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地)과 인간(人) 그리고 하늘 나라(天)

일곱 개의 '자연 비유'와 이미지 네트워킹

 

조태연

 

 I. 들어가는 말

  일군의 예수 비유들은 (1) 땅과 (2) 씨 또는 그것이 자란 나무(식물) 그리고 (3) 인간을 기본적인 요소로 등장시킨다(은밀히 자라는 씨, 겨자씨, 씨 뿌리는 자, 곡식과 가라지). 씨의 소재는 변주되어, 그 자리에 보화가 놓이기도 하고(밭에 감추인 보화) 씨 없이 나무만 놓이기도 한다(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또는 씨든 나무든 아예 생략된 채 땅을 차지하기 위한 끔찍한 싸움을 소개하기도 한다(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모든 자연 과정 및 인간 문화를 통해 설명된다. 이 논문이 "자연 비유"라 부르는 예수의 일곱 비유는 그 문학적 요소들과 구성 그리고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에 있어 어떤 통일성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예수의 사유에서 땅의 일(地: 自然)과 인간의 일(人: 文化)이 무엇과 같은지, 하늘 나라(天)는 이 둘의 관계에 따라 어떻게 정의되는지 그 단서를 제공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우주의 세 바탕(三才)이 되는 하늘 나라(天), 땅과 자연(地), 및 인간(人)이 서로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이 논문은 개별적 비유에 등장하는 제반의 문학적 요소들에 대한 상징성을 연구할 것이다. 각 요소들의 상징성은 적어도 (1) 범종교적 및 문화적 차원에서의 보편적 용례 그리고 (2) 비유 및 아포리즘 등 예수의 '진정한' 말씀 전승의 두 차원에서 비교 및 보완적 관계에서 추구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일곱 개 자연 비유에서 각각 하늘(天)과 땅(地)과 인간(人)의 세 영역에 나타나는 문학 요소의 이미지와 상징을 통합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이 논문은 몇 가지 전제 위에서 연구를 수행한다. 우선, 화자(예수)의 한 작품(비유)에 나타나는 특정한 상징과 이미지는 동일한 화자의 다른 작품에서도 동일한 의미와 가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두 개 이상의 비유나 혹은 다른 '진정한' 예수전승에서 어떤 동일한 문학적 요소가 나타난다면, 그 요소는 동일한 의미의 이미지와 상징을 공유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시적(詩的) 상상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타나는 새는 겨자씨의 비유에 등장하는 새와 동종(同種)의 새고 예수의 다른 가르침(경구)에 나타나는 새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자는 일곱 개의 자연 비유들을 개별적이기보다는 통합적으로 관찰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만일 개별적 비유의 경계를 넘어 이미지와 상징의 '네트워킹'을 시도할 수만 있으면, 해석자는 한 비유를 해석하기 위해 다른 비유에서 확인된 이미지와 상징을 끌어올 수 있다. 나아가 일곱 개의 자연 비유들을 '연속적으로' 읽어 예수의 사유 안에서 우주의 삼재(三才: 天地人)와 관련된 어떤 '서사적 구조'라도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지속적으로 생태학적 조망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특히 인간의 행동 곧 '문화'(文化)와 우주의 법칙 곧 '자연'(自然)을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 물론 땅은 자연을 대표하고 인간은 문화의 대표자가 된다. 예수의 자연 비유에서 하늘 나라는 이 둘의 관계 속에 표현된다.  

 

II. 자연 비유와 상징의 네트워크

 A. 일곱 개의 비유들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예수전승 가운데 진정성을 가장 높게 평가받는 비유와 아포리즘(警句)은 하나같이 자연계와 그 일부인 인간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한다.1)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나라(하늘 나라)를 '하늘'(天)로 상징화하고 또 그 이야기 소재를 구성하는 자연계와 인간 경험을 각각 땅(地)과 사람(人)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예수의 비유야말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삼재(天地人)가 만나는 가상 무대라 볼 수 있다. 예수의 일곱 개 자연 비유는 대부분 천지인의 삼재를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 관계에 관한 이야기든지 혹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행위와 관련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일곱 개의 자연 비유 가운데 네 개의 비유는 각기 씨와 땅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룬다(겨자씨, 은밀히 자라는 씨, 씨 뿌리는 자, 곡식과 가라지). 만일 겨자씨의 비유에서 마가 본문의 구도가 더 원형에 가깝다면, 이 비유는 아예 인간 존재를 등장시키지 않는 셈이다. 인간을 등장시킨 세 개의 비유는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파종과 추수를 인간의 역할로 설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비유는 한결같이 인간의 역할을 부수적인 요소로만 설정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농부는 씨를 뿌린 후 무대에서 사라지고,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농부는 파종 후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땅이 모든 일을 끝내자 낫을 들고 장면에 복귀한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만 예외적이어서, 인간의 악한 동기나 혹은 그에 따른 반응 양식을 다룰 뿐이다.

 어떠한 경우든 네 개의 비유 모두에서 땅은 씨를 품고 있다. 씨가 농부의 손을 떠난 후, 씨의 발아와 성장 그리고 결실의 여부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외 없이 땅의 역할이다. 농부의 추수란 인간이 땅으로부터 얻는 일정한 혜택일 뿐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땅이 인간에게 베푸는 신적 은총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상 씨를 품은 땅에 관한 네 개의 비유 가운데 특이한 것은 겨자씨의 비유다. 이 비유만 농부의 역할을 설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직 이 비유에서만 씨가 성장한 결과 하늘의 새들이 찾아와 "그 그늘 아래" 깃을 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새들이 땅에 둥지를 트는 것이다. 결국 땅은 죽은 씨를 살리고 성장케 하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그 작은 겨자씨를 살리고 또 자라게 하여 새를 부르되 자신에게로 부르는 셈이다. 만일 하늘에서 오는 새들이 여느 종교적 전통이나 시적 상상 혹은 문학적 표현에서처럼 신성과 초월의 상징이라면, 땅은 자신에게로 하늘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땅의 사건인 것이다.

  씨를 품은 땅에 관한 위 네 개의 비유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겨자씨의 비유와 유사한 것은 보화의 비유다. 이 비유는 하늘 나라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고 한다. 첫째, 위 비유들에서 땅이 그 귀한 씨를 품듯이 이 비유에서 땅은 보화를 품는다. 씨의 비유들에서 씨가 땅과 결합할 때 땅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땅이 보화를 품을 때에는 그 땅은 어떤 놀라운 잠재력을 갖는 듯하다. 둘째, 겨자씨의 비유에서 새가 "그 그늘 아래" 깃을 들이고 하늘이 땅에 깃드는 것처럼, 하늘 나라는 보화와 같되 그것은 땅 속에 감취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서 경험된다.

보화의 비유는 이렇게 겨자씨의 비유와 동일한 의미 구조를 가지면서도 씨의 비유들과는 다른 문학적 모티프를 소개한다. 보화의 발견자(소작농)는 주인(땅의 소유자)으로부터 보화를 감추는데, 이는 주인을 향한 기만이다. 기본적으로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땅 위에서 발생하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 암시되어 있다. 그는 또한 전재산을 매각하고 땅을 매입하는데, 이는 주인으로부터 보화를 얻고자 하는 목적 아래 그 소작인이 감행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라 할 수 있다.

포도원의 악한 소작인들이 주인으로부터 포도원을 빼앗고자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판적 물음은, 그가 땅을 사고 소유할 수는 있을지언정 땅 속의 보화를 과연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보화의 비유는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비유는 동일한 문학적 주제를 소개한다고 볼 수 있다. 보화의 비유에서 하늘이 깃든 신성한 가치를 그 소작농이 자본 가치와 부동산 가치로 전락시키고 '투기'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 비유에서 포도원의 소작농들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피의 '투쟁'을 벌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땅 위에서 땅의 소유와 관련하여 인간들이 벌이는 일련의 사건들 및 과정과 관련된다.

