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닌", 어두운 밤

(9:7-50)




눅9:7-50절은 누가복음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구절로서, 눅4:16절에서 시작한 갈릴리 사 역(Galilean ministry)에 대한 결론이다; 이 구절은 누가-행전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새로운 출발을 제시한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두 질문은 대체로 이 구절에 집중한다.

(1) 첫 번째 질문은 헤롯이 제기하였다. 마태와는 다르게, 하지만 마가와는 비슷하게, 누가는 열 둘 파 송 기사(pericope)와 헤롯의 반응 기사를 말한다(마14:1-2; 막6:14-16; 눅9:7-9절). 마14:2절과 막6:16절에 서 보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세례 요한이 틀림 없다"고 헤롯은 말한다: 하지만 눅9:9절에 서 헤롯은 다르게 말한다. "요한은 내가 목베어 죽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가 그린 예 수의 갈릴리 사역은 기독론적인 질문을 제기시킨다: 예수는 누구인가?

(2) 예수가 스스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한다. 첫 번째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된 이 물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누가는 막6:45-8:26/마14:22-16:12절에 있는 주요 자료 단락 (unit)을 생략한다. 종국에 제자들과 함께 있을 자리인 갈릴리에서 예수는 묻는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 라고 말하느냐(눅9:20절)?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두 질문에 이어 나오는 자료들이 대답한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은 눅9:20절 이하와 눅9:28절 이하에 나온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배척, 고통, 고난과 죽음이라는 새로운 영적 단계로 나아간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자신과 동 일한 발전의 과정을 거치도록 한다. 연이어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이 그림에 대한 다양한 차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자의 삶, 그리고 기독교 교회의 발전이라는 거룩한 역사의 과정들을,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 지휘하 신다는 것"을 누가는 보여주고자 한다(A.A.Trites, "The Prayer Motif in Luke-Acts," in Pers pective on Luke-Acts, p. 169.). 사도행전은 열둘과 다른 이들이 기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1:14절). 기도 바로 이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나온다(2:1절 이하). 그리고 기도 동기 이후에 예루살렘 에 있는 증인들을 위한 능력부음이 4:31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행10-11장에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종 말론적인 하나님 백성으로 포함시키도록 고넬료와 베드로의 기도를 사용한다. 더 나아가 행13:1-3절은 어떻게 해서 바울의 이방 선교 이야기가 기도 문맥에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기도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계획 속에 있는 새로운 출발의 의미를 전한다. 이와 같은 점이 복음서에서도 강조된다. 기도 문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가랴(Zechriah)는 자신과 엘리사벳(Elizabeth)이 아들을 가질 것인데, 그 아이가 "엘리야(Elijah)의 영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갈 것이라는 것 을 안다. 눅3:21-22절을 보면, 기도하는 예수가 사역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고,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 하는 자라는 하늘 음성으로 인정받았다. 그 결과, 그는 갈릴리 사역을 시작한다(눅4:16절 이하) 눅 6:12-16절에서 예수는 기도한다. 그리고 후에 열둘을 선택한다. 누가-행전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 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저자는 예수 사역에서 새로운 발전에 대해 말한다. 그래 서 저자는 기도하는 예수 모습을 보여준다(눅9:18 이하, 28 이하).

기도에 대한 두 가지 언급이 눅9:18절과 눅9:28-29절에 나오는데, 이 구절은 분명하게 누가적이다(참고. 마16:13/막8:27; 마17:1/막9:2). 두 구절을 예수와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예수는 다가오는 고난 때문에 기 도한다.

