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준 구별

(5:12-6:11)




눅5:12-6:11은 눅5:29-32절에 의해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이 부분은 5:12-32의 결론이 되며 5:29-6:11의 내용의 서론이 된다). 이 구조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쓰기 위한 고대의 방식을 반영한다(예, 사모사타의 루시안). 첫 부분에서는 예수가 있는 장소에 대해 말하는데, 눅4:31-5:11의 구조와 유사하다.

1) 눅4:31-5:11에 베드로를 부른 근거가 되는 예수의 앞선 행위(기적)가 나오는 것처럼, 눅5:12-26에 레 위(5:27-28)를 부르는 것에 앞서서 두 유형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 을 공동체로 받아들이고(5:12-14), 죄인들을 용서하는 자(5:17-26)인 예수에 근거해서 레위는 반응한다 (28절).

2) 예수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자(눅5:10b)로 임명한 것과 같이, 예수가 레위를 부르신 것도 이 새로운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제자도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뿐만 아니라(5:28), 그의 동 료들을 예수에게 소개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는 것이다(5:29). 눅5:29-32에서 예수는 공동 체로 복귀시키며 용서하는 자이며, 어려운 중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한다.

3) 눅5:1-11에서 나타난 대로 예수에게 복종해서 일어난 큰 수확은 사도 교회의 경험을 예시한다. 눅 5:29-32도 역시 엄격한 유대인들에 의해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방인들과 관계하는 것으로 알려진 부 활 이후의 교회의 경험을 예시한다(행10:1-11:18, 특히 11:18에 주목하라. "그때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하 나님이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승인했다"). 눅5:32절에서 말하는 바, 두 가지는 누가의 그림을 분명히 해 준다.

첫째, 완료시제에 주목하라(evlh,luqa). 이것의 의미는 "내가 왔고 내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이 다"(Eduardo Arens, The Elthron- Sayings in the Syooptics Tradition [G?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6], p. 62). 즉 예수는 교회를 통해 죄인들과 관계를 계속하고 있다.

두 번째, "회개를 위하여"라는 누가의 첨가를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누가는 행11:18을 위한 근거를 놓고 있다. 이 모든 내용들 중에서도 누가의 관심은 예수가 죄인들과 교제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함이 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 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5:31-32)"라고 예수가 말할 때, 이것은 그가 있어야 할 곳을 나타 낼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말한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는 유일한 사귐이다. 교회에 들어오려는 자들에게는 한 가지 자격조건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지원자들의 무가치성 이다"(Robert Munger). 예수와 그의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레코-로마(Greco-Roman) 독자들에 게는 특이한 것이다. 켈수스(Celsus)에 대한 오리겐의 반박(Origen's Against Celsus, 3:59이하)에서 기 독교에 대한 이교도의 비판자인 케수스는 본래 종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초청 받는 자들은 명예로운 삶 을 사는 깨끗한 자들이라고 하며, 기독교를 비난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죄인이거나 어리석은 자이 거나 혹은 저능한 자들은 누구나 초대한다. 요약하면, 어떤 사회적인 낙오자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받 아들여질 것이다. "죄인"이란 도둑이나, 강도나, 죄수나, 속물들과 시체 도굴자들처럼 부정한 사람을 의 미한다. 켈수스는 말한다: 왜 그러냐? 만약 당신들이 강도의 집단을 원하였다면, 여기에 당신이 부르려 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오리겐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부정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3:60-61).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죄인들에게 초대를 확장할 뿐이다(id., 7:60). 플라톤 (Plato)과 그리스의 현인들이 자기 스스로를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상류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치료자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예수의 제자들은 더욱 더 큰 무리를 위해 준비하고 있 다. 누가는 예수가 죄인들과 사귀는 것으로 그린다. 사회적으로 축출당하였지만 공동체로 복귀된 자들 과,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들과의 사귐이 교회라고 누가는 말 한다.

눅5:12-32절은 예수가 대단한 성공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눅 4:31-5:11절과 유사하다. 만일 앞 문단에서 예수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들을 불렀다고 한다면, 이 문단에서 예수가 기도하기 위해 물러났다는 사실에 초점을 모은다. 예수가 간 곳이 어디인가? 그는 죄인들과의 교제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기도에서도 발견된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그가 지닌 것 을 주기 위해 나오는 것과 채우기 위해 퇴각하는 것 사이를 왕래한다. 즉 결핍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채 우려는 행동과 마땅히 해야할 것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얻기 위한 그의 퇴각 사이를 누가의 예수는 왕 래한다(눅3:21-22; 6:12; 9:18; 9:28f; 11:1, 등등). 이것과 관련해서 저자는 예수를 제자들의 모델로 그린 다. 제자는 주님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이 있는 곳에 있다: 그곳은 하나님께 기 도하는 곳이며, 죄인들과 사귀는 곳이다.

눅5:12-6:11의 두 번째 부분인 눅5:29-6:11절에는 기독교인들의 전형적인 삶에 대한 성격과 정의를 다 룬다. 이 구절은 다음의 두 단락으로 되어있다: 1) 눅5:29-39절/ 논쟁이 있는 잔치 장면(참. 눅7:36-50; 9:10-17; 10:38-42; 11:37-54; 14:1-24; 19:1-20; 22:4-38; 24:29-32, 41-43.); 2) 눅6:1-11/ 두 가지 안식 논쟁 . 중요 단어와 구의 반복으로 이 단락이 연결된다: "먹고 마시다(5:30, 33)", "마시다(5:39)", 먹다 (6:1, 4)라는 동사의 3가지 용법에 주목하라. 눅6:1절의 단어에다(안식일에) 또 "다른 안식일"을 첨가해 말하는 눅6:6절에 주목하라. 이렇게 하여 누가는 눅6:1-5절에서 제기된 문제를 눅6:6-11절에서 확장한 다.

