죽음을 근거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다룰 수 있고 그것을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의 관점에서 능력을 평가한다. 우리가 자기방어, 자기확장, 혹은 자기증오에 속하고 있을 때는 언제나 우리는 죽음의 권세 아래 있고 "옛 시대" 아래서 쓰다.

자기방어, 자기확장, 자기증오를 유지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탈피해 살 때는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신뢰한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죽음의 권능을 통해 보는 것이며, 죽음의 권능이 이제는 해체되어 거기서 자유롭게 된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증언은 죽음이 더 이상 최후의 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에서 자유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교는 이스라엘을 갱신하여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승리 안에서 이스라엘의 기능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모임을 위한 초점이 되어야 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선교와 이방인을 위한 선교의 미래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종교적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죽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전적인 헌신이었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예수께서 종말론적 메시아였고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선지자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 경험을 해석한다. 그러나 요엘서 2장 28절은 말한다. "그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누가는 핵심있게 종말론적 공식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오는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라(행2:17-18)

선택받은 개인들에게가 아니라 모든 육체에 부어주는 성령의 선물은 메시야 시대의 표지이다.

바울은 만일 예수가 메시아였고 또 메시아이면, 만일 메시아시대가 진실로 도래했다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여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예수가 지금 "길", 토라(the Torah)라면, 예수께 속하기 위해 받는 세례는 토라(갈라디아서를 참조하라)와 "옛 시대"의 죽음의 권세(골로새서를 참조하라) 모두를 대치시킨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함께 하나가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했음(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참조하라)을 증언한다.

사도적 공동체(the apostolic communities)의 회중들을 위해 이것이 갖는 중요성이 이제 분명해진다. 공동의례의 발전은 재구성될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제자들은 줄곧 회당 생활에 참여하였고 또한 성전의례(聖殿儀禮)에도 참여하였다. 바울 역시 새로운 도시에 갈 때면 먼저 회당을 찾고 예루살렘성전에 대한 그의 헌신을 계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는 의례 - 메시아를 기념하는 식사(the messianic meal) -를 위해 가정에 모였다. 우리는 같은 구절에서 이 모습을 발견한다(행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분명히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들은 누가가 " 떡을 뗄"(the breaking of bread)이라고 부르는 의례에 의해 그리스도의 제자 신분이 확정되었는데, 이제 "떡을 뗀다"는 말은 성만찬을 위한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다. 식사는 메시아 시대의 특징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예수가 실로 메시아였다면, 그리고 만일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면, 그들은 메시아 향연 식탁에 참여하므로써 이 메시아적 사건에 참여하고 그것을 증언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이 드리는 예배는 성서 주석,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과 공동으로 회당에서 하는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의 가정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공동식사를 통해 예수에 의해 시작된 메시아 시대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제 1 세기 말엽, 예수의 제자들과 다른 유대인들 사이에 생긴 균열이 완전해졌다. 예수의 제자들은 더 이상 회당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에서 정규적으로 식사가 이뤄졌던 장소는 성서와 기도로 된 회당타입의 의례(a synagogue - type ritual)에 의해 채워지지 않았다.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2세기 중엽의 의례를 설명한다(변증Ⅰ, 67):

주일이라 부르는 날에는 도시에 살거나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다. 그런 뒤 사도들의 전기나 예언서들이 시간이 허락하는 한 긴 시간동안 낭독된다. 낭독자가 낭독을 마치면 이 고귀한 가르침대로 살라고 사회자는 권고한다. 그런 뒤 우리 모두는 일어나서 기도한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도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와 물이 운반된다. 그러면 사회자는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기도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아멘!"하고 크게 응답한다. 이 성찬이 분배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눈 후에, 집사들은 성찬을 결석한 사람들에게 가져간다.

이 단순하고 의례 구조와 행위 배후에는 예수는 종말론적 메시아라는 일관된 자기-이해가 놓여있다. 메시아 시대는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공동체의 선교는 일어난 사실과 그들이 고대하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메시아적 공동체는 메시아 연회에 의해 정체가 드러난다.

---------------메시아(종말론적) 연회인 성만찬----------------

유일하게 예수 제자들이 이룬 공동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의례로서의 성찬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는 이스라엘의 성서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한 기본 저작은 고프리 와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가 쓴 성만찬과 종말론(Eucharist and Eschatology, London: Epworth Press, 1971)이다. 이스라엘의 제의생활에서 행해진 식사의 역할을 추적하면서 라인라이트는 식사와 포로기의 예언자들, 신명기 전통에 선 이사야(Deutero-Isaiah), 그리고 에스겔에 나타난 하나님의 미래의 구원의 연결고리를 탐구한다. 이사야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主)은 옛 백성을 광야에서 먹이셨듯이(48:21) 사막을 거쳐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 그의 백성을 먹이실 것이다(49:9이하). 열방은 영원한 언약의 축복을 나누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올 것이다(55:1-13). 와인라이트는 후기 이사야의 묵시문학(the late isianic apocalypse)에 들어있는 구절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성만찬은 너무나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죽음의 폐지와 구원과 가쁨의 날의 맥락 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위한 미래의 향연을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만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려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6-8).

포로기 경험을 따라 메시아 기대와 관련된 식사 모티프(the meal motif)가 강화된다. 미래 시대는 풍요의 시대가 될 것이다.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신 그 하나님은 다시 자기 백성을 먹이실 것이다(바룩후서29:8). 와인라이트는 미드라쉬 라바(the Midrash Rabbah)를 인용한다: "처음 구원자(모세)가 만나를 내린 것처럼 뒤에 오시는 구원자(메시아)도 만나를 내리실 것이다." 강력한 종말론적 메시아 기대들이 예수시대의 유월절과 연결되었다. 에디오피아 사람 에녹(Enoch)에 의하면(62:13-16), "의인과 선택받은 자들이 그 날에 구원받을 것이며, 인자와 함께 그들은 먹고 영원히 눕고 일어날 것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식사가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그와 같은 중대한 역할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분명하다. 군중을 먹이신 사건은 사복음서가 지닌 예수의 수세(受洗)와 수난설화 이외의 유일한 사건이다(마.14:13-21; 막.6:32-44; 눅.9:10-17; 요.6:1-15; 군중을 먹이신 추가적인 사건이 마.15:32-39와 막.8:1-10에서 발견된다). 요한복음서에서 먹이신 사건은 분명한 메시아적 성찰을 위한 경우이다(요6:15-59). 예수의 활동의 중심은 죄인들과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는 식탁친교(table collegiality)이며(눅15:1-2), 그 뒤에 따르는 비유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가족에게로 회복시키는 향연으로 끝맺는다. 천국에 대한 예수의 비유는 식사 배경을 담고 있다(마22:1-14; 눅14:16-24).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메시아적 향연식탁에 참여하는 이방인의 종말론적 기대를 담고 있다(예를 들어, 마8:11). 십자가 처형 전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 식사에서, 예수는 떡과 잔을 그의 임박한 죽음의 관점에서 해석하신다. 그러나 한가지로 중요한 것은,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넘어 종말론적 완성을 보신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와 병행절).

사도행전에서 사도 공동체는 한 주간의 첫 날 모였고 (그들은 "제 8일"이라는 종말론적 명칭을 붙였다), 그들이 모였을 때는 그 모임은 "떡을 떼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부활에서 종말(eschaton)은 시작되었다. 이 식사에 참여하므로써 그들은 메시아에 의해 메시아적 공동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으로 규정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너희가 교회로서 모일 때"(고전11:18)라는 두드러진 서문을 가진 주님의 만찬(Lord's Supper)에 관한 글을 써보낸다. 집단이 모이므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교회로서 모인 회중의 의례는 종말론적 식사(the eschatological meal)였다. 그 뒤에 따르는 사도들에 대한 꾸중은 일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종말론적 식사에서 행하는 (혹은 행하지 않은) 일로 말미암아 교회로서,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내포하고 있다.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정규적이며 종말론적인 식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이 보인 자기-보호적 거절은 그들의 식사가 더 이상 "주의 만찬"이 아니었고, 그와 같이 왜곡된 식사를 위해 함께 모일 때에도 그들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님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차라리 집에 남아서 먹는 것이 낫다. 그들의 소위에 의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낮추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하였다. 자신을 헌신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아직까지도 사망의 권세에 사로 잡혀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한 번 전승을 재현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보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자기희생(self-offering)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그들이 메시아적 식사에 참여할 때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의 죽음을 전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상을 위한 예수의 몸으로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에 참여한다.

---------------------성만찬과 교회의 선교---------------------

교회는 결국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자신에 대한 사도적 이해를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가 자신을 종말론적 공동체로 이해하지 않을 때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소비자 경향(a consumer orientation)을 띄었다. 성만찬은 이제 더 이상 종말론적 식사가 아니라 최대의 이익을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소비상품이 되었다. 미합중국(U.S.A)이 경쟁적인 교파적인 분위기에서 소비경향은 극에 달했다. 주님의 만찬은 회중의 욕구에 기초하여 제공되었다. 그 결과는 개신교회와 바티칸 2차 회의 이전의 카톨릭교회에서 교회와 종말, 주일과 종말, 성만찬과 종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이해가 사라져 버렸다. 폰 알멘(J.J. von Allmen)의 통찰은 프로테스탄트교회가 매주일 성찬식을 갖지 않으므로써 주일을 그르친다는 것이다. 교회와 날(日)과 예배의 종말론적 성격이 사라졌을 때, 교회는 예배와 선교의 연관성을 상실했고, 그럼으로써 자연히 선교에 대한 건전한 이해도 상실했다.

교회의 예전의 통합성을 회복하는 것은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정체성 회복을 의미한다. 교회가 시행하는 예전의 통합성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가 행하는 올바른 선교(authentic mission)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 선교는 예수에게 근거를 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언이며 역사의 마지막에 완성될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에 의해, 종말론적 식탁에 의해, 예배에 대한 책임을 맡는 방식에 의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있는 "적개심의 분리 벽"(the dividing wall of nostility: 엡2:11-22)을 허물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성만찬을 위해 모인 공동체는 모든 인류의 종말론적 일치를 미리 내다본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갈3:28)에 대한 차별이나 압제에 대한 모든 증거는 교회의 증언을 손상시킨다.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에 대한 관심은 교회의 삶에 필요한 차원이다(고전1:10이하; 고전12:12이하; 엡4:1-6; 요17:20-26 등).

이 증언이 세상 안에 있는 공동체의 존재 자체의 기능이기 때문에, 예배(the liturgy)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축제(celebration)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임을 알기 때문에 모인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재현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데, 그 재현에 의해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창조한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봉사를 위해 자신들을 (자신들뿐 아니라 시간과 소유를) 제물로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인다. 그들은 메시아가 갖는 최후의 연회(the final banquet of Messiah)를 대망하는 종말론적 식사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모이며, 그러므로써 세상 안에서 전할 자신들의 증언을 준비한다. 예배를 위한 찬송가(resposories)와 공동서적들(public books)이 감당하는 기능중의 한 가지는 주일 예배에 대한 백성들의 소유권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종말론적 향연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든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 이해는 신약성경의 기록이 성만찬 축제를 주관하는 자들의 신분에 관하여는 왜 전적으로 무관심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비록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제사장들이 있었지만(행6:7), 그들은 예배모임에서 제사장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순회 예언자들(the itinerant prophets)이 장로-주교(presbyter-bishops)와 함께 예배집례자로서 활동했다는 2세기(Didache10:7)의 증거자료가 있다.

성찬 집례가 이제는 안수받은 성직자에게 담당되었다는 사실이 예배축하를 위한 백성들의 책임을 그럼으로써 교회의 선교에 대한 책임을 점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president로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시대에 예배회중을 인도하는 지도자(president)는 설교와 대감사(the Great Thanksgiving) 이 두 의례에 책임을 졌다.

만일 교회의 존재가 증언이라면, 안수받은 지도자는 모든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게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기초는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의 정체성에 너무나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공동체에서 권위는 미래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약속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교회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책임을 부여한다. 그것은 종말론적 선물로서의 성령의 의미에 대해 핵심적이다(성령은 미래에 부어진 "지불보증"[down payment]이다[엡1:14; 고후1:22]). 우리 시대에 교회생활의 모든 차원에 충분히 참여하는 여성의 참여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교회의 증언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표지 중 하나이다.

평신도에게 할당된 가장 중요한 기능은 기도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기도는 조종당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그 무엇이라도 얻어낼 기회를 마련하는 말이나 조건을 찾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를 메시아 공동체(the Messianic community)의 일원으로 확증해 주는 것이며, 그 정체성의 구체적 의미를 우리의 소유와 선교에 실천하는 장소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사용하는 의식(儀式, agenda)을 규명할 책임이 있다. 병든자들, 유족들, 이제 막 결혼할 자들, 그리고 목회적 봉사를 찾는 자들을 위한 기도는 이 모든 사역이 특수한 성직자들이 감당할 사역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모든 교회들, 국가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한 기도는 교회의 울타리를 초월하여 우리의 비전을 확대할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 회당과 타종교인들의 특수한 필요에 대한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의 교회일치적(우주적인) 성격과 씨름하게 할 것이다.

