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이상적인 신앙인 그리고 사회적 모델

(1:39-56)




첫 번째 에피소드(요한과 예수에 대한 선언; 눅1:5-38)와 두 번째 에피소드(요한과 마리아의 아들의 출 생과 초기 삶; 눅1:57-2:52) 사이를 눅1:39-56절이 연결한다. 이 구절은 이야기 서론(39-41절)과 결론(56 절)에서 결합된 두 찬양으로 구성된다.(42-45절; 46-55절). 첫 번째 찬양인 엘리사벳 찬양(42-45절)은 마리아를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칭송한다. 두 번째 찬양인 마리아의 찬양(46-55절)은 한 사람을 위한 하 나님의 행위와 사회구조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분명하게 연결한다.

엘리사벳 찬양은 이야기로 시작한다(눅1:39-41절). 이 구절은 연이어 나오는 구절에 대한 무대 설정이 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창25:21-23절에 나오는 리브가의 자녀들의 이야기에서처럼 엘리 사벳의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뛰논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움직임이 자기 미래의 운명과 예수의 운명에 대한 전조가 된다는 것이다. 찬양(41b-45절) 자체는 마리 아에게 이중적인 축복을 한다(당신에게 복 있어라[42절]", "그녀에게 복 있어라[45절]"). 이 축복 선언의 표현 다음에 마리아가 축복받는 근거가 나온다.

첫째, 마리아가 복 있는 것은 자기 아기가 주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43절). 그리고 주님이 될 증거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엘리사벳의 자궁(44절)속에서 기쁘게 뛰논다. 자궁 속에서조차 요한은 메시아 인 주님을 알아본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렇게 알아보는 것은 눅1:31-33, 35절에서 마리아에게 행한 가브리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마리아가 복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45절):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makari,a)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 여기서 누가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마리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요약적인 형태로 기 록하고 있다: 마리아는 제자의 모델이다.

(1) 눅1:38절의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믿는 자이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 루어지이다" 어거스틴은 누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앙에 충만한 마리아는 자기 자궁에 임신하기 전부터 벌써 마음으로 먼저 그리스도를 인식하였다.(Sermon 215: 4) 그녀의 신앙은 신적인 뜻에 철저하게 자신을 복종시킨다.

(2) 눅8:19-21은 눅8:1절에서 시작한 단위의 절정으로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눅8:1-21절과 대응되는 본 문인 막3:19b-35절과 비교해 볼 때, 누가의 분명한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마가복음 구절은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 가족에 대해 언급하는 단위이다. 아마 21절과 31-35절도 본래 이 구절에 함께 속했던 것 같다. 마가의 상황에서 보면, 예수 가족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서기관들(막3:22 절)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결론적으로 막3:31-35절에서 예수 육신의 가족들은 진리와 그 리고 종말론적인 가족과도 상관없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참된 가족은 예수의 하나님, 그의 뜻을 행하는 자로 구성된다. 하지만 육신의 가족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는 것으로 암시된다. 그러 나 누가에서 예수의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은 밖에 있는 자가 아니다(눅 8:19; 막 3:31.); 누가는 모순적 인 상황을 버린다. 마가가 기록한 씨뿌리는 비유(막4:3-8) 부분을 누가는 단락의 시작(눅8:4-8)으로 옮 겼으며, 해석 부분(눅8:11-15)은 좋은 씨에 대해 설명하는 결구로 변경하였다. 좋은 씨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간직해서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15절). 눅8:21절은 예수 육신 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가족에 들어가기 위한 기준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칭찬한 다...."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누가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 형제들처럼 좋은 씨에 속한다.(대조. 요한 7:1-9은 예수의 형제들이 부활절 전에 그를 믿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3) 눅11:27-28절에서 누가만이 마리아가 육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이것 때문에 마리아에 대해 어떤 특별한 위치를 주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리아가 칭찬받는 것은 자기 자궁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자기 가슴으로 예수를 양육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4) 행1:14은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 제자 공동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마리아의 모습은 오순절 시 기의 원시 교회에서 그녀의 위치를 보여준다. 예수의 임신으로부터 오순절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마리아 를 "제자"로 그리고 있다.

(5) 예수의 육신적 가족과 마리아를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이야기는 눅4:24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막6:4은 나사렛에서 예수의 배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눅4:24절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 가족들이 예수를 배척하였 다는 언급들은 모두가 배제되었다. 마리아는 특히 참 신앙인으로 나타난다 (R.E. rowun et al, Mary in the New Testament [Philladelphia: Fortress Press, 1978], P.J.Bearsley, "Mary the Perfect Diciple: A Paradigm for Mariology," Theological Studies 41:461-504 [1980]).

