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의 좋은 소식

(2:1-20)




예수 탄생과 초기 삶을 다루는 두 번째 에피소드(눅1:57-2:52절)의 후반부인 눅2:1-52절 안에는 큰 단 락(unit)인 2:1-20절이 들어 있는데, 이 구절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a)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눅2:1-7절과,

(b) 눅1:5-20절과 눅1:26-38절에서 본 것과 같은 탄생 패턴이 나오는 눅2:8-20절로 되어 있다.

이 두 부분은 분명히 공식적인 연결 고리로 이어진다. 하나는 "다윗(David)의 도시(눅2:4, 11절.)"와 "구 유에 있는 아기 포대기(눅2:7, 12절)"에 대한 회상이다. 다른 하나는 예언-성취 도식이다. 눅2:1-7절은 예수 탄생에 대한 지리적인 장소(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와 예수의 출신 가족에 대해 말한다.(요셉은 다 윗 혈통과 가문이다). 두 사실 모두 예언에 의한 언급이다; 이것에 대해 저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 주 그럴싸하게 미5:2절을 인용하여 말한다:

그러나 너 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유다 계열 중에 너는 가장 작다. 너로부터 먼저 나를 위 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한사람이 나올 것이다.

다윗 도시에서, 그리고 다윗 가문에서 예수가 출생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 주이심을 의미한다(눅2:11 절). 물론 이것은 눅1:32-33절에서 마리아에게 전한 천사 예언에 대한 성취이다: "주 하나님이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권을 주실 것이다." 눅2:8-20절은 또한 예언-성취 도식으로 이루어진다. 천사가 목 자에게 나타나서 구주의 탄생을 알렸을 때, 징조(sign)가 주어진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 표적이니라"(12절) 천사가 말한 대로 목자가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 것들을 발견함으로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16, 17절). 눅2:1-7절과 2:8-20절은 다윗계 메시야의 출생을 환호한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 천사가 전해준 메시지는 "큰 기쁨의 좋은 소 식(10절)"이었다.

예수 탄생에서 무엇이 좋은 소식인가? 이 탄생을 큰 기쁨으로 여기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이 두 질문 에 대해 배경 정보가 우리에게 답을 줄 것이다.

(1) 지중해 세계에서 통치자의 생일은 때때로 그의 탄생일의 이익을 선언함으로써 축하하였다. 기원 전 9세기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생일을 축하하는 프리네(Priene)에서 발견된 비문의 한 부분을 읽 어 보자.

섭리가 ...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아우구스투스는 인류의 이익을 위한 영웅적인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위한 구세주, 그는 전쟁을 멈추게 할 것이며, 모든 것을 잘 정돈하실 것이다. 가이사(Caesar)의 현현은 과거 희망과 꿈의 성취를 가져오게 하였다(F.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p.24.).

여기서 아우구스투스는 고대의 희망을 성취하며, 평화를 가져 오게 한다. 이러한 혜택이 그의 생일날에 선언되었다.

(2) 성서적 문학에서 천상적인 합창은 간혹 이것들이 이미 사실이었던 것처럼 미래 사건을 축하한다(계 5:9-10; 11:17-18; 18:2-3; 19:1-2, 6-8절); 저들의 노래는 계속해서 얻게 될 이익을 노래한다: 눅2:13-14 절은 바로 이런 천상의 합창을 제공한다: 천상의 무리들이 노래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에게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성서 예언으로 표현된 고대 희망을 성취하게 하는 자는 자기 탄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오며, 땅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자로 환호 받는다. 아우구스투스처럼 예수도 자기 생일날, 자기 탄생이 가져 다 줄 이익에 대해 말한다.

기독교를 태통시킨 예수의 탄생이 가져온다고 하는 평화(shalom[히], ??????[헬])가 아우구스투스가 가 져온다고 선언하는 그 평화와 같은 것이니가? 유대문화에서 평화는 기본적으로 온전함을 의미한다. 바 른 삶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온전함은 관계의 여러 측면에서 그 특징을 정리 할 수 있다.

