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하나님의 역사

(눅1:26-38)




눅1:26-38절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선언을 그리는 첫 번 에피소드(눅1;5-38절)의 전반부이다. 후반 부는 그 전반부와 밀접하게 상응되어 있다. 왜냐하면 두 부분의 핵심 모두는 구약에서 발견되는 것들처 럼 신적인 탄생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유대교 성서에서는 신 현현을 위한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탄생을 말하는 것이 목적일 때(창16; 17; 삿 13장)에는, 목적에 잘 부합되도록 근사하게 이 패턴은 수정된다. 신 현현 탄생 선언 패턴의 구성 요소 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천사의 출현(창16:7; 17:1; 삿13:3)(참고 눅1:11, 26;)

(2) 사람의 직접적인 반응(창17:3)(참고 눅1:12,29;)

(3) 사람의 이름(창16:8; 17:5)(참고 눅1:13, 28, 30; )

(4) 재 보증 (창17:4이하)(참고 눅1:13, 30 주목. 창15:1; 21:17; 26:24; 46:3; 삿6:23; "두려워말라" 재보 증;)

(5) 탄생의 선언(창16:11; 17:16, 19; 삿13:3)(참고 눅1:13, 31;)

(6) 이름이 주어진다. (창16:11; 17:19)(참고 눅1:13, 31)

(7) 아이의 미래 운명 예견(창16:12; 17:19, 21; 삿13:5) (참고 눅1:14-17, 32-33)

(8) 목적 (창17:17-18)(참고 눅1;18, 34 (주목하라 창15:8,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삿6:15, 내가 어 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가?")

(9) 징조 혹은 재 보증(창 17:2B-참고 창15:9, 17; 삿6:17이하) (참고 눅1:19-20, 35-36)

(10) 반응(창 16:13; 참고-17:23; 26:25; 35:14 삿6:24)(참고. 눅 1:22-23, 38.)

눅1:5-38에서 누가의 두 개 선언은 이러한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참고. G.F.Wood, "The Form and Composition of the Lucan Annunciation Narratives," STD thesis, Catholic Univ of Amer, 1962)) 이 형식에서 강조점은 부모가 아니라 신적인 약속의 성취인 아이에 있다. 그러므로 눅1:26-38절에서 예 수 탄생은 전형적인 구약 패턴으로 선언된다.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에게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기독교적인 취지는 두 가지 초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초점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관계에 있다. 두 선언의 병행은 구속사에서 예수와 요한의 연속성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예수 와 교회의 연속성을 세우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와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세우려하는 것이 누 가-행전(Luke-Acts)의 주요 관심사이다. 엘리사벳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의 탄생 선언의 연결 고리가 여기에서 예시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시에 저자는 예수가 요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 려고 한다. 요한은 "엘리야의 능력과 영으로(17절)" 주님보다 앞서 가는 반면, 예수는 다윗적인 왕으로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것이다(32-33절)". 반복하건데, 요한보다 나은 예수의 이러한 우월성이 누 가복음의 반복되는 주제이므로, 여기서 그것이 예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단락에서 누가가 가지고 있는 기독론적인 관심의 두 번째 초점은 예수 잉태의 특이한 성격에 있다. 31절은 예수가 될 것이라고 명시한 그 이름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32-33절은 그 예수(여호와가 구원하신다)가 다윗적인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35절은 이것이 어떻게 전해졌는가를 보여준 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될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성령에 의한 임신 때문이다.(주목; "그 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가 눅3:38절에서 아담을 위해 사용되었고, 행 13:33에서는 부활한 그리 스도에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누가-행전(Luke-Acts)의 이 용어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창조적인 간섭 으로 인해 사는 사람을 위해 사용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누가는 후에 교회사에서 야기된 문제들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a) virginitas in partu (아이의 기적적인 출생, 즉 육체적 접촉을 하지 않은 마리아의 잉태).

(b) virginitas post partum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마태처럼 누가는 마리아가 출산하기 전에 처녀 이었다는 것만(virginitas ante partum)을 말한다 (즉 인간과의 관계가 없이 예수를 임신했다) : 예수는 성령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눅1:35절). 처녀 마리아의 자궁 속에 일어난 이런 기적적인 임신 으로 인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기적적인 임신 혹은 처녀 탄생은 기독교 역사에 신학적으로 다양하게 작용하 였다. 3가지 예가 이것들을 보여준다:

(a) 2세기에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가현론 문제에 직면해서 그의 인성의 표시로서 예수의 탄생을 가장 강하게 강조하였다(엡7:2; 18:2; Ign Trall 9:1; Ign Smyrn 1:1). 즉 마태와 누가 이후에 처녀 탄생에 대한 최초의 증거인 이것은 처녀 마리아에 의한 예수 출생을 그의 참 인성의 증거로 내세운다.