눅5:30-6:11절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삶의 유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 시리즈이다. 아울러 예 수의 대답도 나온다.

a) 눅5:30-32절.

비난: 너희들은 어찌하여 문제있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런 사람들과 사귀느냐?

예수응답: 병자가 나를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주인으로 죄인들을 초대한 것이다(32절).

b) 눅5:33-39

비난: 왜 금식과 기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느냐? 네 제자들의 삶의 모습이 경건치 못한다.

예수응답: 1) 눅5:34-35절에서 예수는 말한다. 혼인 잔치에서 금식하지 않는 것처럼 좋은 소식을 전할 때에 금식을 하지 않는다(참고, 4:18-19절) 2) 눅5:36-38절은 이중 비유이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낚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36절).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37-38절). 눅5:39절에서 예수는 더 나은 것(묵은 포도주)을 맛본 후에 어느 누구도 부족한 것(새 포도주)을 바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 다. 39절과 36-38절의 "묵은"과 "새로운"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려는 우리들의 시도가 눅5:39절을 해석 하기에 어렵게 만들었다. 39절에서 "묵은"은 "좋은"으로 "새로운"은 "부족한 것"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묵은"은 예수가 가져온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고,--눅5:36-38과 대비해서--"새 로운"은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같은 부족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c) 눅6:1-11

비난: 왜 지금 먹느냐? 너희 삶의 태도가 유대교 안식일 법을 어긴다. 안식일에 대한 이런 무례한 태도 가 거룩한 날에 부당하게 치료함으로써 분명히 드러났도다(눅6:6-11절).

예수 반응: 두 경우에서 예수는 안식일 법보다 앞선 인간의 필요에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행하는 예수 의 권위는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고(눅22:69절) 서는(행7:56절) 인자라는 것이다(눅6:5절). 그는 또한 법의 해석자이다. 그의 입장은 눅6:9-10절에 나오는 치료 기적으로 정당화된다. 누구든지 그의 말을 듣 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을 것이다(행3:22-23절). 전체적으로 눅5:30-6:11절 단락은 예수를 "비방받는 자의 표적"으로 그린다(눅2:34절).

이 문단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를 추종하는 자의 삶의 성격과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제자 는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누가의 견해이다. 예수에게 속하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내적 분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유대교 문화에서처럼 겉으로 드러내는 분리를 신 앙이라고 생각했던 전통적인 모습과 여기에서 말하는 제자들의 세상과의 분리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점이 2세기 초기의 두 문서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 디오게니투스에게 보낸 기독교인 편지(The Chrictian to Diogenetus, 5)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기독교인들은 지역으로, 언어로, 그들이 지키고 있는 풍습으로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다. 그들은 특별한 지역에서 살지 않으며,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은 자기 만의 독자적인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그리스 지역에서도, 야만인 지역에서도 거주한 다. 운명에 순응하면서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일상적인 모든 행동에 있어서 토착민의 풍습 을 따름으로써 그들은 우리에게 놀라울 정도로 널리 알려진 독특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 들은 자기 지역에서 거주하지만, 체류자로서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모든 것을 나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국인처럼 산다. 모든 외국 땅은 그들 의 고국으로서 그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모든 땅은 이방인의 땅으로서 그들을 위한 것이다. 이들의 삶은 지상에 있지만, 하늘의 시민으로 산다(ANF, 1:26-27).

영적으로 기독교인은 세상에 대한 지나친 몰두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만 그들의 삶의 태도는 여러 면에 서 주변 문화에 속한다. 이것 때문에 가장 가까운 종교적인 동료들과 문제가 생겼다.

(2) 저스틴(Justin)의 작품, 유대인 트리포(Trypho)와의 대화(Dia logue with Trypho the Jew, 10)에서 트리포는 기독교의 세상에 대한 태도에 놀란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당혹스런 점이다: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경건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리 고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점에서도 그들과 구별되지 않 는다. 축제도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할례 의식도 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너희들은 민족적인 삶의 방식에 주목하지 않는다(ANF, 1:199).

세상과의 분리를 말하는 기독교 정신이 정통 유대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세속 문화와 구 별되는 전통적인 경건의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 즉 안식일 법 준수, 규칙적인 금식 과 기도 그리고 불결한 사람들과의 구별과 같은 모습들이 없다는 것이다. 왜 너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경박하냐? 이와 같은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저자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예수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5;28--"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그리 고 그를 따랐다"). 그러면서 예수의 제자들은 전통적인 종교적 헌신과 경건의 행위을 무시했다. 그러나 예수에게 속하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누가는 동일하게 여긴다 해서, 제자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외형적인 관계도 가지지 않고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예수는 새로운 내적 인 종교적 실재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눅5:36-39절). 예수를 따르는 자의 표시는 안식일 준수, 금식, 기도, 그리고 버림받은 자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혼인에서와 같은 기쁨(5:33-35)이 되어야 하며, 인간적인 필요-영적이며(눅5:29-32절), 육체적인(눅6:1-11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러한 삶 배후에는 예수의 권위가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도 이런 정신으로 기록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 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