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뒤집고 온다

-눅10:30-35 -

 

I. 강도에게 당해봐?

먼 옛날 예수는 사람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여 교회마다 연극을 안해본 데가 없고 교인마다 이 극을 안본 자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는다. 그냥 듣고 흘리는 얘기로서 충분한가? 그저 한번 보고 지나칠 연극으로서 예수는 흡족하실까? 이 이야기는 대체 무엇이 아름다운가? 하나님의 새 나라는 도무지 무엇이 새로운가? 조용히 조용히 비유를 다시 듣자. 가만히 가만히 예수를 다시 읽자. 비유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보이고 있다:

(A) 30절 a 여행 중 강도를 만남

(B) 30절 b 강도에게 당함

(C) 31-33절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의 개입

(D) 34-35절 사마리아인의 선행

예루살렘부터 여리고까지는 삼십 여 킬로미터가 된다. 돌로 가득한 불모의 황야, 그 복판으로 난 길은 수없이 많은 언덕들과 비탈들 사이로 굽이친다. 강도들이 매복하기 십상이었고, 예수 당시엔 실제로 강도들이 많기로 악명이 높았다. 어떤 이들은 젤롯당원들로 추정도 하지만, 이야기 속의 강도들은 일종의 산적과 비슷한 노상 강도였을 것이다. 강도들은 한 여행객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채로 버리고 갔다”(30절).

그 불쌍한 이는 알몸이다. 그러므로 그의 옷을 보고서 그 사람의 국적과 출신 그리고 신분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신분과 정체는 끝내 가려져 있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까지도 비유는 강도 만난 자의 이름를 말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이야기가 끝나도록 ‘익명’의 사람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고작해야 그가 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이제 그는 구렁에 빠져 있고, 이 이야기의 목적은 줄곧 이 죽어가는 이의 회복이다. 그 재난을 당한 자 곁으로 한 사람씩 두 명의 인물이 접근하였다.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비유는 이들의 사회적 계층을 밝히는 셈이다. 더욱이 이들은 유대교 사회와 문화의 중요한 역할들로서, 이 언급은 종교적 문화적 가늠쇠이기도 하다. 비유 속의 강도 만난 자나 이 자에게 접근하는 이들 모두가 유대인이다. 화자(話者)도 청자(聽子)도 모두가 유대인이니, 비유를 듣는 이들에게는 이 사실이 특별한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II. 직무 유기(職務遺棄), 아니면 ‘왕따’

제사장과 레위인은 차례로 접근하여 그 죽어가는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그를 피하여 다른 쪽으로 갔다. 왜 피했을까? 그들은 날 때부터 이웃을 모르는 악한(惡漢)이었기로? 그러나 예수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그래서 예수 비유의 리얼리즘의 세계에 충실하려면, 먼저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또한 기득권층일수록 착하기 마련이다. 최소한 그렇게 보이려 한다.

물론 비유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차례로 “그를 보자 피하여 지나친” 경위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서로부터 한 단서를 발견한다. 성전에서 일하는 성스런 이들의 ‘제의적 정결’ 곧 성결의 문제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레 21:1-2, 11).

예수 당시 이 율법이 유효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죽어가는 이를 도울 수 없었다. 그는 죽은 자로 여겨졌고, 그를 도우려면 신체적 접촉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제사장에게도 레위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그를 도울까 아니면 못본 척 지나칠까?”

이것은 실존의 문제였다. 그냥 지나치자니 양심의 방망이가 가슴을 두드렸다. 그를 돕자니 그 지엄한 정결의 규례를 파기하는 꼴이었다. 사람을 살리려면 당분간 성직자이길 포기해야만 했다. ‘부정한’ 자로서는 ‘거룩한’ 하나님께 제사를 집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은 ‘직무유기’(職務遺棄)를 뜻하였다. 그러자니 모든 이스라엘 평신도로부터 존경은커녕 멸시받아야 하고 같은 성직자들로부터도 집단적인 따돌림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을 살릴까, 아니면 아니면...?”