기도의 두 가지 면이 결코 소홀히 여겨질 수 없다.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복음이 우리의 간구,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을 만들고 심지어는 변화시킨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명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하나님나라의 대행자와 사역자가 된다.

실제적으로 공동체의 "사역"(business)은 백성들의 기도에서 표현될 것이다. 공동체가 하는 일 모두는 - 청지기직, 전도, 돌보는 일, 사회봉사, 교회연합운동, 교육 - 주일예배에 근거하고 실행된다. 예배와 선교의 관계를 위해 특히 중요한 것은 봉헌기도(the offertory prayer)이다. 평신도 자신들은 의자 위에 있기 때문에, 의자를 봉헌기도에 포함시켜야 한다. 세례를 통해 그들은 메시아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는 공동체 안에 편입되었다.

성만찬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사적인 tête à tête (head to head)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향연식탁에 앉은 종말론적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므로 우리는 자유하게 되어 모든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시다"(빌2:11)라고 고백하는 평화와 정의의 우주적 비전을 증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라"(Thanks be to God)는 선언과 함께 세상에 파종받는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구하는 것의 응답을 받는다. 그 이름으로 받는 행위는 그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교회는 자체의 예전적 통합성에 직접 비례하여 선교의 능력을 갖는다." 만일 교회의 정체성과 선교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는 성찬예전(the eucharistic liturgy)에 의해 결정된다면, 성찬예전에 관해 가르치고 그것을 준비하고 실행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교회의 선교를 섬기는 다른 사역에서 취한 시간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교회의 모든 사역과 선교에 헌신된 시간이다.

월터 보우만(Walter R. Bouman)

2. 예배와 전도의 관계

예배와 전도는 상대방이 없이는 결코 발전될 수 없는 서로간에 생동적으로 연결된 사역이다. 본 기사는 이 관계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설명하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성격을 규명하여 지역 교구에서 이 관계가 어떻게 계발될 수 있는지에 관한 몇 가지 제언을 제공할 것이다.

개신교에서 전도는 다양하리만큼 예배와 연관되어 왔고,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초청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목회자들이 하는 설교와 결합되어 실천되어 왔다. 복음전도(evangelism)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연결되어 있다.

선포가 일어나는 자리는 거리 모퉁이, 학교, 선술집 혹은 가정일 수 있다. 그러나 복음전도자들은 사람들을 예배공동체에 연합시키고 그들을 예배에 참여시키는 것을 목적과 목표로 삼는다. 그러한 맥락과 배경 안에서만 설교는 듣는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신학적인 고려------------------------

하나님의 본성. 교회의 공동예배와 교회의 증언은 공통적인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예배와 증언은 보내시는 분인 하나님의 본성에서 온다. 하나님은 항상 보내시는(reaching out)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충만으로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창조 그 자체는 하나님의 한 실례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든 창조물은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끊임없는 하나님의 욕구의 주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은 복음을 듣고 복음을 가진 자들은 이제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종됨(servanthood)의 소명에 관한 개념도 구약과 신약성경을 이 주제와 결합시킨다.

예언자들은 우리들의 증언을 세상 모든 끝으로 보내어 모든 민족들이 구원을 얻게 하시는 (사52:10; 55;5)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다. 이 보냄(outreach)은 특히 후기 예언자들에게서 지속되는 주제이다.

하나님의 이런 의도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기도(Christ's high-priestly prayer)에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예수는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세상으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보낸 것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기도하신다(요17:18,21). 이 상호 보냄은 후에 두 구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보냄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요20:21)고 말씀하신 때인 부활현현에서 세 번째로 반복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마치 웅변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엄위하신 권능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화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연합되었다. 이 높임의 결과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복음의 폭발적 증언이었다. 보내시는 하나님의 본성은 모든 열방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경배하므로 "하늘과 땅위에와 땅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빌2:10-11 NRSV).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빌1:21 NRSV)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은 항상 인간에게 다가 오시고(reaching out) 보내시는 하나님의 바로 그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보내시는 하나님은 예배의 초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증언과 선교의 원천이시다. 예배와 증언 모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교회를 보내지 않는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런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나서 성령을 보내셨고 지금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매 주일날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내신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받은 소명은 특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됨(servanthood)인 것을 강조하였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은 이 소명을 강조하였다. 그와 같은 맥락 안에서 예수는 그가 섬기려고 오셨음을 강조하셨다(즉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가서[reach out] 그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시기 위하여). 구약성경과 신약의 예수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교회의 소명도 섬기기 위해 찾아가서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궁극목적 : 개신교가 지닌 근본적인 신학적 확신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의 첫 질문에 대한 답변에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궁극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도 된다.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모든 인류의 궁극 목적이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있는 모든 자에게 전달하여 그들도 동일한 영광을 예배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증언과 선교이다. 복음전도는 예배에서 발생하며 예배는 복음전도의 최종적인 결과이다. 그 어느 것도 다른 것이 없이는 불구이다. 예배와 선교는 자체를 표현하면서 서로에 의해 성취된다.

예배는 증언이 복음전도를 통해 이루어지든지 사회에서 이뤄지는 봉사를 통한 것이든 간에 항상 증언의 서곡이다. 역으로 그와 같은 증언은 성서적으로 말해서 예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형식적 협동적 영광(the formal and Corporate glorification of God)의 준비요 새로운 서곡이다. 교회는 그 증언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기 위해 예배에서 증언으로 나아간다.

-----------------복음전도와 예배의 문제점들------------------

개인적인 것과 공동적인 것. 성경은 개인적인 것과 공동적인 것 사이의 현저한 균형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과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개인적인 헌신과 신앙이 공동적인 것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배경(context)을 제공해준다. 이 두 가지가 가장 강렬하게 만나는 자리는 공동예배이다. 개인은 몸의 예배(Worship of the body)안에서 가장 빈번히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또한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경험될 수 있으나, 일대일의 관계를 규범이나 법칙으로 삼는 것은 그릇된 성경해석이다.

예배를 주로 그리고 유일하게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그 무엇으로 정의를 내리는 개신교 경건주의에서 기독교의 한 분파가 발생했다. 그들의 견해는 예배는 개인적인 것, 내면적인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회심 역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다. 예배와 전도에서 하나님의 행위는 개인의 의식적 이해와 동일시된다.

개신교 내부에는 예배를 공동적인 것, 우리가 참여하는 교회의 행위로 정의하는 다른 부류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복음전도와 회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다. 초대는 그리스도에게로, 그리스도의 몸안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몸은 예배와 복음전도가 더 완전하고 통전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예배는 몸이 일상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곳이며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곳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가장 잘 경험되고, 거기서 한 개인은 모인 회중과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거기서 개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헌신을 이루게 된다.

회심과 양육센터인 예배. 예배는 교회의 "초세대적"(超世代的) 활동인 바, 예배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안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며 양육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안에서 양육을 받는다. 예배는 오랜 기간의 제자도(long-term discipleship)를 위한 배경이다. 예배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소명을 받고 새로운 헌신을 각오하여 더욱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배경이다. 예배에서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전도를 받는다. 예배에서 초대받은 자들(혹은 이방인)은 돌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력을 보고 거기에 들어갈 초대를 수용한다.

교회의 소명으로 이해된 증언(복음전도)은 우선 예배와 증언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형성과 완성에 관심한다. 회심과 개인의 구원은 그리스도안으로 편입된 변화의 산물로서 경험될 것이다.

예배와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이끌어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참여한 자들로 발견하게 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그들이 아무도 볼 수 없고 그리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만남(encounter)이다. 설교는 오로지 이차적으로 확신시키는 것, 일관성있는 논의를 제시하는 것,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리스도교 교리에 동의하게 하는 것, 그리고 주석적 문제를 푸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복음전도 역시 인간 자신이나 교회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춰야 한다.

제단소명과 식탁소명 : "제단소명"(alter call)은 미국인들이 쓰는 일부용어인데, 자유교회의 부흥운동에서 시작된 개신교 그리스도교의 한 현상(a Protestant Christian Phenomenon)이다. 미국 개신교의 종교문화의 한 부분 안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모든 복음전도 설교는 제단소명으로 끝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사람들은 제단에 대한 양자택일적 명칭은 식탁소명(Table Call)으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예배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가족식탁에 앉도록 초대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서로 서로 관계를 맺고 피차간 양육을 받는다.

식탁소명의 개념은 말씀과 성례전이 축하될 때 교회의 규칙적인 주일예배 안에 통합된다. 말씀이 낭독되고 선포되며 이에 응답하여 회중내에 있는 성숙한 신자와 새신자들은 헌신으로 초대된다. 이 헌신의 초대는 믿는자들의 몸의 한 부분인 떡과 잔에 참여하라는 초대이다.

식탁소명은 혁신적으로 공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의 가족의 맥락 안에 마련된 것이다. 주님의 식탁에로의 부르심은 비록 두 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공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제자도를 향한 부르심, 예배와 교회의 성례전적 삶에 대한 전적인 참여에의 부르심이며, 그러한 예배를 통해서 이 세상 안으로 전체 삶을 관련시키는 것이다.

제단소명은 극히 개인적이다. 그것은 개인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죄의 회개와 의식적으로 구원을 수용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비단 회중이 있거나 대중복음전도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해도 제단소명은 개인 자신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향한 부르심이다. 제단소명은 비록 수많은 대중전도집회 지도자들이 회심자를 지역 회중과 연결시키려 할지라도 종종 회중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제단소명은 교회생활의 사회적 차원 그리고 한 개인의 차원을 초월한 윤리적 요구에 대한 각성에서 멀어진다.

식탁소명은 윤리적 책임성뿐 아니라 교제를 향한 부르심이다. 신자들의 몸 안에서 한 개인은 교회의 친교 범위 내에서나 범위를 초월하여 사랑의 상호책임을 갖는다. 내 누이 동생이나 형제가 나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었듯이, 복음의 명령은 모든 이웃에게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랑을 증거할 책임을 내게 지운다.

높은 교육표준과 사역의 한계 : 미국 개신교 초기시대부터 회중들은 매우 적은 숫자의 목회자들의 문제와 복음전선에 보낼 목회자 부족현상 문제와 씨름하였다. 우선은 유럽의 모교단에서 온 자격이 인가된 목회자들이 "극소수"였다. 신학교들이 세워진 후에조차도 현존하는 교회들을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부족하였다. 목회사역을 위해 높은 교육표준을 강조한 교회들은 복음전도자를 복음전선에 보내는 일에 실패했다. 그러한 교파들은 설교와 복음전도 사역을 위한 인식적 표준을 조정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교육 표준에 대한 문제로 발생한 긴장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역사가 깊은 개신교교파교회가운데 일부는 계속해서 고전적인 신학적 훈련에 대한 강조가 더 있어야 한다고 믿는 반면, 다른 교파교회들은 성령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더 많은 관심이 목회자들과 복음전도자들이 필요로 하는 실제적인 기준 개발에 바쳐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음전도와 예배의 미래---------------------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전도와 예배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 왔고, 일부 관계된 역사와 신학을 더듬어왔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 교회의 예배와 복음전도를 강화할 수 있는 가능한 미래의 방향이나 강조점을 살펴볼 것이다.

우선 우리 교파에는 예배의 변화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복음전도 파송(evangelistic outreach)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강조점과 관심의 현저한 유사성이 있다.

예배갱신은 복음전도를 극대화하고 강조한다는 데에는 일치가 있다. 미래를 위한 단계들 가운데 하나는 몇 몇 교파의 새로운 예배와 예배자료를 포용하고 그것들과 충분히 친숙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초점은 지역회중의 삶과 예배 그리고 개인과 사회와 세상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증언활동을 통합시킬 것이다.

회중의 삶과 예배 : 회중의 삶 그 자체는 회중이란 장벽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증언을 위해서뿐 아니라 회중 안에서 이 시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을 전달하는 일, 그리고 특별한 회중에 속한 모든 회원들의 신앙육성을 위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다음의 질문들은 만일 예배가 지역 회중의 복음전도를 위한 효과적인 기초가 되려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관심들이다.

(1)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달하고 구체화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전능자에 대한 경외심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가? 성결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으로 이끄는가?