(1) 한편으로 눅9:18절은 말한다. "예수가 홀로 기도하고 있다." 그때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에 대해서 묻는다. 베드로가 대답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눅9:18-20절)." 그러나 예수는 마태처럼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는다(마16:17-19절). 그리고 마가처럼 "저들을 가르치지도 않는다(막8:31절)." 누가 는 명령의 중요성을 잃지 않도록 수난에 대한 예언으로 침묵하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베드로를 책망하 는 내용(마16:22-23 그리고 막8:32-33절)도 생략한다. 누가가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의 수난 예견(9:22 절)과 예수 운명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함이다. 눅9:18-22절이 암시하는 바는 예수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도할 때 깨달았다. 기도할 때 그는 자신이 고통받아야만 하고, 죽어야만 하고, 일으켜 질 것을 알았다(참고. 눅24:56, 46; 행2:23-24절). 기름 부음 받은 자, 성령으로 능력을 받은 자는 배척받고, 고난받고 그리고 죽은 이후에만 마지막 영광에 들어갈 것이다. 더 나아가서 누가는 고난의 예견(9:22절)에 대한 내용을 예수가 직접 가르치도록 함으로써(대조. 마16:21/막8:31절), 이 내용을 앞선 대화의 일부분으로 삼는다. 예수는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이렇게 반응한 것이 다.

(2) 다른 한 면으로, 변화 이야기는 눅9:28절 이하에 나온다. 이 이야기도 역시 기도 장면으로 설정되었 다. 전형적으로 저자는 기도를 천상적인 환영과 신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하는 것으로 그린다(예. 3:21-22; 행10-11장.). 기도 중에 예수는 천상 세계에 참여한다. 거기서 두 명의 하늘 거주자와 별세 (e;xodon; 참고. eivso,dou-행13:24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수의 별세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즉 승천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드러난다. 앞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누가는 예수가 기도 를 통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기도가 매체라고 한다면,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삶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 다. 이 새로운 출발의 내용은 즉시 일어나는 고양이 아니라 오히려 거절, 수난, 죽음이다: 성령으로 기 름부음 받은 자는 거절당할 것이며, 죽임을 당할 것이다. 예수 상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암시가 여기 에 나온다.

첫째로, 누가는 예수의 사역이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이것은 이미 눅2:40, 52절에서부터 말한 것이다. 그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예수 가 영적인 단계까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서에서 성인 예수는 3가지 단계를 거친다: (a) 능력 부음(눅3:21-22, 4:16절 이하); (b) 수난과 죽음(9장 이하) (c) 부활-영광(눅24장) 누가복음 9장을 보 면, A단계에서 B단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발전은 기도를 많이 하여 얻는 분별력에 의해 진행된다.

두 번째로,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자신처럼 발전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능력부음이나 영광이 아니고 수난-죽음이다. 눅9:23a(그리고 그는 모두에게 말하고 있었다[미완료 시제])는 눅9:18절에서 시 작한 대화를 계속해서 진행한다. 기도로 분별력을 가진 예수가 자기 운명(눅9:22절)에 대해 말한 후에 제자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습에 대해서 말한다. 누가가 말하는 제자도는 같은 경험을 계속하는 것이 다. 그래서 눅9:23절(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에서 저자는 과거(evlqei/n-동사. 마16:24; 막8:34) 대신에 현재 부정사(evrcesqai-to come)를 사용해 말한다. 여기서 강조점은 예수와 같은 삶이 계속적 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마16:24/막8:34절에 나오는 "십자가를 지고"에 "날마다"를 첨가해 말한다. 마태와 마가가 제자들의 처음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반면, 누가는 제자들이 날마다 계속해서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 제자들이 예수의 능력(눅9:1-6절)을 공유했던 것처럼 이제 죽음도 함께 하라고 부름을 받는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눅9:23절)."

성령의 능력을 받은 예수가 어떻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가? 능력부음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1세기 정통 기독교의 종말론으로 말할 수 있다. 이 종말론은 "지금"과 "아직 아니"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참고. 고전4장, 15장, 빌3장에서의 바울). 새로운 시대(New Age)는 예수의 부활로 생기지만, 옛 시대(Old Age)는 재림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 는 이 두 시대가 함께 존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렇게 두 실재(지금-아직 아니)를 주장한다. 이것 이 언제나 가장 어려운 기독교인의 삶과 사상이었다. 계속해서 두 실재 중에 하나만을 강조하려는 유혹 이 있었다: 믿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새시대의 능력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약속 이 사라졌다. 또 다른 하나는 신자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구조와 상황만을 너무 강조한다는 점이 다. 이렇게 나약한 무리들에게 성령의 능력은 임재하지 않을 것이다.

