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초월하여

(6:12-49)




이 단락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6:12-16, 열 둘의 선택;

2) 6:17-19, 예수가 열 둘을 선택한 산에서부터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지시하는 평지로의 이동

3) 6:20-49, 평지 설교.

누가복음-사도행전(Luke-Acts)에서 사도들은 본래 역사적 공동체와 교회 메시지의 권위를 보증하는 증인이다(행1:21-22): 즉 6:12-16절은 연이어 나오는(6:20-49) 전승에 대한 사도적 보증을 세우는 역할 을 한다. 6:20-49절에서 누가는 말한다.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도들이 제자들을 위해 예수를 소개한다 (참고. 6:17-"그는 그들과 함께 내려왔다"). 사도들 명단이 행1:13절과 그들의 신임장이 나오는 행 1:21-22절에서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하라(그들은 시작부터 승천까지 예수와 함께 계속 있었다).

눅6:17-19절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 이 단위는 이어 나오는 청중들-사도, 제자의 무리, 거대한 군중들-을 그리고 있다.

둘째, 평지설교는 전달자의 성격을 말한다. 그는 성령의 부음받은 자이며(4:18), 좋은 소식을 말하는 자 이며(4:18b), 몸과 영의 질병을 고치는 자이다(참고. 4:18c, d, e.). 지금 듣고자 하는 자들과 장차 전승으 로 전해 줄 자들과 함께, 저자가 말하는 평지설교 무대는 예수의 제자들(6:20)과 "듣는 자들에게(6:27)" 직접 말한다.

비록 마태의 산상설교와 누가에서 평지설교가 유사한 명단 속에 있는 유사한 자료의 네 무더기(마 5:2-12/눅6:20-23; 41-42; 마5:38-48/눅6:27-36; 마7:1-5/눅6:37-38, 41-42; 마7:15-27/눅6:43-49)로 이루 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설교에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다. 이런 점은 6:20-49에 있는 자 료들의 배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구별할 수 있다(이 단락을 통한 6:20-49의 패턴에 대한 관찰 은 다음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Robert Morgenthaler, Die Lukanische Geschictsschreibung ais Zeugnis [Z?rich: Zwingli Verlag, 1948], 1: 81-83.).

평지설교는 소개하는 공식구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6:20,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2)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3) 6:39,"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처음부분, 6:20-26은 네 가지 저주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네 가지 복을 담고 있다. 이 단편(section)은 두 종류 사람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말한다.

두 번째 부분인 6:27-38은 네 가지 사상 단락(unit) 속에 있는 사랑의 삶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a) 6:27-28, 네 가지 단락-사랑, 선을 행함, 복비는 것, 기도

b) 6:29-30 네 가지 단락-너를 때리며, 너희 겉옷을 빼앗으려 하며, 구걸하며, 네 것을 가지려 하며-연 이어 나오는 요약(31절)

c) 6:32-35, 네 가지 단락: 처음 세 가지-만일 네가 사랑한다고 하면, 만일 네가 선대하려 한다면, 만일 네가 빌려준다고 하면- 단지 사랑, 선을 행함, 빌려줌-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요약(36절)

d) 6:37-38a, 네 가지 단락: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는 두 부정은 용서, 줌이라는 두 긍정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 그리고 연이어서 요약(38b)이 나온다.

세 번째 단락, 6:39-49절에는 네 개 비유가 모여 있다. 소경(39-40절), 티와 들보(41-42절), 나무와 열매 (43-45절), 두 집(46-49절). 이 구절들 속에는 제자들의 삶을 지배할 원칙들을 다루고 있다. 이 원칙은 제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영향력 있는 원리이다. 평지설교 끝 부분에 나오는 두 유형의 사람들(6:46-49) 의 대조는 평지설교 시작 부분의 대조를 반영하고(6:20-26) 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을 같은 식으로 취 급함으로써 누가는 전체 평지설교의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 구절(6:20-49)에 대한 어떤 해석도 누가 자료 배열의 페턴을 통해 이끄는 바를 따라야만 한다.