음악은 대부분의 회중들에게 초월의 매체이다. 우리는 교회를 노래하고 있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음악은 언어 이상의 차원으로, 황홀경으로 이끄는가? 우리는 찬송가를 최대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기대의 분위기를 전달하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날 기대를 갖고 오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이 기대는 회중의 삶 속에 스며들고 있는가? 신자들은 그들이 친구들을 교회에 초대할 때 그들을 그러한 만남 안에서 그들과 연합을 이루도록 초대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2) 우리는 하늘의 천군뿐 아니라 온 세상에 걸쳐 신자들과 더불어 예배를 위해 모인 신자들의 몸의 정체성을 제공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에는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는" 차원이 있는가? 우리는 세상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우리 자신들과 전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유용한 자료들을 이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선교 프로그램에 자원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선택의 문을 여는가? 사람들의 눈은 항상 교회와 세상 안에서 더 멀고 높은 지평을 향해 돌리어져 있는가?

(3)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가장 가능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성서의 증언을 공유하는가? 성경을 꾸준히 읽고 있으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성경은 현대적인 용어나 사건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비유로 화하고 있는가?

성경의 진리를 20세기 지성에 전달하는데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개발과 사용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적 교양에 대한 점진적인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4)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배자의 편에서 해야 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의 응답을 요구하는가? (혹은 아이디어, 입장 그리고 해석에 대한 지적 동의만을 요구하는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재능과 은사를 탐구할 때 그들 편의 다양한 응답을 허용하고 심지어 격려하는가?

(5)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수님의 기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의 연장으로서 사람들을 내어 보내는가? 예배자들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한 복음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며 그들을 통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가?

(6) 우리는 특수한 파송의미(outreach implication)를 가진 예배를 강조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주님의 기도는 최소한 교회의 파송에 대해 언급하는 세 가지 단락이 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단락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 교회안과 밖의 사람들에게 공히 알려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단락은 모든 세계와 그 세계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헌신된 사람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단락은 빵이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찬양드리는 행위에서 우리의 경배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의 찬양과 함께 이끌려 올림을 받는다. 우리들이 이 경배행위에 가담하도록 초대받는 것처럼 또한 그 초대를 다른이들에게도 확대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삶에 관한 공포(公布)는 지역 회중의 삶의 한계를 초월해야 한다. 우리들 회중의 친교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반면, 더 폭넓은 교회와 세상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책임과 축복은 그 무게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믿는 자들을 내어 보내는 파송행위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복을 받는다. 그들은 지금과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리라고 약속하시고 보내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송받는다.

사회와 세상을 향한 파송 : 선교와 전도에서 하는 파송과 사회봉사를 통한 파송사이에 놀랄만한 통일성이 있다. 교회자체의 회중적 영역을 초월하는 교회의 증언에 대한 놀라운 관심이 있다. 교회와 교회에 소속된 개별적 회원들은 증언과 사역과 고백, 변호, 평화창조, 화해 그리고 피조물을 돌보는 사역에 있어서 파송되어야 한다. 회중이 개인, 사회와 세상으로 나아갈 때 이 증언 활동에 동기와 힘을 부여하는 것은 회중의 예배생활(그리고 프로그램)이다.

지역교회 회중은 직접적으로 혹은 대표자들을 통하여 개인들에게 파송된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다른이들을 초대하여 그리스도의 주장을 생각하게 하고 그분의 약속을 수용하도록 보냄을 받고 또한 책임을 갖는다. "와서 보고 가서 전하라"는 것이 그리스도교회의 선교이다.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대답하셨다. 야곱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동일한 권고를 잘 사용하였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해석한 요한은 단순한 우정, 세속적 환대(hospitality)의 분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을 위해 "와서 보라"는 초청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기계적인 일을 와서 보라는 초청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예배하는 회중은 성령충만한 삶을 보여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

개인들에게 나아가는 파송은 위임될 수도 있다. 우리는 파송받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선교사라 부른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복음전도자라고 불리는데, 그들은 다른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예배로 이끌어 말씀을 듣게 하고 성례를 받게 하고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로 보냄을 받게 한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글을 써 보낸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전도자가 되는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설득한다(엡4:11). 지역 회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로 파송하기 위해 위임자들을 세우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증언과 파송의 과제가 복음의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 이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시작했던 기본적인 신학적 확신으로 되돌아간다. 복음전도는 복음전도의 대상에 의해서 보다는 출처와 기원에 의해 더욱 올바로 정의된다. 하나님의 본성 혹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본성은 예배와 복음전도를 함께 정의한다. 그리고 복음전도와 예배 모두는 신앙을 공유한 공동체인 회중 안에서 타당한 위치를 갖는다. 예배와 복음전도는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며, 하나님의 자기계시, 보내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자체의 형태와 표현을 취한다. 복음전도와 예배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사람들과 사회질서를 통치하시는 새하늘과 새 땅에 관심을 둔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가입시켜 그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을 알고 예배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모든 만물을 그것들이 존재하는 참된 목적,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아르로 두바(Arlo Duba)

3. 19세기 부흥운동 때의 예배와 전도

미국에서 19세기 부흥운동은 예배와 복음전도의 관계를 형성했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심지어는 부흥운동과 전통적으로 관련이 없는 예배전통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관계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그것이 미친 최근의 영향을 인식하고 비평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미국 개신교의 초기역사를 통틀어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은 부흥운동의 한 부분이 되었다. 경험적인 종교와 회심에 대한 강조는 19세기의 대각성(the Great Awakening)과 1801년의 케인 리지 모임(the Cane Ridge Meeting)에서 절정에 달한 19세기의 서구부흥운동(the Western Revivals)을 포함하여 몇 단계를 거쳤다.

---------------복음전도에 대한 장로교회의 접근--------------

19세기 중엽까지 미국의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미국에 온 장로교의 토대 안에서 일어났다. 개혁초기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들은 매년마다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 하루 동안의 사건을 위해 사람들은 성례전의 의미에 대해 교육받고 교회와의 화해된 관계로 되돌아가는 몇 날 동안의 준비기간을 앞서 가졌다. 공동체의 내부와 주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적극적인 참여자들이었다. 이러한 성례전 시즌의 배경에는 극도로 유명하나 금지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몸의 축제(feast of Corpus Christi)와 또한 성만찬을 기념하는 공식축제가 있었다(참조: Leigh Eric Schmidt, Holy Fairs: Scottish Communions and American Revivals in the Early Modern Period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성만찬 예전(the Communion liturgy)이 진행되는 동안 주님의 만찬을 위해 사람들이 식탁에 앉는 것이 장로교회의 관습이었다. 큰 군중이 참여했을 때는 종종 저녁시간까지 계속 진행되므로 중심적인 성례행위가 성공적으로 되기 위하여 식탁은 교회건물 내에 배치되었다. 가끔은 수천 명에 달하는 전체 회중, 성찬 참여자들은 하루 종일 설교가 계속되는 바깥에 남아 있곤 했다. 보름 가까이 되는 주일에 예배를 계획하는 것은 이점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편리한 시간에 예배를 폐하고 다음 주일에 계속했다.

-------------------------미국을 향한 이동-----------------------

년간 성례전 시즌의 전통이 미국에 건너와서는 동부 정착지로부터 산을 넘어 오하이오 계곡(the Ohio Valley)으로 확산되었다. 요셉 스미스(Joseph Smith)는 엘리게이니 산맥(Alleghenies) 서쪽에서 시작된 장로교회의 시초에 대하여 낭만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정상적인 관습은 목회자가 그가 맡고 있는 두 세 교회 회중들에게 일년에 한 차례씩 성만찬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한 교회의 회중들은 성찬주일에 이웃 교회에 갈 수 있어서, 자연히 회중의 숫자가 커지고 의사소통의 빈도도 늘게 되었다. 목요일은 준비하는 날이었는데 설교와 적극적인 화해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주일 축제 그 자체는 통상 교회 인근의 무덤에서 이루어졌는데,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마련해 주었다. 텐트로 불리는 나무로 덮인 플렛폼(platform)을 지었는데 6-8피트의 넓이와 10-12피트의 길이 그리고 약 4피트 높이의 규격이었다. 이 텐트 정면의 공간은 성만찬 식탁을 위해 확보되어 있었고 식탁은 자른 통나무로 그리고 그 주위에는 널판자나 통나무 의자가 둘러 있었다. 이 식탁 한가운데에는 성찬요소(the Communion element: 빵과 포도주)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성찬축제가 거행되었다. 성찬주일에 그 식탁은 "큰 성찬식탁에 사용하는 눈처럼 흰 린네르(아마포)로 덮여졌고, 함께 식탁 위에 마련된 성스런 상징인 용기(用器)들(the vessels of the sacred symbols)은 흰 냅킨으로 덮여졌다"(Joseph Smith, Old Redstone: Historical Sketches of Western Presbyterian [Philadelphia; 1854], 154.).

스미스는 모든 회중이 앉는 자리에 대해 설명한다. 텐트 앞에는 긴 의자가 펼쳐져 있고 이 모든 의자들은 정면 텐트를 향해 있다. 스미스가 제공하는 청사진은 이 모든 사안(事案)들이 지극히 의례적(儀禮的)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빈틈없이 통제된 환경과 빈틈없이 통제된 일련의 활동은 그들의 후기 역사 전체에 걸쳐 켐프모임(the camp meetings)의 특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후기의 연구를 통해 알게 된다(참조. Dickson Bruce, They All Cried Hallelujah: Plan-Folk Camp-Meeting Religion, 1800-1845 [knoxville: University of Tennessee Press, 1974]).

예배는 회중이 기립하고 텐트 안에 있는 예배인도자 목사가 기도를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회중들은 시편을 노래했다. 인도자가 또 다른 기도를 하면 회중들은 다른 시편을 노래했다. 그런 뒤 설교가 뒤따랐다. 이런 예배준비에 뒤이어 성만찬은 예배자들에게 제공되었다.

티넌트 가족(the Tennent Family)이 지도했던 부흥운동처럼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일어났던 초기의 부흥운동들은 형태가 유사했고, 그들이 거행했던 성찬절기(sacramental seasons)가운데 최소한 한 절기의 설교는 현존하고 있다. 켄터키 부흥운동(the Kentucky Revival)이 예외적인 것은 짧은 기간동안 이 성례전 행사가 성령세례를 위한 절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조차도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초기 부흥운동에서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큰 부흥운동은 1642년 캄버스랑(Cambuslang)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케인 리지(Cane Ridge)에서 있게 될 부흥운동에서처럼, 이 부흥운동에는 거의 30.000명이 참여했고 놀라운 영적 체험이 일어났던 것이다.

---제임스 멕그레디(James McGready)와 켐프운동(Camp Meetings)----

이 카리스마적인 현상에 대한 켄터키 각색(the Kentucky version)이 서부 켄터키(southern Kentucky)와 북테네시에서 장로교 신자인 제임스 멕그레디의 목회사역으로 교회들에서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성례전 절기에서 있었던 핵심 단계들이 그들의 방식에서 되풀이되었고, 사람들의 행동은 성례가 매듭되기까지 신중하고 일상적이었다. 그 후 저녁에는 감사예배(Thanksgiving service)가 뒤따랐다. 지금쯤이면 수일간에 가졌던 강한 교육과 권면으로 축적된 회중들의 정서적 에너지가 최고도의 압력으로 압축된다. 필요한 모든 것은 누군가가 그 힘이 폭발되기 위해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최초의 멕그레디의 켐프모임에서 한 감리교회 방문설교자는 장로교 신자 그 누구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일을 행하였다. 군중가운데 임한 능력을 감지하면서 그는 메시지를 외쳤다. 그리고 그 밤은 두려움의 부르짖음과 기쁨의 환희로 충만해졌다. 그 다음 날 폐회하기전 바로 이 시간부터 사람들은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이 극적으로 표현한 바로 그 구원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경험했을 때 성찬(the Eucharist) 그 자체는 잊혀졌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들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성만찬(the Eucharist)이 제공한 구원을 적용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때 참여했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젊은 바톤 스톤(Barton W. Stone)이 북켄터키에 있는 자신의 장로교회로 돌아갔다. 그해 8월 그는 케인리지 성례절기(the Cane Ridge Sacramental Season)를 주도하였다. 성만찬 후의 각성(the Post-eucharistic awakening)이 폭발적이면 폭발적일수록 더 완벽한 성례전 축제가 눈에 띄일 정도로 거행되었다. 진동하는 죄인들에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보면서, 빵과 포도주안에서 세상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능력있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을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이 부흥운동적인 주님의 만찬축제 기간에 행해진 설교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한다. 또한 성찬기도문에 대해서도 그렇다. 몇 가지 설교, 특히 멕그레디 자신이 준비한 설교 몇 편은 남아 있다. 그의 성찬신학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그의 설교에서 드러나듯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멕그레디는 성찬식탁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뜻은 성만찬(Eucharist)안에는 하나님의 충만하심(the fullness of Deity)과 만나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만남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행위설교"(action sermon)에서 하나님과 믿는 영혼이 대화하는 모든 자리는 숭엄하고 두렵다. 그러나 만찬성례(the sacrament of the supper)가 가장 효력있는 하늘의 제도일 때,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최상의 길일 때, 그 안에서 신자들이 복되신 예수님과 긴밀히 대화하는 것이 허용될 때, 우리는 그 행사에 합당할 수 있다"(McGready, Posthumous Works, ed. James Smith [Louisville: W. Worsley, 1831], 175).

