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복음 이해

 

김연태



I

바울은 헬라-로마 세계에 기독교의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세기의 헬라-로마세계는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못지 않게 다양하고 급속한 변화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은 때로는 복음의 토착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사람들과 싸웠고, 또 한편으로는 복음을 지나치게 왜곡시키려는 반대자들과 투쟁하면서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기독교의 복음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된, 또는 인종적으로 유대인에만 적용되는 편협된 복음이 아니라 당시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복음으로 이해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가족의 될 수 있다는 비젼을 그의 복음 이해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급속한 변화의 위기에 직면한 현대인들은 바울을 모범으로 하여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였고 나름대로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합의에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다. 신비적, 개인적, 철학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관점들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모든 논의를 여기서 다 살펴볼 수는 없다. 다만 나의 관점에서 관련된 부분만을 검토해 볼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의 바울 복음 연구사를 집대성하여 나온 결과를 기초로 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주장의 나열보다는 독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울의 복음 이해에 관한 나의 논지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새시대의 도래'이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 이해는 묵시적 종말론의 배경 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승리가 선포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되는 구원을 경험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이 우주는 새로운 창조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믿었다.

그런데 바울은 목회적 상황에 따라서 이러한 복음의 이해를 상당히 융통성 있게 접근하고 있다. 때문에 복음을 그 상황과 따로 떨어뜨려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하면 복음을 율법적으로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 복음 이해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 복음의 근원 문제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 다음에 바울 자신이 복음의 핵심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핵심이 바울의 목회 상황에서 어떻게 융통성 있게 적용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울의 복음 이해는 어디서부터 기원한 것일까? 이것에 대한 견해도 많지만 정리해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바울의 복음이 그의 다메섹 체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고, 둘째는 헬라-로마적인 사상 체계로부터 근원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 마지막으로는 유대적 사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나는 마지막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오늘날 대표적인 바울학자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

첫째의 견해, 즉 다메섹 체험으로부터 바울이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바울은 원래 유대교 바리새파에 속한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그 바리새적인 유대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쓴 사람이었다. 그 유대적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을 무척이나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전력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순간에 다메섹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다.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회심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그의 경험을 복음으로 받아들였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전통적인 이해에서 받아들여지는 복음이해이다. 물론 이 견해는 바울의 급격한 변화를 설명하는데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러한 복음 이해는 상당히 개인주의적이고 심리적인 해석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사도행전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문서 연구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이해는 누가의 신학적인 해석에 상당히 좌우된 것이라는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서신에서 바울은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서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 1:15-16)라고 하면서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 해석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다메섹 사건을 소명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소명의 목적은 복음의 전파라고 본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죄의식의 갈등에서부터 복음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선교의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복음을 심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루터나 웨슬레와 같은 해석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서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 복음의 이해가 심리적으로 흐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늘날 서구적인 복음해석의 대부분은 루터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루터적인 복음이해는 심리학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에 머물고 있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둘째, 바울 복음의 근원을 헬라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려는 시도가 있다. 철학적인 면에서는 플라톤적인 영육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불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복음으로 이해하거나, 스토아-견유학파적인 자유를 복음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헬라세계에서 성공적인 발전을 하였던 신비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복음을 신비주의적으로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특히 영지주의와 관련해서는 영지주의적 구속자론이 빌립보서 2장에서 표출되기 때문에 바울의 종교사적 배경이 그것과 상당히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해석들은 바울이 헬라지역에서 태어났고, 또 헬라어에 능통했으며, 그 철학과 종교에 깊숙히 관여했다는 이유 때문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이 과연 거기에서부터 근원한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완벽한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바울 복음의 헬라적 성향에 대해서는 그의 선교적인 적응력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울은 헬라철학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끌어 온 것이 아니라 헬라철학과의 대결에서 기독교의 복음의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적인 산황하에서 복음이 토착화되어 이해된 것과 그 복음의 내적 중심성을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신비주의적으로 혹은 영지주의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복음을 전달할 때 그 지역과 인종, 문화를 고려하여 복음을 융통성 있게 적용한 것뿐이다. 한편으로는 복음을 헬라적인 토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 핵심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 그들과 변증하면서 그들의 용어와 구조를 빌린 것이다.