(b) 예수의 처녀 탄생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이 중세 기독교에 들어온 것은 어거스틴(Augustine)의 자료 때문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다. 성적인 번식 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수된 원죄가 우리 모두에게 유전된다. 그리스도가 죄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는 죄가 없어야만 한다. 예수가 죄가 없으려면, 우리들에게 유전되어 죄를 범하게 하는 아 담의 죄가 그에게 유전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는 성적인 출산을 통해 인성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한 잉태로 인하여 예수는 원죄의 오염을 벗어날 수 있었고, 모든 사람의 죄없 는 구세주가 될 수 있었다.

(c) 정통 개신교는 예수의 기적 속에서, 그리고 예수의 사역 안에서 드러난 성서적인 예언의 성취 속에 서 기독교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보았다. 처녀 탄생을 성서적인 기적으로, 그리고 사 7:14절의 성취로 이해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처녀 탄생을 예수의 신성의 증거로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처녀 탄생을 성서의 기적임을 부인하는 것은 곧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말이 그들의 슬로건이 된 것이 다.(참고. Hans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Napervill, Ⅲ: Allenson, 1964], and Thomas Boslooper, The Virgin Birth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2]) 기적적인 임신이 교회사에서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누가기자 는 누가복음서에서 이 기적적인 임신을 통해 무엇을 의도하였을까?

누가 사상에서 기적적인 임신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영웅 장래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눅1:4-4:15절에 속한(앞의 눅1:5-4:15의 서론을 보라.) 유명한 사람에 대한 공생애 이전의 경력에 대한 장르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해 줄 수 있 다. 그레코-로마 전기에서처럼 복음서에서도 기적적인 임신 이야기는 영웅의 장래가 위대할 것임을 설 명한다. 그가 예수인 것은 신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 우리는 누가-행전(Luke-Acts)이 의도하고 있는 기독론을 알아야만 한다. 심지어는 바울 이전 초기 교회 내에는 3가지 다른 기독론이 이야기되었다: 그 두가지 초점은 고양과 현현이다.(참고. R .H.Fuller. The Foundations of New Testament Christology [New York: Scribner's, 1965]) 요한복 음은 현현과 관련하여 예수 이야기를 말하는 반면, 누가-행전(Luke-Acts)은 고양 기독론을 말한다.: 지 상적인 삶에서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고 유대교 성서의 약속을 상속할 자이다. 예수는 부활로 인해 능력 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양된 신분으로 올려졌다. 지금 그는 모든 것에 대한 주님으로서, 그리 고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 자기 백성들의 행위를 간섭함으로써 하늘에서 통치하신 다. 다음 도표는 이것을 보여줄 것이다.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

| 부활

다윗의 아들 |

------------------------+

고양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경험을 이중적으로 설명한다: 하늘에서 통치하는 지금의 주님으로서, 그리고 우리를 위한 전형적인 모델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역사적인 예수로서. 어떻게 그리 스도가 이런 두 가지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구도 속에서 현재 하늘에서 통치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설명한다(기독론); 그의 지상 생활에서의 독특성은 기적적인 임신 으로 설명한다(장르). 이렇게 기독론과 장르는 어울린다. 그가 살았던 지상적 예수의 삶은 기적적인 탄 생 때문이다.

고양 기독론은 율법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왜곡되기 쉽기 때문에 처녀 탄생으로 시작하는 것이 신학적 으로 중요하였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올리셨다." 이 구절을 사람들은 예수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고양시켰다고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주의 영이 내게 임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기 위함이다." 이 구절 또한, 예수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의롭고 신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가 세례 때에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고 해석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의 지상 삶이 공로의 삶으로 이해된다면, 예 수의 추종자들의 삶 역시 공로의 삶으로 여겨야 한다. 바로 이렇게 생각한 (역자주 : 예수의 삶, 능력, 기름 부음을 공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빚어지는 것들) 결과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반박한 바로 그런 유형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고양의 구도에서는 기적적인 임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신학적 으로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지상 삶과 추종자들의 삶을 공로라는 용어로 해석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배제되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 생애의 위대함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신적인 간섭의 결과이다. 예수의 사역은 완전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만이 그와 같은 삶을 살게 하 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루터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무로부터 창조하신 것 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변함없이 계속된다"(Luther's Works, ed. J. Pelikan [St. Louis: Concodia, 1956], 21:299). 만약 우리가 예수의 기적적인 잉태를 누가가 보았던 대로 본다면, 우리는 그 것을 모든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확증으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