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마가복음 1장 21-28절)  



조 태 연



투쟁은 무엇을 위하여?

안식일이 되자 예수는 어부들을 동반한 채 가버나움의 시가지(市街地)로 들어섰다(1:21). 예수는 회당 안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21절). 그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놀랐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권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다.  

그 가르침의 현장에는 불행히도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파산한 한 인생이 있었다. 말씀으로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는(1:14-15, 21-22), 이제는 자기의 새 제자들(어부들)과 익명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행위'로써 보일 차례이다(1:23-28). 선포(1:14-15)와 가르침(1:21-22)이 하나님 나라의 언어적 연출로서 '들음'의 대상이라면, 여기 예수의 귀신축출의 기적이야말로 식탁교제와 함께 그 나라의 행위적 연출로서 '봄'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마가복음 안에서 봄과 들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4장 11-12절과 8장 17-18절을 보라).

예수를 보자 그 더러운 영은 자신이 사로잡은 사람의 입으로 말하였다:"나사렛 사람 예수여,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24절). 이 물음은 열왕기에 나오는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모범으로 하고 있다(왕상 17:18). 사렙다 과부의 경우처럼 그 더러운 영의 이 질문에는 예수를 향한 원망과 적대의 감정이 섞여있었을까. 그 영과 예수 사이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싸움의 전선이 되고 있었다.
계속하여 그 더러운 영이 말하였다:"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24절). 귀신이 예수의 정체를 알아버린 것이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24절). 이쯤 되면 예수도 그의 정체를 알고 그 영도 예수의 정체를 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라 하였다. 이제 그 자와 예수 사이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 대결이 되었다.

복음(마가) 안에서 예수와 그 더러운 영 사이엔 피할 수 없는 대면이 있다. 예수는 그 나라의 복음을 가져오기 위하여 그러한 악령의 세력과의 싸움 속으로 언제나 자신을 내어 던진다. 마가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어김없이 싸우는 분이다. 예수 이야기는 투쟁의 이야기여서 자신의 생애 동안 어떠한 형태로든 악령의 세력들과 싸우고 있다. 예수는 사탄의 집을 뚫고 들어가 그를 결박하고 세간을 늑탈(약탈)하는 강한 분이다(3:27). 악령과의 이러한 전쟁은 일찍이 그의 공생애 사역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1:12-13의 유혹의 사건). 악령의 세력들이란, 병든 자들이든 귀신들린 자들이든 인간 삶의 표면에 나타나기도 한다(1:21-28; 3:20-35; 7:23-30). 그들은 예수와 대립하는 유대(유대교) 지도자들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2:1-3:6). 때로는 생(生)을 파괴하는 자연의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며(4:37-39), 심지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8:33). 한 마디로 말하여, 악령이란 인생에게 재난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이다(참고, 막 9:17,25). 마가가 예수와 악령 사이의 투쟁의 이야기라면 앞으로 이러한 투쟁을 하나의 드라마처럼 전개할 때에 마가는 우리의 상상을 크게 넘어설 것이다.

가버나움 한 회당에서 일어난 투쟁은 예수와 그 더러운 영 사이에 서로 건널 수 없는 간극을 구도로 하여 발생하였다. 대결은 그 파산한 인생을 사이에 두고 "더러운 영"과(23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24절) 사이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이야기의 긴장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파산과 예수께서 그를 회복시킴으로써 이루신 진정한 인간 회복 사이에 있다.

예수의 정체, 그 영원한 신비

드디어 예수께서 그 더러운 영을 "꾸짖었다"(25절). 여기서 "꾸짖다"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 '에피티마오'(ejpitimavw)는, 우리들 삶에서 스승이 제자를 꾸짖거나 부모가 자식을 나무라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말이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안에서 반드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더러운 영 사탄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사이의 치명적인 공격과 저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1:25; 3:12; 4:39; 8:30,32,33; 9:25; 10:13,48 등). "하나님의 거룩한 자" 예수는 그 "더러운 영"을 피하지 않고 대적하였다. 예수는 그 더러운 영을 대면하고 그 영을 "꾸짖었다." 이는 그 파산한 자 안에 있는 그 더러운 영을 저주함으로써 그 '사람'을 온 몸으로 맞아들이는 행위이다.

더러운 영을 향한 예수의 그 거룩한 폭력(ejpitimavw)은 또한 자신의 정체에 대한 타협 없는 '침묵'을 강요하였다:"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25절). 비록 그가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된다. 그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정체는 끝까지 '비밀' 속에 감추어져야 한다. 이것은 마가복음 전체를 통하여 일관된 특성이다. 자기의 정체가 밝혀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예수는 어김없이 자신을 감추신다. 가버나움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알아보는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든(1:34), 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실 때든(1:44),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를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할 때든(3:11-12), 심지어 베드로에 의하여 "그리스도"라 고백을 받을 때든(8:29-30), 혹은 변모의 산 위에서 있었던 그 위대한 신현적 사건에 의해 그의 정체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우주적으로 폭로될 때든(9:7), 그 어느 때든 자신의 정체는 감추어져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확고한 입장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명령하였다, "입을 다물라"(1:25; 4:39). 예수의 정체는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밝혀지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감추어진다. 예수의 정체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마가는 이내 자신의 예수 이야기를 신비의 '복음'으로 만들 것이다.