셋째, 바울 복음을 유대적인 기원으로 보는 입장이 최근의 바울 연구에 있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나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유대적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묵시적 종말론의 종교사적 배경에서 바울의 복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유대 바리새파의 골수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많은 양식 있는 유대교인들이 당시 유대교가 시대의 문제 해결력을 잃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유대교의 자체 반성이 중간기 묵시 문학을 통해서 두드려졌다. 제4에스라서 같은 경우는 아주 솔직하게 유대교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우리 조상의 율법이 더 이상 효력이 없다"(Ⅳ Ezra 4:23)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유대교의 효율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묵시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도 거기서 예외라고 볼 수 없다. 바울이 바리새파에 가담하였지만 유대교 전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성의 흐름에 그 바리새파의 일원인 바울도 예외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서신의 전반에는 이러한 묵시적인 사상이 깊이 스며있다. 따라서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묵시적 구조를 사전에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현대의 사상 구조를 가지고 접근하면 항상 현대인의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묵시적 구조를 가지고 보려고 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바울의 복음은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이해는 루터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사실 개신교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영향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의 원초적인 질문으로 들어가야지 루터가 바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물어서는 안된다. 루터는 자신의 시대 상황하에서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기초로 해서 바울의 복음을 이해했다. 그러한 이해가 개신교적인 복음 이해의 전반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인정해햐 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루터적인 이해,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따르는 해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바울의 복음을 단지 심리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루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 바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신득의'가 너무 지나치게 우리의 복음이해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이신득의'는 바울 복음 이해의 하나의 주제는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는 목회적 상황에 따라서 상당한 중요성을 띨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신득의'가 바울의 복음 전체를 관할할 수 없다. 바울의 최초의 서신인 데살로니가 전서에는 이러한 '이신득의'의 주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더불어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에도 이 주제는 약하다. 물론 바울서신의 양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이 그 양 서신의 중심 주제라고만 과장 되어서는 안된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도 '이신득의'의 주제는 바울의 논증을 위한 하나의 주제인 것이다.

또한 '이신득의'가 현대의 목회에서 얼마나 값싸게 전락하고 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오늘날 한국의 목회적 상황하에서 믿음은 너무도 '값싼 믿음'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과연 복음에 있어서 '믿음만'으로라는 주장이 얼마나 효력이 있는가? '믿음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케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세상이 인정하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숫자는 많지만 그 시대변화의 효율성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두 번째로 바울의 복음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대속의 죽음'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가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대속의 죽음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독특한 것 중의 하나이다. 복음서에서도 대속의 죽음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그이 중요하지 않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죽음이 그다지 강조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죽음이 단지 물리적인 것으로 처리되며 부활을 위한 예비적인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죽음이 부활만큼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울만큼 죽음에 대속의 신학적 의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은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인간을 위한 죽음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상은 헬라적인 순교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신의 헬라-로마적 상황하에서는 많은 전쟁을 치뤄야 했기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영웅적인 행위로 승화되었다. 이러한 죽음의 해석이 종교적 의미로까지 승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헬라-로마적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을 신학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대속의 죽음이 바울 복음의 유일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바울 복음의 유대적인 기원을 주장하는 나의 견해가 옳다면 헬라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대속의 죽음보다는 유대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새 시대의 도래가 가장 핵심적인 바울 복음이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동족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전달하는 것을 그의 생애의 최대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러한 복음이해를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이러한 복음 이해의 배경에는 유대종말론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을 나는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복음을 유대 묵시적 종말론의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묵시적 종말론의 구조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묵시사상의 전반을 논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복음이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점만 다루어 보기로 하자. 우선 묵시적 종말론은 이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이 사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사는 인간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복음이란 이러한 사탄의 지배하에 빠져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원론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힘의 이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세력의 편에 서서 싸움으로써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시대 이원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대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으며, 이제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시대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변환의 변두리에 살고 있는 인간은 항상 종말적인 긴급성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며, 그의 존재는 미래에 의해서 규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인간의 구원은 급속한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구원의 미래가 현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현존적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바로 지금이 구원받을 때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묵시적 종말론은 내용적으로 보면 종말론적인 가치전도(Eschatological reversal)를 꾀하는 사상이다. 기존의 종교적 틀과 내용을 과감하게 반성하고 새로운 틀을 만든다. 가치관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영역은 종교적인 것에 국한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전 영역에 확대된다. 예를 들어 전통 종교에서는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종말론에서는 종교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외적인 종교행위 보다는 내적 자질(inner quality)을 중요하게 본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가 의인보다는 세리와 창기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러한 이해는 전통 종교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묵시 종교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이해가 시대 문제 해결에 있어서 효과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바울의 복음이해는 정리되어야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구원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은 단지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따라서 이 우주적인 세력구조하에서 하나님이 승리를 선포하고, 사탄은 영원히 멸망을 선고받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의 악의 구조도 파멸될 것이다. 구조적인 악도 이제 해결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연과 환경과 우주의 영역에까지도 복음은 적용된다. 새로운 시대에는 훼손된 자연이 치유를 받고 환경이 새로워지며, 우주질서에 하나님의 승리가 선포된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은 그의 목회 현장에서 각각 융통성 있게 적용되었다. 그의 첫 서신이면서, 기독교 최초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복음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살아 생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믿고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강하게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인에게도 종말론적인 삶을 살 것을 촉구하였다. '잉태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살전 5:3) 종말이 급속히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가치관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린도의 상황에서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로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의 세력이 멸하게 됨을 역설하였다. 고린도의 반대자들은 헬라철학에 의해서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특히 영지주의적인 영육의 이원론, 즉 육체로부터 영의 구원을 생각하였는데, 바울은 육체의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이 땅의 삶의 책임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빌립보 상황하에서 바울은 복음을 토착화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의 영지주의적인 구속자 이론의 구조를 받아들여서 예수를 올라갔다 내려오는 구조(Descending-Ascending Redeemer, 빌 2:6-11)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복음의 핵심을 양보하지는 않았다. 빌립보의 반대자들이 십자가가 없는 부활을 강조하고 완전주의에 몰입했을 때, 바울은 단호하게 그들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라고 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양쪽 날개였던 것이다.