멕그레디는 언약과 훈련을 규범으로 살고 있는 앵글로 - 미국전통(Anglo-American tradition)의 중심에 서 있다. 성만찬(the Eucharist)은 개인생활에서 이뤄지는 교회의 도덕훈련의 실제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일치되는 가장 강한 깨달음을 주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한다. 멕그레디의 체계에서 강조된 훈련개념(sense of discipline)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더 강도높은 체험을 위한 촉매(the catalyst)가 되어왔던 것 같다.

멕 그레디에게서 그리고 또한 바톤 W. 스톤에게서 우리는 성찬임재(eucharistic presence)에 관한 전통적인 카톨릭과 성공회의 개념을 볼 수 없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칼빈의 교리의 핵심 주제 역시 사라졌으나, 그들의 자리에는 이 모든 성찬신학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생생한 성찬적 삶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eucharistic life)이 있다.

--------------------성례전과 부흥운동의 결별------------------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성례전과 부흥적 종교는 결별되고 말았다. 19세기 말엽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알렉산더 할데인(James Alexander Haldane), 로버트 할데인(Robery Halane), 그리고 그리빌 에윙(Greville Ewing)의 지도아래 이와 유사한 분리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들이 주창한 "새로운 방식"(new measure)의 복음전도에는 안수받은 성직자만에 의해서가 아닌 평신도에 의한 순회설교가 포함되었고, 군중들이 모여들어서 복음적인 설교를 들을 수 있는 큰 장막을 도시 도시마다 세우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 설교가들은 성서적인 기독교를 재설립하는 일에 헌신되었는데, 여기에는 물 속에 담그는 세례와 빈번한 주님의 만찬의 기념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성례행사의 발전과 열정에는 다양성이 있었다.

미국에 건너온 여러 장로교도들 세대가 초기 스코틀랜드교회의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지만, 새로운 이민 물결은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운동의 영향 속에 이뤄졌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이주민 가운데 젊은 알렉산더 캠프벨(Alexander Campbell)이 있었던 사실인데, 그는 곧장 그의 부친이 시작했던 운동을 떠맡았다. 켐프벨 운동이 시작된 후 20년 이내에, 그 운동은 바톤 스톤(Barton W. Stone)이 시작했던 초기 운동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흡수했다. 알렉산더 켐프벨이 성례시즌에 강조점을 둔 초기의 스코틀랜드 전통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그가 새로운 운동지도자들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초기에 스톤운동은 옛날 방식을 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어간에 대부분의 스톤 설교자들과 회중들은 그것을 포기하였다. 켐프벨운동과 융합하는데 그들이 지불한 대가는 성만찬과 부흥운동의 연결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켐프벨과 그가 이끈 새 운동(the New Formation)은 성찬 중심적(eucharistic)이었으나, 그들은 년간 성례시즌보다는 "매주 주의 성찬"(every Lord's Day Lord's Supper)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로교에서 보편적이었던 부흥운동적 배경에서 끌어들인 성만찬 거행을 정규화 하였다.

성례시즌에서 중심인물이었던 장로교도들은 곧 성찬 중심적 경건(eucharistic Piety)과 켐프모임의 영적 체험(camp meeting spiritual exercise)사이의 긴장을 인식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켐프모임에서 나타났던 종류의 종교체험을 금지하기 위해 그들이 행하는 성찬 형태를 개정하려고 했다.

이와 동일한 발전의 다른 한 면은 감리교도들의 참여였다. 감리교도들은 성례시즌을 켐프모임으로 전화시키는데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켐프모임 형식(camp meeting format)을 보존한 주역도 되었다. 종종 년간 네 차례 혹은 년간 종교회의가 켐프모임 형식 안에서 계획되어 졌는데 이때는 주의 만찬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감리교도들은 주말의 성례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신앙부흥 경험(the revivalistic experience)에 더 관심을 가졌다.

-----------------성만찬과 회심의 관계의 중요성---------------

고려되어야 할 기본문제는 성만찬과 회심사이의 관계의 중요성이다. 부흥은 설교를 듣기 위해 대중이 함께 모인 사실의 결과였는가? 아니면 부흥은 군중이 주님의 만찬을 축하하기 위해 함께 모인 사실의 직접적인 결과였는가?

혹자는 성찬이 회심을 유도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미국 기독교 역사상 오랜 기간동안 성찬이 회개시키는 성례(a converting ordinance)로 간주되었던 까닭이다. 18세기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서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와 인크리스 마터(Increase Mather)사이에 벌어진 길고도 강렬한 논쟁은 이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마터는 주님의 몸을 분별한 사람들만이 - (이미 구원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아무런 위험없이 성찬 테이블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정통주의 청교도 교리(Orthodox Puritan doctrine)를 대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토다드는 성찬의 본질은 복음적이며 성찬은 회심으로 이끌기 위해 제공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이며 교회의 행동강령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일 이 사람들이 회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였다. 그래서 이따금씩 스토다드의 사역에서 이 회심 경험이 일어났다.

성례전적 배경은 회심의 가능성에 강력하게 기여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개혁전통 안에 있는 설교자들은 죄인들의 회심에 따른 수단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하였다. 이 수단들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것은 율법의 위협과 복음에서 온 확실한 결단을 강조한 설교였다. 성례절기기간의 설교는 특별한 투명성을 갖고 복음의 중심인 예수님의 죽음과 구원사역에 초점을 두었다.

이 설교가 특히 통렬하고 힘이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희생과 피흘림,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자비를 강조하였고 구원받는 일의 중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 설교 후에 성례전(the eucharistic celebration)이 뒤따랐는데, 이 예전 안에 설교 메시지가 강력한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매우 분명한 주석과 강력하고도 정적(情的)인 예배형식의 결합이 회심 가능성을 강화하였다.

이 성찬과 회심의 결합은 신적 임재의 외형적인 표지로 부각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제기된 종교적 물음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가? 였다. 전통적인 답변은 성만찬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하며, 빵과 포도주가 하나님 임재의 구체적 표지라는 것이다. 이 물질적인 요소들을 묵상하므로써 우리는 십자가 처형의 임재(the presence of the Crucifixion)와 그리스도의 수난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건들로 다시 돌아간다.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그 삶에 참여한다. 우리들의 감각은 빵과 포도주를 계속 경험하지만, 우리들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참된 연합을 경험한다.

멕그레디의 부흥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켄터키의 그의 교구 신자들 사이에서 구체적인 경험의 문제가 중요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칼빈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줄곧 지속된 질문이 남아있다. 과연 내가 구원받은 자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성례전의 객관적인 능력을 믿는 자들 가운데 대답은 항상 가치있는 방법으로 받는 세례와 성찬을 받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방법이었다. 부흥운동이 끝난 후 스톤운동(the Stone movement)의 대표자들은 그들이 이미 세례받았기 때문에 영적 체험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성례전주의자들(the sacramentalists)의 정신구조에 대한 명확한 암시가 있다.

그러나 켐프모임의 영향은 세례와 성만찬의 객관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적 임재의 외면적 표지를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경험으로 대체시키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 밖에서 임하는 어떤 능력이 자신들을 통제하고 움직여서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할 때 구원받은 것을 알려고 하였다. 나는 멕그레디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의도했는지를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자기 교구 신자들에게 주었던 최종적인 해답은 다음과 같다: 만일 성령이 당신을 사로잡고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고 당신의 정서생활을 전적으로 변혁시킨다면, 당신은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 것이다. 이 해답은 분명히 미국 개신교의 후기 발전에 선구자가 되었는데, 미국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영적 체험은 중생(重生)에 대한 결정적 증거이다.

미국 종교상 있었던 이 에피소드가 지닌 중요성의 또 다른 면은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으로 초점이 옮겨진 것이다. 고전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충분히 계시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임재를 충분하고도 완전한 방법으로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위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충분하고도 완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은 성령을 미래의 어느 날 하늘에서 받을 유업의 보증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더 계시지 않는 기간동안 위로자로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실재를 계속 나타내신다. 명백히 고전적인 본문 안에 들어 있는 성찬은 이 견해를 고수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속적인 능력인 이유는 예배자들을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예수와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사이의 연합의 완전성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instrumentality)이다.

켐프운동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부차적인 요인이 되었고 성령에 소유당하는 것이 지배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때 이후부터, 최소한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교회들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는 주요 수단은 말씀을 직면하는 자들의 심리적인 기질을 변화시키는 성령이다.

케이스 왓킨스(Keith Watkins)

4. 예배를 통한 복음전도의 세 모델

하나님-임재복음전도(Manifest-presence Evangelism), 구도자 복음전도(Seeker-service evangelism), 그리고 예전적 복음전도(liturgical Evangelism)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믿으며,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인도받는 세 가지 길이다. 다음의 글은 이 세 가지 모델을 설명할 것이다.

러시아 핵심 연대기(the Russian Primary Chronicle)안에 든 한 이야기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러시아에 당도했는가를 말한다. 이 진실된 이야기에 의하면, 키에브(Kiev)의 왕자 블라디미르(Vladimir)는 그의 부하 몇 사람을 "참된 종교"를 찾아 보내었다.

먼저 그들은 볼가의 모슬렘 불가리아인들(the Moslem Bulgars of the Volga)에게 갔으나 "그 어떤 기쁨도 발견하지 못하고" 오로지 "비통함과 큰 냄새"만 발견했다는 보고를 가지고 되돌아 왔다.

그 다음 그들은 독일과 로마에 갔는데, 거기서 그들은 좀 더 만족할 만 하나 여전히 힘없는 예배를 발견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여행하여 거룩한 지혜교회(the church of the Holy Wisdom)를 방문하고 바로 거기에서 그들이 찾던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집에 돌아와 블라디미르에게 보고하였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하늘과 땅 그 어디에도 그와 같은 장엄함이나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신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아는 바로는, 하나님이 거기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고 그들이 하는 봉사는 그 외 다른 모든 곳에 드리는 예배를 능가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Timody Ware, The Orthodox Church [Harmonsworth, U.K.I Penguin, 1964], 269).

-------------------------예배를 통한 전도-----------------------

이 탐구자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경험했던 것은 예배를 통한 복음전도(evangelism through Worship)는 그들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믿게 했던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그와 같은 복음전도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이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줄 아는가?" 우리가 예배를 준비할 때, 모이는 자들을 복음화할 예배의 네 가지 특징이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첫째로, 우리는 예배자체가 복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교실 결단이나 필요를 채워주는 정신분석적 침소를 위해 설교하는 복음전도적 예배(evangelistic service)가 아니다. 참된 예배는 이 모든 것을 달성할 수 있는 반면에 건전한 성경적 예배(authentic biblical worship)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는 것인데, 이 역사적 행위를 통하여 악의 권세가 보좌에서 박탈당하고 궁극적으로 파멸할 것이라는 인식을 갖는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예배는 공동체에서부터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그리스도 사건을 공적(公的)으로 기념하는 것은 결코 개인주의적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에클레시아(ekklesia), "사건의 사람들"(people of the event)인 사람들의 교제를 존재하게 하신다. 사건의 사람들로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사회적 관계구조를 낳는 공통적인 경험을 공유한다. 우리는 사랑, 긍휼, 우정, 헌신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의 통전적인 관계(authentic relations)안에서 살 때 새로운 창조의 실재를 구현한다. 그와 같은 공동체는 잠재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막중한 힘을 갖는다.

셋째로, 우리는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는 예배는 복음전도가 하나의 과정인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순간적인 회심들은 일어난다. 그러나 너무나도 빈번히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나는 회심과 뒤따르는 성장은 발달과 성장의 여러 단계를 포함하는 여정(旅程)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참으로 기념하는 건전한 신앙 공동체의 예배는 전 회중이 지속적으로 복음화될 배경과 추진력을 제공한다.

끝으로,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예배는 복음전도의 복합성(complexity)을 인식한다. 복음은 우리를 전체 백성으로 말하기 때문에, 복음전도는 사람들이 지닌 다른 면들을 접촉한다. 궁극적으로 복음전도는 주님이신 예수에 대한 신앙과 관계되지만,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신앙에 접근하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경험하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욕구들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념하고 그 사건의 의미를 사람들의 삶에 적용하는 예배 안에서 다뤄진다.

다행스럽게 예배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험해 볼 가치가 있는 모델들이 있다. 나는 이 세 가지를 언급하고 특히 셋째 것을 발전시킬 것이다.