갈릴리 사역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악을 물리친 예수이지만, 지금 예수는 이 세대의 한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준다. 예수가 즉시, 그리고 자동적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해 방시켜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가르쳤지만, 거절당했고, 죽임을 당했다. 이 세대를 뛰어넘지 못하도록 그 다른 한 면이 그를 최후의 영광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제자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된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것"과 "죽기로 된 운명", 이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이 신학적 으로 중요하다. 나란히 놓지 않는다면, 기독교 실존에서 "지금""아직 아니" 사이의 균형은 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이렇게 고난받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정보에 대한 두 가 지 면이 필요하다. 크게는 신약 전반에 한 면이 나오며, 누가에 다른 한 면이 나온다.

(1) 누가는 예수의 지상사역을 두 개의 유혹 장면으로 구성한다(눅4:1-13; 23:35, 36-37, 39절).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먼저 눅4:1-13절에서 우리는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읽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 행하신 모든 것의 정점으로, 그리고 눅3:23-28절, 족보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를 두 번째 아담으로 읽어야만 한다. 눅4:1-13절에서 나오는 유혹 목록은 창3:6절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3 중적 유혹일 뿐만 아니라 시106편에 나오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시험을 반영한다: 이렇게 예수의 유 혹은 이스라엘 광야 유혹과 동산에서의 최초의 두 사람의 경험과는 반대 유형이 된다. 앞에 나온 사람 들이 불순종한 것과는 다르게, 예수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 유업의 참된 정점으로서 순종하였다. 이것으로 아담과 이스라엘의 죄가 취소되었다. 유혹 이야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예수가 순종한 것처럼 예수의 지상 사역을 따르도록 만들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두 번째 유혹은 눅 23:35절, 36-37절에 계속해 나온다. 이것도 역시 3중적인 유혹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신의 요 구가 있음에 대해서 말한다(눅9:22, 44; 18:31-33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했다. 이것은 심지어 죽음을 의미한 것이었다(눅23:39-46절); 지금 그는 십자가 위에서 유혹받는다. 이 유혹은 살기 위해서 신적인 힘을 사용하는 유혹이다(여전히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눅22:51절). 세 번째 유혹 은 다음과 같은 요구이다: "네 자신을 구원하라"(눅23:35, 37, 39절). 이렇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예수 는 죽기까지 순종하였고, 아버지에 대해 온전하게 순종하였다(참고. 눅13:32절). 예수의 공적 사역을 둘 러 쌓고 있는 누가의 구조는 예수의 사역을 순종의 길로, 심지어는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으로 정의한 다.

(2) 신약 초기 기독교사상에서 하나의 경향은 예수의 죽음을 죄에 대한 구속과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 로 여길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궁극적인 순종의 행위 혹은 신실한 행위(예. 빌2:8; 롬5:18-19 절)로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이런 문맥에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투 쟁이다. 이 안에서 그는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한다. 히2:10절은 말한다.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심이 합당하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 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절)",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 임에 대해 가진 그 시각이 바로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이들은 고난,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죄와 씨름하는 투쟁의 장소로 여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또한 투쟁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자기들의 순 종을 발전시켰다. 벧전4:1-2절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 을 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여기서는 기독 교인들이 신앙 생활할 때 받는 고난, 즉 징계(히12:7절 이하), 시련(벧전4:12), 시험(벧전1:6-7절)을 받는 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약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이 견딘 고난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은 투쟁 속에 서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하였다.

누가복음 9장이 이해한 대로, 고난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문맥은 영적 성장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을 말한다. 예수는 자기를 위한 하나님 계획의 새로운 국면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기도 를 통해서 알았다. 예수가 계속해서 능력 부음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는 능력 부음과 계시 받음 (empowing-illumination)의 시작 단계에서 배척받는 삶의 단계(눅9:22절)로 나아간다. 이 단계에서 예수 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울 것이다(히5:8-9절) 배척, 박해, 고난을 받아 결국 죽기까지 예수는 하나님 께 순종함으로써 죄에 대해 승리할 것이다(벧전4:1-2절).