이상 여섯 개의 비유들과 동일한 연장선 위에서 구연되는 이야기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다. 비유의 구도에서 씨와 파종은 없었지만 땅 위엔 나무가 있다. 다른 비유들에서처럼 땅은 독립변수로 존재한다. 그 비유들에서처럼 나무가 결실하는지의 여부가 온전히 땅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땅 위에서 혹은 땅을 사이에 두고 투기와 투쟁을 일삼는 다른 비유들과 달리, 인간(과원지기)의 역할은 거름(희랍어 κ?πρια는 문자적으로 '똥 더미'를 뜻한다)으로써 다시 땅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일곱 개 자연 비유는 그 함축하는 주제와 의미가 어떤 유기적 관련성 안에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모든 비유들 가운데 이들은 하나의 독특한 범주를 형성하며 의미의 모체(matrix)가 된다.

 

B. 문학요소와 상징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상 세 가지 범주에 속하는 일곱 개의 비유들은 공통된 주제를 다루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다른 주제로 발전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각 비유가 공통된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유사하지만 조금씩 다른 문학요소들을 자유롭게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 요소들은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인간(人)의 세 가지 영역에서 다채롭게 나타난다.

첫째, 하늘과 관련된 요소들은 어떠한가? 이 비유들 가운데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제외하고는 "하늘 나라"(하나님의 나라)를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하지만 예수의 언어와 메시지 그리고 그의 교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다.2) 그리고 예수의 언어와 가르침 가운데 그 나라의 의미에 대한 가장 우선적인 담론은 말할 것도 없이 비유다. 위 두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를 명시적으로 언급치는 않는다 하여도, 그 비유들의 이야기 사건조차 틀림없이 그 나라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자연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나 혹은 하늘 나라를 직접 언급하기도 하지만, 하늘에 '새들'이나(겨자씨, 씨 뿌리는 자) '해'를(씨 뿌리는 자) 등장시키기도 하고 혹은 '밤과 낮'의 순환을 제시하여 배경을 이루기도 한다(은밀히 자라는 씨).

둘째, 인간과 관련된 요소들은 복합적이다. 겨자씨의 비유만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 존재를 등장시킨다. 이들 비유에서 인간은 1인 '자영농'인 듯한 비교적 단순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은밀히 자라는 씨, 씨 뿌리는 자). 혹은 2인 이상이 특정한 관계를 형성한 채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로 나타나기도 한다(보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아니면 땅의 주인과 그 밖의 다른 이('원수')가 적대적인 관계 속에 나타나기도 한다(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도마의 본문에서는 땅의 주인과 '원수' 2인이 적대 관계 속에 있다). 이 적대 관계는 집단 간의 갈등으로 규모가 커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땅의 주인은 종들을 둠으로써 '주종관계'를 이루며, 다른 한편으로 이들과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소작농)도 둘 이상이다(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마태 본문도 도마의 경우와 달리 이런 구도 속에 전개된다).

그들의 행위(文化)는 어떠한가? 씨와 땅의 결합을 다루는 비유들 가운데 세 개의 비유에서 그들은 '파종'과 '추수'의 일을 한다(은밀히 자라는 씨, 씨 뿌리는 자, 곡식과 가라지).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농부의 행위는 특기할 만하다. 파종 이후부터 추수 직전까지 그 긴긴 시간 동안 그는 단지 "밤낮 자고 깨곤"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대로 밤과 낮으로 순환하되, 농부는 무위(無爲)의 생활 가운데 밤에 자고 낮에 깨는 생활의 리듬을 지키는 것이다. 자연의 리듬에 생활의 리듬을 실었고, 그러는 동안 땅에 떨어진 씨앗은 성장의 리듬을 보인다. 이와 유사한 것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다. 과원지기는 땅의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려 한다. 인간의 행위가 문화(culture)라면 이들의 문화는 땅의 일 곧 자연(nature)과 조화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의 비유들에서 인간의 행위는 훨씬 더 '작위적'이다. 보화의 비유에서 발견자(소작농)는 밭의 주인이 보지 못하도록 보화를 다시 묻는다. 급히 소유물을 매각한 후 밭을 매입한다('매매'). 행위의 동기는 물론 보화에 대한 '소유욕'이며, 그 과정은 주인을 향한 '기만'과 '배반' 그리고 '투기'라 할 수 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인간은 원한관계에 의하여 좋은 씨 가운데 나쁜 씨(가라지 종자)를 덧뿌린다. 마음의 동기는 단지 적대자에게 음해를 가하는 것뿐이다('가해'). 추수는 가라지를 모아 불태우는 과정으로 끝이 난다('인내'와 '심판').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비유에서 이익을 향한 지주의 집착과('영리') 땅을 소유하기 위한 농부들의 집착('소유욕')은 끝없이 부딪힌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끝내 아들의 살해라는 극단적 행위를 통해서만 진정된다('투쟁'과 '폭력적 살해'). 인간의 문화는 땅의 일 곧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가장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은 땅과 자연에 관한 문학 요소들이다. 일곱 개의 자연 비유가 예외 없이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문학적 요소는 오직 '땅'이다 많은 경우 그냥 땅으로 표현한다(겨자씨, 은밀히 자라는 씨. "땅"은 마가가 선호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밭'이나(보화, 곡식과 가라지. "밭"은 물론 마태적 표현이기는 하다) 혹은 '포도원'(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니면 '길,' '돌,' '가시떨기,' 혹은 '좋은 땅' 등의 다양한 토양으로 기호화되기도 한다.

모든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 요소가 땅이라면, 자연 비유에서 땅과 관련하여 자연계의 매우 중요한 요소는 '씨'와 '파종'이다. 씨와 파종을 다루는 비유는 모두 네 개인데, 이들 모두에서 땅은 어김없이 씨를 품는다. 물론 농부의 역할이 개입되기도 한다. 씨와 땅 그리고 농부는 여러 가지 방식의 조합을 보인다. (1) '씨와 땅의 결합'에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에 나타난다. 무슨 씨든 어떤 땅이든 상관없이 단지 하나의 씨가 땅에 심겨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이 하나의 씨를 땅 위에 뿌림과 같다"(막 4:26). (2) 이 기본적인 구도로부터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슬며시 구도의 변형을 시도하였다. 씨와 농부를 고정시키고 땅의 종류를 다양화한 것이다. 동일한 농부가 동일한 씨를 뿌리지만 씨가 어느 종류의 땅과 결합하였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은 각기 흙을 함유하는 양과 성장의 환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3) 겨자씨의 비유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구도를 발전시켰다. 땅을 그대로 둔 채 단지 씨의 종류를 특성화한 것이다. 그 씨는 아주 작은 것으로서 '겨자씨'다: "그것[하나님의 나라]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 위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막 4:31). (4)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러한 구도를 한층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땅은 그대로 두었으나, 인간 존재와 함께 종자를 다양화한 것이다. 땅의 주인(혹은 그의 종들)은 '좋은 씨'를 뿌리고 원수는 '가라지'를 뿌린다(물론 마태는 도마와 달리 주인이 종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 결과 같은 밭에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도마는 "밀"이라 하고 마태는 "곡식"이라 한다).

(5) 이상 네 가지 씨의 비유와 유사한 것은 보화의 비유다. 그러나 땅이 품은 것은 씨가 아니라 '보화'고, 더 이상 파종도 없고 씨의 발아와 식물의 성장도 없다. 따라서 식물도 없고 결실도 없다. 오직 보화를 소유하기 위하여 재산을 팔고 밭을 사는 인간 행위만 있을 뿐.... (6) 소유를 위한 인간의 행위를 다룬다는 면에서 이와 유사한 것은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비유다. 여기서도 씨와 파종 그리고 성장과 추수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결실도 없다. 단지 땅의 소유를 위한 투쟁만 있을 뿐이다. (7) 그러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식물이 땅에서 자라고 결실의 문제가 쟁점화 된다는 점에서 위 네 가지 씨의 비유들과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씨와 파종의 모티프를 생략한 채 땅과 식물의 관계를 다룬다. 물론 땅의 형태는 포도원으로 구체화된다. 땅 위에서 자라는 것은 더 이상 밀과 같은 일년생이 아니라 몇 십년을 버티며 존재하는 '나무'가 되어 있다.