-----------------------하나님-임재 복음전도---------------------

우리가 다룰 첫 번째 모델인 하나님 임재 복음전도(Manifest-Presence evangelism)는 예배 안에 힘이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는 존재의 경험으로 묘사될 수 있겠다. 카렌 호웨(Karen Howe)는 성공회교회(Episcopal Church)에서 가진 하나님 임재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나는 회중석에 앉아 예배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설교가 아니었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구원의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고 나를 헌신기도(그 후에 일어났던)로 인도하지 못했다. 나는 단순히 내 주변에서 예배가 진행될 때 하나님의 임재에 몸을 녹이고 있었고, 내가 교회를 떠났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들어오셨음을 알았다. 그 분은 살아 계셨다. 나는 그 분을 만난 것이다. 그날 나의 심령은 다시 태어났다.

예배에서 "하나님에 의해 붙들림 받는 경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 경험은 공동체에 대한 환대(hospitality)를 통해, 말씀선포를 통해, 찬양을 통해(하나님은 백성들의 찬송 속에 거하신다), 혹은 빵과 포도주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

-------------구도자 중심의 예배를 통한 복음전도------------

예배(혹은 예배의 종류)를 통한 복음전도의 둘째 모델은 구도자를 위한 예배(the Seeker's service)이다. 일리노이스주 사우스 베링톤(S. Barrington, Illinois)에 있는 월로우 크릭 컴뮤니티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미국에서 둘째가는 큰 교회이다)가 시작한 이 접근방식은 구도자들이 드리는 예배(비기독교인들을 위해 계획된)를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계획된)에서 분리시킨다. 구도자들이 드리는 예배는 토요일 밤과 주일날 아침에 갖는 반면,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는 주간에 갖는다.

구도자들의 예배는 윌로우 크릭 교회의 일곱 가지 선교전략에 부응한다. 요약하자면 그 단계들은 다음과 같다.

모든 신자들은

(1) 복음전도에 참여해야 한다.

(2) 입으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3) 그/그녀가 증언하는 사람을 구도자 예배에 인도해야 한다.

(4) 회심자들을 (회심과 세례 후)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에 인도해야 한다.

그런 다음 회심자들은

(5) 훈련받을 수 있는 소그룹에 출석해야 한다.

(6) 개인적 은사를 발견하여 교회의 사역에 활용해야 한다.

(7) 돈과 삶에 대한 청지기직을 배워야 한다.

구도자들의 예배는 좀 더 충분히 신앙에 노출되기를 희망하는 세속인들을 위한 비위협적인 예배(a nonthreatening service)로 묘사되는데, 그 이유는 교회 회원들은 이미 서로의 관계 속에 이미 들어갔기 때문이다. 구도자들의 예배는 비록 그리스도교 예배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교회 예배같지 않다(역자주: 윌로우 크릭 컴뮤니티교회는 전통적인 강단이 없다. 커텐이 열리면 악단과 싱어(혹은 싱어들)가 몇 가지 복음송을 부른다. 이를 통해 구도자들의 마음의 문을 연다. 그날 설교주제와 내용과 관련된 약 5분간의 연극이 이뤄지면, 설교자가 등단하여 간략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때 조그만 탁상같은 것을 예배위원[조력자]이 단에 올려놓는다. 그런 뒤 찬양하면서 헌금을 하고 짧은 광고 후 찬양[몇 곡]과 축도로 폐회한다. 한 마디로 구도자들의 정서에 부응하는 역동성 있는 예배이다.

구도자들의 예배가 이뤄지는 윌로우 크릭 강당은 교회라기 보다는 마치 극장같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교 상징들이 없고 비기독교인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중립적인 배경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음악과 메시지는 특별한 영적인 주제로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예를 들어, 내가 최근에 출석했던 구도자 예배에서 주제는 자녀양육(parenting)이었다: 당신은 혼란과 유혹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하는가? 네 가지 요지 가운데 하나는 "자녀의 영적 측면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증언은 차라리 구도자를 인도한 친구의 책임이다.

-------------------------예배적 복음전도-----------------------

예배를 통한 셋째 복음전도의 모델은 로마 카톨릭교회에 의해 부활된 제 3세기 모델이다. 카톨릭 신도들 가운데 그것은 성인 입사식(RCIA)이라 불린다. 나는 그것을 예전적 복음전도(liturgical evangelism)라 부르고 싶다.

이런 류의 복음전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도 있겠다.

예전적 복음전도는 예배에 의하여 조절되고 정리된 회심을 통하여 한 개인을 그리스도와 교회 안으로 부르는 것이다. 교회의 연간 일과에 걸친 예배는 죄로부터의 내적 참회경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삶의 회심, 그리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으로의 편입 경험을 일으킨다.

3세기의 교회에서 복음전도는 3년간의 기간에 걸쳐 발생한 일곱 가지 진보적인 단계에 바탕을 두었다.

(1) 질문

(2) 환영식

(3) 입문과정

(4) 선택의식

(5) 정화와 계몽기간

(6) 입사식

(7) 비법전수

7단계 가운데 네 단계는 성장과 발전의 기간이나 시간인 반면(질문, 입문과정, 정화와 계몽기간, 비법전수) 세 가지는 통과의례(rites of passage)였다(환영식, 선택의식, 입사식). 각 단계는 매우 의미있는 방법으로 교회 안의 장소에서 - 카톨릭교회뿐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 이뤄질 수 있다.

질문. 출발점은 오순절 주일이다. 그날 당신은 복음전도사역에 부름을 받은 당신의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파송예배를 거행할 수 있겠다. 이 사람들은 이제 또 오순절 이후의 절기의 달(months of the season)안에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의 소명을 성취하려 할 것이다. 그들은 친구들과 이웃들을 교회에 초청하고 그들과 함께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교회 회원이나 장로들과 함께 복음과 그것이 그들의 삶에 대해 갖는 의미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이 몇 달 동안 그들의 일부 사람들은 깊은 헌신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회개하는 사람들"(the converting people)로 부를 수 있다.

환영식. 그 다음 단계는 첫 통과의례로서 환영식인데, 강림절 첫 주일날 거행된다. 초기 교회에서 이 의례의 부분인 회심자들은 거짓된 신들을 버리고 앞에 있는 십자가의 표지를 받았고 입문자로서 교회 안에 받아 들여졌다.

유사한 상징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 사용될 수 있겠다. 각 교회는 옛 삶의 방식의 포기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들을 계발할 수 있다.

입문과정. 입문과정은 가장 긴 단계이다. 초기 교회에서 이 과정은 2∼3년 확장되었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하는 사람의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어떻게 돕는가 하는 문제에 달려있었다.

이 단계동안 회심자는 성경, 기도, 그리고 거룩한 삶에 대해 교육받는다. 오늘날 이 학습기간은 대강절(advent) 첫 주일부터 시작하여 주현절 절기(Epiphany season)까지 이른다. 일부 교회들은 그것을 다음 해까지 확대하나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선택의식. 일단 교리문답 기간의 교육이 완성되면 회심자는 제 2의 통과의례인 선택의식을 위해 공동예배에 모인다. 이 의례는 사순절(Lent) 첫 주일에 이뤄진다.

고대 교회와 오늘날에 있어서 이 의례의 주요 상징은 "당신은 당신을 선택한 자를 선택합니까?"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회심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예"라고 대답하고 나서는 그 또는 그녀의 이름을 강단 앞쪽에 위치한 책에 기록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정화와 계몽기간. 사순절 기간동안 이뤄진 단계는 세례를 위한 심도있는 영적 준비시간이다. 그것은 삶을 지배하고자 하는 정사와 권세들과 싸우는 시간이다.

고대 교회에서 회심자는 이 단계동안에 매일의 축귀사역(exorcisms)을 위해 교회에 왔다. 오늘날 교회는 지속적으로 입문자의 집 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삶 속에 유혹을 가져오는 악의 권세와 씨름하는 입문자들의 머리 위에 안수하고 기도를 대신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입문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의 삶, 유혹과 고통의 시기에 교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제공하는 방법에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삶인 것을 배울 수 있겠다.

입사식. 이 6단계는 세례 그 자체이다. 초기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에서 회심자들은 대파스칼 전야(the great Paschal Virgil)의 맥락에서 부활주일 아침에 세례받는다.

초기교회 의례의 한 부분으로서, 세례를 받게 될 사람들은 악의 권세와 결별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았고, 기름으로 씻김 받고, 평화의 입맞춤을 교환한 후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였다. 오늘날 회심자들을 위해 행하는 이 의례의 채용은 신앙여정의 한 국면의 완성과 다음 단계를 위한 출발에 특별한 강조점을 둔다.

비법전수. 회심자가 갖는 일평생에 걸친 신앙체험의 지속성은 최종단계에서 비법전수(mystagogue)기간으로 표현되는데, "신비학습"(learning the mysteries)을 의미하는 기묘한 용어이다. 초기교회에서처럼 오늘날 비법전수 단계는 부활시즌의 제 5일에 시행된다.

초기교회의 비법전수에서 새로운 개종자들은 성찬의 의미에 대해 교육을 받았고 교회의 전체 삶 안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 시간을 새로운 개종자들의 은사를 분별하고 완전히 개종된 사람을 적극적인 회원자격에 올리는데 사용하는데, 이 자격을 얻으면 교회생활에 그 또는 그녀의 은사가 활용되었다.

당신이 예전적 복음전도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면 새로이 갱신되는 카톨릭교회들에 의해 그리고 점증하는 개신교 예전교회들(Protestant liturgical churches), 특히 성공회 교회에 의해 극히 효과적으로 사용된 한 복음전도의 형태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회중들은 이 복음전도 형태를 사용하기 위해 엄격하게 예전적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월력(the Christian year)이 순례과정을 축하하는 어떤 교회의 회심자들과 회중들의 새로운 삶을 위해 이런 형태의 복음전도를 효과있게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전체교회는 과정을 의식하고 있고 대강절, 크리스마스, 주현절,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의 의미에 의해 질서가 정해진 지속적인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세 단계들--------------------

예배를 통해 이뤄지는 복음전도에 대한 이 세 가지 접근방식들은 예배를 통해 복음전도를 할 하나의 길이 없음을 증명해 준다. 만일 당신의 회중이 그 어떤 예배를 통한 복음전도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당신이 세 단계를 택할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첫째, 복음전도에 대한 이 세 접근 방식들에 대해 토의하고 어떤 것이 당신의 회중에게 가장 적합한지를 결정하라. 둘째, 한 가지 접근방식이나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면 그것을 연구하라. 서적들을 읽으라. 회의에 참석하라. 전체 회중에게 이 접근방식을 제시할 수 있는 누군가를 대동하라. 마지막으로, 그것을 실천하라. 아마도 당신은 먼저 자부심을 느끼겠으나, 계속 실험하다 실패할 때 당신 자신을 먼저 세우고 다시 노력하라. 그 접근방식은 당신의 회중의 틀을 짜고 전도하는 예배공동체가 되도록 자극할 것이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

5. 교회성장예배에 대한 신학적 비평

미국교회 생활의 마지막 세대에 특별히 영향을 미쳤던 것은 때로 교회성장전략이라는 용어에 의해 알려진 복음전도전략학파였다. 최근에는 그와 같은 전략들이 많은 예배전통들 안에서 점진적으로 교회의 예배를 형성했다. 이 기사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와 현재의 경향의 빛에서 강점 및 약점 모두를 평가하면서 교회성장예배(church growth worship)를 검증할 것이다.

"초보적인 교회성장텍스트"로 시중에 나온 교회성장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 앞부분에서, 도날드 멕가브란은 "예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성장이 그들이 가진 관심에 대해 별 할말이 없는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다(Understanding Church Growth, 3d ed. [grand Rapids: Eerdmans, 1990], 8). 실상 교회성장운동의 대부인 멕가브란은 예배에 대한 그 어떤 그리스도교적 방식들을 말할 때면 의례히 예배에 대한 보수성향(a liturgical conservatism)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이런 방식들을 채용하는 개종자들이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언급일 뿐이다. 이 책 대부분은 교회 성장이론은 예전적 관심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멕가브란의 제의를 확증하고 있다.

멕가브란이 한 증명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교회성장 개업가들이 미국교회에 그들의 이론을 적용하기 시작한 이래 수년간 예배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오늘날 교회성장 복음전도가 어떻게 예배와 관련되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서적, 세미나, 회보,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들이 쇄도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어떻게 예배자 수를 늘릴 수 있는지, 이 예배들을 목표하는 청중(a target audience)의 욕구를 채우도록 어떻게 맞출지, 그리고 특히 어떻게 새로운 종류의 예배, 즉 불신자들을 겨냥하는 구도자 예배(the seeker's service)를 계발할지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설명한다. 실상, 교회성장 자료는 올바른 예배형식에 관한 토의에 점진적인 위협이 되었다. 현존하는 예배형식들은 빈번히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에 주요 장애물로 설명되었다. 교회성장 이론이 미국교회의 예배에 미친 점진적 영향의 견지에서 이 기사는 그 이론의 장점을 조사하고 또한 타당한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목표는 그 이론이 담고 있는 위험을 피하고 끼친 공헌을 찾아내면서 교회성장예배를 재평가할 것이다.