갈라디아 상황하에서 바울은 문화적인 각도에서 복음과 율법의 문제를 다루었다. 바울은 유대문화 하에서는 율법과 할례가 구원에서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유대문화가 아닌 이방 문화에서 복음은 율법과 할례를 떠나서도 의미가 있다고 보았으며, 더 적극적으로는 할례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대문화 뿐 아니라 이방 모든 문화가 복음에 적합하게 수용되어야 함을 바울이 주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화라는 것은 옷과 같이 입고 벗을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선교할 때 유대문화의 옷을 벗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로마의 상황에서 바울은 복음을 인종적인 관점에서 이해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을 향하여는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 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고 하면서 유대인의 특권 의식을 질책하였다. 당시 로마교회는 인종적인 갈등이 심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각각의 목회의 상황하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우리가 바울의 각 서신을 대할 때는 이점을 항상 인식하여야 한다. 어느 한편의 서신만으로 혹은 어느 한 단락만을 가지고 바울의 복음 이해를 논의하면서 그것이 바울 복음 이해의 전부인양 말해서는 안된다. 현재 정경에 남아 있는 바울 서신도 바울 사상의 전체를 다 논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주어진 서신만으로도 우리는 바울의 복음을 좀더 개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의 복음 이해를 새롭게 시도하는 것은 21세기의 도전에 응전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바울이 이해하는 복음은 단지 개인의 축복, 치유,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복음 이해는 전 우주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전 우주의 문제에 하나님의 개입과 통치가 바로 복음인 것이다(롬 8:22). 바울은 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시대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창조의 시대라고 믿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새로운 시대'라는 바울의 복음 이해는 21세기 선교를 대비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몇 가지 통찰력을 제시해 준다. 첫째, 복음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개인에게 새로운 구원의 삶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것이 개인주의적 혹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만 복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둘째, 21세기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복음의 핵심의 변질을 방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복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 것이냐 하는 해석의 과제도 분명 중요한 것이다. 셋째, 복음의 핵심은 변하지 않지만 그 해석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융통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그의 복음이 1세기 세계인들에게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21세기는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경험해왔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 변화도 엄청나게 빠르고 다양할 것이다. 과연 기독교의 복음이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예견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만일 어떤 종교가 현실에 안주하여 자기 배만 불리우고 있다면 그러한 종교는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도적으로 나선다면 그 종교는 생명력이 계속해서 새롭게 약동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도 새로운 도전에 새롭게 응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