씨와 땅이 결합한 결과는 무엇인가? 땅 위에서 식물이 다 자란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씨를 특성화한 겨자씨의 비유에서, 씨를 품은 땅은 '겨자식물'을 낸다. 이 식물은 '겨자열매'를 맺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늘'을 드리운다. 겨자식물은(궁극적으로 땅은) 열매와 그늘로써 하늘의 새들을 부른다. 그러면 새들이 날아와 그 그늘 아래 '둥지'를 튼다. 둘째, 씨와 땅의 결합을 제시하는 비유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를 보자. 이 비유에서 땅이 씨를 품은 결과는 땅 위의 장면으로만 묘사된다. 씨는 "나서 자라되," "처음에는 싹으로 다음에는 이삭으로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성장한다"(막 4:27, 28). 성장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셋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성장과 그렇지 못한 경우의 단계를 지표 아래와 지표 위의 장면으로 정교하게 묘사한다. 식물의 성장은 땅의 종류에 따라 등급이 달라지고 그 운명도 각각의 단계에서 달라진다. 씨를 품은 땅은 지표 아래로는 함유하는 흙의 양이 많을수록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다. 지표 아래로 뿌리가 튼튼하면 지표 위로는 '싹'을 틔우고 '이삭'을 낸다. 그 중에서도 성장의 환경이 좋아 경쟁적인 식물('가시')이 없는 경우에는 온전히 자라고('성장') 무성해져서('증가') 결실을 낸다('추수'). 그렇지 않으면 씨의 상태에서 새들에게 먹히거나('먹음'), 싹의 상태에서 해가 태우거나('태움'), 혹은 이삭의 상태에서 가시에 찔려 죽는다('질식').

자연 비유들 중에서도 땅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다. 이 비유는 과원지기의 말을 통하여 지력을 상실한 땅의 회복을 위하여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문학적 동기를 소개한다. 여기 거름이라 번역된 코프리아(κ?πρια)는 '똥 더미'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똥 더미에 관련시키는 이유는 유기물이 땅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일곱 개 자연 비유는 다음의 중요한 문학적 요소들이 다양하게 조합을 이루며 나름대로 이미지와 상징의 네트워킹(networking)을 형성하고 거기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천(天)--"하늘 나라"(하나님의 나라), 해, 하늘의 새들

인(人)--인간: 농부, 주인-소작농, 주인-과원지기, 주인-원수,

             주인과 종들-악한 농부들

        문화: 파종, 추수, 밭 갈기, 발견과 감춤, 팔기와 사기, 자고 깨기,

             불태움, 투기, 투자, 투쟁, 살인, 위탁과 경작, 땅 살리기

지(地)-- 땅:  땅, 좋은 땅, 흙, 밭, 포도원, 길, 바위

       식물: 식물(겨자식물, 곡식, 가시나무, 밀, 가라지, 무화과나무),

             씨(씨, 겨자씨), 성장(씨, 싹, 이삭, 열매)

             열매(열매, 겨자열매, 무화과)

      기타: 보화, 가지 그늘, 둥지, 배설물

 

 구분

  보화

 겨자씨

  은밀히

자라는 씨

    씨

 뿌리는 자

 가라지

 포도원의

농부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하늘()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       )

 (       )

  하늘에

 속한 것

 

 새들:둥지

 밤과 낮 

 해: 태움

새들: 먹음

 

 

 

 사람()

주인

사람/소작

 

   농부

   농부

主人-원수

 종

主人-농부

종들

주인

과원지기

인간 행위

(문화도구)

발견, 감춤,

팔고, 사고

 (소유물)

 

파종, 추수

자고, 깨고

   (낫)

파종(추수) 

파종, 추수

불태움

 

투자, 집착,

폭력, 살해

 

 

위탁, 경작

식물

 

(겨자열매)

 겨자식물

싹, 이삭,

곡식, 열매

곡식, 뿌리,

가시: 찌름

밀-가라지

 

 

 (무화과)

무화과나무

 땅에

 속한 것

 

   그늘

   둥지

 (밤과 낮)

 

 

 

  배설물

  땅()

   밭/땅

    땅

    땅

길, 바위,

좋은땅, 흙

  밭/땅

포도원/땅

포도원/땅

 씨

보화:

감취어있음

겨자씨:

      작음

    씨

    씨

  씨-씨

 

 

기타

 주요 개념

 및 이미지

人: 기만

    배반

    투기

自然: 작음

      성장

 먹고 먹힘

天: 내려옴

  둥지틀기

人: 무위,

    무지

地: 스스로

 

自然:

손실과결실

먹임, 먹힘

文化:

원한, 악행

혼합, 분리

 

文化:

소유욕,

상속, 집착,

기다림,

투자, 투쟁

地: 지력↓

人: 심기

   (찍기)

   기다림

地: 지력↑

  

이 도표는 일곱 개의 자연비유들이 각각 어떤 중요한 문학 요소들을 갖는지 종(縱)으로 배열하였고, 또 다른 비유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들은 동렬에 놓이도록 횡(橫)으로 위치시켰다. 예를 들어, 하늘의 새는 겨자씨의 비유에도 나타나지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도 나타난다. 이 경우 이들은 동렬에 놓인다.

이상과 같이 일곱 개 자연비유의 문학 요소와 주제를 파악하였으면,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은 각각 무엇과 같고 또 그 삼재(天地人)의 관계는 무엇이었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이 요청된다. 첫째는 각각의 비유를 생태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며, 둘째는 각각의 문학적 요소들이 예수의 어느 특정한 비유 뿐 아니라 다른 비유들에서도 보편적으로 어떤 이미지와 상징을 갖는지 살피는 일이다. 전자가 씨줄과 같은 작업이라면 후자는 날줄과 같은 일이다. 특히 후자를 위해서는 위 도표에서 보듯 개별적 문학 요소의 이미지와 상징을 '횡으로' 읽어야 한다. 비유의 경계를 넘어 이미지와 상징을 이렇게 횡으로 읽노라면 많은 비판적 물음을 접하고 또 창의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겨자씨의 비유에 나타나는 하늘의 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타나는 그 새와 동일(同一)한 새일까, 아니면 최소한 동종(同種)의 새이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다. 동일 인물(역사적 예수)에게서 나온 동일한 범주(자연 비유)의 화두(하나님의 나라와 자연)라면, 동일한 문학 요소는 동일한 (최소한 유사한) 범주의 의미함축을 갖는다고 전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III. 하늘엔 해가 뜨고 새들이 난다

비유가 펼치는 세상이 예수의 시적 상상에서 왔다면, 비유 세상에서 하늘에는 해가 뜨고 새들이 난다. 예수에게 하늘이란 무엇인가? 해는 무엇이며 하늘의 새들은 또 무엇인가? 이들이 갖는 보편적인 상징성을 살피면 예수의 시적 상상력과 비유 세상을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 하늘

하늘은 적어도 다음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하늘은 신(神)을 상징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하늘의 푸른색은 성스러운 신의 얼굴을 감추는 베일이고 구름은 그의 옷이며 하늘의 별들은 그의 눈이다. 라르센은 "하늘은 아마도 이 세상에 대한 신의 감정이리라"고 하며 푸른 하늘이 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음을 암시한다. "알 수 없어요"에서 한용운이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라 물을 때 하늘은 절대자의 얼굴이다. 둘째, 하늘은 초월을 상징한다. 보들레르의 작품에서 하늘이 "자연의 그윽한 깊이"와 "이데아의 견딜 수 없는 투명성"을 상징하는 것은 모든 신성이 일종의 초월적 관념성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레마르카가 "하늘은 어디를 가나 똑같은 채로, 살인과 미움과 희생과 사랑을 초월하여 똑같은 채로 있다"고 할 때, 하늘은 지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공간으로 기술된다.3)

예수에게 '하늘'이란 무엇인가? 복음서에 남은 수많은 말씀들에서 예수는 하늘을 언급한다. 물론 복음서 저자들의 문학적, 신학적 경향성이 가미되긴 했지만 그들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범주로 나타나며 신성과 초월을 상징한다:

1. 하늘은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태복음에서 35회나 "하늘의 나라"로 언급된다(마 3:2; 4:17; 5:3, 10, 19, 19, 20; 7:21; 8:11; 10:7, 32, 33; 11:11, 12; 13:11, 24, 31, 33, 44, 45, 47, 52; 16:19; 18:1, 3, 4; 18:23; 19:12, 14, 23, 24; 20:1; 22:2; 23:13; 25:1).