--------------------교회성장예배에 대한 정의------------------

교회성장예배(church growth worship)란 용어가 운동(movement)을 다룬 문헌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그와 같은 현상은 존재한다. 교회성장예배는 예배에 대한 이런 접근을 한정하는 두 가지 뚜렷한 요소들 - 한 가지는 오래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새로운 요소이다 - 로 이루어져 있다.

이 예배의 "낡은" 면은 예배를 어떤 투명한 인간적 욕구, 특히 인간이 그 어떤 행동이나 경험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를 성취하는 도구로 보는 실용주의(pragmatism) 정신이다. 보편적으로 이 실용주의는 예배의 모든 외적 요소들을 욕구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변화에 개방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접근방식에서 "예배를 위한 시금석은 예배의 효율성이다"(James F. White, Protestant Worship: Traditions in Transition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89], 177).

이 "낡은" 면은 실제적으로 그렇게 낡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19세기 초에 미국의 프론티어(변경)에서 창안되었다. 그것은 예배에 대한 교회성장 접근에 계속되고 있다.

특히 예배에 대한 교회성장 접근은 전통에 대한 실용주의의 환멸을 보여준다. 전통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옛 방식을 좇아 무엇을 행하는 것은 예전적 실용주의자들(liturgical pragmatists)에게는 혐오스러운 일이다. 욕구된 목표는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 위대한 관심에 모든 것들이 종속된다. 간혹 이 실용주의는 예배의 실제를 성경적 모델에 일치시키려고 하는 개신교의 공통된 접근방식인 예전적 성경주의(liturgical biblicism)에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교회성장예배는 예배전통과 예전적 성경주의에 대해 그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그 대신 욕구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도록 자유를 증진시킨다.

교회성장예배의 "새로운" 국면은 여러 가지 용어를 구사하여 욕구하는 예배의 목표를 한정하는 것이다. 예전적 실용주의자들에게는 양적 결과가 목표가 되었다. 그들은 빈번히 이 표준에 큰 강조점을 둔다. 한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교회성장 위의 권위는 예배출석이 교회의 영적 건강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평가이다(Joe A. Hardin and Ralph W. Mohney, Vision 2000: Planning for Ministry into the Next Century [Nashville: Discipleship Resources, 1991], 60). 이런 확신을 갖고서 교회성장예배에 대한 자료는 교회출석을 자극하기 위해 이루어질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예배는 이 두 가지 기본 요소들에 의해 성격이 드러난다. (1) 예전적 요소들(liturgical particulars)을 개인들이 욕구하는 목표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는 실용주의에 대한 강조와 (2) 이 목표를 증가된 출석숫자로 보는 정의이다.

종종 이 두 요소들의 결합은 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이끌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비즈니스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의식적(意識的) 틀(framework) 안에서 명료한 마켓팅 용어들은 어떻게 교회들이 예배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기대되는 출석자들은 예배 "상품들"이다. 교회는 그들의 소비자들의 의식의 문을 두드려서 예배에서 다양한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이 잘 들려지도록 메시지를 적당히 잘 "꾸려야" 한다(비교 Timothy Wright, A Community of Joy: How to Create Contemporary Worship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이러한 상업적인 용어(business terminology)가 교회성장예배에 관한 제반 토의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용어는 이 접근방식이 갖춘 두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드러내 준다. 실용주의적인 틀과 수적 증가에 대한 관심인 이 특성들은 교회성장예배로 불리는 그 현상을 정의해준다.

----------------------------유익한 공헌---------------------------

교회성장의 공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예배와 복음전도의 연관성을 인식한 것이다. 이 연관성은 다른 관심들 때문에 쉽게 잊혀졌다. 예를 들어, 예배는 종종 심미적인 것으로 좌천되었다. 예배는 다른 예술형태들과 한데 묶어질 수 있는 한 예술 형태였다. 예배식 사제들(Liturgists)은 음악인들과 다른 예술인들과 여러 사안들을 토의하려고 하였다. 예배의 목표는 미(美)였다. 너무나도 빈번히 예배의 표준은 예배가 모짜르트의 아리아(Mozart aria)만큼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교회성장운동은 교회를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본질적인 사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 부름 안에서 그 운동은 예배와 복음전도가 이 중심사역의 상호 연관된 국면이란 사실을 교회에게 올바로 환기시켰다. 그러므로 그 운동은 예배와 복음전도 안에 있는 목표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유익하게 제시한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성장운동은 둘째 공헌을 제공한다. 현재 드리는 예배가 동시대의 문화에 잘 부응하는지 혹은 미국의 문화가 자체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에서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가에 대한 재숙고이다. 이 관심은 예배전문가들에게 낯선 것은 아닌데, 예배전문가들은 예배가 특별한 문화의 독특한 표현이 되는 과정을 inculturation이라 부른다(역자주: inculturation은 한 문화가 타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체의 정체성[identity]를 가지고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aculturation은 한 문화가 정체성을 잃고 지배적인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운동은 현대교회가 지나치게 자기만족에 취해있다는 것이 아니라 재숙고하라고, 예를 들어, 19세기의 복음송이 20세기 신앙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재숙고하도록 해 준다. 특히 일부 교회성장교회들은 오늘날 공적인 모임에 출석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에 중대한 침해를 가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쇼핑센터같은 공공장소에 가는 사람들의 경험은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그들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교회성장 옹호자들은 더 규모가 큰 인종적 혹은 종족적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하부구조의 다양성에 대한 유익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그들은 어떤 한 종족의 예배를 모든 인종이나 종족의 예배에 적응시키려는 예배의 위험성에 대해 올바로 경고해 준다. 교회에게 inculturation의 목표와 의무를 깨우쳐 준 것이 이 교회성장운동이 남긴 제 2의 공헌이다.

올바른 inculturation에 대한 이 관심은 또 다른 유익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은 곧 예배를 기획하는 자들의 개인적 취향보다도 예배를 위한 표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배를 가장 잘 계획하는 자들까지도 회중들의 신앙을 표현하기보다는 실제적으로 자신들의 예배를 반영하는 오류에 빠져 들 수 있다. 종종 공공예배가 교회공동체의 행위로 부를 수 없고 본질적으로 회중에게는 전혀 낯설고 아무 도움도 못되는 예배가 되는 결과를 본다. 예배에서 이뤄지는 이 교회성장 강조(church growth emphasis)는 문화적으로 타당한 예배를 강조함으로써 이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질문과 약점들------------------------

이러한 긍정적인 공헌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예배는 미국교회에 몇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대부분의 문제들은 교회에 대한 한 가지 차원의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교회론에 대한 혼란. 특별한 신학적 난제는 교회를 위한 목표와 교회의 목표간의 혼란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를 위한 목표인 복음전도는 구속받은 인간 공동체인 교회의 종말론적 목표와 같다. 교회성장에 관한 많은 자료들은 교회가 많은 수적인 증가로 복음화 사역을 하고 있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나님에 의해 구속받고, 하나님께 화해되고 서로에게 화목되고, 정의와 긍휼과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즉, 교회의 목표에 대한 비전)을 지닌 백성에 대한 비전은 지금 교회를 위한 목표인 복음전도를 성취하려는 욕망 때문에 쉽게 잊혀지고 있다.

그리고 성서적인 비전에서 볼 때 예배는 종말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해야 할 최우선적인 "사역"이므로, 복음전도와 예배사이에 둘째 혼란이 발생한다. 기껏해야 예배는 복음전도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최악으로 예배는 복음전도의 주제가 된다. 허락되지 않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의 유일한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독특한 종말론적 활동으로 예배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지닌 더 깊은 본성에 대한 성찰 부족이 교회성장 자료 안에 깊이 흐르고 있는 징후이며, 교회의 하나님나라의 관계를 올바로 규정하지 못한 실패이다.

교회의 중심성(centrality of the church)이 교회성장 자료 안에서 너무 중요하므로, 이 투명성의 부족은 놀라운 것이다. 한편으로 자료는 교회의 중요성에 관하여 특수하다. 교회 안의 책임있는 회원자격은 회심과 구원의 표식으로 생각된다. 교회의 수적 증가는 제한된 자원이 집중되어야 할 바람직한 목표이다. 증가된 횟수의 예배는 회중의 영적 건강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 목표들과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왜 이런 것들이 바람직한 목표이어야 하는가? 이다. 질문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깊은 관련, 특히 하나님 나라의 표명(demonstration)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해를 강하게 내세웠던 것 같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일부 긍정적인 관계 밖에서 이 교회중심주의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교회중심주의는 교회의 진보를 자체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활개치는 실용주의 실상 이 위험은 그 운동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험들에 의해 감지된다. 예를 들어, 교회성장교회론(church growth ecclesiology)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 이뤄진 좁은 - 그러나 보편적인 - 관계를 제시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위한 도구이다(Charles van Engen, The Growth of the True Church [Amsterdam: Rodop, 1981], 344). 이 관계의 차원이 사실인 반면,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나라 사이의 완전한 관계를 올바로 설명하지 못한다. 좀 더 타당한 설명 없이는 "참된 교회는 명약관화하게 더 큰 교회로 자랄 수 있는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유해한 집단"(a vicious circle)을 만들어 낼 수 잇다(van Engen, 479). 위험은 수적 성공을 성장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된 그 어떤 수단으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비전의 균형없이, 이 자기 정당화를 추구하는 실용주의는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배에 대한 어떤 전통적인 국면을 포함하여 교회의 종말론적 본성을 표현하는데 궁극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조차도 타협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 저서는 출석자 수의 증가에 근거한 성찬 빈도의 증가와 감소를 제시한다(Lyle Schaller, 44 Ways to Increase Church Attendence [Nashville: Abingdon Press, 1988], 75). 이론적으로 어떤 이는 막대한 수가 성취되면 성찬은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성경읽기와 설교와 같은 예배의 다른 전통적인 국면들도 동일한 표준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사실, 뉴저지(New Jersey)에 있는 한 교회는 인기있는 22분 짜리 예배를 개발하기 위해 설교와 성례전을 제거하였다(Associated Press article, February 12, 1994). 그러나 예배에 설교와 성례전이 없다면 그런 모임을 과연 예배라 할 수 있겠는가? 신학적 표준이 없이 어떻게 예배나 교회가 의미하는 바를 결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수적인 성공을 강조하는 실용주의적 표준은 본질상 예배에 관한 사고를 위해 적당한 지침이 없으며 예배에 대한 어떤 신학적 반성에 의해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첫 단계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시(manifestation)임을 허용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이런 관계 안에서 예배가 지닌 독특한 역할을 인식하는 것, 특히 예배를 하나님 나라가 교회 안에 충분히 계시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신학은 예배를 강조함으로써 천국생활을 그리는 성서와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예배가 구속받은 인간 공동체가 되는 것이 뜻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에 예배는 교회의 활동들 가운데 종말론적 우선권을 갖는다. 그러나 단순히, 예배하는 것은 교회의 목표 가운데 무엇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속된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으로 응답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가 지닌 종말론적 성격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진실로 그리스도교적이고 성서적인 예배에 대한 어떤 한정적 요소들을 가르친다. 종말론적 비전에 합당한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며 찬양으로 가득찬다. 이와 같이 예배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모든 일에 대한 충분한 기억이어야 한다. 성서적이며 종말론적인 예배는 또한 상호적, 즉 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활동이 아니라 모여든 교회의 활동이다. 그리고 성서적인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현 시대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핵심적인 순간인 세례와 주님의 만찬을 강조한다.

특수한 문제들. 교회성장 교회론 밑바닥에 흐르는 이 흐름,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분명히 규정하지 못하는 이 무능은 몇 가지 특수한 문제를 유발시킨다. 첫째 문제는 교회성장 예배가 "공교회적(公敎會的; catholic)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기와 야합할 때 예배는 교회의 우주적 본성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없다. 만일 지교회가 예배와 관계된 모든 것을 간편화하는 일에 의해 측정된다면, 지교회의 예배는 지나치게 한 문화 편중적(inculturated)이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예배는 결코 우주적("catholic") 교회의 지역적 표현이 되기 위해 부름받은 지역교회에 도전을 주거나 각성시킬 수 없다(지역교회가 하나님의 한 교회의 현시로 알려지고 있는 고린도전서 1장 2절과 비교하라). 이 성서적인 접근이 사라질 때 지역교회가 받을 위험은 몇 사람들이 교회성장예배에 관해(Frank C. Senn, The Witness of the Worshiping Community [New York: Paulist Press, 1993]), 그리고 대체적으로 교회성장이론에 관해(Harvie M. Conn, "Looking for a Method: Backgrounds and Suggestions," in Exploring Church Growth [Grand Rapids: Eerdmans, 1983]) 논평했듯이 단순히 자신의 문화적 독자성을 표현하는데 안주하리라는 것이다.