예수의 꾸짖음(ejpitimavw)에 그 더러운 영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그 폭력적 침입이 있자 그 더러운 영은 자신이 사로잡은 자로 발작케 하면서 그 사람을 빠져나갔다. 그 더러운 영을 향한 예수의 타협 없는 공격은 그 파산한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힘이 정의가 되는 구조 속에서 폭력적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남용으로 파산한 인생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폭력 없이는 오질 않는다.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이렇게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쫓는, 하나님 나라의 폭력적 사건으로 기원하였다. 예수 '가르침'(말씀)의 권능에 놀란 청중은(21-22절), 이제 예수 '행위'(축귀)의 권세에 또 한번 놀라게 되었다(27-28절). 그들은 이렇게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침입에 대하여 '듣게' 되었고, 이제 그 나라가 인생들에게 실제로 어떻게 뚫고 들어오는가 그 능력을 '보게' 되었다.

 

예수의 존재 양식

한 가지 문제가 있다. 23-28절로 하나의 귀신축출 이야기가 완성된다면, 21-22절은 또 무엇인가? 더욱이 21절과 23절 그리고 29절은 각각 '카이 유뚜스'(KaiV eu'quV")로 시작한다. 바로 이 말로써 마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게다가 21절부터 28절까지는 동일한 시간(안식일)에 동일한 장소(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기술한다. 그렇다면 마가는 21-28절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취급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분명 마가는 21-28절을 하나의 단위로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21-22절 없이 오직 나머지 부분만이 귀신축출 이야기의 양식을 완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21-22절은 또 무엇인가?
21-22절과 23-28절은 '전승'의 단계, 즉 마가복음 이전의 단계에서 각각 독립된 채로 서로 무관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에 그렇게 무관하였던 21절 이하와 23절 이하를 마가가 인위적으로 결합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샌드위치 모양의 문학적 구성이다:

21-22절.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권세 있는 자와 같다"

23-26절. 귀신축출 사건

27-28절. 귀신축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권세 있는 새 가르침"


[가르침―귀신축출―가르침]의 도식이 되도록 구성한 것은 다름 아닌 마가의 탁월한 손길이다.

마가가 21절 이하와 23절 이하의 두 예수 전승을 자료로 접수하여 [가르침―귀신축출―가르침]의 도식으로 조합한 것을 살피면(학자들은 이를 '편집'이라 부른다), 우리는 귀신축출의 기적에 대한 마가의 이해를 발견할 수 있다. 전승의 단계(23절 이하)에서 예수는 귀신축출자(Exorcist) 혹 기적행사자(miracle-worker)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편집의 단계 즉 자신의 의미 세계 안에서, 마가는 새로운 예수의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귀신축출자 예수의 모습을 해소시키고 있다. 그 새로운 예수 상이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또 무엇인가?


귀신축출과 기적 행사는 결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는 신앙을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예수께서 귀신을 축출하실 때 그것은 사람들을 혼동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또 그것은 예수의 그 기적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의심하게 하기도 한다. 마가의 의미 세계에서 예수의 가족들은 실제로 그가 미쳤다고 하며 그를 잡으려 한다(3:21).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신학자들)은, 예수께서 귀신축출에 성공하신 것이야말로 그가 바로 바알세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3:22,30). 기도원과 같이 우리들 삶의 가까운 주변에서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거나 그와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 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상투적인 물음 투성이다:

"그 기도원에만 가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그 사람이 정말 그 일을 하였을까?"

"아니, 그의 배후에서 이러한 일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일까 혹은 사탄일까?"

"그것이 하나님이었다면, 그 나은 자는 지금껏 '귀신들렸던' 이 아닌가?"

어디를 보아도 예수에게 지배적인 관심이었던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를 사람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없다. 쓸데없는 망상들뿐이다. 기적은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였을까. 마가는 교회 안에서 귀신축출의 기적이 지나치게 확대되거나 과장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귀신축출의 기적(23-26절)을 가르침의 맥락(21-22, 27-28절)으로 둘러쌈으로써 최소화하고 있다. 마가복음을 연구하는 신약학자들은, 실제로 마가 공동체 안에 기적을 목회 사역의 핵심으로 이해하던 자들이 존재하였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얼마든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곡해할 수 있다. 마가는 바로 이러한 점을 경계하였다는 것이다(이 점에서 마가복음의 해석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이는 Theodore Weeden이다).
그래서였을까. 마가의 예수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질실된 고백은 결코 영웅적 기적의 그 화려한 현장에 있질 않다. 기적은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6:34-45와 8:1-9에 있는 두 차례 먹이심의 기적 및 이들과 관련된 논쟁 및 오해들 즉 8:11-33을 보라).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과 그에 대한 진실된 고백은 오히려 수난의 현장에 있다(15:39)! 진정한 깨달음도 회개도 그리고 신앙의 진실된 고백도 십자가와 부활의 결정적 사건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9:9)!