2. 하늘은 하나님처럼 영원하다(막 13:31; 마 5:18 = 눅 16:17; 마 24:35 = 눅 21:33). 하늘은 그의 처소처럼 안전하여,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과 같다(막 10:21 = 마 19:21 = 눅 18:22; 마 6:20 = 눅 12:33). 하늘의 상도,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도 그렇게 영원하다(눅 6:23; 10:20).

3. 하늘은 권능과 영광의 곳이다(눅 2:14; 10:18; 19:38; 21:26; 22:43).

4. 하늘은 기도(탄식과 축사)의 대상이다(막 6:41 = 마 14:19 = 눅 9:16; 7:34; 눅 4:25; 9:54; 18:13).

5. 하늘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관한 계시의 출처다(마 16:2-3 = 눅 12:54-56; 21:11).

6. 하늘은 신적 권위의 인증이기도 하다(막 1:10-11 = 마 3:16-17 = 눅 3:21-22; 8:11 = 마 16:1 = 눅 11:16; 막 11:30 = 마 21:25; 눅 20:4-5).

7. 종말의 때 인자는 하늘로부터 올 것이다(막 14:62; 마 26:64; 눅 17:24, 30).

8.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막 11:25; 마 3:16; 5:45; 6:1, 9; 7:11; 7:21; 12:50; 16:17; 18:10, 14; 23:9; 눅 11:13).

9.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고 하나님은 하늘의 주인이시다(마 5:34; 23:22; 11:23 = 눅 10:15; 마 11:25 = 눅 10:21).

10. 하늘은 하나님 뿐 아니라 천사들이 있는 곳이다(막 12:25; 13:32; 마 18:10; 22.30; 24:29-31, 36; 눅 2:13, 15). 그래서 주의 천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마 28:2).

11.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들 뿐 아니라 새들의 처소다(마 6:26; 8:20). 새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눅 8:5 = 막 4:4 = 마 13:4; 막 4:32 = 마 13:32 = 눅 13:19), 여우나 인간처럼 땅을 거처(둥지)로 삼는다(마 8:20; 눅 9:58).

12. 예수의 상상과 사상에서 하늘과 땅은 온전히 합일되어 있다. 인간에게 범죄하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눅 15:18, 21).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며(마 6:10), 땅에서 무엇을 하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될 것이다(16:19; 18:18-19; 28:18; 막 11:25; 눅 15:7).

 예수의 자연 비유에서 하늘은 신성과 창조의 영으로 가득하다. 하늘은 당연히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신적, 초월적 공간이다. 이 하늘에 예수는 해가 띄우고 새들을 날려보낸다.

 

B. 해(태양)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은 태양(해)이 떠오르는 곳이다. 태양이란 무엇인가? 첫째, 태양은 하늘의 세계를 함축한다. 태양은 천상의 신이 낳은 젊은 자식이며 그 후계자다. 크라페는 태양이야말로 여러 신성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도덕의 신성을 상속받는다고 한다. 신의 계보학을 따르면 태양은 천상의 왕국들이 통과하는 한순간을 재현한다. 그래서 때로는 하늘의 세계를 함축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은 그 자체로서 신(神)이다. 둘째, 태양은 하늘의 눈이다. 여러 원시 부족들은 태양을 하늘의 눈이며 달은 세계-축의 다른 쪽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남아프리카의 토인들은 태양을 탁월한 신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시베리아의 몽고족들은 태양과 달을 하늘의 눈이라 생각했지만 태양은 선한 눈이요 달은 악한 눈이라 간주했다. 셋째, 태양은 생명과 에너지의 근원을 상징한다. 칼 융도 태양의 상징성을 생명의 근원으로 규정하였다. 보들레르의 "태양"은 "빈혈증의 적, 태양은 벌레와 장미에게 공평하게 생명을 부여해 주네"라고 노래한다. 넷째, 태양은 불멸의 상징이다. 달은 한 달을 기준으로 소멸하지만 태양은 죽을 필요가 없다. 태양은 지옥으로 내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표상하는 대양이나 호수의 심연을 통과한다. 그러므로 태양은 불변 혹은 불멸을 상징한다.4)

예수의 시적 상상에서 태양(? ?λιο?)은 무엇과 같았을까? 예수의 많지 않은 말씀전승 가운데엔 태양에 관한 것이 있다. 그리고 후대의 복음서 저자들도 예수의 생애를 기술하며 몇 차례 태양을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두루 비추신다(마 5:45).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 같이 빛날 것이다(마 13:43).

종말엔 해와 달과 별들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막 13:24-25; 마 24:29; 눅 21:25).

저물어 해 질 때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막 1:32; 눅 4:40).

변모의 사건 때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마 17:2).

예수의 죽음에 태양이 빛을 잃었다(눅 24:29).

일단의 여인들은 안식 후 첫 날 해 돋은 때에 부활의 빈 무덤을 찾았다(막 16:2).

 

예수에게 태양이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태양은 하나님의 권능이고, 종말에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일들을 알리는 예지의 능력이 된다. 태양은 모든 의인들이 향유하게 될 온전성 곧 운명의 이상적 상태로서 그것은 불멸의 상징이다. 태양은 또한 인간에게는 무한한 신적 은총이다. 후대의 복음사가들에게도 태양은 치유와 온전함과 예수의 영광이었고, 하늘(하나님)의 얼굴(표정)이었으며, 부활의 빛이었다.

불변과 불멸 그리고 신적 권능과 생명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태양은 예수의 자연 비유에서 '돌' 위에 던져진 씨를 태운다(막 4:6). 돌(바위)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째, 돌은 일반적으로 견고성과 내구성을 가짐으로써 변화, 부패, 죽음의 법칙에 종속되는 것과 대립되는 세계를 암시한다. 따라서 돌은 존재, 응집, 혹은 자아와의 조화로운 화해를 상징한다. 전체로서의 돌은 통일성과 강한 힘을 상징한다. 그러나 부서진 경우 해체, 심리적 분열, 무정형, 죽음, 전멸을 상징한다. 둘째, 하늘에서 떨어진 돌은 생명의 기원을 상징한다. 화산이 폭발하면 공기는 불이 되고, 불은 물이 되며, 물은 돌로 변한다. 돌은 창조의 리듬이 구현된 최초의 견고한 형식이고, 기본적 운동이 구현된 조각이며, 음악이 굳어 화석화한 창조의 작품이다. 셋째, 바위는 영속성, 견고성, 통합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신이 거주하는 자리로서 신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코카서스 지방의 전설을 따르면 "최초의 세계는 물로 덮여있었으며 그때 위대한 창조자인 신은 바위 속에 살고 있었다." 돌과 바위는 인간 삶의 근원으로 인식된다. 반대로 땅은 바위나 돌이 분해된 상태로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는데, 식물과 동물의 삶의 근원이 된다.5)

예수의 말씀과 복음서의 문학적 표현에서도 돌과 바위는 마찬가지 상징성을 갖는다. 반석 위에 지은 집(마 7:24-25 = 눅 6:48)이나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마 16:18) 그리고 예수의 죽음에 바위가 터졌다는 진술(마 27:51)에서 보듯, 돌과 돌밭은 견고성과 강한 힘 그리고 영속성과 통합성을 상징한다. 혹은 예수께서 바위 무덤을 열고 부활하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부활의 상징이며 신성의 상징이 된다(막 15:46; 마 27:60).