배척, 박해, 고난 그리고 죽음의 위협은 영적 성장 과정에서 중요하다. 이 과정들은 손해가 될 수도 있다. 그 손해는 존경 혹은 뭔가를 갖게 하는 유혹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경제, 신분, 명예, 그리고 생명 자체에 대한 손해의 위협을 받는다. 박해 상황이 안정하고 싶어하는 욕 구들을 제거해 준다. 배척받는 고난이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이거나 잠재되어 있는 거짓 신들과 분리 시켜 준다. 그러므로 고난의 단계는 성화(purification)로 나아가게 한다. 사람들은 고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에게만 순종하게 된다. 배척 혹은 박해는 실제하고 있는 우상과 잠재하고 있는 우상들을 제거시 켜서,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만 향하게 한다. 고난의 구속적인 단계는 능력 부음(empowering) 혹은 계시 받음(illumination)이라는 앞선 단계 없이는 불가능하다. 누가 관점에 의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재할 때만 고난 안에 있는 잠재적인 성화(purification)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서 능 력 부음을 받아 영광에 이르는 것이 예수의 길이었다.

이 길을 걸었던 예수는 이와 같은 발전의 과정에 참여하라고 제자들을 부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눅9:23절)." 십자가를 인생의 짐을 지 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 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는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십자가를 날마다 진다"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다 고 한다면, 여기서 자기 부인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모든 형태의 세 속적인 안전뿐 아니라. 신체적인 요소까지도 박탈당한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죽은 분 밖에는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영원히 자신을 사로잡을 수 없다. 모든 다른 집착은 죽 음의 선고, 자신에게 내려진 선고로 인하여 끝장이 났다.

눅9:24-26절에는 비슷한 방법으로 시작하는 세 가지 말씀이 나온다: 24절- 누구를 위해; 25절-무엇을 위해; 26절-누구를 위해. 이 구절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기 부정의 두 가지 이익을 보여준 다. 부정적인 형태로 주어지는 그 이익은 두려움을 피하게 한다. 24-25절에서 예수는 자기 부정이 현재 의 두려움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옛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람들은 참된 자아 혹은 참 생명을 잃는다(참고. 눅4:5-8절). 누가 맥락에서 자기 부인은 어떤 동방 종교에서처럼 하나님이 주신 개 성과 가치를 부인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보다도 자아를 더 절대화하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이다. 선하게 창조된 자아(창1:31절)가 왜곡되어 이렇게 상실될 수 있다. 피조된 질서에 대한 사람 의 우상숭배적인 집착에서 벗어날 때만, 그리고 창조주를 궁극적인 관심으로 여길 때만, 피조물인 자아 는 구원받는다.

26절에서 예수는 미래의 공포를 자기 부정으로 피할 수 있음을 말한다. 지금 예수에 대해 잘못된 반응 을 한 사람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맞게 될 것이다. 이 심판은 예수의 지상적인 삶과 사명을 변호할 것이 다. 피조된 질서에 대한 우상적인 집착이 없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전부인 새 시 대에서 변호를 받을 것이다. 현재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선고받은 사람으로 사는 자만이 창조주가 의 도한 바 그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받은 예수는 이러한 삶에 대해서(눅9:22, 44, 31절) 말 한다(9:22, 44, 31절). 그리고 그의 능력 받은 제자들도 이러한 삶으로 나아 오라고 부른다. 제자들이 예 수를 따라 갈 때 그 길이 어떤 신체적인 순교를 포함하든지 간에, 제자의 길은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집착도 버린, 사형선고 받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오직 이것으로만 자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 로 성화될 수 있다: 이것으로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온전해질 수 있다.

예수는 "배척-고난-죽음-성화"를 보증하는 약속과 연결하여 가르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여기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로 있느니라(27절)." 27절의 형식은 분명히 누가 적이다: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마16:28절)."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 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막9:1절)." 이 두 구절은 내림(內臨, parusia)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라고만 말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역사 안에서 경험되거나 보여진 왕국의 현존이다. 눅17:21절이 예수 사역 속에 있는 왕 국의 현존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는 자기에게 절대적인 복 종을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절대적인 복종으로 모든 집착을 벗어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 이 예수는 지금 말한다. 내 말을 듣는 자는 살아가는 동안 참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보증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