교회성장예배에 대한 다른 하나의 특별한 비평은 간혹 이 예배가 사도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도적 증언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적 행동, 특히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성취된 행동에 대한 기억에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도적 증언은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이 우주적이며 개인적 관련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교회성장예배는 자체의 메시지를 관련성있게 하는데 초점을 두기 때문에, 복음의 메시지를 오로지 개인적 투쟁과 욕구에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포장할 수 있다. 예배를 쇼핑하는 자(the worship shopper)는 복음이 줄곧 만족을 주고 자신의 욕구에 만족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접근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복음을 개인적이고 역사와 무관한 심리극으로 격하시킬 수 있다.

교회성장예배 옹호자들은 변화된 것이란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형식일 뿐이지 복음자체의 내용은 아니라고 응답한다(참조 Walter P. Kallestad, "Entertainment Evangelism," The Lutheran 3[May 23, 1990]:17). 그러므로 교회성장예배는 현대의 청취자들의 욕구와 관심거리에 직접 관련성이 있는 의사소통방식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식만이 바뀌었다는 응답은 부정확한 답변이다. 형식과 내용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형식을 바꾸는 것은 내용을 바꾸는 것이다. 결혼기념일에 손으로 쓴 사랑의 표현이 담긴 아름다운 카드를 받는 것은 냉장고 위에 "다음 해에도 느낌은 여상할 것이다"는 말이 쓰인 딱지를 보는 것과는 훨씬 판이하다. 이와 같이 죄의 회개와 고백을 외치는 복음의 요구는 "재미있게" 들려지는 것과 훨씬 판이할 것이다. 만일 흥미를 돋구어주는 꾸러미가 된다면 복음은 결국 그 내용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예배는 그 형식을 바꿈으로써 이미 내용도 바꾸었다. 매력을 추구하는 예배는 예배참석자들의 개인적 욕구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예배에 따르는 위험은 예배가 하나님중심이기 보다 인간중심이 되므로 하나님의 형상에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욕구충족을 위해 포장된 예배는 하나님의 모습을 흡사 사람이 부를 때면 서비스를 위해 항상 바쁜 천상의 웨이터 모습으로 그리게 된다. 그와 같은 예배는 예배에 있어서 누가 섬김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돌려놓는다. 더 이상 교회 회중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지 않는다. 그 대신 교회 회중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게 된다.

그러한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 편에서 즉각적인 효과, 특히 정서적 심리적 효과에 관심을 기울일 때 성서적인 비전과 상치된다. 성경이 보여주는 바로는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예배자들이 유익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경배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하늘 천군들의 노래는 "주 하나님과 죽음 당하신 어린양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4:11; 5:12)라고 선포한다. 이 하늘 천군들은 "당신을 찬양하는 행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라고 노래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예배드리는 개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그것이 예배의 목적으로 표현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예배하는 타당한 이유는 예수 안에서 행하신 자비로우신 행위 때문에 찬양을 받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가치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선포를 희석시킨다면 그것은 비기독교적(sub-christian)이며 비성경적인 예배이다. 교회성장예배가 사람들의 유익에 치중하기 때문에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비전에 어긋난 면을 벗어나야만 한다.

두 가지 독자적인 관심이 교회성장예배에 대한 논평을 종료시킨다. 첫째 관심은 교회성장예배에 대한 작금의 필요성 배후에 놓여있는 전제와 맞부딪힌다. 사려 깊은 복음주의자라면 이 방식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이 접근방식은 역사가 보여주듯이 잘못되었다. 19세기의 예배실용주의의 발전이전에 복음주의자들은 항상 "결과"에 대한 욕구를 조정하는 부가적인 요인들을 갖고서 예배에 접근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예배 역사에서 얻은 통찰력을 갖고서 생동적인 예배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표출했다. 웨슬레는 전형적으로 전통을 역동적인 예배 회복을 위한 기본적인 아이디어와 범주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예배 전통에 대한 관심은 성공적인 복음전도와 불협화음을 이루지 않는다고 본다.

마지막 논평은 교회성장교회들이 지금 변호되고 있는 예배에서 같은 변화의 수준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시간이 지나가도 작금의 높은 변화의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가? 그것을 믿는 것은 의례적(儀禮的)인 순진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의례 행위들처럼 그리스도교 예배에 이르는 어느 한 길은 표면을 능가하는 의미를 갖는다. 교회성장예배에서 이 세대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이 예배 형식을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결부시키듯이, 변화를 거부하는 새로운 전통도 형성될 것이다. 이 과정은 몇 세기 전에 구세군에서 일어났다. 복음전도를 통해 엄청난 성장을 경험하면서 십자군(the Salvation Army)은 이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예배형식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오늘날, 십자군은 더 이상 다음 세대에게 적응될 수 있는 차원의 예배를 추구하지 않는다. 실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집단 동질성(group identity)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의례에 폐쇄적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 교회성장운동의 옹호를 받는 혁신적 변화와 함께 일어날 수 있을까? 지금의 혁신이 백 년 뒤에도 색다를 수 있을가?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신실한 교회는 즉각적인 성공에 의해 예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으로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며 하나님을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겸손히 고백하느냐에 의해 선택할 것이다.

---------------------------------제언-------------------------------

교회성장과 예배의 "형식"의 미래의 방향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할 수 있다.

교회성장옹호자들은 예배와 복음전도 사이를 구분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 예배를 복음전도로 격하시키는 것은 실제로 예배의 성격을 왜곡시키고 교회의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인 교회의 형식적인 힘(formative power)을 또한 전도시키는 것이다.

예배를 계획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핵심적인 증언이 될 요소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성례전은 그 초점을 단순히 개인주의적이거나 감상적인 차원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깊은 신비에 두는 방식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달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언을 위한 좋은 영역이다. 세속적이고 문화적인 휴일 대신에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절기에 관심을 집중하는 일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막1:5)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교회는 예배 공간에 예배를 치장하는 상징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예배하는 교회는 공동체를 한정하고 형성하는 신앙과 의례를 지닌 독특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예배와 복음전도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믿는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계획된 예배와 관련된 언어의 조율을 또한 의미한다.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한 구도자예배(the Seeker's Service)를 계획한다면, 차라리 예배라고 부르지 않는 편이 더 정직한 노릇이다. 그리고 이런 교회는 복음화된 자들을 준비시켜 참된 예배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참조. Barbara Steward, ed.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Church Leader's Handbook [South Barrington. IL., 1991]). 새신자를 위한 교회의 사역은 예배훈련을 포함한다. 복음전도는 예배를 지향해야 한다.

아마도 교회성장 자료가 끼친 공헌은 교회 배경을 보다 더 안락하게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개발하도록 자극하는 방식으로 복음전도에 혁신적인 방법을 제공한 것이다.

예배에 관심을 가진 자들은 이 새로운 예배형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는데, 그 이유는 예배에 따르는 위험을 피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느 한 예전학자가 논평한대로 획일적이고 이상적이기만 한 예배는 예배를 위해 모인 다양한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다(Joseph Gelineau, The Liturgy Today and Tomorrow [New York: Paulist Press, 1978], 34ff..). 이 다양성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예배형식이 마련되어야 한다. 일부 교회성장 아이디어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나 중도에 있는 자들에게 적용점을 마련해 줄 지 모른다. 매주일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이런 책임은 간과될 수 없다. 기회를 놓친다면 이는 수치거리이다.

레스터 루스(Lester Ruth)

6. 환대, 예배 그리고 복음전도

많은 교회들은 예배에서 방문자들이나 새로운 이들에게 별관심을 갖지 않는다. 몸에 배인 습관이나 신선미가 없는 예배형식은 이들은 환영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이 기사는 모든 참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예배로 만드는 사회학적 필요성을 다룰 것이다.

주류를 이루고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공예배에서 새신자들을 다루는 방식은 누가 저녁식탁에 올 것인가(Guess who's coming to Dinner?)라는 헵번(Hepburn)과 트레이시(Tracy)의 영화에 등장하는 부부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낯선자들을 환영하는데 바치는 헌신을 고백하지만, 실제 그들이 바라는 접대를 알려줄 때는 쇼크를 받는다.

그 영화 속에서 트레이시는 신문 편집자의 역할을 하는데 그의 지도 아래 종족차별에 대한 매우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일어났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신들을 시민권리운동가로 여겼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이상적이고 자유스러운 한 쌍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그들의 딸이 한 젊은 흑인 남자를 저녁식탁에 데리고 올 때까지는 잘 진행되었다. 그런데 시드니 포이터(Sidney Poitier)가 역을 감당한 그 흑인은 딸이 결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 부부는 쇼크를 받았다. 저녁 식탁에서는 감히 상상도 기대도 않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자유주의적인 편집인과 그의 아내처럼, 주류교회의 많은 회중들이 새로 오는 이들을 환영은 하지만 정작 그들이 예배를 드리러 올 때는 불편했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예배가 사람들을 회중 안으로 이끌어 활동적인 회원으로 남아있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새로 오는 낯선이들을 환영할 필요가 있어서 따뜻하게 대하고 개방적인 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 가운데 어떤이들은 이 모델을 성취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

많은 회중들의 봉사 장부에 환영이란 글이 씌여있다. 어떤 목회자들은 이따금 예배 도중에 환영순서를 갖기도 한다. 그들은 새로온 이들에게 환영을 표시하는 명찰이나 텍을 부착하게 해서 사람들의 봉사를 유도하기도 한다. 이런 따뜻하고 개방적인 자기 - 이미지(self-image)와 환영절차에도 불구하고, 회중들은 여전히 그들을 환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우연히 그리고 의도적으로 비환대적이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을 가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낯선이들에게 환대의 초점을 두지 못한다. 새신자들을 환영하는 예배순서지도 언제 앉는지 일어서는지 그리고 누가 예배인도자인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예배 순서지는 오로지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새신자들을 환영하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회중들이 좀 더 공적인 감각을 깨우치기까지 그 순서지는 배타적이다.

이런 상황을 되돌려 놓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는 새신자들에 대한 회중들의 태도에 있다. 이런 태도 특히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하는 자들의 태도이어야 한다. 예배를 계획하는 자들의 안중에 이 새로운 낯선이들이 없다면, 그와 같은 예배는 회중의 수를 계속 감소시켜 나갈 것이다.

새신자의 본질적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하는 자들은 그들의 상상력의 자리에 그들을 위한 자리와 공간을 비워두어야 한다. 상상력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과 연결시키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 관련성은 이미지를 통해 실제화된다. 예배계획자나 인도자들이 그들의 상상력 속에 낯선 새신자들을 두게 될 때, 복음도 자유로이 역사하고 회중들은 말씀과 성례전에 의해 갱신될 것이다.

--------------------왜 새신자들이 소속되는가?-----------------

새신자들(the Strangers)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모든 회중이 드리는 공예배의 계획과 실제에 들어있다. 이 기사에서는 세 가지 이유를 탐구할 것이다.

첫째 이유는 공예배의 공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공예배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예배의 계획과 실제에 새신자들이 속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공적인 것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명료성은 예배를 사적인 일로 삼는 행위를 고쳐줄 것이다.

둘째 이유는 복음과 공예배에서 차지하는 새신자들의 지위와 관련있는 성서의 증언에서 직접 나온다. 이 성서의 증언에서부터 기본적인 신학적 원리가 나온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환영받는다. 더욱이 하나님은 새신자를 통해서 임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새신자들에게 환대를 베풀 것을 약속하시고 명령도 하신다.

셋째 이유는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공적 차원과 사적 차원을 연결시키려고 애쓴다. 공예배를 통하여 이 사람들은 심원한 가치를 함께 나누는 공적인 의례표현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이 의례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수치상황에 노출시킴 없이 공적 및 사적 삶을 통합시켜 준다.

--------------------공적인 예배에 대한 상상력-----------------

공적 예배에 새신자가 속하는 첫째 이유는 공적인 것 자체에서 비롯된다. 사회심리학자 리챠드 스네트(Richard Sennett)에 의하면, "공통된 일련의 행위를 통한 새신자들의 상호행동이 공적인 것을 구성한다"(Richard Sennett, The Fall of Public Man: On the Social Psychology of Capitalism [New York: Random House, 1978]). 새신자들을 위한 자리가 없는 곳에는 공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예배가 공적인 것이 되려면 새신자들이 거기에 소속되어야 한다(Sennett. 48).

스네트는 새신자(stranger)를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드니 포이터같은 낯선이들의 한 집단은 국외자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옷을 입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계급과 인종에 들 수 있다. 이 국외자들은 분명히 다른 대상으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공예배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외자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교회 안에서 국외자로 남아있다. 둘째 집단은 친근한 자들과 국외자의 중간에 위치한 자들이다. 그들은 주일 아침 모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인 내부 국외자들(inside strangers)이다. 만일 그들이 의미있게 공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국외자들이 직면하는 것과 같은 많은 장애물에 직면한다. 이 장애물들은 공적인 공간, 공적인 심리학, 그리고 공적인 신화에 대한 왜곡된 개념을 가진 결과이다.