예수의 비유 세상에서 하늘의 해가 돌 위의 씨를 태우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곧 부활의 빛이고 불멸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한결같으신 능력이신 태양이 부활과 영속의 돌 위에 놓인 씨를 태움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여전히 생명을 순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단지 한 톨의 씨일망정 그것이 마르고 썩을 때, 그 작은 유기물조차 거름이 되어 불모의 땅에 지력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눅 13:8; 14:34-35).

 

C.

하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새다. 는 태양보다 인간에게 가깝지만 새도 해처럼 하늘에 있다("하늘의 새"). 첫째, 새는 높이와 하늘을 지시하고 초월을 상징한다. 여러 문학 작품에서 새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존재이며 세속의 관념을 초월하는 신성한 경지로 드는 삶을 암시한다(예: 정진규, "새가 되는 길"). 둘째, 새는 신성한 창조를 상징한다. 이슬람의 『미라크』에서 모하메드는 하늘 나라의 거대한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생명의 나무를 본다. 그 열매를 먹으면 젊음을 회복하게 된다. 그 생명의 나뭇가지에는 눈부신 빛깔을 가지며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 새들이 앉아있다. 베다 시대의 힌두인들은 태양을 독수리나 백조 같은 거대한 생의 형태로 묘사했다. 게르만 전통은 태양-새의 이미지에 대한 더 많은 보기를 제공한다. 거대한 새는 바람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스칸디나비아 신화 속에는 라스벨그 혹은 라에스베글러라 불리는 거대한 새가 나오며, 이 새가 날개를 퍼덕여 바람을 창조했다고 암시한다. 북아메리카에서도 숭고한 존재는 때대로 거대한 새와 동일시되며 이 새는 빛과 천둥을 의인화한다.6)

예수의 시적 상상과 후대의 복음서 저자들에게 새는 어떤 존재인가? 역시 많지는 않지만, 예수의 몇 가지 말씀들은 하늘의 새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늘의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신다(마 6:26; 눅 12:24).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둥지가 있다(마 8:20; 눅 9:58).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마 10:29-31; 눅 12:6-7).

 새들은 하늘에 거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담지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를 실천하며 살아갈지 하늘의 새들은 땅의 인간들을 가르친다(마 6:25-30; 눅 12:22-29). 그래서 새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눅 8:5 = 막 4:4 = 마 13:4; 막 4:32 = 마 13:32 = 눅 13:19), 여우나 인간처럼 땅을 거처(둥지)로 삼는다(마 8:20; 눅 9:58). 그러나 그 하늘의 새들이라 할지라도, 인간들에게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두어 마리 합하여 겨우 한 앗사리온에 팔리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장터에서 팔리지 않는다(마 10:29-31; 눅 12:6-7).

예수의 비유 세상에서 하늘에는 태양 아래로 새들이 난다. 땅과 인간에게 새는 해보다 가깝다. 새들의 움직임은 아주 활기차고 누구나 볼 수 있다. 새들은 그러므로 자유의 표상이다. 하늘의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그리고는 길 위에 떨어진 씨앗을 먹는다(막 4:4; 도마 9). 지금껏 이 비유의 모든 해석이 돌 위에서 태양에 의해 타버린 씨와 새에게 먹힌 씨를 실패의 경우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이는 씨를 말씀으로 또 새와 자연계를 사탄으로 본 알레고리적 해석(막 4:4)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음식의 소비는 생명계의 성스러운 제의 중 하나다. 인간 중심주의적 이기심을 조금만 버린다면 그것은 새들에게도 성만찬이 되는 것이다. 식사를 끝낸 새들은 다시 하늘로 박차 오를 것이다. 새들이 하늘을 날며 높이와 신적 초월을 지시하고 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상징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배부르게 먹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새들은 특별한 노동을 하지는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르신다고 말이다(마 6:26; 눅 12:24).

이제 하늘의 이 새들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막 4:32; 마 13:32; 눅 13:19). 거기엔 작은 겨자 나물이 있고 그 아래 겨자 열매(음식)와 그늘(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새들은 아예 거기에(땅에) 깃을 들인다. 둥지를 트는 것이다. 하늘의 새가 땅에 깃을 들이면 하늘은 어느새 땅에 깃든다. 비유 세상에선 이렇게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고, 새들은 땅에서 하늘로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오가며 두 개의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다(앞서 살핀 바와 같이 하늘과 땅의 완전한 합일은 예수의 사상이다. 마 6:10; 16:19; 18:18-19; 28:18; 막 11:25; 눅 15:7).

  

IV. 땅에는 곡식이 자라고 생명이 순환한다

일곱 편의 자연 비유가 가장 두드러지게 그리고 가장 역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땅과 자연이다. 그래서 모든 비유에서 땅은 가장 기본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 모든 비유에서 하늘 아래로는 땅이 펼쳐져 있고, 이른바 좋은 땅, 흙, 밭, 포도원, 길, 그리고 바위 등 다양한 범주로 나타난다. 그 어떤 인간이든, 씨든, 혹은 나무나 기타 식물이든, 그 위에 맺힌 열매(곡식)이든 그 다양한 범주의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다.

 

A. 땅 속엔 하늘이

예수의 가르침과 이를 전수한 복음서기자들에게 ''(γ?)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범주의 의미함축으로 나타난다:

 1. 땅은 '세상'을 뜻한다(막 2:10 = 마 9:6 = 눅 5:24; 마 5:13; 9:3; 마 12:42 = 눅 11:31; 마 9:26, 31; 17:25; 마 10:34 =눅 12:51; 눅 2:14; 4:25; 12:49; 18:8).

2. 땅은 물(바다)과 대조되는 '뭍'(육지)이다(막 4:1; 6:47; 마 14:24; 눅 5:3, 11; 눅 8:27).

3. 땅은 특정한 도시나 지역을 지시한다: 게네사렛땅(막 6:53 = 마 14:34), 유대땅(마 2:6), 이스라엘땅(마 2:20,21), 스불론땅과 납달리땅(마 4:15), 소돔과 고모라땅(마 10:15), 소돔땅(마 11:24).

4.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며, 하나님은 땅의 주인이다(마 5:35; 마 11:25; 눅 10:21).

5. 땅은 종말의 징조를 아는 예지의 상징이며(눅 12:56), 파국과 새로운 창조의 현장이다(눅 21:23; 21:25; 21:35; 막 13:27).

6. 땅은 영속성의 상징이다(막 13:31 = 눅 21:33; 마 5:18 = 눅 16:17).

7. 땅은 예수께서 무리를 먹이신 현장이다(막 8:6 = 마 15:35).

8. 땅은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축복의 상징이다(마 5:5).

9. 땅은 살아있는 사람과 같다. 예수는 "땅의 표정"(얼굴)과(눅 12:56; 21:35), "땅의 마음"(을 언급한다(마 12:40).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임종 때 땅이 요동치며 바위가 터졌다고 말한다(마 27:51).

10. 땅은 연약함의 여성적 상징이다(눅 6:49). 땅은 모든 것의 바닥이며 죽음의 곳이다(막 9:20; 14:35; 15:33 = 마 27:45 = 눅 23:44; 마 10:29; 마 23:35; 눅 24:5; 22:44). 그러나 땅은 똥 더미)로써 회복될 수 있다(눅 14:35; 참고, 눅 13:8).

11. 땅은 하늘과 대비된다(마 23:9). 그러니 보화를 땅에 쌓으면 안되고 하늘에 쌓아야 한다(마 6:19; 25:18, 25).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은 하늘과 합일되어야 한다(마 6:10; 마 16:19; 18:18, 19; 28:18).