평지 설교의 첫 부분(6:20-26)은 네 가지 축복과 저주를 담고 있다. 누가의 주장을 이해하기 있어서 우 리는 먼저 고대에 축복과 저주가 어떤 기능을 했는지에 주목하여야 하며, 그리고 여기서 사용하는 주요 단어의 의미에 주목하여야 한다.

a) 기능. 축복은 그리스와 유대 세계에서 특별한 장르이다.(예. 시1:1; 잠8:34; 단12:12; 토비트13:14; 솔 로몬의 시편 4:23; 17:44; 18:6.) 초기 기독교인들은 축복의 유용함을 알았다.(롬 14:22; 마5:3-12; 요 20:29; 계14:13; 16:15; 22:7) 여기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축복은 복을 비는 (maka,rioj) 형태로 이루어 졌으며, 연이어서 복 있는 자가 누구인지, 왜 복을 받아야 하는지가 나온다. 축복은 복을 비는 것을 의 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축복은 어떤 특별한 이유로 누군가에게 생기는 복 있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축 복은 무엇인가 되어야 하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어떤 행운 에 근거해 사람을 칭찬하거나 증명한다. 이것은 "----이유 때문에---에게 복 있으라"로 대치되어야 한다. 이것은 누군가의 성공을 찬양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축복은 흔히 종말론적이다: 축복은 궁극적으로 미래의 빛 아래에서 현재 모습을 본다. 축복은 성공처럼 보이는 지금 여기에서의 외형적인 것을 근거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회의에 참석 하는 위치와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아는 것을 축복이라 여긴다(예언자가 했던 것처럼, 예. 렘23: 18, 21-22). 축복 내용은 고통스러운 현재와 비례하여 주어진다. 역설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무엇이 일 어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되어질 것 때문에 축복 아래 있다. 만약 현재가 미래에 되어질 것과 철 저히 모순된다면, 축복은 모든 인간 가치의 역전을 말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1: 51-53).

또한 구약에서 저주는 일종의 장르이다(사 5:8-23; 33:1; 암 5:18; 6:1; 합 2:6-19). 신의 심판 하에 있는 자들을 위한 동정의 표현으로 저주가 사용된다. 또한 저주는 어려움 중에 있는 그 사람의 어려운 처지 를 슬퍼한다.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사용될 때에는, 현재의 모습과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되어질 것 때문 에 저주는 거명된 사람의 처지를 탄식한다.

일련의 축복 모음(예. 시락 25:7-10)을 찾을 수 있고, 축복과 저주가 결합된 형태 또한 흔히 나온다(예. 전 10:16-17; 토비트 13:12; 에녹1서 99; 에녹2서 52). 축복과 저주의 개개 모음과 축복과 저주를 결합한 모음 역시 앞의 경우처럼 축복과 저주의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눅6:20-26절에서 저자는 그의 주변 환경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축복과 저주는 이런 맥락에서 성격적으로는 종말 적이다. 궁극적으로 되어질 것에 근거해서 축복과 저주는 현재의 사람들에 대해서 복 있으라 그리고 화 있으라고 말한다. 축복과 저주는 사람의 성공적인 삶을 축하하고 실패한 삶을 애도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삶이 새로운 시대에 되어질 것과 유사하거나 다르기 때문이다.