현대 미국에서 공적인 공간들, 특히 도회 배경으로 한 공간들은 냉담하고, 폭력적이고 위험한 공간들로 인식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낯선이들을 두려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누군가를 세워놓고 방향을 물을 때 "실례합니다"(Excuse me)하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의 신성하고 개인적인 침묵의 비누거품(bubbles of silence)을 깨뜨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냉담하고 폭력적인 공공장소에 감각에 대한 지나친 과민행동과 친숙한 사회에 대한 묵종으로, 우리는 개인적인 범주 안에서 공예배를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공공장소 혹은 공적인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감지한다. 그러나 낯선이들과의 상호교류를 즐기게 해 주는 공적인 신화, 공간, 사회에 대한 기술과 감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대신에 우리는 부정하고 거부한다(비고 Richard Palmer, The Company of Strangers [New York: Crossroad, 1985], 46-55; Sennett 222ff.).

우리는 공예배가 공적인 공간임을 부정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적인 상상력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는 예배를 사적이고 가족적인 사안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사적이며 따뜻하고 개방적인 가족느낌이 새신자를 환영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친밀집단의 한 부분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소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지배적인 사고는 가족이란 사건이기 때문에 새신자들은 그들 가운데서 후원해 줄 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와 같은 "가족" 회중(family congregations)은 오로지 한 개 아니면 두 개의 문만 갖추고 있다.

가족 회중 가운데서 회원 자격에 대한 근본적인 문이 목회자인 교회가 있다. 목회자가 심방하여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그런 뒤 가족의 한 사람이 된 새 신자를 후원한다. 전체 과정은 사적이며 일대일의 사안이다(전도자인 목사에 대한 다른 대안을 위해서 다음 책을 읽으라. Richard Stoll Armstrong, The Pastor-Evangelist in Worship [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대부분의 새신자들은 소외당한다. 일부 사람들은 목회자가 너무 어려서 부성적인 면모를 볼 수 없다거나 아니면 절친한 친구로서 대하기는 그릇된 정치적 견해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따뜻하고 개방적인 가족 이미지의 결과는 많은 새신자들의 추방이다. 기껏해야 복음을 나누는 부족한 방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낯선이들에게 따뜻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교회는 비평없이 공적인 공간, 심리학, 그리고 신화에 대한 친밀사회(the intimate society)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주인과 객이신 하나님----------------------

그리스도교 예배는 사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들은 말씀과 성례 주변에 공적으로 모인다. 여기서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객(客)들의 동반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환대(hospitality)에 의존한다.

공예배에 대한 이런 견해는 단순히 콘스탄틴시대의 기독교의 결과이거나 그리스도를 문화와 쉽게 동일시하는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나그네를 접대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서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은 종종 나그네의 임재를 통하여 그리고 나그네에 대한 관심 안에 임재하신다. 하나님은 나그네의 임재에 대한 약속과 함께 하신다(John Koenig, New Testament Hospitality Partnership with Strangers As Promise and Mission [Philadelphia: Fortress, 1985]는 내가 쓴 이 기사의 지침이다).

주님은 마므레 상수리 나무가에 있던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의 객의 형태로 나타나셨다(창18:1-5). 그 나그네들은 주님이시라는 나레이터의 말을 독자인 우리들은 듣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알지 못한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에게 "나의 주여, 만일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으면 종을 지나가지 마소서"라고 인사를 건넨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함께 먹고 쉴 것을 부탁한다. 음식을 먹는 동안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분명히 봄에 다시 너에게로 돌아오며 너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약속은 세 나그네들로 가장하고 나타난 하나님께 드린 환대와 더불어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증언에 있어서 나그네에 대한 환대는 가정을 초월하여 성전(聖殿)까지 이른다. 성전봉헌식 때 드린 기도에서 솔로몬은 나그네들이 주님의 집에 들어갈 권리가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왕상8:41-43). 성전은 여호와의 집이었고, 외국인들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환대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배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예배가 되어야 했다.

솔로몬의 기도에 의하면, 외국인들에 대한 개방성은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열국백성이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알고 두려워하게 하시고, 이 집이 당신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곳임을 알게 하소서." 성전은 여호와의 집이지 솔로몬의 집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나그네의 장소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보장받는다. 예배에 나그네가 임재하는 최종 목적은 열국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배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종종 환대를 필요로 하는 나그네들로 묘사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 집 안밖에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도 끊임없는 환대를 필요로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현존을 위해 그리고 현존을 통하여 임재하듯이 예수님은 종종 손님으로 식탁에 참여하시지만 끝에 가서는 주인이 되신다.

부활의 저녁에 예수님은 엠마오라는 마을로 향해 가던 두 제자들과 동행하신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는 그 나그네가 주님이시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제자들은 그 분을 알지 못했다. 그 나그네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고, 그들은 그가 예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난 큰 사건들을 듣지 못한 사실에 아연실색한다.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예수는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할 것과 그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눅24:26). 그들이 집에 들어가서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그 낯선이는 빵을 갖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계시하셨다.

나그네에 대한 이 환대의 개념은 초대교회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시대의 순회설교자들과 함께 바울은 복음을 나누기 위해 회당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접대에 의존했다. 그가 고린도교인들의 불친절을 보았을 때, 그들의 식탁친교(Table Fellowship) 습관을 거세게 공격했다.

고린도 공동체 가운데 일부교인들은 주님의 식탁(the Lord's Table)에서 어떤 이들을 배제시켰다. 그들은 일찍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이 늦게까지 일자리에서 돌아오기 전에 모임을 즐겼다. 신약성경학자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1장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환대를 보증했던 예배구조(liturgical Structure)를 제시한다(Gerd Theissen, The Social Setting of Pauline Christianity: Essays on Corinth [Philadelphia: Fortress, 1982] ; 특별한 참조 "Social Integration and Sacramental Activity: An Analysis of Corinthians 11:17-34," 145-74). 요약하면, 주님의 식탁을 중심하여 시작된 그리스도교 예배는 나그네에 대한 환대를 강조하였다.

----------예배(Liturgy): 공사(公私)를 연결하는 가교---------

고린도교회 회중들 가운데 일부는 성찬친교(the Eucharist Fellowship)를 사적인 사안으로, 주님의 식탁(the Lord's Table)을 자신들의 식탁으로 환원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본질상 공적인 것을 개인화시키려 했다. 바울은 바로 예배가 공적인 것을 방해했다고 말했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주변화 되어버린 자들에게 환대를 보증하는 예배구조를 제시했고, 또한 의례가 지닌 본질적인 성격을 인식시켜 주었다. 예배는 사람들의 삶의 사적인 차원과 공적인 차원을 연결한다.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독일의 연방공화국인 튀빙겐의 외교에 있는 조그만 농장마을에서 살았다. 나는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월요일 밤마다 연습을 했고, 대원 서로는 만날 때마다 악수를 하면서 피차간에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이 집단이 만날 때마다 동일한 의례를 줄곧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즈윽이 놀랐다. 나는 이 만남의 의례형식이 공적인 상호교류의 전형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미국인인 나는 처음으로 이 악수가 소박한 형식, 기묘한 의례인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이 굳게 결합된 공동체에 낯선 인물이었을지라도 이 의례는 곧 나를 대화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의례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악수를 통해 나는 의례적으로 공적인 공간에 들어갔던 것이다(참조 Raymond Finth, Symbols: Public and Private [New York: Cornell University, 1979], 176ff.).

우리가 얼굴을 낯선이들에게 돌리고 환영의 손을 더 확장할 때 우리는 의례를 통하여 자신의 개인 세계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한다. 악수는 친밀감의 표현이거나 투쟁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선한 의지를 담은 공적인 표지(a public sign)이다.

악수는 따뜻하고 개방적인 신뢰를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공유된 공적 상호교류에 기초하여 낯선자와 만날 때 우리들의 정서를 구조화한다. 이 만남에 대해 비록 내가 양면 감정을 느낄지라도 악수는 말한다. - 나는 두렵고 기쁘며, 지배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정복당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 나는 손을 뻗쳐서 선한 의지의 표지로 그 양면 감정을 구조화한다.

효과적인 의례사용은 우리들 개인의 삶의 차원과 공적 차원을 연결시켜주는 극히 효과적인 길이 될 수 있다. 의례는 또한 낯선자에게 베푸는 환대를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으로 구조화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의례는 - 친밀사회(the intimate society)에 의하면 건강한 인간 상호작용의 적이다 - 훌륭한 공예배를 위한 핵심적인 요소이다(목회사역에 있어서의 의례에 대한 논의를 위해 읽을 책 : Elain 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Philadephia: Fortress, 1987]).

이것은 그 어떤 의례도 타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효과적인 복음전도로 이끄는 효과적인 공예배를 원한다면 잠재적으로 예배가 핵심 자료라고 하는 말이다. 효과적인 복음전도는 우리가 어떻게 예전 예배(Liturgical Worship)를 드리는가에 달려있다.

만일 우리가 드리는 예전 예배가 친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감각을 극대화한다면, 교회 안팎에 있는 국외자들을 배제시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공간, 심리학, 그리고 신화에 대한 공적 감각 안에서 발전된 의례는 낯선이들을 예배의 본질적 특성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성경적 증언에서 비롯된 신학적 원리를 신중히 택한다. 그것은 주변화 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여호와의 집에서 갖는 주님의 식탁주변에 모인 동료 낯선이들(fellow strangers)로 받아들인다.

끝으로 그것은 상상력의 문제이다. 그것은 낯선이들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의 말씀에 의해 이뤄지는가 아니면 선하고 의미있는 공동생활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과 친밀하고 개인적인 것을 그리스도교 예배에 투사함으로써 이뤄지는가?

페트릭 카이퍼트(Patrick Keifert)

6. 예배와 복음전도에 관한 참고도서

Dale, Peter Ernest. Send Us Out: A Study in Worship and Mission.

Bramcote, Nottingham, U.K.: Grove Books, 1974. 예배와 교회의 선교의 관계에 관한 성공회의 전망

Davies, J. G. Worship and Mission. London: SCM Press, 1966. 예배

드리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 안에서 자신의 선교를 자극하고 완수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는 고전

Keifert, Patrick R. Welcoming the Stranger: A Public Theology of

Worship and Evangelism. Minneaplis: Fortress Press, 1992. 교회의 예배행위가 어떻게 예배하는 공동체 밖에 있는 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공적 행위가 되는가를 설명해주는 교회의 환대사역에 관해 확대된 논의.

Schmemann, Alexander. For the Life of the World: Sacraments

and Orthodoxy.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3. 교회의 성례전 생활과 선교의 관계에 대한 서구 정통주의의 접근. 성례전적 통일성(sacramental integrity)이 교회가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부유한 은사 가운데 하나라고 논의한다.

Webber, Robery, Liturgical Evangelism. Harrisburg, Pa.: Morehouse

Publishing, 1986, 1992. 초대교회가 시행했던 복음전도를 위한 모델을 설명하는 작품

____________ . Celebrating Our Faith: Evangelism Through Worship.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6. 초기교회의 예전적 복음전도의 성장에 관한 에세이인데, 이 모델이 오늘날 교회에 의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논의를 제공한다.

------------------구도자 예배 및 현대의 예배-----------------

Dobson, Ed. Starting a Seeker Sensitive Service: How Traditional

Churches Can Reach the Unchurched. Grand Rapids: Zondervan, 1993. 한 교회가 어떻게 구도자 예배사역을 할 것인지 그리고 다른 교회들이 어떻게 같은 사역을 할 것인지에 관한 설명

Guinness, Os. Dining with the Devil. Grand Rapids: Baker, 1993. 최

근의 예배와 복음전도의 실제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 교회성장운동에 대한 비평서

Pederson, Steve, ed. Sunday Morning Live: A Collection of

Drama Sketches. 3 vols. Grand Rapids: Zondervan, 1992. 일리노이주 사우스 베링톤에 있는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가 시행하는 구도자 예배사역에서 사용된 드라마 모음집

Senn, Frank C. The Witness of the Worshiping Community: Liturgy

and the Practice of Evangelism. New York: Paulist Press, 1993. 교회성장예배와 구도자 중심의 접근방식에 대한 비평.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성실한 예배를 제공함으로써 세상 안에서 교회가 선교를 완수하도록 하는 현대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발전을 다룬 책.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An Inside Look at the Willow

Creek Worship Service: Show Me the Way and An Inside Look at the Willow Creek Worship Service: Building a New Community. Grand Rapids: Zondervan, 1992. 구도자 예배 복음전도 페러다임의 교회들 가운데 한 교회가 드리는 예배에 관한 설명

Wright, Timothy. A Community of Joy: How to Create

Contemporary Worship.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현대와 구도자 중심의 예배 전통 안에서 예배 사역의 발전을 위한 실제적인 핸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