 

예수의 비유 세상에서도 땅의 이 같은 이미지는 상당 부분 유지된다. 땅은 여러 종류의 인간 존재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상'이며, 인간 존재가 '하늘'과 만나는 만남의 현장이다(비유는 땅과 인간 경험으로 하늘을 말하는 이야기 사건이다). 예수의 비유가 사실주의(realism)를 가장 큰 특징으로 갖는 것은 바로 이 땅의 현실 세상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일곱 편의 자연 비유는 예수의 시적 상상 안에 있는 땅의 서사시를 노래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땅은 하늘과 온전히 합일하듯(마 6:10; 마 16:19; 18:18, 19; 28:18), 예수의 자연 비유에서도 하늘은 땅과 온전히 하나가 된다. 보화의 비유는 하늘 나라가 땅에 묻힌 보화와 같다 한다(마 13:44; 도마 109, 보화). 보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태양의 속성을 지닌 금빛이 승화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신화나 전설 그리고 민담의 세계에서 보화는 흔히 동굴에서 발견된다. 동굴이 어머니 혹은 무의식을 상징한다면, 그 안에 있는 보화는 획득하기 어려운 것 혹은 삶의 기본적인 신비를 나타낸다. 칼 융은 인간 정신의 내부에 있는 신비한 '중심' 곧 '자아'를 보화로 표현한다. 보물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겪는 시련과 고난은 사물의 변용을 추구하는 연금술사의 실험과 동일시된다. 보화는 태양과 신의 속성으로 빛나는 '가장 귀한 것'이며 동굴 속에 있는 '획득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7) '하늘'이 보화와 같다. 그것은 광채이고, 가장 귀한 가치이며, 희귀성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며, 교환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보화는 땅에 묻혀있다. 땅이 하늘을 품을 때 하늘과 땅이 하나 되고 땅은 성화(聖火)되는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신과 초월 그리고 '하늘'을 상징하는 새가 땅에 내려와 그곳에 깃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막 4:30-32; 도마 20, 겨자씨).

그러므로 두 편의 자연 비유는 하늘과 땅의 합일을 말해주며, 어떻게 땅이 '하늘'(神)이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예수의 비유는 그러므로 '하늘'을 머금은 땅의 꿈이다:

 보화의 비유: '하늘'이 땅에 묻히다

겨자씨의 비유: '하늘'이 땅에 깃들다

 

B. 하늘의 성품과 능력으로

예수의 사역에서 땅이 무리를 먹이는 생명의 현장이고 그의 말씀이 생명의 가르침이듯(막 8:6 = 마 15:35), 자연 비유에서도 땅은 생명의 능력과 그 현장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씨가 바로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는 다양한 상징성을 갖는다. 첫째, 씨는 우주론적 의미를 갖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재적인 힘 혹은 신비한 잠재력을 상징한다. 이 잠재력은 '신비한 중심'을 상징한다. 이 중심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점이며 이로부터 빛이 방사함으로써 이른바 '세계-나무'의 가지가 생긴다. 엘리아데는 " 씨앗이 지하에서 그런 것처럼 죽은 자들이 지상에서와는 다른 형태로 회생할 수 있다는 전역사적·농경적 신념에 있다"고 한다. 이어령,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는 "농사를 짓는 것은 마치 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것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한 톨의 곡식 속에는 작은 우주가 잠들어 있는 까닭입니다"라고 한다. 둘째, 씨는 강한 생명력 혹은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죽었던 씨는 발아(發芽)하여 재생하고, 성장하며 결실을 맺어 곡식이 된다. 그래서 인간과 새들에게 음식과 모이가 되어 또 다른 생명을 이어나간다. 셋째, 씨는 '생명의 순환'이고 영원이다. 함석헌의 "야인 정신"은 "씨가 품은 것은 영원이요 무한이다. 그러므로 꽃마다 잎마다 열매를 내기 위하여 떨어져야 하고, 그 씨는 더 많은 더 새로운 씨를 위해 땅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8)

씨가 땅에 떨어지면 땅은 씨를 품는다. 닭알(달걀)을 품은 닭이 병아리를 부화하듯이, 예수의 자연 비유에서 씨알을 품은 땅은 죽었던 씨에서 싹을 틔우고 생명을 가꾼다(막 4:26, 28, 31, 씨의 비유들).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그 놀라운 생명현상은 씨를 뿌린 농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無爲)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때(無知) 땅이 "스스로"(α?τομ?τη) 하는 일이다(막 4:28). 땅이야말로 자주성과 신성을 가지고 또 신으로서 창조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9)

땅이 겨자씨를 품었을 때는 레바논의 백향목이나 다니엘의 우주목(宇宙木)이 아니라 단지 겨자식물만을 내어준다. 땅은 무엇이든 자기가 품은 것만을 내어주는 것이다(겨자씨).10) 또한 땅은 흙이 많은 좋은 땅에 씨가 떨어진다 해도 곡식을 무한정 많이 내지 않고 잘해야 100배를 냄으로써, 오직 심은 만큼만 거두게 한다(씨 뿌리는 자).11) 땅은 신적 '정직성'으로써 생명의 세상을 경영해 가는 것이다. 또한 땅은 자기 위에 곡식뿐 아니라 가시나무도 자라게 한다(씨 뿌리는 자). 땅은 또한 인간에게 좋은 알곡뿐 아니라 필요 없는 가라지도 내어준다(곡식과 가라지). 세상의 부모가 모든 자식에게 그러려 하듯 땅은 공정함이라는 신적 덕목으로써 생명의 세상을 경영해나가는 것이다.

땅은 자기가 품은 씨를 자라게 하되 "처음에는 싹으로, 다음에는 이삭으로,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게 한다(막 4:27-28, 은밀히 자라는 씨). 밀과 가라지를 함께 기르고(가라지), 곡식과 가시나무를 함께 자라도록 한다(씨 뿌리는 자). 1m 남짓한 그러나 일년생인 겨자 식물이 되기도 하고(겨자씨),12) 그보다 더 크고 훨씬 오래 사는 무화과나무가 되기도 한다(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땅이 내는 나무식물은 무엇인가? 첫째, 나무는 우주의 생명을 상징하고 조화, 성장, 즉식, 생성과 재생의 과정을 상징한다. 둘째, 나무는 일종의 '죽음이 없는 생명'을 나타내고, 따라서 존재론적 측면에서 절대적인 현실을 의미하며 세계의 중심이 된다. 셋째, 나무는 그 뿌리를 땅에 높이는 하늘에 닿아 하늘 곧 초월성과 관련되어 있다. 킬머의 "나무들"을 보면, 나무는 문학에서 하늘의 세계를 지향할 뿐 아니라 신성과 초월을 상징하는 새를 부른다. 넷째, 나무는 중심에 자리할 뿐만 아니라 길고 수직적인 형태로 되어있으므로 '세계-축'의 상징이 된다. 더욱이 지하세계, 지상세계, 그리고 천상계를 관여함으로써 우주목(宇宙木) 또는 세계수(世界樹)가 되고, 사다리나 높은 산과 등가의 위치에 놓인다. 하늘과 땅 심지어 지하세계까지 연결해줄 뿐만 아니라, 존재 이행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13)

예수의 비유에서 땅과 하늘이 수평적이라면 나무와 식물은 수직적이다. 하늘이 신의 영역으로 초월적이라면 땅은 세상 그 자체로서 일면 세속적이다. 그러나 하늘이 땅으로 성육(成肉)하고 땅이 성화(聖火)할 수 있는 것은 그 두 세계를 이어주는 나무와 나물(식물)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가장 작고 유한한 겨자 나물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고 한다(겨자씨 비유).