b) 핵심 용어의 의미. 이 문제의 핵심은 "가난", "주림" "울음" 그리고 "부유", "배부름", "웃음"이다. 이 것들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복음 서는 어떤 사회적인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단어의 종교적인 의미는 보다 이전에 사용된 사회적인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가난은 애초에 사회적인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 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영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는 유 능한 엘리트들보다 이스라엘 종교의 영적인 면을 더 충실하게 지켰다. 이들은 신실한 예배자의 모델이 되었다: 사29:18-19는 가난한 자를 온유한 자와 연결한다; 사61:1의 마소라 본문(Massoretic text)의 "온 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선언한다"가 70인역(LXX)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선언되는 것"으로 번역되었 다. 쿰란(Qumran)에서 가난한 자는 세상의 소유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참고 4QPPs37, 1:8F.; ⅠQH 5:13이하) 경건한 자이다(참고 War Scroll); 솔로몬의 시편(the Rs of Sol) 10:7은 경건과 가난을 비슷 한 평행구로 말한다(참고 5:2, 11; 15:1; 18:2). 예수 시대에 이르러 유대교적인 분위기에서 가난한 사람 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유형이 되었다. 즉 가난한 자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이 다. 이러한 의미가 있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마태는 심령(5:3)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였다. 또한 누가 가 가난을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의도했다는 것은 "교만하고 힘있는" 이라는 평행구가 "부유 한 자"로 동일시되고 있는 본문인 1:51-53절을 통해 나타난다. 동시에 저자는 종종 경제적인 의미인 것 처럼 보이는 가난도 종교적인 것(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힘없는 자)으로 이해했다(1:45; 2:24). 대 조적으로. 6:24에서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라고, 부유한 자들의 처지에 대한 누가의 탄식은 처 음 경우에서처럼 종교적인 상황을 말한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부유한 자들은 자기들의 부를 의지하는 자이다(에녹1서 94:8-9: 너 부유한 자여 네게 저주가 있으리라 왜냐하면 네가 네 부를 의지했기 때문이 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무시하는 자들이다(12: 16-21, 16:19-25). 기름 부은 자에 의해서 복음을 받게 되는 부류인 가난한 자(4:18)는 힘 없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결국 성 공한 자로 축하받게 될 것이다; 착각 속에서 사는 교만한 그들은 실패자로 불쌍히 여기게 된다. 이런 시각으로 제자들이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누가와 동시대인 야고보 서신(the epistle of James)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 "이제 주린 자는 복있나니"에서 주린 자라는 용어는 유대 전승에서는 육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다 가진다; 시132:15, 146:7, 겔34:29과 같은 구절에서 주린 자라는 것은 신체적인 의미이다; 사55:1-2, 암 8:11, 시락서 24:21에서 굶주림은 영적 만족을 위한 욕구를 의미한다. 시107:9, 사49:10절에서는 둘 중에 하나 혹은 둘 다를 의미한다; "의를 위하여"를 첨가함으로써 마태는 종교적인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5:6). 누가의 지배적인 의도가 영적인 것임을 1:51-53절로부터 알 수 있다. 이 본문에서 굶주린 자는 교만한 자와는 상대적인 의미로 비천한 자와 평행을 이룬다. 영적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원하는 굶주린 자 그는 찬양을 받아야 한다. 배부른 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6:25절은, 영적 으로 만족하고 있는 자들에게 그리고 빵만 가지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임에 틀 림없다(4:4). 영적으로 만족하여 자만한 자는 불쌍히 여겨진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배부른 자여."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구절은 신음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누가가 종종 사용하는 구절이 다. 의심할 바 없이 보호 받을 수 없는 자들을 억압하는 삶의 잘못된 구조가 고통을 야기하는 주된 요 인이다(참고, 시126:2 5-6; 사60:2; 61:3; 66:10; 65:16-19; 35:10).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6:25b에서 웃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70인역(LXX)에서 악한 종류의 웃음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웃음은 적의 운명을 경멸하는 것이고, 거만하고 교만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하는 웃음이다. 이러한 느낌이 여기에 나타난다. 만일 그렇다면, 탄식은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무관심한 자들에 대한 것이다 (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p. 256.). 현 구조 아래서 고통 당하는 자들은 축복 받아야만 한 다: 이러한 구조에서 즐기는 자는 비통하게 될 것이다. "너 박해받는 자에게 복 있으라." 인자로 인한 박해는 축복 받아야만 한다. 이것 때문에 이전에 같은 운명을 겪었던 많은 예언자의 무리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복스러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인자와 그의 추 종자들을 거절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의해 칭찬 받는 것은 탄식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옛날 거 짓 선지자와 같은 부류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합은 불행하다. 여기서 우리는 행6-7장 에 나오는 기독교인의 시련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행5:41절하에서 눅6:23절의 명령으로부터 나 오는 행위임에 주목하라.