교회를 위한 마리아의 의미에 관한 한 저자는 마리아를 기독교 신앙인의 원형으로 그린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정직과 선한 마음으로 간직했다(2:19, 2:51). 그래서 인내로써 열매를 맺 었다. 누가는 처녀 엄마 속에 이미 마리아가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임을 예견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 씀을 듣고, 그것을 믿으며, 그것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긴다: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되어지게 하소서" (눅1:38). 만약 우리가 누가가 본대로 마리아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를 제자의 모델로 보아야 한다. 이 마리아 모델은 자기 인식이나 통찰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참 제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거나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본문이 제공하는 증명의 압도적인 무게와 단락의 구조를 보건대, 46-55절은 마리아의 노래이지, 당시 로마의 몇몇 증인들이 주장한 엘리사벳의 노래가 아니다. 노래는 하나님의 자비로움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두 연으로 구성된다: 46-50절과 51-55절. 49-50절과 54-55절은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면서, 각 연의 끝을 알린다.

마리아 송가에 해당되는 이 연은 한 여인만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있는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강조점 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처녀는 자신의 비천함(46절)과 그리고 자기의 행위를 뛰어넘어 자 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49-50절)를 노래한다. 만일 엘리사벳의 찬양이 신앙의 모델인 마리아(45절) 에게 집중한다면, 마리아가 직접 칭송하는 첫 번째 연은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에 집중한다. 그래 서 마리아는 믿음으로 이 은총에 반응한다.

마리아 노래의 두 번째 연은 종말론적 역전을 통한 하나님의 사회적 혁명에 대해 말하는 데까지 영역 이 확장된다. 두 연 모두에서 낮은 자를 위한 하나님의 각별한 관심이 계시된다. 한 불쌍한 여인을 위 한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을 위한 종말론적 행위의 표시이다. 작은 사건 속에 큰 사건이 숨겨져 있다(R. C. Tannehill, "The Magnigicat as Poem,"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93:263-75 [1974]). 누가의 이 해에서 하나님의 사회적 혁명은 예수의 임신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완전함이 아니라 역 사 속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종말론적이며, 마지막 날을 지시 한다.

여기서 누가는 그리스도와 인간 문화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미리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인간 삶 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문화 실재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확실히 누가의 견해는 아니다. 마리아노래의 두 번째 연은 하나님이 세계 문화의 가치와 구조를 궁극적으로 전복할 것임을 선언한다. 저자는 그리스도 와 문화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누가는 문화를 변혁하 려는 사회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어떤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예수는 만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시이저나 빌라도처럼); 그는 좌로 치우치지도 않는다(열심당원처럼) 그 대신에 그는 용 서와 구원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자기의 생활공동체로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 가난한 자와 죄인들에게 갔다. 누가는 하나님만이 마지막 날에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동시 에 누가는 예수와 교회가 사회를 위한 사회 윤리를 추구하지 않고, 서로 함께 살아가려고 노혁하는 모 습으로 그린다. 교회의 첫 번째 의무는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사회적인 관계들이 무엇인가를 구성원 들이 서로 나누는 것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공동체, 교회가 되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이 해한다면, 예수와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힘을 가짐으로써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 한 책임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범, 창조적 소수, 하나님의 자비에대한 증인이 됨으로써 책 임을 실천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직접적으로 사회의 구조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사 회의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그 엄청난 내용 자체가 됨으로써 자기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한 다." 동시대 기독교 윤리자들에 의한 이 진술은 정확하게 누가의 견해를 반영한다.(Stanley Hauerwas, "The Nonresistant Church: The Theological Ethics of John Howard Yoder," in Vision and Virtue [Notre Dame: Fides Publishers, 1974], p.212.) 누가-행전(Luke-Acts)에서 예수와 그의 교회는 어떤 수 단 - 폭력이든 비폭력이든 - 으로 사회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으로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세상의 가치를 전복함으로써 변화시키고자 한다 (S.Hauerwas, "The Polics of Charity," Interpretation 31:262 [1977]). 궁극적인 사회 구조의 변혁은 일 반적으로는 마지막 날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인간 가치의 전복에 대한 그녀의 확신을 반영한다. 연이 어 나오는 51-55절에서는 동사가 하나님의 미래 행위를 묘사함에서 과거 시제로 표현한다. 이것은 지 금 마리아를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할 것이라는 보증 을 말한다. 지금의 궁극적인 간섭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롬 8:28-30 절과 유사하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예정과 칭의를 과거 사건으로써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의 사 건인 기독교인의 영화를 말한다. 바울은 미래의 실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의 사 상과 관련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읽는 것은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개인적인(예. 마리아) 경험을 아는 것이 다. 넓게 이 은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게 될 전형적인 방법이다.

누가에게는 개인을 위한 구속의 행위와 넓게 사회를 위한 구속의 행위를 하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과거와 지금 역사했고, 미래에도 역사하실 하나님도 같은 분이시다. 만일 동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면, 그의 역사 또한 동일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즉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은혜로운 간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