(a)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b) 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c) 사람과 자연 세계와의 관계,

(d)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 온전함은 다른 형태로는 악과 반대되는 행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죄가 들어옴으로써, 이 온전함은 상실되었다. 그러므로 평화는 종말론적 희망(Zeck 9:9-10)이 되며, 메 시아의 모습은 평화의 왕(사9:6)이 된다.

신약에서 평화는 유대적인 뿌리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정상적인 삶 의 상태와 종말론적 구원 모두를 말한다. 이와 같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성(예. 롬5:1; 고 전1:20; 엡2:14, 17절)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전성(예. 막9:50; 고전7:15; 엡2:14-17; 4:3절) 그리 고 자연 세계와의 관계에서 온전성(예. 막5:34절),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온전성(롬8:6; 15:13; 갈5:22; 빌4:7; 골3:15; 요14:27절) 모두를 포함한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 누가-행전(Luke-Acts)은 이런 상황 모두를 반영한다. 메시아적 구원은 평화의 길 로 그려지고 있다(눅1:79절).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자이다(행10:36절). 예수 안 에서 하나님이 역사함으로 나타나는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눅7:50절), 자연 세계와의 관계에 서(눅8:48절), 사람들 가운데서(예. 행9:31절), 회복된 온전성이다. 자기와의 관계에서 평화에 대한 언급 이 없다는 것은 누가-행전(Luke-Acts)에서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삶의 실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누가가 많이 의존하고 있는 성경 자료가 내적인 감정 으로서의 평화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탄생이 평화 회복으로 여 겨지기 때문에 매우 큰 기쁨인 것이다. 이 회복은 모든 영역에서의 삶의 온전성의 회복을 뜻한다: 눅 2:14절에서 노래하고 있는 천상적인 찬양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 자연 세계와 더불어 이루 어지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누구를 위해 약속되었는가? 14절을 보면, 선한 뜻의 사람들이나 은총의 사람들을 위해서이 다. 그러므로 은총의 사람(avnqrw,poij euvdoki,a)을 위해 약속되었다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낫다. 은 총의 사람이란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는 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있는 경우에 대해서 누가 복음은 두 가지를 말한다.

첫 번째 경우, 세례 후에 예수가 "내가 그 안에서 기뻐하는(euvdo,khs,a) 나의 사랑하는 아들" 로 선언 된다: 예수는 신적 은총의 대상이다. 두 번째 경우, 눅12:32절에서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한다. "적 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euvdo,khsen)": 여기서도 예수의 제자들이 신적 은총의 대상들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 중에 평화가 있기 때문에 인간들 중에도 평화가 있게 된다. 바로 이곳이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의 온전성이 바로 예수 탄 생과 주권의 결과로서 회복되는 곳이다. 이것이 기쁨의 이유이다.

더 나아가서 이 복음은 "모든 백성들"(10절), 즉 공동체(group) 안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밖에 있는 자 들을 위한 것이다. 누가 시대에 목자들은 종종 율법 밖에 있는 자들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의 부정직 한 평판으로 인하여 그들의 증언은 효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b. Sanhedrin 25b) 그렇지만 이들의 증언은 천사들이 구세주의 탄생의 좋은 소식을 선언했던 것과 같이 믿을 만한 것이다(눅2:8-11절). 이 것은 누가복음을 관통하고 있는, 죄인들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주제에 대한 전조로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메시아적인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이다(예. 5:29-32; 7:36-50; 10:30-37; 15:1-2; 17:11-19; 19:1-10). 예수가 좋은 소식을 약속한 대상은 죄인이었다(18:9-13; 15:11-32). 예수의 탄생이 평화의 혜택을 상징한다는 소식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큰 기쁨의 이유인 것이다.

천사의 찬양은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제자들 사이의 온전성 회복에 대해 노래할 뿐 아니라, 예수 탄생 의 유익을 주시고 주님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눅2:14과 마찬가지로 시85:8-9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화롭게 되심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평화와 연결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온전함이 인간들 중에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뢰를 반 영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행동하신 하나님 때문에 생겨나는 인간 관계의 온전한 회복은 하나님을 영 화롭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것 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천사가 예수 주권의 유익을 노래했을 때,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그리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노래했다."-한 노래로 메시야 탄생에 의한 두 가지 유익을 전하고 있다. 이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