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려지지 않은 초태생 
(2:21-52) 




예수 탄생과 초기 삶을 다루는 두 번째 에피소드(1:57-2:52)의 후반부인 눅2:1-52절 안에 두 번째 큰 단락(unit)인 눅2:21-52절이 있다. 21-52절 사건들은 유대 율법과 유대인의 경건한 풍습들에 대한 순종 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1) 눅2:21은 레위기12:3절에 나와 있는 대로 팔 일 만에 예수가 할례를 받았음을 말한다.

(2) 눅2:22-24에는 율법에 규정된 적어도 두 가지 전통적인 유대 풍습이 나온다. 22절a와 24절에는 레 위기 12:6, 8절의 지시대로 아기 출산 후의 어머니의 정결례가 반영되어 나온다. 예수의 어머니가 정결 례로 새를 바친 것은 자신의 가난함을 나타낸다(참고.레12:8): 예수는 가난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22b, 23절은 출13;2, 12, 13, 15절을 반영한다.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기에 드려져야만 한다(참고. Mishna, Bekhoroth, 8). 이런 점에서 예수 부모의 행위는 "율법의 풍습에 따른" 것이다(눅2:27절): "그 리고 그들이 율법의 풍습대로 모든 것을 행한 후, 갈릴리로 돌아왔다(눅2:39절)"

(3) 눅2:41절은 매년 유월절에 예수 부모가 예루살렘으로 갔음을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모든 남자는 매년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고 하는 출23:14-17; 34:23; 신16:16절을 따른 것 이다. 비록 율법이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서 시대에 여자들도 분명히 순례를 했다(삼상 1:7; 2:19절).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유월절에 가야만 한다는 것을 규정하였다.

(4) 눅2:42절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여행이 풍습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아 마도 13살되었을 때(Pirke Aboth 5:21) 가야 하는 종교적인 의무에 첫 발을 디디려는 준비였을 것이다.

(5) 예수가 "그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 이것들을 지켰다."는 것을 눅2:51절은 말하고 있다. 소년 예수는 자기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을 성취하였다(출20:12; 신5:16절). 눅2:21-52절에서 저자는 예 수 부모와 어린 예수가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는 것으로 그린다: 이러한 맥락들이 이 단락을 하나로 묶 는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맥락은 또한 신학적으로 눅2:21-52절에서 중요하다. 소년 예수가 율법을 따르는 게 된 것은 순종을 생활의 거부할 수 없는 전제로 받아들이는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족을 번 식하는 것과 자선으로 감정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 그리고 종교적 경험을 영구히 하는 것이 가족의 기능에 포함된다는 것으로 믿었던 유대적인 이상을 여기에서 예수의 가족이 성취하였다. 세 번째 기능 은 잠언에 진술되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 리라(잠22:6절)". 예수가 하늘 나라의 멍에를 스스로 지기로 결정할 수 있던 것은 율법에 대한 이의 없 는 수락을 가르쳐 준 가족 때문이다(42절). 차후 부모에 대한 그의 순종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욕구로부터 나왔다(엡6:2-3).

율법에 대한 예수 가족의 순종 맥락 일부분으로, 제자 모델로서 마리아가 자기 아이를 하나님에게 바친 것에 주목하자. 눅2:22-24절은 AB:B'A'구조를 지닌다: 아기 출산 후에 어머니의 정결례를 다루고 있는 22절a와 24절(참고. 레12:8)은 A와 A'이다; 초태생의 바침을 다루는 22절b와 23절은 B와 B'이다. 초태 생에 관한 출13:2절의 규정이 문자적으로 속량받지 않은 초태생 예수(눅2:7절)에 의해 성취되었다(출 13:13; 민3:47; 18:16). 일반적인 풍습과는 다르게 예수는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Bo Reicke, "Jesus, Simeon, and Anna [Luke 2:21-40]," in Saved By Hope, ed. J.I.Cook [Grand Rapids: Eerdmans, 1978], pp. 96-108, esp. p.100.). 이것과 매우 유사한 평행구가 삼상1-2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보면, 한나는 사무엘 출생 그날에 사무엘의 전 생애를 주께 바쳤다. 그래서 사무엘은 만남의 장막 안에 있는 엘리 앞에서 산다. 이와 비슷하게 만약 예수가 하나님께 바쳐졌다면, 그는 영원 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부모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어디서 찾아야할 지 몰랐던 이유인 것이다(2:48-49): 그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무엘 경우처럼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을 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 구성 단계에서, 소년 예수는 자기 부모들이 탄생일에 자기에게 행했던 결정들을 스스로 실행했다. 눅2:21-52절에서 가족의 영향과 인격적인 결정이 청년 예수를 만들었다.