땅이 내는 모든 식물은 열매를 낸다. 열매란 무엇인가? 열매는 달걀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다. 과일의 중심에는 우주의 기원을 재현하는 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14) 밀과 같이 작은 식물은 곡식을 내고(은밀히 자라는 씨, 씨 뿌리는 자, 곡식과 가라지), 겨자 식물은 겨자 열매를 내며(겨자씨),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를 기약한다(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그리하여 땅은 나무(식물)와 그 열매와 씨로써 해마다 순간마다 우주의 새로운 재현해 가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에서 땅이 이렇게 죽은 씨를 살리고 자라게 하는 생명의 현장이라면, 땅이 나무와 식물을 통해 맺는 결실이란 인간과 각종 생물에게 베푸는 땅의 혜택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가르침에서 땅이 온유한 자가 누릴 축복이듯(마 5:5), 그의 비유에서 무위(無爲)의 저 농부는 추수를 위하여 장면에 다시 등장하고(막 4:26-29; 도마 21c, 은밀히 자라는 씨),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는 하늘의 저 새들조차 땅의 수혜자가 되어 음식과 안식을 위해 겨자 나물 밑으로 날아온다(겨자씨의 비유; 마 6:26 = 눅 12:24).

그러므로 자연 비유 가운데 네 편의 씨의 비유는 땅이 어떻게 신의 성품과 능력을 갖는지 말해준다. 예수의 비유는 하늘이 된 땅의 꿈이다:

 은밀히 자라는 씨: 자주성, 신성, 창조하는 능력

              (땅은 이와 같은 신의 속성을 갖는다)

씨 뿌리는 자: 땅의 정직성과 공정성

              (땅은 이 신적 덕목으로 생명 세상을 경영한다)

곡식과 가라지: 땅의 정직성, 공정성

              (땅은 이 신적 덕목으로 생명 세상을 경영한다)

 

 

 V. 자연과 문화: 인간의 두 얼굴

 예수의 비유 세상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인간이 있다. 일곱 편의 자연 비유는 몇 가지 유형의 인간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조금씩 다른 저마다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이 비유들에서 인간은 계층화되고 관계도 복잡화되며 인간의 행위(文化)도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농경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 비유들에서 기본적인 등장인물은 농부다.

 

A. 인간과 문화

그러나 농경사회가 인간 사회에 계급의 분화를 가져온 것처럼 여기 비유 세상엔 억압과 종속의 계급 구조가 발생한다. 또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끼리 원한관계가 발생한다. 그 결과 비유 세상엔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 문화가 출현한다.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인간의 문화는 은밀히 자라는 씨, 씨 뿌리는 자,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파종과 추수를 포함한다. 하지만 이 비유는 밭의 소유주와 적대자("원수") 사이의 갈등관계를 제시한다. 인간 문화는 원한에 찬 악행과 대응으로 발전한다.

보화의 비유는 주인과 소작농이라는 억압과 종속의 사회관계에서 발생한다. 발견, 감춤, 매각 그리고 매입으로 이어지는 발견자의 행위에 나타난 인간 문화란 주인에 대한 기만과 배반 그리고 땅에 대한 투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화 된 땅을 신적 가치(神的價値)로 보지 않고 천박한 자본가치(資本價値)와 부동산 가치로 보며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은 인간 문화의 근본적인 오점이다. 보화를 땅에 쌓으면 안 되듯(마 23:9; 6:19; 25:18, 25), 보화(자본 가치)를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 더더욱,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이고 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마 5:35; 마 11:25; 눅 10:21), 그래서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아주 팔아 넘기거나 사서 영영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레 25:23), 투기의 목적으로 땅을 팔고 사는 것은 야훼 하나님이 명령을 어긴 것이다.15)

포도원의 농부들 비유도 지주와 소작농의 종속관계에서 이야기된다. 포도원의 건설, 집요하게 반복되는 종의 파송, 그리고 마침내 아들의 파견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지주의 행위는 영리에 대한 집착에서 온 것이다. 거듭하여 종들을 거의 죽이고 마침내 아들을 살해하는 것은 땅을 탈취하고자 하는 소작농들의 소유욕에서 온 행위이다. 비유에는 이 두 가지 모티프가 각각 지주와 소작농들의 독백을 통하여 문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지주는 되뇌인다: "내 아들이라면 저들도 공경하겠지!" 소작료를 받아내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작농들의 계산은 다르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인간의 문화란 돈의 집착이며 소유의 욕망이다. 결과는 땅을 투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채 피로 물들이는 비극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두 비유에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거나 혹은 극대화하려는 지주들의 굳은 표정과,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얻으려거나 빼앗으려는 혹은 그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하려는 자들의 야심과 기만 그리고 원한에 찬 표정이 교차한다.

땅에 대한 인간 소행의 결과는 무엇인가? 투기와 투자 그리고 투쟁의 결과 땅의 운명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예수의 말씀에서 땅이 "마음"(마 12:40)과 "얼굴"(표정)(눅 12:56; 21:35)을 가짐으로써 산 사람과도 같다면 땅도 인간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는 뜻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땅은 무화과를 맺지 못한다. 지력(地力)을 상실하여 불모의 땅으로 변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에서 땅이 여성적 이미지를 갖는 것처럼, 그의 자연 비유에서도 땅은 부드러운 흙으로서 여성적 이미지를 갖는다(막 4:5 = 마 13:5 = 눅 8:8; 막 4:8,20 = 마 13:8,23 = 눅 8:15, 씨 뿌리는 자). 더욱이 단산(斷産)한 후에도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앙상한 뼈와 마른 살가죽만 간직한 채 무덤에 들어가는 어머니처럼, 땅은 모든 인간과 온갖 동식물에게 자신의 모든 기(氣)와 진(盡)을 다 내어준 후 불모의 땅으로 죽어간다. 가히 어머니의 자기희생적인 모습이다. 예수의 말씀에서 땅이 모든 것의 바닥이며 죽음의 상징인 것과 마찬가지다(막 9:20; 14:35; 15:33 = 마 27:45 = 눅 23:44; 마 10:29; 마 23:35; 눅 24:5; 22:44).

그러므로 밭에 감추인 보화,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그리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투기와 투쟁이라는 인간의 소행(文化)으로 말미암아 땅과 자연(自然)이 맞게 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문화와 자연의 대립이며, 인간 문화로 말미암아 피로 젖은 땅의 비극이다:

 땅에 감추인 보화: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몰락함

포도원의 농부들: 땅을 투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피로 적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인간의 투기와 투쟁이 땅을 죽임

 

B. 인간과 자연

농경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 비유들에서 기본적인 등장인물은 역시 농부다. 예수의 비유는, 읽기에 따라서는, 농심(農心)으로 돌아가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농부란 누구인가? 보편적으로 농부의 행위는 씨앗, 봉오리, 꽃, 열매라는 신성한 세계와 만난다. 그뿐만 아니라 농부는 절기(달력)가 예시하는 우주적 질서를 따른다(이무영, 『농부』를 보라). 천상적 질서를 따르는 지상적 사건들이 보여주는 순환적 운동은 그것이 천체 생물학적 사고와 관련됨을 나타낸다. 농부는 낡은 해를 보내면서 새 해를 맞이함으로써 농경적 제의의 파수꾼이 된다. 농부는 모든 시작을 모든 종말과 결합시키되, 계절의 순환과 그에 따라 부활하는 식물의 세계를 잇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적 질서를 용해시킨다. 농부는 이렇게 정신적 차원에서 소생과 구원의 힘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16)

예수의 자연 비유들에서 인간의 투기와 투쟁이라는 어리석은 소행 이전에는 자연을 닮은 착한 농부들의 삶도 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그리고 또 예수의 시적 상상에서 자연의 법칙을 가장 잘 알고 창조의 섭리에 가장 익숙한 자는 다름 아닌 농부다. 그는 하늘이 깃든 땅 위에서 그 땅을 일구며 땅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땅에 씨를 뿌리고 또 곡식을 거둔다(은밀히 자라는 씨, 씨 뿌리는 자, 곡식과 가라지). 농부는 밤에 자고 낮에 깨곤 하면서 자연의 리듬에 생활의 리듬을 싣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땅으로 씨앗을 살리고 성장하여 결실케 한다. 자연과 조율된 삶이 성장의 리듬을 가져온 것이다(은밀히 자라는 씨). 이들 비유에서 땅(地)과 인간(人)의 관계는 대부분 땅이 베푸는 큰 은혜에 대하여 인간이 수혜자가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나라(天)는 이런 것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인간의 역할은 더욱 적극적이다. 과원지기는 나무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줌으로써 땅의 지력을 회복하고자 한다(눅 13:8). 여기 '거름'으로 번역된 '코프리아'는 똥 더미라는 뜻이다. 예수는 이 말을 한 번 더 사용하였다: "소금은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눅 14:34-35). 은 무엇인가? 똥은 배설물로서 버려진 것이고 가장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민담과 전설 속에서 똥은 놀랍게도 황금과 연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심리학 연구에서 무가치한 것이 곧잘 가치 있는 것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는 모든 상징이 "가장 높은 단계의 삶은 가장 낮은 단계의 삶에서 나와 그 절정에 도달한다"는 니체의 말로 요약된다.17)