그러나 그 제사장도 그 레위인도 그 알량한 선행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기엔 너무나 ‘지혜롭고’ 너무나 ‘똑똑하였다.’ “내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내 본분을 다하려면, 내 몸을 ‘정결하게’ 보존해야 하지 않는가? 모든 이들이 자신의 맡은 일을 착오없이 수행할 때 이 복잡한 사회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하나님의 경륜도 정상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나라도 ‘정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가? 모든 것을 차치하고,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질 않는가?” 그러나 우리네 속물들과 다름없는 성직자들의 그 유창한 변(辯)을 변(辨)함이 예수의 의도였다면, 그 다음의 이야기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대체 역할이 어떻고 본분이 어떻고 논할 일이 무어랴? 사람을 구하는 일에 체면 따위나 교리 나부랭이가 다 무어랴?

하나님의 나라는, 언필칭 역할들과 사람들로 ‘잘’ 조합된 체계 안에서 그리고 이념들과 교리들로 ‘훌륭하게’ 짜여진 구조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그러나 억울하게 죽어가는 나라가 아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신의 섭리와 자연에 반하여 ‘생명 폐기’를 방조하는 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힘이 정의가 되어 강도들이 세상을 제압하는 그런 나라는 더더욱 아니다. 그 나라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나라며 ‘생명’을 유일한 궁극적 가치로 삼는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가치’이고 ‘생명 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렇게 하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든 아니면 목회의 궁극적 목표든, 모든 것을 ‘인간 가치’와 ‘생명 가치’에만 두자! 다짐컨대 이제는 이렇게 살자. 내 삶의 모든 목적은 예수를 닮아 인간 가치 생명 가치만을 위하는 것이 되게 하자!

III. 입장을 확 바꿔봐?

하지만 저쪽을 보라.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하여 지나친 후에, 한 사람이 다가온다. 이 사람도 물론 익명이다. 하지만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이 비유는 지명(예루살렘, 여리고)과 문화적 가늠쇠(사마리아인, 레위인, 제사장)를 갖는 유일한 이야기다. 여기, 그가 ‘사마리아인’이란 언명은 매우 중요하다. 앞서 등장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유대인’으로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꽤 괜찮은 신분의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은 그 반대다. 그러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모두 “그를 보면서도 피하여 지나친” 것에 비하면(31, 32절), 이 자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섰다”(33-34절). 그뿐 아니라 큰 손실을 감수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보이며 그를 살려냈다(34-35절).

사려깊은 학자의 눈으로 볼 때,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은 전혀 뜻밖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일종의 당연한 ‘사회적 위계’가 있었는데, 이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 위계란 다음과 같다: 제사장--레위인--이스라엘인(평민/평신도)--사생아--성전노예--개종자--해방노예(m.Hor. 3.8). 그렇다면,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 다음에 그 불쌍한 자에게 접근하는 인물로는 이스라엘인이 왔어야 옳다. 그가 등장하여 그 강도 만난 이를 돕고 영웅이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는 오질 않는다. 엉뚱하게도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이 온다. 난제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지도자들은 그냥 지나쳤고, 기다리던 자는 오질 않았다. 대신 그들의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를 구한다.

사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수의 의도를 읽고자 하면 우리는 한 가지 모순에 직면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은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의 편에서 불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저 더러운 이방인들과 피를 섞은 혼혈족속이었다.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똑같다”는 잠언은 그 적대감의 한 예에 불과하였다(m.Sheb 8.10).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의 ‘기름’이나 ‘포도주’를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사마리아인의 모든 것은 부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랍비 전통을 따르면,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 이스라엘의 구속은 그만큼 늦어진다. ‘사마리아 사람’은 재수 없는 친구였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혐오스런 존재였다.

IV. 비유와 나, 예수와 나

연속극을 보든 소설을 읽든, 누구나 특정한 인물에게서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찾거나 또는 심정적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동정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명분에 찬 당위일 수도 있다. 이를 가리켜 식자들은 “동일시”라 부른다. 우리에게 고민은 이것이다. 과연 이 비유 속의 어떤 인물과 나 자신을 동일시할까? 그들 가운데 나는 누구와 같을까? 죽어가는 이 사람을 지나쳐버린 제사장이나 레위인일까, 혹은 경멸스런 그 사마리아인일까? 사마리아인을 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제사장이나 레위인 편을 들자니 모양새는 좋지만 예수의 의도가 맘에 걸린다. 그렇다면 강도는 또 어떠할까? 아니면, 강도 만난 이?