누가복음의 12살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 아니라,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는 영적인 분별력을 소 유하고 있다. 눅2:41-51절에 나오는 성전에서의 예수 이야기는 소년을 율법을 이해하는 비범한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49절)로 그린다. 형식적으로는 주변 내용들이 이야기 중심인 예수의 지혜(눅2:40 과 2:52절)에 대해 말한다(Henk J.de Jonge, "Sonship, Wisdom, Infancy: Luke 2:41-51a," New Testament Sudies 24:317-54 [1978]).

A. 마리아, 요셉,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다(41-42)

B.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머물지만 그는 주목받지 못했다(43)

C. 그의 부모는 찾았고 그를 발견했다(44-46a)

D. 선생들 중에 있는 예수(46b-47)

C' 예수를 괴롭히고 책망하는 부모(48)

B' 이해못함에 대한 예수의 반응(49-50)

A' 마리아, 요셉, 예수가 나사렛으로 돌아옴(51a)

중심 주제와 틀의 일치: 예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성서를 지혜롭게 해석한 하나님의 아 들 예수에 대해 말한다. 누가-행전(Luke-Acts) 이야기 곳곳에서 발견된 동기가 이것이다(예. 눅4:1-13; 4:16-21; 7:26-27; 10:25-28; 20:17-18; 20:37-38; 20:41-44; 24:25-27, 32; 24:44-47절). 누가24장에는 부 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고, 의미를 이해하도록 저들의 마음을 열어주는데, 이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예수 가족들과 청년 예수의 순종을 강조하는 문단 속에서 청년 예수를 비범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 그리는 누가 관점은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 뜻에 대한 종교적인 이해인 통찰은 종교적인 복종 과 순종의 맥락에서 발전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절)". 일반적인 법칙처럼 이 진술의 의미 는 확장될 수 있다: 영적 진리에 대한 분별력 - 하나님의 뜻 - 은 단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 다 음에야 나올 수 있다. 사람은 영적 통찰력 - 성경에 대한 종교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 - 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할 것인가 여부를 결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먼 저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어한다 그런 후에만 이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한다. 하늘 왕국의 멍에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수락하는 맥락 안에서만, 그리고 어린 자신을 부모가 하나님에게 바 치는 것과 인격적으로 동일시하는 맥락에서만 청년 예수는 성경의 원숙한 해석자(하나님의 뜻)이다: 분 별력 뒤에는 사명감이 있다. 예수의 참된 인성을 염두에 둔 사람을 위해서 저자는 청년 예수를 말한 다.

(1) "그리고 어린이는 자라 강해졌다"(40절a); "예수의 키가 자랐다"(52절)(참고. 19:3에서 이 단어는 키 가 작은 삭개오에게 사용된다.). 이 표현은 인간 몸을 가진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 히2:14절에서 이런 방법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 께 속한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예수의 참된 인성(육체)을 부인하려는 경향을 영지주의라고 불렀다.

(2) "그리고 예수는 지혜에 있어서도 자랐다"(52절). 이것은 참된 인간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서 말하는 방식이다. 히브리서는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 하도다(히2:17절)";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절). 만약 에 예수가 우리처럼 제한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처럼 어떤 방법으로든 그도 유혹을 받을 수 밖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도 누가처럼 지적인 면에서의 예수 인성에 대해 말한다. 기독 교 역사에서 보면, 라오디게아 감독(A.D.390)인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는 예수의 참된 인성(정신)을 부인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이후에는 아포리나리안니즘(Apollinarianism)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인간처 럼 몸(body)과 영혼(soul)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가진 이성적인 지성은 영원한 로고스이라고 그는 주 장한다.

(3)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점점 사랑스러워 갔다"(52절) 이 표현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커가는 사람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히브리서는 동일한 사실을 말한다: "그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셨다 (히2:10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5:8절)" 게다가 이러한 표현은 공 통적으로 사무엘에게도 나타난다: 삼상2:26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 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기독교 역사에서 팔레스타인에 나타난 온전히 성숙한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말했던 사람은 마르시온(Marcion)이다. 누가가 볼 때 예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종 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예수는 참으로 인간이었다. 이렇게 볼 때만이 그는 구원의 선각자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당한 모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