크리스천의 실존 방식

마가의 예수 이야기에서 예수의 가장 본원적 이미지는 그러므로 기적 행사자가 아닌 '교사'이다. 첫째, 그것이 명사의 형태이든 동사의 형태이든, 21-22,27절에서 '가르침'에 관한 언급이 네 차례나 반복됨을 주목하라. 둘째, 사건의 핵심은 분명 귀신축출이었는데, 27절에서 목격자들의 반응은 이와 모순되게도 가르침에 관한 것임을 주목하라.

물론 가르침의 레파토리에 관한 한 누가나 특히 마태가 우선한다. 예수의 말씀(Q)을 무더기로 받아들여 자신의 예수 이야기에 편입시킨 마태나 누가에 비하면, 마가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차지하는 비율은 훨씬 적다. 그러나 예수를 "교사"라 부르는 경우는 마태나 누가보다도 마가가 우선한다. 더욱이 기적의 현장에서조차 예수는 어김없이 '교사'로 묘사된다. 가버나움 한 회당에서 악령을 축출할 때(1:21-28), 야이로의 딸을 치유할 때(5:35),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6:34), 한 간질병자를 고치던 때(9:17),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기적적으로 저주할 때(11:21), 이 모든 경우에 예수는 기적 행사자라기 보다는 참된 교사로 나타난다. 그는 인생을 가르치고 삶을 깨우치는 스승이다. 한 영혼이 온 우주보다도 존엄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일깨우는 참 스승인 것이다. 마가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는 가르침(말씀)의 레파토리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께서 가르치셨다는 사실과 함께 기적의 권능을 넘어서는 예수 말씀의 '권위' 곧 '엑수시아'(evxousi.a)이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권능은, 기적의 과시가 아니라 예수 말씀의 '엑수시아'를 통해서 온다. 마가의 예수 이야기에서 예수는 언제나 말씀하시고 그의 말씀은 언제나 권능이다. 그가 말씀하실 때 악령이 쫓긴다(1:21-28; 3:20-35; 7:24-30). 그가 명령하실 때 풍랑이 잔잔케 된다(4:35-40). 그가 명하시면 죽은 자가 일어난다(5:35-43; 9:17-25). 그가 연민할 때 병자가 낳음을 입는다(5:21-34). 그의 말씀에 의하여 적들이 굴복되고(7:1-23), 그의 가르침에 "그 열둘"(일명 "열두 제자")이 두려워한다(8:13-21; 9:32; 10:32). 그가 말씀하실 때 무리가 놀란다(1:22,27; 6:2; 7:37; 10:24,26,32; 11:18; 9:15). 그러므로 가장 진정한 예수 따름 곧 가장 진정한 제자직이란, 그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음'으로써 백 배의 결실을 이루는 일이다(4:8,20).

마가복음의 완결을 따르면(16장 1-8절), 사실 그것은 미완성의 복음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는 기적의 자리나 심지어 부활의 현장에 계시질 않는다. 그러므로 마가의 클라이맥스에는 누가복음에서와 같은 부활의 현현도 없고(눅 24), 마태복음에서와 같은 "내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기약도 없다(마 28:19-20). 그는 단지 앞서서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14:28; 16:7). 그렇다면,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까지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들 크리스천의 실존 방식은 무엇인가? 기적인가? 신비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난무하는 귀신을 축출하고자 덩달아 기세를 올리는 카리스마적 신비주의가 결코 아니다. 죽음과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까지, 우리에겐 오히려 예수의 권능 있는 말씀 곧 복음의 "엑수시아"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인간은 무엇으로 인하여 그 인간성이 더럽혀지며 현대 교회는 무엇으로 오염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모든 것, 이를테면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맘모니즘이 사람과 교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가? 또한 출세(성공)지상주의나 실적지상주의에 사로잡힌 그러한 사람이 교회에 가득하지는 않는가? 교회의 오염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마술적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에 입각하여 교우들을 유혹하고 '기적적으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기회주의와 왜곡된 기독교 정신 때문은 아닌가? 이러한 기독교인과 이러한 교회를 예수는 피하실 것이다. 오늘의 인간과 교회는 무엇으로 정화될 수 있는가? 그것은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마가에 귀 기울여 예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그때 그는 이윽고 우리 마음의 갈릴리에 와 우리를 만날 것이며, 이 재회가 황폐한 우리들 인간성을 회복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