이 비유를 듣는 우리에게 동일시의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강도 만나 죽어가는 그 사람이다. 적대자에게 구원받는 그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 하며 예수의 이 비유를 통째로 부인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든지, 아니면 예수의 비유를 폐기하든지 해야 한다. 예수의 비유를 뿌리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구역질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제사장-레위인-이스라엘인(평민/평신도)]의 위계를 깨야 한다. 이것은 물론 인종과 문화 그리고 종교와 계급화에 따른 인간 차별의 기제이다.

비유는 처음부터 “나”[聽子]를 참여자로 이끌었다. 비유(예수)와 나 사이엔 대화가 있다. 예수의 이야기에서 그 강도 만난 이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표정도 없다. 이는 바로 나의 존재를 그 안에 넣음으로써 비유의 사건을 몸소 체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그와 하나가 된다. 처음엔 이 비유가 나로 하여금 그 이름 없는 자와 함께 사납고도 위태로운 길을 따라 걷도록 나를 불렀다. 그 다음엔 나를 강도의 표적으로 삼았다. 죄다 옷을 벗겨 나신(裸身)으로 만들었고 가진 것조차 다 빼앗았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후줄근하게 두들겼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구렁에 처박힌 채, 나는 내 앞에 제사장이 다가서고 또 레위인이 오는 것을 본다. 이제 나는 흠없는 한 유대인으로서 내게 혈통과 신앙이 같은 존경스런 이 유대인 성직자들로부터 도움을 구할 권리가 있다. 목숨을 구하려 소리를 친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입 안에서만 웅웅거릴 뿐, 가위눌림과 다를 바 없다. 짐짓 망설이더니 아아, 못 본 체 가버린다! 그들은 절대로 도움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나에게는 아니었다. 제사장도 그랬고 레위인도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과 가까운 분들이니, 하나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죽어가는 나에겐 쓸모 없으려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내 희미한 눈으로 또 한 명의 사람이 내 앞에 다가오는 것을 본다. 얼핏 보아도 행색은 영락없는 사마리아인이다. 나는 이 자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구할 권리가 없다. 만일 내가 그 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나는 이스라엘의 구속을 더디게 하는 반역자가 될 것이다. 사선을 넘나드는 마당에도 끝내 재수가 없다. 하지만 이 자도 사람이 아닌가? 구차하지만 이 이교도에게 생명을 구걸할까? 아니면, 믿음을 위해 민족혼을 위해 이스라엘 장부의 기개를 보이며 장렬하게 산화(散華)할까? 살고 볼까, 아니면 명분을 지킬까? “아아, 웃음[齒牙]을 보일까, 아니면 자비를 구할까?”

기억은 아련하다. 그러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내게로 와 내 몸을 ‘만진다.’ 아니, 나의 제일 약하고 제일 아픈 환부(患部)를 만진다. “아니 ... 아니 ... 이럴 수가? 누가 당신더러 나를 만지라 했는가?” 그러나 나는 무기력하다.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저항할 힘도 없다. “아아,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그는 내 환부에 사마리아산(産)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다. 이제 내 핏줄 속엔, 그들의 문화를 타고 종교를 타고 계승된 그 저주스런 유전자가 흐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의 신(神)에게 나의 소생을 기원한다.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 조상들께 대물림한 신앙적 순수함은 또 어찌할 것인가? 억제할 수 없는 혼란이 회리보다도 강하게 몰아쳐온다. 그러나 그는 나를 나보다 조금 큰 나귀에 태운다. 떠그덕떠그덕, 어디론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아, 나귀 등 위에서의 감미로운 흔들림과 몸의 안온함에 스르르 눈이 감긴다. 아아, 얼마만의 안식인가. 기억하기도 두려운 그 강도들을 이내 잊어버리듯, 회리 같은 그 혼란도 차츰 망각의 바다로 침잠한다. 이내 의식을 잃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게로 이렇게 왔다. 그것은 회복이었고 소생이었으며 생명이었다! 나의 고집과 내 자존심에 비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때 이렇게 불가항력으로 찾아왔다. 또한 구원의 가능성은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것은 멀리서 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을 만한 동족민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받은 이방인에게서 왔다. 고집 센 나에게 예수가 묻는다. “너희들, 편견과 아집으로 교만한 자들 가운데 누가 저 혐오스런 자를 너희의 구원자로 받을 수 있겠느냐?” 결국 이 비유는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재난을 당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내게 무엇과 같은지를 깨닫게 한다.