자연과 역행하는 인간과 그들의 문화로 말미암아 죽은 땅은 오직 인간과 육축의 똥 더미로써만 회복될 수 있다. 인간이 소비한 모든 곡식은(막 4:8) 배설물이 되어 땅으로 돌아온다. 하늘의 새들이 날아와 먹은 길가의 그 씨알도, 그 한 톨의 씨앗조차도(막 4:4), 분명 배설물이 되어 땅으로 돌아온다. 가시에 찔려 성장을 멈추고 죽은 그 어린 식물도 썩고 마침내 유기물이 되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막 4:7). 곡식과 함께 밀밭에서 자라다가 주인에 의해 아궁이에서 불탄 가라지도(마 13:24-30; 도마 57), 뜨거운 태양 아래 바위 위에서 타죽은 씨알도(막 4:5-6), 모두 재와 유기물이 되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모두는 거름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할 것이다! 그러면 죽은 땅은 살아있는 땅이 되고, 불모의 땅은 하늘의 신처럼 세계를 창조하는 땅이 될 수 있다!

가장 무가치한 똥 더미와 잿더미가 가장 귀한 가치를 입는 것은 생태계의 순환 고리 안에서이다. 생명은 순환하되, 그 어느 하나도 '손실'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이루어나간다. 자연과 조화로운 문화란 이런 것이다. 땅의 회복을 위한 인간의 역할이란 이것이다. 그것은 땅으로부터 온 모든 것을 고스란히 땅으로 되돌리는 일이다(눅 13:8). 그러므로 이 비유는 땅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제시하는 셈이다. 이렇게 인간이 땅과 협력하고 문화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진다.

  

IV. 하나님의 나라와 자연

 이 논문은 일곱 개의 자연 비유에 나타나는 문학 요소들의 이미지와 상징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 연구는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발견하고 확인하였다. 첫째, 이 비유들은 그 문학적 구성이나 의미 발생의 범위에서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둘째, 이들은 하나같이 땅의 비유이다. 셋째, 이 비유들은 보편적 차원에서 여러 문학적 요소들의 이미지와 상징을 공유하고 있다. 넷째, 이 범주의 개별적 비유들은 그 요소들의 이미지와 상징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시키는 네트워크 안에서 의미를 발생시키고 있다. 다섯째, 그 결과 일곱 편의 자연 비유들은 독립적/개별적으로뿐 아니라 이미지 네트워킹의 방법을 통하여 '연속적으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여섯째, '연속적 읽기'는 자연 비유들 나름의 '서사적 구조'를 드러낼 수도 있다. 그것은 본 논문의 마지막 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음의 세 가지 단위로 나타난다:

 

1. 하늘을 머금은 땅의 꿈

보화의 비유: '하늘'이 땅에 묻히다

겨자씨의 비유: '하늘'이 땅에 깃들다

 

2. 하늘이 된 땅의 능력

은밀히 자라는 씨: 자주성, 신성, 창조하는 능력

씨 뿌리는 자: 땅의 정직성과 공정성

곡식과 가라지: 땅의 정직성, 공정성

 

3. 피에 젖은 땅의 비극

땅에 감추인 보화: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몰락함

포도원의 농부들: 땅을 투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피로 적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인간의 투기와 투쟁이 땅을 죽임

 

마지막으로, 이 비유들은 청중에게 땅과 인간과 하늘의 삼재(三才) 사이의 관계로써 하늘 나라를 표현한다. 물론 인간은 문화를 대표하고 땅은 자연을 대표하며, 하늘은 하늘 나라를 상징한다.

                 天

                ??|

              ??  |

            ??    |

         人-----地

      (文化)    (自然)

 

인간(人)이 땅(地)을 거스르고 문화(文化)가 자연(自然)과 대립할 때는 인간과 땅 모두에게 비극과 재난이 찾아온다. 그러나 하늘 나라(天)는 인간이 땅을 따르고 문화가 자연과 조화할 때 이루어진다. 아울러 이 논문은 (1) 일곱 편의 자연 비유 각각에 대하여 문학적 및 생태학적으로 해석할 것과 (2) 모든 자연 비유에 나타나는 문학 요소들의 이미지 네트워킹과 연속적 읽기를 통하여 자연 비유 전체에 드러나는 서사적 구조를 확정할 것을 새로운 과제로 제시한다.

 

1)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졸고를 보라: "창문을 열면 저기 '새' 나라가. 예수 비유의 생태신학적 해석을 위한 제안,"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 (서울: 한들출판사, 1999).

2) Hans Conzelmann, Jesu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3) 51; Bruce Chilton, e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에 실린 여러 글들을 보라.

3) J. E. Cirlot, A Dictionary of Symbol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2) 136-37;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서울: 고려원, 1995) 511-14를 필자가 정리한 것임.

4) Cirlot, A Dictionary of Symbols 302-05;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476-79를 필자가 정리한 것임.

5) Cirlot, A Ditionary of Symbols 262, 299-300;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138-40, 189-90을 필자가 정리한 것임.

6) Cirlot, A Dictionary of Symbols 25-27; 이승훈, 문학상징사전 278-82를 필자가 정리한 것임.

7) Cirlot, A Dictionary of Symbols 97;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223-24을 필자가 정리한 것임.

8) 이상은 Cirlot, A Dictionary of Symbols 269;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101-03, 351-52를 필자가 정리한 것임.

9) 필자의 해석을 보라: "대지에 귀를 가만히 대어보라. 씨를 살리는 땅의 비유 (막 4:26-29)," 『세계의 신학』 47 (2000/여름): 51-74.

10) 이 같은 해석을 위해서는 필자의 졸고를 보라: "하늘은 땅에 깃든다. 겨자씨의 비유," 『세계의 신학』 50 (2001/봄).

11) 이같은 해석을 위해서는 필자의 졸고를 보라: "잘해야 본전, 아니면 손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세계의 신학』 46 (2000/봄): 70-97.

12) 겨자식물은 일년생으로서 야생으로 크며 보통 4피트 정도 자라지만 더 큰 경우도 있다. 싹이 빨리 돋고 번식력이 강하여 일단 심기면 온 장소를 차지하게 된다(Pliny, Natural History 29.54.170; LCL 529).

13) Cirlot, A Dictionary of Symbols 328-32;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84-89를 필자가 정리한 것임.

14) Cirlot, A Ditionary of Symbols 109, 116;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51-52를 필자가 정리한 것임. 겨자 열매는 찌르는 듯한 맛 때문에 양념으로도 쓰이고(Pliny, Natural History 20.87.236-37; LCL 137-39), 약용으로 만병통치약처럼 쓰이기도 한다. 그 씨는 작음에 대한 은유로 사용될 정도고, 그 식물은 때에 따라서는 불결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m. Nid. 5.2 [Danby, 750]; b. Ber. 31a[Sonico 1:188-89]. 포도는 과일로서 풍요를 상징하고 또 포도주의 재료가 됨으로써 희생을 상징한다.

15) 이러한 해석을 위해서는 필자의 졸고를 보라: "아하, 땅 속에 하늘이 있었네. 보화를 품은 땅의 비유 (마 13:44; 도마 109)," 『세계의 신학』 48 (2000/가을): 55-88.

16)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101-03을 필자가 정리한 것임.

17)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151-52를 필자가 정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