하나님에게 유일한 희망을 두는 가난한 자가 왜 복 있는 자인가(힘없는 자)? 그것은 단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기 때문이다(20b). 사람이 굶주리게 되고 울게 되고 박해받 고 있는데, 왜 이들이 복있는 자인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로 인하여 이들이 새 시대의 구조에 의해 은총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6:20-23의 묘사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이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바 --하나님 자신--에 인하여 찬양받을 것이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가지게 될 것-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구조--때문에 지지받을 것이다. 저주로 묘사된 유형의 사람은 비통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 금 가지고 있는 것만을 믿음으로써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고(24b), 자신들이 속한 나쁜 동료들처럼(6:26-거짓 선지자) 하나님이 최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51-53).

6:27-38절 평지설교의 두 번째 부분은 네 개의 사상 단락(unit) (6:27-28, 29-31, 32-36, 37-38)으로 구 성된다. 이 부분에서 예수는 인간관계 면에서 제자들끼리만 서로 의존하는 그런 삶의 유형을 깨려고 한다. 처음 두 개의 단락은 비폭력과 관련된 사랑을 묘사한다.

첫째(6:27-28) 다음과 같은 하나의 원리를 세우고 있다. 악에 대해서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는 원리-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초대 교회의 필수적인 가르침인 벧전2:18-25과 롬12:14-21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두 번째(6:29-31)은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네 가지 경우로 말한 다. 그러면서 황금률로 결론 내린다(6:31). 27절에서 원수사랑에 대하여 언급하는 비폭력의 네 가지 예 (때리고, 빼앗고, 구하고, 가져가고)가 이런 방법으로 배열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가 사용하고 있는 "중심되는 예"를 접하게 된다(보라. R. C. Tannehill, "Tension in Synoptic Sayings and Stories, " Interpretation 34:142-44 [1980]) 문자적인 의미로만 볼 때, 중심적인 예로 그려지고 있는 상황은 매우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유용한 법칙을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특이하다. 그 특성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서 일반적으로 취하는 태도와는 아주 다르게 자극적인 명령을 함으로써 청중들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자극적인 명령은 청중들로 하여금 그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이상을 생각하게 하고, 삶을 지배하 고 있는 행동의 모든 패턴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독특한 명령은 기계적으로 따를 수 있는 행위의 법칙이 아니다. 이것은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어떤 암시를 끄집어 낼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 하기 위함이다. 만일 내 빰을 치는 사람이 없거나 내 옷을 빼앗아 갈 사람이 없다면, 내가 폭력에 대하 여 비폭력적인 반응을 취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로부터 윤리적인 상상력으 로 재인식되어질 때, 바람직한 결과를 갖게 된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비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하라는 것이다. 황금률이 분명히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 라고 하더라도(Homer, Odyssey, 5:188-89; Isocrtes, Nicokles, 49:1; Seneca, On Benefits, 2:1:1; Tobit 4:15; Philo [in Eusebius, Preparation of Gospel, 8:7]; 2 Enoch 61:1; Test Naphtali 1, 등등.), 여기서 (31절) 저자는 악한 대우에 대항해야 할 독자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독자의 태도란 자기가 대우받는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대우받고 싶은 방법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독자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행한다면, 독자는 악을 악으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가지고 말하건대, 제자가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상황에 대한 예로서 저자 는 스테판의 순교(Stephen's martydom)(7:54-60절)를 말하고 있다: 외형적인 면에서는 원수인 빌립 보 간수(16:28ff)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기독교인의 선행의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비기독교인을 대항 하는 방법에서 자기 변호를 위해 어떤 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누가는 분명히 당연시 했다 (16:37-39; 22:25-29; 25:10-11). 반면에 동료 기독교인에 대한 불만을 바로 잡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누가는 바 울과 일치했을 수도 있다(고전6:1-11절).