V. 세상을 확 바꿔봐?

내가 그 죽어가는 자와 동일시 할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입장을 다시 한 번 바꿔보면 드러난다. (1) 만일 곤고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었다면, 굳이 유대인 성직자들이나 사마리아인이었을 필요가 없다. 흔한 이야기들처럼 그냥 아무나 세 사람을 등장시키면 그뿐이었다. (2) 만일 예수께서 이웃 사랑을 가르치면서 예루살렘 사제들과 기존의 종교 질서(유대교)를 비판하려 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에 이어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인(평신도/평민)을 등장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3) 더욱이, 만일 예수께서 원수 사랑을 설득하려 했다면, 오히려 사마리아인을 거반 죽게 하고 보통 사람 유대인들 가운데 아무나 선한 이 하나를 등장시켜 그를 구하게 하면 되었다. 그렇게만 하여도 이웃 사랑과 원수사랑의 교훈을 위하여는 기실 지나치게 과격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목적은 곤궁에 처한 이웃을 도우라는 것이 아니다.

이웃 사랑의 가르침도 원수 사랑의 감화도 비유의 요점이 아니었다면, 예수의 의도는 무엇인가? 정상적인 유대인 예수께서 유대인 회중에게, 그것도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여, 그 성결한 유대인을 죽이면서 그 혐오스런 사마리아인으로 그를 구하기까지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왜 예수는 제일 부정하고 제일 구역질나는 친구에게 제일 착하고 제일 빛나는 배역을 맡길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자에게 그렇게 넘어가는 것일까?

심술(心術)이었을까, 심산(深算)이었을까? 예수의 난맥(亂脈)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존경받는 성직자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사람의 행위에 가려 뒷전으로 밀리다가 자연스레 잊혀진다. 이후로 비유는 줄곧 이 사람만을 무대에 남긴 채 각광(脚光)을 비춘다. 더욱이, 글 머리의 ‘구조’에서 보듯, 예수는 비유의 절반 이상이나 할애하면서 그 사마리아인의 행위에 대한 서술(D)을 ‘기형적으로’ 길게 제시하는 셈이다(33-35절). 30-32절에서 예수의 이 비유가 지금까지의 많은 요소들을 소개할 때에(A, B, C) 말을 절제하면서 요점만 보도하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행위에 대한 서술(D)은 그저 “그가 자비심을 가졌다” 혹은 “그가 그를 돌봐주었다” 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부정한’ 사마리아인으로 ‘정결한’ 유대인을 구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를 뒤집기 위함이다. 예수의 시적 상상(詩的想像)에서, 그 청중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은 결코 영웅이 되질 못하고 오히려 처참하게 죽어가는 희생양이다.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분명 비유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는다. 아니, 현실 세상에서는 혐오스런 사마리아인이 비유 세상에선 망인(亡人)의 영광스런 ‘구원자’로 등장한다. 이렇게 세상의 선한 사람(제사장과 레위인)은 나쁜 사람이 되고 나쁜 이(사마리아 사람)가 좋은 이로 될 때, 세상은 뒤집힌다. 아니, 예수가 세계를 뒤집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도 인간의 구원도, 세계를 뒤집은 채 전혀 뜻밖의 사람을 통하여 온다는 말일까?

이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로서, 종교와 계급화를 통하여 인간을 차별하고, 또 이 차별적 기제(질서, 구조)를 통하여 문제 많은 ‘세계’를 지탱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뒤집어버린다. 구원이 누구를 통해 오든 무슨 상관이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든 무엇이 문제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다스림이 종교적 우월성과 경건의 겉 껍질 속에 임한다는 믿음을 노골적으로 도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모든 교만한 우월감과 종교의 경직된 제도를 초월하여 구현된다. 종교와 경건의 범주를 넘어섬이 없인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오지 않듯이, 사회 제도와 문화 전통 그리고 인간의 통념과 다수의 합의를 깸이 없이는 결코 그 나라가 오질 않는다. 그 나라는 세상을 뒤집고야 이루는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는 문제 많은 이 세상을 뒤집으려 침입해올 것이다! 물음은 이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고 세상의 ‘악한’ 것을 ‘착하다’ 하는 것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을 구원의 여망으로 보는 것이라면, 그래서 이렇게 세상을 뒤집는 ‘반전’(反轉)이라면, 그 나라가 침입해 들어오는 위기의 순간에 나는 나와 나의 세계를 그 아래 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