산상수훈의 두 번째 문단의 나머지 두 단락(6: 32-36, 37-38)은 관용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사랑을 묘사 하는 점에서 함께 속한다. 원리는 다음과 같다; 단지 보답으로, 혹은 보답을 돌려 받기 위해서만 선한 뜻을 보이지 말라.

지중해 연안의 헬라 사람에게 수혜자와 수익자 사이의 관계는 상호 책임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수혜 자에 대한 수익자의 감사와 그 감사를 표현한 수익자에 대한 수혜자의 걸맞는 책임이다. 기준되는 법칙 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보였다. 이것을 행할 때에 이러한 보답이 기대되었을 것 이고, 수혜자는 빚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감사에 대한 반응은 계속해서 은혜를 돌려 받을 자를 선택하 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수혜자는 가난한 자를 돕지 않고, 부유한 자를 도왔을 것이다. 그것은 도 와준 자들로부터 감사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의 표현은 처음 은혜를 준 자에게 더 많은 이익을 요구를 하도록 만들었다(S.C. Mott, "The Power of Giving and Receiving; Reciprocity in Hellenistic Benevolence," in Current Issues in Biblical and Patristic Interpretation, ed. G.F.Hawthorne [Grand Rapids: Eerdmann, 1974] pp.60-72.).

6:32-36절은 3가지를 질문한다. "만일 네가 ---, 너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심지어는 죄인들도---" 그리고 현재 명령법으로 말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이러한 관용들은 상호의존의 원리를 뛰어넘는다. 선을 행하는 체계를 뛰어넘는 동기가 6:35b-36절 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기적이고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도 친절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비로운 것처럼 사람도 자비로워야 한다.

마지막 단락(6:37-38)에는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대하는 네 가지 경우에 대해 말한다. 그래 서 이러한 행동을 하게 하는 다른 동기들로 마무리한다: "비판치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 라" 왜 이렇게 해야하는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 절b)"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롭게 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참고 마18:23-25; 고후9:6-15절).

그러므로 눅6:27-38절은 인간관계에서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상호책임에 대해서 두 가지 면에서 공격 한다. 한 편으로 사람들은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들이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대접 하라는 것이다: 누가 사상에서 이것은 비폭력을 의미한다. 다른 한 편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을 준 자들에게, 혹은 자신들에게 선하게 보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선한 행위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보여 주며,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준 것처럼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준다: 누가에 의하면 이 의미는 관용이다. 상호책임의 원리에 의해서 사 는 인생은 너무나 제한적이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같은 방식(in kind)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out of kind) 반응하라는 요구는 이해하기 힘들다. 폭 력에 대해 비폭력으로 반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배척하는 자를 관용으로 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원리 -네 원수를 사랑하라 -가 정당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이 없다고 한다면, 제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무슨 유익 이 있는가?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이야기가 실마리를 준다. 예수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는 같은 방식만으로(in kind) 대응하려는 경향이 있었다(예. 9:52-54; 22:49-50절); 오순절 이후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행5:41절)"을 기뻐하였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강력한 임재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지 않게 할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만이 예수의 말씀을 불가능한 것이 아닌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평지설교(6:39-49절)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네 개의 비유(6:39-40, 41-42, 43-45, 46-49)로 구성되었다. 15장3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5장을 보면, 저자는 예수가 비유로 말했다고 단수로 말했다. 그런 후에 세 개의 비유가 연이어 나온다. 이렇게 4개의 이야기(참고 5:36-38)에도 단수로 나온다. 저자는 일련의 비유들(unit)을 단수로 말함으로써, 이 비유들이 시리즈임을 보여준다. 15장을 보면, 누가는 잃음과 찾 음, 그리고 찾음의 기쁨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39-45절에서 저자는 특별히 기독교 인들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서 집중한다.

그 영향력이란 누가가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문제이다. 들어오는 자들을 비추기 위해서 현관에 등을 설치하는 로마 양식의 집을 8:16은 떠오르게 한다(마5:15에서는 등이 비추고 있는 방이 있는 팔레스타 인 집으로 묘사됨.). 누가의 맥락에서 요점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옳게 응답한 자와 하나님 가정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위한 빛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미 제자가 된 사람 들은 새로운 개종자의 길을 비추워야 한다(C. E. Carlston, The Parables of the Triple Tradition [Philadelphia: Fortress, 1975], p. 91.). 사도행전 또한 같은 사상을 반영한다. 행20:17-35에서 누가는 에 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 연설을 보도한다. 여기서 바울의 행위는 기독교인들이 가야할 길에 대해 본보기로 제시되고 있다(33-35절a). 신약시대에 처음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미 예수를 따르는 사람 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기독교의 도를 배웠다. 이것이 바울이 초심자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고전 4:15-17; 11:1; 빌 3:17; 살후 3:7). 누가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기독교인의 영향이었다.

이 단락의 유형에 주목할 때,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6:39-45의 위치는 분명해진다. 이 단락은 ABA'의 유형이다. 중심 단락(B:41-42)은 자기 비판을 위한 어떤 지침의 필요를 말하고 있다. 또한 다른 동료 제자들을 훈계하고 변화시키기에 앞서서 자기가 변화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죄인이라고 해 서, "자신들의 도덕적인 결함에 따라서 살고, 또 그렇게 살게하고, 또 그것에 대해 묵인하라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자세는 악에게 청신호를 제공하는 꼴이 되며, 공동체 내의 상호권면을 중 지부 찍는 셈이 되고 만다"(F.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p. 89.). 여기서의 핵심은 자기 자신 에 대한 평가가 없이 다른 사람들을 개선하려고 하는 노력은 우스운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개의 구성, A(39-40절); A'(43-45)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보다는 자기 인격의 변화에 우선적으 로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동기가 된다. 39-40절처럼 말하는 동기는 학생이 선생보다 더 나을 수 없기 때문에, 선생은 소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다른 사람의 삶의 개선-자기 스스로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새로움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43-45절 역 시 동기에 대해서 말한다(43절이 왜냐하면[γαρ]으로 시작하는 문장이다.). 선생 자신의 인격적인 변 화가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행하고 말하는 것은 오직 그의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제자들이 하나님 집안에서 빛(8:6)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마라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역할에 있지 않고, 자신의 인격적인 변화를 우선시하는 데 있다(야고보서 3장).

마지막 비유(6:46-49절)인 이 문단은 3번째 단락(6:39-49절)의 마지막과 평지설교의 전체의 결론으로 서 기능한다. 이것의 역할(참고. 겔13:10-16; Aboth R. Nathan 24.)은 권고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들었 던 것을 행해야 한다(참고. 마7:21-23; 요13:17; 요일2:17절)고 말하고 있는 약1:21-25과 관련이 있다. 들 은 바를 행한 자들은 위기시(눅8:15; 시1편)에 안전하고, 듣기만 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다(눅8:14절). 야 고보서와 같이 복음서도 세상 속에서 행함(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행하지 않고)과 분리된 믿음과 고 백(너희들은 "주여, 주여" 라고 부른다.)을 기독교의 본질로 여기지 않는다. 모든 자아가 온전히 주님께 반응할 때, 고백과 행동은 서로 뗄 수 없는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된다.